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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멸망한 짐승들의 왕국

2008.10.15 10:4910.15


20세기 인류 최대의 전쟁인 2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 국방군 2백만 명 정도가 행방불명 처리되었다.



“젠장, 젠장, 젠장!”

제도방위사단을 보조해주는 제5독립전투대대의 지휘관 카르노타 대령은 절망적인 얼굴로 복잡한 건물 내부를 부하들과 돌아다녔다.
마침내 그는 건물의 중심부이자 핵심 시설에 해당하는 곳에 도착했고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안에는 겁에 질린 박사가 기묘한 신음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발작적으로 내젓고만 있었다.
카르노타 대령은 천창까지 뻗어나간 다각형 기둥 형태의 구조물을 흘끗 쳐다본 후 박사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박사, 당장 저 망할 기계를 작동시키시오!”

대령의 고함에 박사는 벌벌 떨면서 쉿 소리와 함께 거부 의사를 밝혔다. 카르노타 대령은 거친 울부짖음과 함께 박사의 멱살을 잡고 다시 외쳤다.

“저 기계만이 우리의, 아니 우리 종족의 유일한 구원이자 희망이란 말이오! 이걸 보시오!”

거대한 구조물에 부속된 콘솔 장치 중 하나를 이리저리 조작하자 꺼져 있던 모니터 중 하나가 영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이 연구소의 대공 경계 및 감시를 위해 설치된 카메라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상황의 실체를 똑똑히 보여주고 있었다.
푸른 하늘 저편에서 붉게 빛나는 물체가 점점 그 모습을 선명히 보여주며 낙하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결정체 형태였지만 그것이 초래할 결과는 너무나 파멸적이었다.

“저것이...저주받을 페레르니아 제국 녀석들이 보낸 저것이 대지에 부딪쳐 폭발한다면...”

박사는 혀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고개를 필사적으로 움직이다가 중얼거렸다.

“우리 행성은 소멸할 것이오. 나도 명색이 과학자인데 이미 알 수 있소. 우리 제국과 적이 둘로 나누어지기 전에 위대한 과학자 집단이 만들어낸 무한한 동력 에너지체. 그 신의 축복과도 같은 것이 파멸을 안겨다 주다...”

“크아아아아!”

카르노타 대령이 괴성과 함께 박사의 목아귀를 쥐었다. 시간이 없었다. 점점 그 모습을 드러내는 동력 에너지체, 아니 패배와 함께 제국 멸망이 눈앞에 다가오자 광기에 찬 황제가 동귀어진을 목표로 변형시켜 쏘아올린 종말의 물건이 이제 5분도 안 돼서 땅에 추락할 것이다.
강력한 충격에 의해 폭발하여 공간 자체를 삼킬, 행성의 절반을 소멸시킬 지구 멸망의 무기! 유일하게 도망갈 수 있는 기회이자 희망은 바로 이 연구소이다. 다른 공간과 세계로의 워프 연구를 진행하던 이 연구소는 격화되는 전쟁 상황과 맞물리면서 효과적인 전쟁 무기 개발로 그 목적이 달라져 연구가 중단되고 군사 기지화 되었지만 워프 연구의 완성이라는 목표는 달성해놓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연구소에 주둔한 채 연구소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은 제5독립전투대대의 대대장 카르노타 대령은 모든 이들을 절망에 빠뜨린 그 소식을 듣자마자 이렇게 박사에게 달려온 것이다.

“이렇게 죽어 우리 종족의 멸망과 행성의 종말을 당하느니 다른 세계로 도망쳐 우리 종족을 구원할 것이오! 어서, 어서 이 망할 기계를 작동시키시오!”

박사는 미친 듯이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중간 중간 날카로운 쉿 소리를 섞으며.

“종족을 구원한다? 행성을 구원한다? 크키키키. 이미 이런 상황까지 온 것만으로도 우리 종족은 처음부터 자기 종말의 운명을 띤 구제불능의 짐슴에 불과했소. 멸망한 짐승들이라는 기록조차 못 남길 멸망할 짐승들이라는 운명의! 크키키키”

박사는 미친 듯이 웃다가 굳은 신념에 찬 카르노타 대령의 얼굴과 붉은 눈동자를 보고는 재밌다는 듯이 쉿 소리를 내며 고개를 까딱했다.

“당신은 지금 자기 자신이 이 모든 것을 해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군. 자기 종족의 운명을 바꾸고 종족을 구원해야할 숭고한 이상! 크키키키. 재밌군. 재밌어. 과연 그 신념이 어떻게 꺠지는지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군.”

박사는 카르노타 대령의 손을 내치며 복잡한 콘솔 장치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내 평생을 바친 워프 연구의 실현을 직접 체험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뭐, 공간과 공간 틈바구니에 끼인 채 죽는 것보다 못한 상태로 영원을 보낼 가능성도 있지만 정말 괜찮은 건가? 크키키키키.

카르노타 대령은 불안에 떨리는 눈동자로 화면을 쳐다보았다. 붉은 결정체의 형태는 이제 선명하게 보이는 수준이었다. 이제 곧 땅에 부딪쳐 행성을 멸망시킬 것이다.

1분이란 시간조차 아까운 상황에서 그는 35초나 고민했다. 그리고 그는 결정을 내렸다.

“워프를 시작하시오.”

박사는 역시 괴이하게 웃으며 쉿 소리를 섞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좋지만 워프가 발생하려면 1분이란 시간이 걸릴 것이오. 그리고 내 간단한 계산으로는 저 동력 에너지체가 지면에 부딪치는 시간도 대충 1분 정도? 크키키키. 아, 그리고 워프의 발생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전혀 모른다는 것을 알아두시오. 이 기계만 워프 할 수도 있고, 아님 우리 둘만 워프할 수도 있고....크키키키”

박사는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았다. 과학자 집단이 인생의 모든 것으로 삼으며 숭배하는 과학이 자신들과 자신들의 행성을 파멸의 길로 인도한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또 절망하다가 부서진 것이다.
카르노타 대령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1분의 절반이 지나갔고 기계는 거친 소음과 함께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지막 버튼을 누르며 박사는 미친 듯이 웃어대며 부자연적인 과장된 몸짓과 함께 외쳤다.

“드디어 시작이로다! 이 위대한 과학의 결과물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할 것인가, 영원한 지옥의 길로 인도할 것인가! 크키키키키!”

“크윽!”

박사의 웃음과 함께 순식간에 주변을 향해 뻗어나가는 순백색의 빛이 카르노타 대령의 눈을 압도했다.
워프로 인한 빛인 건가? 아니면 폭발로 인한 것?
그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어느새 빛의 한가운데 속으로 잠식되어가면서 그대로 모든 사고감각을 상실해버렸다.


종말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깥은 아비규환과 폭음, 전투로 뒤덮인 지옥이 되어있을 것이다.
한 때 유럽을 석권했던 제3제국의 종말의 날, 히틀러는 한 무리의 장교들 앞에서 외쳤다.

“제3제국은 부활할 것이다! 바로 자네들의 힘으로! 그리고 신이 준 힘으로!”

퓨러붕커(FuhrerBunker) 안의 공기는 퀴퀴했고 어둡고 음습했으나 히틀러는 광기에 찬 눈빛으로 밝은 미래를 공상해나가고 있었다. 그 공상의 끝은 오직 총통만이 알 일이었다.

“가라! 새로운 제3제국을 위해!”

한 장교가 조용히 물었다.

“총통 각하께서는....”

“난 베를린과 함께 운명을 다할 것이다. 발할라로 가는 것이다. 그럼 어서 나가도록! 레츠테 바탈리온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

“하일 히틀러! 지크 하일(Sieg Heil)!”

우렁찬 충성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거대한 폭음이 퓨러붕커를 뒤흔들었다. 총통은 의자에 쓰러지는 듯 앉으며 장교들이 문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지하의 어두운 그림자 저 너머로 그들은 사라지고 있었다.


“좋아, 제군들! 준비는 됐나?”

지휘관의 우렁찬 고함에 도열해있던 병사들이 거의 악을 내지르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일반인의 귀라면 도저히 못 견딜 소음에 만족한 듯 지휘관은 시원스럽게 웃으며 다시 한번 고함을 외쳤다.

“영광스러운 시간 보호군 육군 제3장갑보병단 제2대대 장병들이여! 이번 임무에서 완벽한 승리를 쟁취하자!”

“HOOAH!”

그 모습을 조종석에 앉은 채 모니터로 보던 제임스 하먼 소위는 지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베르크 기갑사단의 제1 전투 FS 중대 제 2소대에서 5기가 인간형 병기가 이번 작전에 주공을 맡게 된 제3장갑보병단의 지원 임무를 위해 특별히 선발되었다.
제임스 하먼 소위 또한 2소대의 소대장으로서 그 엄선된 5기 중 하나였다.
모니터를 끄고 싶었지만 곧 생성될 타임 홀에 정확히 입장하기 위해서는 계속 켜놓고 있어야 했다.
장갑보병 녀석들은 여전히 곧 있을 전투에 대한 전의를 다지고 있었다. 이제는 숫제 군가까지 고래고래 불러 재끼고 있었다.
하먼 소위는 이마를 주무르며 시스템 모니터를 조작해 기체의 상태를 다시 한 번 점검했다. 물론 그의 FS는 10분 전까지 남극 기지의 시간 보호군 정비병들의 뛰어난 능력으로 완벽한 상태였다.

“아, 마침내!”

정면 스크린 한 구석에 정확히 5초 후 타임 홀이 생성될 것이라는 메세지가 표시되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먼 소위는 조종간과 컨트롤 페달을 조작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대기 중이던 자신의 기체를 일으켜 세웠다. 전고 10미터 급의 인간형 병기는 일어섬과 동시에 두 눈을 붉게 빛냈으며 소대장기가 일어서는 것을 신호로 나머지 기체들도 속속 일어서기 시작했다.
현재 그 일부분만이 규명된 정체불명의 자연 현상이자 신의 저주인 타임 슬립 현상을 인공적으로 통제하게 된 결과물이 타임 홀이었다. 저 타임 홀과 함께 시간 보호군은 존재했으며 또 존재할 것이다.
지면에서 겨우 몇 센티 정도 떨어진 웜 홀 형태의 암흑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휴....”

이 순간만큼은 배짱 좋은 그 누구라도 긴장한 채 그 암흑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5명 단위로 장갑보병 먼저 타임 홀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리 짧지도 길지도 않은 기다림의 시간이 지난 후 어느새 자신이 차례가 되자 하먼 소위는 기체를 움직였고 인간을 본 딴 인류의 충실한 전투 종복은 타임 홀 앞으로 성큼 성큼 걸어갔다.
타임 홀의 암흑 안으로 들어왔다고 느낀 순간 어느새 끈적한 냉기와 암흑이 모든 것을 뒤덮어버렸다. 하먼 중위는 그 차갑고 어두운 느낌에 육체와 정신을 잠식당하면서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정말이지 불쾌한 느낌이란 말이야.
제임스 하먼 소위는 이내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맨 먼저 박사를 찾았다. 한 구석에 쓰러져 있는 박사에게 달려가 쳐다보았을 때 대령은 순간 멈칫 했다. 박사는 희열의 미소로 경직된 채 죽어 있었다. 정신적 충격이든 심장 마비이든 이미 상관없는 문제였다.
카르노타 대령은 주변을, 그리고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살아있었다. 워프가 성공한 것이다!
무사히 탈출했다는 희열감도 잠시, 그는 이제 붕괴되었을 모성을 떠올리고는 한 순간 우울해졌고 또한 여기가 어딘지에 대해 급히 파악에 들어갔다.
모니터가 점차 밝아오면서 연구소 주변 풍경을 비쳐주기 시작했다. 다행히 워프하면서 전자 기기 같은 정밀 장비가 손상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녹색....”

초록빛 정글이 카르노타 대령의 시선 한 가득을 메우고 있었다. 그 정글 한 가운데 덩그러니 존재하는 회색빛 부지와 여타 시설물들은 너무나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어딘지도 모르는 원시 환경의 행성에서 그들은 살아남아야 했다. 살아남고 이 행성을 제 2의 알타투네로 재건해야 했으며 종족을 다시 부흥시켜야하는 끔찍하리만치 냉혹한 운명이 카르노타 대령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가혹한 운명에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며 미친 듯이 몸을 떨다가 손목에 피가 나올 때까지 손톱으로 상처를 내고 나서야 간신히 제정신을 차렸다.
카르노타 대령은 스피커 방송 설정을 연구소 내외 전 시설과 전투 장비의 무전기, 외부 스피커와 연결하도록 조작한 후 방송 버튼을 꾹 눌렀다.


“어라? 어라라?”

제임스 하먼 소위는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하먼 소위 자신은 FS 조종복만 달랑 입은 채 서있었다.

“바...방금 전까지 조종석에 앉아 있었는데? 그리고 다른 녀석들은 어디로 간 거야?”

하먼 소위는 군용 유틸리티 벨트의 한쪽 면에서 시공간 통신기를 떼어내 본부와 연락을 시도했지만 ‘알 수 없는 오류’라는 글자만 뜬 채 작동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도저히 뭐가 뭔지 모르겠네!”

하먼 소위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오른 팔목에 끼워져 있는 팔찌를 조작해 현지인들에게는 이 시대에 무난한 평상복 차림으로 보이도록 조작했다.
아니, 그것보다 원래 목표로 한 시간대에 제대로 도착한 거 맞기는 한 건가?
순간 휘파람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망할, 누가 휘파람을 불어재끼는 거야?
아, 아니군. 그는 시공간 통신기를 다시 꺼내 들었다. 액정에서는 ‘예상된 상황 1에 따른 프로그램 작동’이란 게 뜨더니 군복 차림의 한 사내가 나타났다.
홀로그램인가? 이러다가 현지인에게 들통이라도 나면....
그러한 염려가 하먼 소위의 뇌리를 엄습한 순간 그 사내는 독특한 억양으로 말을 시작했다.

-제임스 하먼 소위, 서기 1945년 9월 5일에 도착한 것을 환영 한다. 지금 자네가 당황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군. 물론 이 영상과 음성은 다른 이에게는 절대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 특수한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아무런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이번 임무의 핵심인 코드네임 ‘하프아 힌몸 미디엄’이 강력한 에너지 파동을 일으켜 시공간적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본다. 사실 이번 작전에서 표류한 군대와 시설의 제압은 부차적 임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임무는 막중하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저 혼자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하먼 중위가 따지듯 외쳤다가 대답 없는 공허한 메아리임을 깨닫고 괜히 혼자 무안해져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하. 지금 이 시점에서 분명 나 혼자 어떻게 하냐고 울고 있겠지? 그러나 걱정 말게. 기록에 따르면 자네는 단신으로 이 임무를 성공리에 완수하고 귀환했다고 하네. 그러니 자네는 할 수 있어!-

망할 심리학자들! 하먼 소위는 문득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아니, 잠깐! 그러면 이런 상황이 닥칠 줄 알았다는 거로군! 나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말이지!”

-어디 보자, 이 시점 정도인가? 정답이네! 자네를 제외한 다른 병사들은 타임 홀에 들어간 지 5초 후 원래 장소로 튕겨져 나왔네. 아, 그리고 자네는 본래 목표로 했던 장소가 아닌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폐건물 안인가 하여간 어딘가에 있을 거야. 자세한 건 나도 모르겠고.-

영상 속의 사내는 손에 든 쪽지를 뒤적이다가 헛기침을 하며 다시 한번 유창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하여간 목표로 했던 적들의 본거지에 돌입하려면 현지에서 어떻게든 자네의 힘으로 가도록 하게. 전투는...뭐,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 맨 몸으로 간 건 아닐 테고 GR-13 음파충격총과 유틸리티 벨트에 부착된 다양한 장비들이 있으니. 여기서 명심할 것은 자네는 이 임무에서 혼자서 완벽하게 해내고 귀환했다는 사실이네! 그러니 걱정말게. 이미 역사는 흐르고 있으며 자네의 승리는 미래의 기록에 보장되어 있네! 자, 힘을 내게 병사여!-

그것을 끝으로 영상은 꺼졌다.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 이런 무책임한 녀석들 같으니!
제임스 하먼 소위는 고개를 내저으며 약간 힘이 빠진 발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임무는 완수해야 되었고 불리한 현 상황에서 어떻게든 하려면 발 빠르게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인기척을 들었을 때 요한 헤르메임 이병은 의아함을 느끼며 녹색 빛 충만한 숲속으로 다가갔다. 바람과 함께 나뭇잎이 나부끼는 평화로운 공간이었으나 왠지 모를 불안감이 그로 하여금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고집을 부리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숲 속에서 그것과 얼굴을 마주친 순간 요한 헤르메임 이병은 있는 대로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아!”

충격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헤르메임 이병은 허둥지둥 뒷걸음질 치며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총격을 가했다. 숲의 정적을 깨우는 거친 총성에 같이 왔던 동료가 무슨 일이냐고 급히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면 안 돼. 헤르메임 이병은 바짝 마른 입술을 열려고 했으나 할 수 없었다. 풀숲 너머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미지의 공포가 현실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헉...헉...”

간신히 일어나며 거친 숨을 몰아 내쉬는 순간 동료가 고통에 질린 고함과 함께 비틀거리며 도망쳐 나오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 순간 헤르메임 이병은 마지막 이성의 한 끈을 놓아버리고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한스 카믈러(Hans Kammler) SS소장(SS-Brigadefuhrer)은 집무실에서 이런 저런 서류를 뒤적였다. 독일 제 3제국이 남긴 망령이자 최후의 희망인 레츠테 바탈리온 사단의 지휘관인 카믈러 SS소장은 탁자 위에 놓여진 지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
이곳은 독일 제 3제국 최후의 희망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은 이 섬에서 그들은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완편 규모의 사단이 은신한 채 활동할 정도의 규모의 무인도를, 그것도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섬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미에서 독일의 영향력이 강한 쪽에서 그나마 근접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리고 독일 첩보부에서는 기적적으로 이 섬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그 지도를 노려보듯 쳐다보며 카믈러 SS소장은 서류를 뒤적이며 지도 곳곳에 표시를 하고 있었다.
재편성된 무장친위대 제 1장갑사단 “레츠테 바탈리온”은 이 섬에 숨어있었다.

“흠, 소령. 루프트바페 세력은 어느 정도인가?”

카믈러의 부름에 집무실 왼편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무장친위대 장교 하나가 급히 달려와 경례를 한 후 몇몇 서류만을 골라내 보고했다.

“하일 히틀러! 먼저 JG 1은 일단 조종이 가능한 인원만 따지자면 2개 슈타펠(Staffel: 12~16대 규모의 비행중대) 수준입니다. 물론 전투기 자체는 종류와 상관없이 전체 수량만 따지자면 100여대 정도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KG 1의 경우는 전투항공단보다는 약간 낫지만 엇비슷한 수준입니다. 실제 가동 능력 자체는 1개 그루페 수준(Gruppe: 30~40대 규모의 비행대)으로 수량만 따지자면 약 150대 수준입니다.”

“음, 루프트바페 녀석들은 얼마나 오래 잡아 둘 수 있다고 생각하나?”

“친애하는 각하, 항복한다고 해도 무사할리 없는 저희 무장친위대랑은 달리 그들은 깨끗하니 섣불리 확신할 수 없는 사항입니다. 물론 그런 점을 감안해 연합군 녀석들의 폭격에 가족을 잃거나 동료를 잃어 적개심을 가진 파일럿들만 뽑아놨으니 대충 2~3년 정도면 이 임무에 회의를 느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길어봤자 4년 정도?”

소령의 대답에 카믈러 소장은 지도 한 구석에 메모를 하고는 신음성을 발했다.

“음, 우리 장병들이 서둘러 조종술을 익혀야 될 텐데.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무장친위대의 조종사 교육이 성공리에 끝난다면 루프트바페 녀석들이 도망치는 말든 아무 상관없는 문제다.”

“아, 그리고 결함 비행기가 꽤 많다고 합니다. 너무 빨리, 그리고 저품질의 원자재로 생산한 놈들이다 보니...예비 부품 부족 문제도 있고 말입니다.”

카믈러는 분통을 터뜨렸다. 무엇하나 부족하고 또 무엇 하나 불안한 상황이었다.

“빌어먹을, 서둘러 니벨룽겐의 반지가 도착해야 된다! 그것만 도착한다면!”

니벨룽겐의 반지. 게르만 민족의 희망이자 모든 적을 단숨에 해치워줄 것이라 기대되는 물건이었다. 전쟁 후반에서야 발견되어 아쉽게 전쟁의 승패를 바꾸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 물건에 대한 믿음과 확신에 차있던 히틀러 총통은 전황이 급격히 암울해지고 모든 전선이 무너질 때부터 이 모든 계획을 세웠다.
독일 제3제국 재건의, 최후의 대대 계획을.

“하일 히틀러! 각하, 유보트에서 연락입니다. 3시간 후 니벨룽겐의 반지가 도착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함장이 개인적으로 각하에게 청하길 이 수송 임무를 끝으로 자신과 승조원들의 직위 해제를 원한다고 합니다.”

통신원의 보고에 카믈러 SS소장은 코웃음을 쳤다.

“그런 나약한 해군 녀석들은 우리도 필요 없으니 맘대로 하라고 전해라. 니벨룽겐의 반지나 잘 갖고 오라고 전해! 쯧!”

“각하! 남쪽 구역 정찰 거점을 위한 정찰대가 정체불명의 적에게 당해버렸습니다. 생존자는 단 한 명 뿐이며 심각한 공포로 정신이 거의 나가 버린 상태입니다!”

카믈러는 그 소식에 크게 분노해 주먹으로 탁자를 강하게 내리치며 호통을 쳤다.

“제기랄! 이 섬에서 본격적인 계획에 들어 간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노출인가! 한심한 놈들! 그 생존 병사는 어딨나!”

“네...저기..”

“내가 직접 심문한다. 멍청하고 쓸모없는 놈들. 설마하니 이 지하 시설과 비밀 비행장이 탄로 나는 일은 없어야 될 텐데....

“아, 그리고 그 생존 병사는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 그래? 그건 내가 듣고 나서 판단할 일이다!”

그렇게 쏘아붙인 카믈러 SS소장이 부관과 함께 문 앞으로 걸어 나가자 착검한 StG-44 돌격소총을 든 채 서있던 병사는 힘껏 발을 구름과 동시에 경례를 취한 후 문을 열었다.
차갑게 울려 퍼지던 군홧발 소리는 잠시 메아리치다 곧 사라졌다.


카르노타 대령은 연구소와 시설의 물품, 그리고 병력과 장비의 점검에 바쁠 지경이었다.
카리테스(Charites: 카리스 워프 연구소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 기지의 명칭) 내의 활주로를 경비하는 임무를 맡던 공군 지상 사단 1개 소대 병력은 제5독립전투대대의 소속에 편입하기로 합의를 봤다.

“흠.”

지하 2층, 지상 4층 구조의 연구소 건물은 놀랍게도 소규모의 탄약이나 소모품 생산 시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 5독립전투대대의 주둔 기지에도 비축 물자라던가 여러 예비 부품, 여타의 전투 장비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비상시를 대비한 전술형 섬멸 병기 3발, 전략형 섬멸 병기 1발이 엄중한 관리 속에 보관되어 있었다.
항공 전력마저도 꽤 충실했는데 제 5독립전투대대 소속의 무인 지원 항공기가 8대, 활주로에 있던 공군 다목적 전투기가 13대, 대형 공중 강습기가 3대 있었다.
또한 연구소에서 실험기로 가지고 있는 항공기도 최소 4대는 되었으며 예비 물품 보관소에 구세대 전폭기 6대가 부품별로 나누어진 채 보관되어 있었다.
한 쪽에서는 일단의 병사들이 태양열-수소 복합 전지의 충전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제국이 두 개로 나뉘기 전 그 좋았던 옛 시대에 만들어진, 모든 용도로 사용이 가능한 최고의 엔진 기관이었다.

“대령님!”

저 멀리서 4륜 구동 정찰 장갑차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다가 점차 속력을 줄이면서 부드럽게 카르노타 대령 바로 앞에서 정차했다.

“여기 계셨군요. 충격적이면서도 놀라운 보고가 있어 급히 대령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공포에 정신이 반 정도 나가있던 그 불운한 병사는 카믈러 소장 앞에서 벌벌 떨면서, 그리고 약간 횡설수설하는 투로 자신이 목도한 것 모두를 말했다.
10분 정도 후 더 이상 이야기가 새로울 것도 없고 반복의 양상을 보이자 카믈러 소장은 그를 내보내게 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카믈러 소장이 심각한 얼굴로 묻자 부관 역시 진지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한 마디로 넌센스입니다. 아마 야생 동물이라도 봤겠죠.”

“물론 나 역시 그 악마니, 공룡이니 하는 말을 전부 믿는 건 아니다. 다만!”

카믈러 소장은 뭔가 알 수 없는 열에 반 이상 녹아내린 G-43 반자동소총을 집어 들었다.

“분명 알 수 없는 흔적과 증거가 있다는 것이 문제란 말일세. 소령, 그리고 현장에서 회수된 탄피는 전혀 처음 보는 형태였어. 시신도 사라졌고....”

한스 카믈러 소장은 심문실 안을 왔다 갔다 하며 혼자 중얼거리다 책상 위에 펼쳐진 지도에서 그 병사가 표시한 곳을 가리켰다.

“이 지역에 분명 뭔가 있단 말이군. 미군도 아니고 남미 녀석들도 아니다. 하물며 영국이나 소련 놈들도 아니야. 그렇다면 단순히 적이 아니란 말이지. 아주 좋아. 어두워질 때 정찰기를 띄우도록 해라. 그것이 무엇이든 이용할 수 있으면 우리에게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그것은 처음 보는 생명체의 시체였다. 머리 부분에는 선명한 금발 모발이 풍성하게 나있었고 피부도 백색에 매끈한 알 수 없는 생물이었다.
단순히 정체불명의 원주 생물이라면 상관없는 문제였지만 시신이 입고 있는 군복과도 같은 옷, 그리고 개인용 복합 자동소총의 원시적 형상에 해당하는 화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또한 이 행성의 원주인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은 외계에서 온 불청객인 자신들과 처음으로 만나 전투를 벌였다.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
카르노타 대령은 자신들보다 뒤떨어지는 수준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꽤나 발전한 모습의 원주 지적 생명체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빛이 사라지고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낮과 밤의 경계 무렵, 한 대의 Fi-156 슈토르히(Storch)가 레츠테 바탈리온의 비밀 격납고에서 꺼내졌다.
지정된 활주로를 매끄럽게 달리는가 싶던 슈토르히 정찰기는 단숨에 대지를 박차고 하늘 저 편으로 날아갔고 잠시 동안 드러났던 활주로와 격납고 시설은 지상 요원들에 의해 다시 급히 위장되었다.


“도대체 뭘 정찰하라는 것인지 모르겠군. 우리 밖에 없는 이 무인도에서.”

하인츠 슈프레거 대위는 정찰기를 조종하면서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순간 회색빛 지상 시설과 인공적 빛들이 어느 지점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우리 말고도 이 섬에 누군가 있었단 말인가? 설마 미국 놈들?”

슈프레거 대위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그 정체불명의 지상 시설로 슈토르히 정찰기를 접근시켰다.
건물과 군사 기지의 조합과도 같은 곳이었다. 전차나 장갑차 같은 것들도 있었고 군인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열심히 그 기지의 전경을 카메라에 담던 슈프레거 대위는 잠시 주저하다가 대공 공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정체불명의 군인의 국적을 확인하기 위해 좀 더 저공으로 접근했다. 그리고 그는 우연히 한 군인의 모습을 아주 생생하게 목격한 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 신이시여! 하느님, 맙소사!”

너무나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나머지 순간적으로 조종간을 놓쳤고 기체가 거칠게 요동치자 그는 다시 정신을 차려 조종간을 붙잡았다. 슈프레거 대위는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는 파충류 특유의 냉혹한 동공을 목도하며 방금 자신이 본 것이 헛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공포를 느꼈다.

“신이시여. 우린 대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될 것이란 말입니까!”

탄식하면서도 그는 군인다운 충실함으로 모든 것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레츠테 바탈리온의 모든 이들을 혼란에 빠뜨릴 정보를 손에 넣은 슈토르히 정찰기는 이내 방향을 돌려 저 편으로 사라졌다.


그 비행기를 본 순간 카노르타 대령은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원주 생물의 문명 발달 수준이 높은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자신들의 것과 비교하면 정말 한심할 정도로 구식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지만 비행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야만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대령님, 공격할 까요?”

카르노타 대령은 그런 부관의 질문에 손짓으로 거부의 의사를 밝혔다. 대령은 일자로 된 날개와 허술해 보일 만큼 단순한 구조를 가진 괴상한 비행기를 자세히 관찰하다가 저것은 단순한 정찰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보다도 그로서는 단순히 원시 행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이제 저들과의 접촉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문제는 누가 먼저 접촉할 것이냐는 것이다.
과연 갑작스럽게 외계의 존재와 만나게 된 원주 생물들이 먼저 접촉하려 들 것인가?
그리고 카르노타 대령은 종족의 재건을 위해서라면 상당한 문명을 지닌 원주 생물과의 대립보다는 그들과 협력하는 것이 오히려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했다.
카르노타 대령은 잠시 생각하다 대대의 주요 참모진과 중대장, 공군 파일럿들을 소집했다.


파일럿의 보고와 여타의 증거에 카믈러 소장은 경악을 금치 못 했다.
전쟁 동안 많은 것을 경험하고 본 그였지만 이것만큼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다. 파충류 인간이었다. 걸어 다니는 도마뱀이 강력한 병력과 무력을 지닌 채 이 섬에 존재하고 있었다.
곧 그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재밌군. 아주 재밌어. 멸종한 줄 알았던 공룡들이 이 행성 오지에 숨어 살아남은 채 자신들만의 문명을 꾸렸단 말인가? 아니면 우리 인간들이 한창 싸움에 몰두할 때 독자적으로 진화한 것이란 말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외....”

카믈러 소장의 말은 집무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 부관의 다급한 보고에 끊겼다.

“가...각하! 무례를 범해 죄송하지만 급히 밖으로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오오오...이건 대체!”

대기를 진동시키는 거칠고도 날카로운 소음이 들려왔다. 카믈러 소장이 하늘을 쳐다보자 상당한 크기를 지닌 정체불명의 비행기가 두 기, 그리고 선두에서 날아오는 작지만 보다 날렵한 형태의 항공기가 한 기 날아오고 있었다.
프로펠러는 없었고 단지 양 옆에 원통형의 엔진 같은 것을 달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푸른 색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선두의 항공기가 부드럽게 수직 착륙하는 것을 시작으로, 뒤따르던 대형 항공기도 착륙했는데 대형 항공기의 앞부분이 갈라지면서 전차와 병력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기간트와 비슷한 능력의 수송기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럴 수가!”

카믈러 박사는 다시 한번 눈을 부릅뜨고 자신이 본 것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최소 그 높이가 8미터는 되어 보이는 로봇이 하나 걸어 나온 것이다. 다른 쪽 수송기에서도 한 녀석이 걸어 나왔는데 예전에 저런 비슷한 걸어 다니는 인간형 병기를 연구한다는 소문은 듣기는 했지만 직접 보니 정말 놀라움 따름이었다. 더군다나 인간의 형상을 균형감 있고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말 그래도 강철의 인형 병기였다.
그리고 그들이 왔다.
걸어 다니는 파충류. 지금까지 보아온 모든 광경과는 너무나 이질적 풍경에 카믈러 소장조차 당황한 표정으로 침묵만을 지켰다.
이윽고 그는 약간 어색하게 환영 인사를 건넸다.

“여러분, 지구에 온 걸 환영합니다!”

그 말에 대장으로 생각되어지는 파충류가 옆에 서있던 파충류에게 무언가 말을 건넸다. 파충류들의 언어는 날카로운 비명 비슷한 소리와 알 수 없는 어조의 단어의 나열들이 뒤섞인  것이었다.
무언가 동전 크기의 원형 물체를 꺼낸 파충류가 대장 파충류에게 전해주자 그는 귀에 해당하는 부분에 꽂았고 역시 다른 하나를 카믈러 소장에게 건네주었다.
아하, 실시간 통역기 그런 거로군. 카믈러 소장은 약간 주저하다 그것을 귀 부분에 갖다댔다. 놀랍게도 특별히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마치 자석처럼 착 달라붙었다.

“뇌의 언어 부분에서 그 본질적 의미만을 알려주는 기계이다. 기술적인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지. 나는 이들의 지휘관인 카르노타 대령이다.”

카믈러 소장은 떨리는 마음으로 그 카르노타 대령이라는 파충류의 말 하나 하나를 주의 깊게 듣다가 말이 끝나자 서둘러 자기들 자신 소개를 했다.

“우리들은 위대한 독일 제3제국의 유일한 군대인 새로운 무장친위대 제 1장갑사단 ‘레츠테 바탈리온(letzte Battalion)’이오.“

“길군. 간단하게 부를 종족 이름이 있었으면 한다만.”

카르노타 대령의 냉랭한 음색에 잠시 당황한 카믈러 소장이었지만 이내 침착을 되찾았다.

“도이치 종족이라 부르시오.”

“흠, 우린 알타투네 행성의 절반을 지배하던 케이스 제국의 영광스러운 군인들이다. 케이스라 명칭하면 된다.”

“이 지구에는 무슨 목적으로?”

“흠, 여기를 지구라고 부르나 보군. 우린 사고로 왔다. 우리 모성이 한 전체군주의 끔찍한 광기에 의해 멸망하기 직전 간신히 도망쳐 나와 이곳에 표착한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을 발견했지. 첫 만남은 약간 불미스러웠다고 생각한다.”

“아, 유감이군요. 그래서 저희들과 접촉하시게 된 이유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우린 이 행성에서 우리 종족과 우리 문명을 재건할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정보가 필요하지. 이 행성에 대한 현 상황이나 역사를 간단히 알려줬으면 한다만.”

카믈러 소장은 충실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한동안 그의 설명을 듣던 카르노타 대령은 카믈러 소장이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에 눈가를 날카롭게 했다.

“우리와 동맹을 맺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우리 또한 저 흉악한 적들에게 쫓겨 이 섬에 숨어든 신세. 동병상련의 신세끼리 협력하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흠, 왜 우리들이 너희들과 동맹을 맺어야 되지? 납득할 수 없군. 너희는 이미 전에 패배한 나약한 존재들이다. 그리고 우리와 너희가 동등한 입장이라고 생각하는가? 난 아니다.”

카믈러 소장은 웃으며 손짓을 했다. 그러자 슈빔바겐(Schwimmwagen: 대전 중 독일이 사용한 수륙양용차. 미군의 지프처럼 다용도로 사용되었다) 한 대가 다가왔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보시게 된다면 곧 생각을 바꾸고 우리와 기꺼이 함께 할 것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자, 그럼 타실까요?”


“아흐퉁(Achtung:차렷)!”

정렬해있던 도트 위장복 차림의 일단의 무장친위대 장병들이 기계와도 같은 정밀한 움직임으로 차렷 자세를 취했다.
카믈러 소장은 슈빔바겐에서 내리면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저 케이스라 칭하는 이들이 오기 몇 분 전에 유보트가 비밀 항구에 입항한 것은 정말 타이밍이 좋은 일이었다.
니벨룽겐의 반지. 히틀러 총통이 무엇 하나 부족한 전쟁 말기에 레츠테 바탈리온이라는 너무나 허황된 계획에 상당한 물자와 인력, 그리고 자금을 투자한 것은 바로 그 물건에 대한 확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천년왕국 건설에 대한 확신을.
카믈러 그 자신도 그 물건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많이 과장된 소문이라거나 실현 불가능한 연구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정말 차원이 다른 물건이었다. 말 그대로 세계를 뒤집는 힘.
그리고 이 외계 파충류 놈들도 이걸 보고 놀라 자빠지겠지.
카믈러 소장이 히죽 히죽 웃고 있을 때 헌병 중위가 다가왔다.

“각하, 예의 승조원들에 대한 처리는....”

“아아, 물론이다. 그렇게 처리하도록. 다만 손님들이 있으니 처리에 주의하도록 하라.”

“야볼(Jawohl:넷)!”

카르노타 대령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얼굴에 띤 채 슈빔바겐에서 내렸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그는 불만스러운 듯 낮게 으르렁대며 물었다.

“인간, 대체 무엇을 보란 말인가?”

“바로 이것 말이오!”

두 명의 병사가 휘장을 걷어내자 찬란한 황금빛이 일순간에 주변을 압도했다. 아니, 빛뿐만이 아니었다. 공기를 진동시키는 알 수 없는 에너지 파동. 강력하게 용솟음치고 일렁이는 강력한 에너지의 리듬이 들려왔다.
카르노타 대령은 믿을 수 없었다. 좀 더 가까이서 자세히 보기 위해 다가가자 카믈러 소장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소개했다.

“우리 독일 제3제국은 이 물건을 러시아에서 발견했소. 강력한 힘의 근원이자 그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이 놀라운 물건을 우리는 니벨룽겐의 반지라고 부르고 있었소.”

카르노타 대령은 흥미에 찬 얼굴로 그것을 천천히 관찰했다. 황금빛으로 찬란히 빛나는 그것의 형태는 매우 복합적이었으며 뭐라 설명하기 힘든 기묘한 구조적 모습을 띠고 있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정팔면체를 기본으로 각부에 물방울 같은 구체가 덕지덕지 붙어있었고 날카로운 가시와도 같은 것들 또한 이리저리 돋아나 있었다.

“정말...놀랍군.”

카르노타 대령은 본능적으로 이 물건이 자신들의 종족을 구원하고 고향을 재건할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처음 보는 외계의 짐승들은 이것을 담보로 자신들과 거래를 원하고 있었다.
카르노타 대령 일행과 연구소가 보유한 테크놀러지는 얼핏 봐도 저들 것을 최소 몇 세대 상회하는 것이 분명해보였다. 그리고 저들이 정복하려는 이 행성의 원주민들도 저 정도 수준의 기술력이라면 예상보다 손쉽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좋아. 거래는 성립이다. 다만 이 행성의 절반은 우리가 점령한다는 점은 명심해라. 우리들은 이 행성에서 알타투네를 재건해야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구체적 사항은 나중에 추후 협의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너희들은 너희를 멸망시킨 너희들의 적들에게서 승리할 것이다.”

“아주 좋소. 아주 좋아.”

한스 카믈러 소장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악수를 청했고 카르노타 대령은 붉은 보석과도 같은 눈동자로 쳐다보다가 손을 잡았다.


“우리 두 종족의 동맹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그리고 우리 군의 전력을 보여주기 위해 기지를 간단히 안내할 생각이오.”

카르노타 대령은 레츠테 바탈리온의 군사 시설로 안내받던 중 일단의 병사들이 시신들을 수습하는 광경을 보고는 참을 수 없는 의구심을 느꼈다.

“저것들은 뭔가?”

“아, 저들은 우리의 방침에 거부를 가지고 반란을 일으키려한 위험 분자들이었소. 어쩔 수 없이 반격을 해야만 했고 결국 모두 전멸했소. 슬픈 일이지만.“

“흠. 군인의 예우에 맞는 장례가 필요하겠군.”

“아, 물론이오. 그나저나 우리는 인원이 없는 유보트 한 척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든 개조해 우리의 전력으로 할 수 있겠소?”

“흠, 일단 소음 제거 장치와 동력 기관을 우리 것으로 부착하면 완전 무소음에 최대 3년간 활동할 수 있도록 개조는 가능할 것이다. 다만, 무인이라...완전 무인으로 개조하려면 아예 새로 만드는 게 더 싸게 먹힐 거라고 생각한다만.”

“그렇소? 흠, 이 문제는 나중에 생각해 봐야 겠군요”

굉장히 투박하고 특이한 전차였다. 카르노타 대령은 흥미롭게 전차들을 살펴보다가 선회 기능이 없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선회 기능이 없는 고정식 포탑인가? 이건 너무하군.”

“아, 물론 포탑이 돌아가는 전차도 있기는 있소. 다만, 우리 사단의 가장 주력을 차지하는 전차는 이 헷처 전차(Jagdpanzer 38(t) Hetzer)라오. 전쟁 말기 생산성도 뛰어난 탓에 수량에 그나마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오.”

카르노타 대령은 항공기들을 보고는 더더욱 놀라자빠졌다.

“청소년들이나 가지고 놀 법한 이 조잡한 레시프로기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당신네들 기술력과 우리들 기술력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유념해두시오. 물론 우리도 프로펠러가 없는 제트기를 전쟁 중반에 개발해냈고 양산도 해냈소이다.”

카르노타 대령은 항공기들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주기되어 있는 어느 제트기들을 가리켰다.

“저것들 말인가? 아니, 저건 초기 순항 미사일이 아닌가?”

도이치 종족이 보여준 단발 제트 전투기의 외양 자체는 그들 종족이 맨 처음에 개발한 순항 미사일들과 너무나 흡사했었다.

“아, He-162 살라만더(Salamander) 전투기로군. 이 하인켈 전투기는 헷처 전차와 마찬가지로 생산성이 뛰어나고 수량에 여유가 있는 기종이기 때문에 이렇게 대량으로 배치가 되었소. 사실, 조종사보다 저 비행기가 더 많을 지경이지.”

“이 지구라는 행성의 전체적 문명 수준을 알 만하겠군.”

카르노타 대령이 혀를 이죽거리며 중얼거리자 카믈러 소장 역시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응소했다.

“그러니 우리는 단번에 승리할 수 있다는 것 아니오? 우리들이 힘을 합치면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소.”

“흠, 그렇다면 답례로 우리 기지를 보여주지.”


한스 소장은 카르노타 대령 일행과 함께 워프해온 카리테스의 규모를 보고는 그 위용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럴 수가! 이것에 비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만든 것은 완전히 애들 장난이었군!”

그러다가 이런 시설이 다른 이들에 들킬 염려를 묻자 안 그래도 당신들의 정찰기에 노출 된 후 은폐 시스템을 가동 중이라고 하자 그는 내심 속으로 기뻐했다.
이들과 협력하면 지하에서 빌빌대거나 지상에서도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군사적 행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레츠테 바탈리온 기지에 남겨진 모든 물자와 장비, 병력을 이곳으로 옮겨도 되냐고 묻자 카르노타 대령은 혼쾌히 동의하며 또한 자신들이 도와주겠다고 제의했다.
카믈러 박사는 입가에서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1945년 9월 11일. 브라질의 해안에 위치한 소규모 활주로에서 한 수송기가 발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건장한 체격에 푸른 눈, 그리고 갈색 모자를 눌러 쓴 서구인이 수송기에 다가오자 한 관리가 마지막 절차인 듯 종이를 내밀었다.
서구인은 웃으며 종이에 서명했고 그 라틴계 관리는 스페인어로 행운을 빌어주고 사라졌다. 인부들의 책임자는 땀에 젖은 얼굴로 일의 완수를 통보했고 서구인은 미리 준비해놓은 돈을 꺼내 건네주었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돈을 챙긴 그들은 희희낙락하면서 역시 수송기에서 떨어져 건물로 사라졌다.
그는 푸른 눈동자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이윽고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심하고 수송기의 조종석 문을 열었을 때였다.

“멋진 이름이야. 존 스튜어트. 그나저나 좀 상투적인 이름이 아닌가 싶네만.”

스튜어트라 불린 그는 난데없이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고 제임스 하먼 소위는 그를 능글맞은 웃음으로 환대했다.
레츠테 바탈리온 계획을 위한 정기 수송 임무를 위해 남아메리카에서 존 스튜어트란 이름으로 암약하던 무장친위대 장교는 침작을 되찾고 반박했다.

"뭐...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지금 당장 이 비행기에서 꺼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소! 당신은 대체 누구요?“

하먼 소위는 어깨를 으쓱했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하고 싶지가 않군. 이 빌어먹을 나치 녀석!”

주먹을 휘둘러 단숨에 조종사를 쓰러뜨린 그는 자칭 존 스튜어트란 녀석의 의식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녀석의 볼을 탁탁 치면서 그는 중얼거렸다.

“젠장, 이 녀석들 때문에 내 전문도 아닌 첩보전을 한 걸 생각만 하면. 에구구, 곱게 꼬리를 잡혀주면 얼마나 좋아?”

하먼 소위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수송기에 가득 실린 물품들을 잠깐 볼까 하다 이내 그 생각을 거두고 조종석에 앉아 발진 준비를 했다.
제임스 하먼 소위는 조종간을 잡으면서 탄식 비슷한 경탄을 외쳤다.

“마침내 그 빌어먹을 섬으로 가는군!”

한스 카믈러 소장과 카르노타 대령은 두 종족의 첫 기술적 협력물의 시제품을 살펴보고 있었다.

“흠, 이건 레터르(Reteoreu: 케이스가 운용하는 이족 보행 병기의 통칭)의 초창기 형태에서 약간 발전한 수준이긴 하지만 이 시대에서는 여전히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아예 너희들의 기존 전차를 좀 더 개조해서 생산하는 게 더 낫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생각한다만.”

“대령은 인간 종족의 심리를 모르나 보군요. 이 새로운 무기는 우리의 적들에게 매우 뛰어난 심리적 공포와 압박감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 전차가 처음 나타났을 때 보여준 공포와는 차원이 다른 공포를 말이죠. 그리고 우리로선 당신들의 신기술이 많이 적용되면 많이 적용된 무기를 원하고 말이오.”

“흠.”

카르노타 대령은 여전히 이해 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 시제품을 쳐다보았다. 대충 4미터 크기의 그 이족 보행형 병기는 일부 핵심 부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도이치 종족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물론 설계도나 대부분의 기술적 원리를 그들 쪽에서 가르쳐주어야 했지만 엄연히 지구제 물건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도이치 종족의 기술력 비중을 꽤 높인 결과 머니퓰레이터도 그닥 정교하지 않았고 그나마도 왼쪽 팔은 기관포를 달고 있었다.
몸체 자체도 투박했으며 전체적인 형상이 도이치 종족의 전차 디자인과 꽤나 닮아있기도 했다.
하늘 저 너머로는 수송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우린 이것을 판쩌 캄프게어 1호(Panzer-Kampfgeher I)라고 부를 생각이오. 어떻게 생각하시오?”

카르노타 대령은 수송기에서 시선을 거두고 흥분에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카믈러 소장에게 말했다.

“글쎄...내 생각으론...”


“흠.”

비행장에는 여러 비행기들이 정렬한 채 주기되어 있었다. 그 중 폭격기 He-117이 모여 있는 방향으로 착륙을 감행했다.

“폭발력을 최대로 해야겠지.”

유틸리비 벨트에서 납작한 정육면체 형태의 수류탄 하나를 꺼내 폭파 설정을 최대로 한 후 조종석에 놔두었다.

“아주 좋아.”

그렇게 중얼거리며 하먼 소위는 문을 열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조종사를 잃고 최고 속도로 목표 없이 돌진하던 수송기는 하인켈 폭격기의 동체 부분과 격돌하면서 그대로 폭발했다.
순식간에 비행장은 아비규환의 폭발 현장으로 변했고 여기에 더해 불타는 파편들이 여기저기 떨어지면서 심대한 2차적 피해까지 안겨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하먼 소위는 약간 질린 표정으로 팔목의 팔찌를 조작했다.

“화물은 폭발물 종류였나 보군. 괜히 수류탄을 써버렸나.”

무장친위대 장교 정복 차림을 한 하먼 소위는 폭발의 아우성과 혼란의 틈바구니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서둘러라! 도이치 종족의 적이란 녀석들이 공격한 모양이다!”

소대장의 명령에 레터르 조종사들과 정비병들은 서둘러 출격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흠, 바로 여기에 있었군. 역시 시간 보호군의 투시 정찰 장비의 명성이 괜히 얻어진 게 아니란 말이야.”

난데없이 들려온 인간의 목소리에 고함을 내지르기도 전 소대장은 두뇌를 강타하는 찢어질 듯한 소음에 경련을 일으키며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쓰러졌다.
물론 다른 녀석들도 부들부들 떨다가 정신을 잃었다. 아니, 한 녀석이 뇌를 뒤흔드는 충격에 부들부들 사지를 경련하면서조차 달려들고 있었다.
어릴 때 애완용으로 기르던 이구아나가 생각나는 움직임으로 다가오면서 녀석은 충혈 된 눈동자로 노려보고 있었다.

“크아아, 이...이 새끼!”

“이런, 이런.”

그 모습에 하먼 소위는 GR-13 음파 충격총을 꺼내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흠, 이 음파가 만능은 아니로군.”

하먼 소위는 유틸리티 벨트의 13번째 파트에서 흘러나오는 파충류계열 종족에게 치명적인 음파 발생을 중단시키고 격납고 안에 우뚝 나열돼있는 이족 보행 병기 하나 하나를 살펴보았다.

“이런, 전부 모양이 똑같군. 일반 양산형인가?”

뭐, 상관없는 문제지만. 3번째 이족 보행 병기에 올라타면서 그는 유틸리티 벨트에서 비상용 나노머신 앰플들이 담겨진 것을 분리해 그 중 ‘3-N' 이라는 글자가 적힌 앰플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보관 케이스에서 분리된 앰플의 끝부분이 자동으로 날카로운 침 형태로 변형되자 그는 조종석에 그대로 꽂았다. 특수군용 특수전 기체 GPN-13 발디온(Baldion)의 데이터가 저장되어있던 나노머신들은 이족 보행 병기 각부로 잠식해 들어가 구성 물질과 부품, 그리고 그 모습을 바꾸어나가기 시작했다.
하먼 소위는 그 모든 작업이 마무리될 때까지 적병의 접근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족 보행 병기의 겉면에서는 회색 거품과도 같은 것들이 부풀어 오르다가 그대로 굳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밋밋한 형상이었던 페이스가드에 날카로운 수직선이 촘촘히 그어지고 있었고 사람의 귀에 해당하는 곳에 뿔처럼 생긴 구조물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격렬한 총성과 함께 하먼 소위의 GR-13 소총에서 음파 충격탄이 연속적으로 발사되면서 파충류 병사가 쓰러졌다.
이윽고 그 형태가 완전히 달라진 이족 보행 병기, 아니 발디온의 날카롭게 찢어진 두 눈이 붉게 빛났다.


제2격납고 천장을 짓부수며 솟아난 정체불명의 이족 보행 병기의 출현에 모두는 당황했다.
정찰 장갑차를 타고 급히 유폭 현장으로 달려가던 2소대장 라프닉쿠스 소위는 적이 출현했음을, 그리고 그 적이 우리들 모두를 파멸시킬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35mm 기관포를 그 정체불명의 이족 보행 병기에게 정조준 시킨 후 발사했다. 3연장 대공 미사일도 발사했고 어느새 제2격납고 주변에는 레츠테 바탈리온과 케이스의 무장 차량이 몰려들어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강력한 제압 능력! 육전형 인형 병기라기보다는 특수전용의 발디온을 고른 이유가 바로 이 이유였다.
제한적 우주전 능력도 갖춘 말 그대로 다용도에, 그것도 고성능을 갖춘 전술 제압형 FS만이 단신으로 이 임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발디온이야 말로 하먼 소위가 아는 가장 강력한 제압 병기 중 하나였다.

“일단 출력은 3 정도에 지속 시간은 8초 정도로.”

모니터를 조작하자 발디온의 흉부가 반으로 갈라지면서 날카로운 결정체가 드러났다. 푸른 결정체는 점차 눈이 시릴 정도로 빛을 발하다가 이내 강력한 에너지 포를 발사했다.
발디온을 향해 맹공을 가하던 무장 차량들은 그 빛의 한 틈바구니 속에 묻히는가 싶더니 연속적인 대폭발을 일으켰다.
그렇다고 무자비하게 이 모두를 전멸로 몰아넣을 생각은 물론 아니었다. 타임 슬립이라는 천재지변에 휘말린 표류자들 구원 또한 그들의 임무였다. 항복의 의사만 있다면 무장 해제 후 기억을 일부 수정, 원래 시공간대로 이송시켜 불필요한 전투를 피하는 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항복하면 목숨은 보장한다. 반복한다. 적대 행위를 보이면 그 즉시 격퇴하겠지만 항복하면 목숨은 보장하며 명예로운 대접을 할 것이다.-

언어와 상관없이 정신에 직접 들리는 방식의 텔레파시를 외부 스피커로 송출시키기 시작했다. 어느 시설에서 예광탄과 함께 미사일, 로켓 등이 달려들었다. 정면으로 맞아주고 에너지 포로 그대로 쓸어버렸다.

-태양열-수소 복합 배터리 중 하나 과열. 냉각 시작.-

무미건조한 메시지 하나가 모니터에 뜨자 하먼 소위는 혀를 찼다. 나노머신은 발디온의 모든 것을 생성해냈지만 시간 보호군이 보유한 병기의 핵심 에너지원인 영구식 연료전지는 구현해내지 못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미래에서 온 일부 기술자들만 아는 정말 특별한 기술력이었고 나노머신들도 영구식 연료전지보다는 한 수 아래지만 기존의 에너지원을 최선으로 개조해 나름 기대했지만 이 꼴이었다.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기동을 중지하고 즉각 항복하라-

항복 방송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전방위 화면에서 에너지광을 내뿜으며 포진하기 시작하는 적들의 모습이 보였다.
곧 달려들겠군. 젠장, 대체 왜 항복 안 하는 거야?
속으로 투덜대던 하먼 소위는 녀석들이 사격을 가하자 발디온의 머리 부분에 내장된 기관포(실탄이 아닌 음파 충격탄을 사용)로 적들의 진형을 분쇄시키며 단숨에 파고들었다.
격렬한 소음과 함께 노획한 돌격속사포가 불을 뿜었고 레터르 하나가 내지르는 날카로운 주먹을 피하면서 그대로 잡고 머리 부분을 짓뭉개버리면서 그는 생각했다.
멍청한 녀석들.
살아남은 병기들이 급히 퇴각을 하는 모습이 보이자 하먼 소위는 비행 장비의 출력을 최대로 했고 순식간에 등과 다리, 어깨에 달린 보조 비행 장비에서 푸른 에너지광이 짙게 뿜어져 나왔다.
발디온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자 대공 포화와 미사일이 그를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여유 있게 튕겨냈다.

"다 쓸어버려 주마"

발디온의 흉부에서 검붉은 빛이 일직선으로 뿜어져 나오면서 기지와 레터르들에게 정확하면서도 무차별적인 포화를 퍼부었다.

-중심부의 건물 지하에서 목표로 하는 것과 유사한 에너지 반응을 감지.-

"하프아 어쩌구는 저기 있군."

끔찍한 폭발과 페허의 중심부를 활공하면서 하먼 소위는 연구소의 중심부로 날아갔다. 동시에 하늘 저 멀리서 항공기들이 불규칙적인 편대를 이룬 채 날아오고 있었다.


늘씬한 유선형의 동체와 곡선미를 보이는 날개를 지녔고 1939년~1943년 중반까지 유럽과 소련의 하늘을 지배했던 He-111 쌍발 폭격기.
이제는 구식이 되었지만 He-117에 비하면 신뢰성도 뛰어나고 제한적이나마 수송기로도 사용이 가능한터라 레츠테 바탈리온 사단에도 몇 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대폭발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은 하인켈 폭격기는 복수를 위해 인형 병기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저기 있군, 가증스러울 정도로 위풍당당하게 저공 비행중인 강철의 거인. 붉은 두 눈과 대조적인 검은 몸체. 그리고 군데군데 들어가 있는 회색 배색은 자신도 모르게 멋있다는 감정이 들게 했지만.
저것은 단지 적일뿐이야. 우리 독일의 앞을 가로막는.
산소마스크를 쓴 기장은 행여 적이 눈치 챌라 서둘러 물었다.

"한스, 폭탄 활성화는?"

기장의 물음에 한스는 굳게 닫힌 채 때만을 기다리는 폭탄창의 마지막 폭탄에 장치된 핀 모양의 안전장치를 급히 뽑아 회수하고는 외쳤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비행기 전체를 뒤흔드는 진동과 함께 폭음이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맹렬한 포격을 가하던 카노넨 포겔(Kanonen Vogel: Ju-87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에 37mm 기관포 2문을 장착한 개량형) 하나가 검은 연기에 휩싸인 채 추락하고 있었다. RAM 공대공 로켓을 쏘며 급히 이탈하던 포케불프 전투기도 주익이 그대로 박살나면서 폭발했다.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그 치열했던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 때도 이 정도까지 비참한 수준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한스는 분통을 터뜨리며 그 참혹한 광경에서 시선조차 떼지 못했다. 그 강력하다는 케이스들의 항공기조차 무참하게 격추당하고 있었다.

“침착해라! 서둘러 폭탄창을 개방하라!”

한스는 동요하는 심장을 애써 추스르며 손을 움직였고 이윽고 폭탄창이 천천히 좌우로 벌어졌다.

“제발, 제발 맞아야 된다! 운 좋게 직격이 된다면!”

기장은 폭격 조준기의 접안구에 눈을 대고 목표를 조준했다. 독일 공군은 급강하 폭격 맹신으로 인해 수평 폭격기의 폭격 조준기 개발은 대체적으로 뒤쳐져 있었다. 슈투카와 같은 급강하 폭격기의 핀 포인트 폭격에 비하면 여전히 정확도가 떨어졌다.
기장이 투하 버튼을 누르며 외쳤다.

"투하!"

그와 동시에 폭탄들이 묵직한 소음과 함께 발디온을 목표로 낙하했다. 그러나 지면을 낙하하던 폭탄들은 반투명한 궤적에 하나 하나 공중 폭발해버렸다.
기장은 당황했다.

"말도 안 돼! 폭탄을 전부 요격했...."

그것을 끝으로 기장의 의식은 사라졌다. 동체가 박살난 하인켈 폭격기는 두 조각으로 찢어진 채 추락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공중 폭발했다.


여러 잡다한 종류의 항공기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이런 저런 공격을 해대자 그는 코웃음을 쳤다.

“저리 비켜라, 이 잡것들!”

쌍발 제트전투기(그 형태는 21세기까지 미합중국이 사용한 F-18 전투기와 닮아있었다.) 한 대가 반투명의 탄환을 맞고 반 조각이 났고 발디온의 거친 움직임에 비행 안정성을 잃어버린 대부분의 항공기들이 맥을 못 추다가 정확힌 기관포 공격에 격추당하거나 추락했다.
하먼 소위는 연구소를 날아가는 동안 군사 시설이라던가 장비들을 철저하게 때려 부수었다. 적이 공격해오면 그 적은 죽어 마땅하다. 그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흉부에서 일직선으로 뿜어져 나오던 에너지 포가 네 갈래로 갈라지면서 마치 살아있는 뱀과도 같은 생물적 움직임과 함께 각각의 목표로 격돌했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화망의 중심부에서 이족 보행 병기 한 대가 유선형 곡선을 띤 라이플을 연사하며 달려들고 있었다.
비행이 가능한 녀석도 있었군. 더군다나 리니어 라이플이라.
하먼 소위는 40mm 돌격속사포를 내던지고 그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온 몸으로 절규와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그 불운한 이족 보행 병기에게.


전차가 멈추자 하인트라우스 소위는 당황한 얼굴로 조종수에게 물었다.

“왜 안 움직여!”

“모...모르겠습니다. 엔진이 정지했습니다.”

“하필이면 이럴 때! 제기랄! 철갑탄 장전해! 한 방이라도 먹여주고 가야지!”

티거 2 주포의 사거리를 생각해볼 때 상향 사격을 잘만 하면 다리 부분을 맞힐 수 있어 보였다.

“저...그냥 항복하는 게 어떨...”

“닥쳐! 항복이라고? 항복 따위 우린 결코 못한다는 거 잊었나? 닥치고 어서 장전해!”

항복은 무슨. 그와 동료들은 절대 항복할 수 없었다. 항복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신세였고 그나마 운이 좋아도 몇십년을 감옥에서 썩어야 하는 전범 신세로 전락한 무장친위대로서는. 더군다나 자신들은 동부전선에서 전쟁 범죄도 꽤나 저지른 판이었다. 이렇게 비참하게 남미의 잊혀진 섬 한 구석에서 숨어 지낼 줄 알았더라면 흥분에 취해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후회는 뒤늦게, 그러나 너무나 뼈저리게 다가왔다.
그는 하늘 위에서 파충류의 로봇과 격전을 벌이는 정체불명의 로봇을 분노와 증오에 찬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저 놈만 아니었다면 우리 게르만 족이 다시 세계를 제패했을 것인데! 저 망할 놈만 사라진다면!

“장전 완료!”

그 망할 놈이 파충류 로봇의 팔을 찢어발기고 머리를 내리치는 모습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포이어(Feuer: 발사)!”


굉음이 근거리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절망과 함께 내지르는 전투의 고함,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울부짖는 비명이 들려오는 듯 했다.

-대령님.-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한쪽 팔 부분과 머리 부분이 많이 손상된 만신창이의 모습으로 하강하던 이족 보행 병기는 간신히 착륙하는가 싶더니 결국 주저앉아버렸다.
카르노타 대령은 황망한 얼굴로 부관의 기체를 쳐다볼 뿐이었다.

-대령님, 저희는 거의 모든 시설을 손실했습니다. 배터리 충전 시설과 이족 보행 병기를 보관하던 제1, 2, 3격납고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없던 항공 세력마저도 전멸 위기에 몰려있습니다. 활주로는 엉망입니다. 우리 대대 중 살아남은 자가 얼마이며, 또 죽은 자가 얼마인지는 그 누구도 모를 지경입니다. 대령님, 저희는 끝났습니다. 도이치 종족은 결국 하등 도움조차 안 되는 존재였습니다.-

“난 싸울 것이다. 나의 전용기가 연구소 지하 시설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니벨룽겐의 반지 또한. 그것만을 지켜낸다면...전멸 자체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대령님은 모두를 구하시려 노력하시는 군요. 전쟁 때부터...하지만 대령님. 이제 그만 포기하십...-

콕피트 부분에서 오렌지 빛 폭발이 치솟았다. 뜨거운 열기가 카르노타 대령의 몸과 얼굴로 밀려들면서 카르노타 대령의 두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1장갑정찰대대 연락 두절!”

“제 2장갑척탄병연대 16중대 통신 응답 없습니다! 15중대로부터의 연락입니다! 모든 장비 손실!”
“제 1장갑연대 2대대, 케이스 기갑부대와 연합하여 적에게 맹공 중!”

“공군 통신부대로 부터의 연락입니다. 거의 모든 항공 세력 손실!”

“3번 탄약고가 방금 날아갔습니다!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한스 카믈러 소장은 그 모든 통신들을 일그러진 얼굴로 감내하고 있었다.

"역시...역시 정체불명의 외계인 따위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단 말인가!"

"각하, 어서 대피를!"

"어디로 말인가? 니벨룽겐의 반지가 없으면 승산 자체가 없다. 그것이 없으면 몇십년이 흘러도 천년왕국의 건설은 헛된 망상일 뿐이다!"

"니벨룽겐의 반지는 파충류들의 연구소 지하 시설에 이송되어 있습니다. 회수부대를 편성할까요?"

카믈러 소장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천장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화염에 휩싸인 채 천장을 짓부수며 거대한 병기의 잔해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카믈러 소장과 좌중의 무장친위대 장교들은 파멸을 직감하고 그 광경에서 시선조차 못 떼고 있었다. 그리고 자그마한 폭발과 함께 레츠테 바탈리온의 수뇌부는 전멸했다.


치열하게 연구소 주변을 방어하던 잔존 파충인류와 무장친위대 기갑부대의 방어선은 원거리에서 쓸어낸 에너지 포 한 방에 무너져 내렸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절망적인 공격을 가하던 마지막 전차를 사뿐히 짓뭉개며 발디온은 착륙했다.

“저기 있군.”

하먼 소위가 굳게 닫긴 연구소의 정문을 향해 기관포 사격을 가하려던 순간 문을 뚫은 뜨거운 무언가가 발디온의 오른 어깨를 강타했다.
직격당한 어깨는 뜨겁게 달아오른 채 반 이상이 녹아내리면서 내부 골격을 노출할 정도의 손상을 입었다.

“맙소사! 설마하니 입자 빔 포?”

카르노타 대령은 절망했다. 최후의 히든카드이자 기회를 어이없게 실수해버린 것이다. 연구소에 있던 강립자 병기화 시작 실험 장비라면 저 녀석을 박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불행히도 그는 흉부의 청색 결정체를 맞추지 못했다. 그리고 시작 실험 장비의 전원은 나가버린 채 고철로 변해 있었다.
카르노타 대령은 날카로운 이를 꽉 깨물며 하네론의 컨트롤 스틱을 밀어 넣었다.
하먼 소위가 잠시 당황한 순간 이족 보행 병기 하나가 문을 거칠게 열어 재끼고는 체리와도 같은 두 개의 눈동자를 붉게 빛내며 발디온에게 거칠게 달려들고 있었다.

“지겨운 파충류 녀석들! 곱게 항복하란 말이다!”

리니어 라이플을 쏘며 돌진을 저지하려 했지만 지금까지 본 형태나 크기와 크게 다른 모습의 그 병기는 간단하게 튕겨내면서 그대로 발디온에게 육박해왔다.
거친 충격이 조종석을 뒤흔들면서 발디온은 뒤로 밀려났고 아슬아슬하게 서있는가 싶더니 결국 쓰러져 버렸다.

“그렇군.”

하먼 소위는 차가운 눈동자로 그 이족 보행 병기를 응시했다. 지금까지 본 녀석들보다 더 고급스럽고 현대적 디자인, 그리고 눈이 하나가 아닌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점들이 의미하는 사실은 분명했다.

"저 녀석이 지휘관인가.”

발디온이 다시 몸을 일으키는 그 순간 그 녀석은 그대로 공중으로 상승해버렸다. 그리고 오른 손에는 뭔가 번쩍이는 형상의 물건을 쥔 채.

-하프아 힌몸 미디엄 발견-

“저...저 미친놈이!”

하먼 중위는 경악과 공포에 찬 얼굴로 그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물건을 되찾기 위해서 역시 푸른 하늘로 날아올랐다.
저 에너지체의 회수 및 파괴야 말로 이번 임무의 핵심이자 진정한 목표였다. 하먼 소위는 초초한 얼굴로 정면 모니터를 노려만 보았다.


하늘 아래로는 카리테스가, 시공을 넘어온 무기물과 유기물의 집합체가 울부짖고 있었다. 활주로, 격납고, 병기고 등등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질서정연하면서도 깔끔한 모습으로 활기와 생기가 넘치던 주요 시설들은 철저하게 파괴된 채 검게 피어오르는 연기와 아직도 꺼지지 않는 불꽃만이 그 흔적을 알려주고 있었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관제탑이 굉음과 함께 무너지면서 폭음과 불꽃이, 파괴의 광기가 더욱더 맹렬해졌다.


뭔가 지직 거리는 잡음과 함께 점차 선명해지는 거친 음역의 목소리가 하먼 소위의 조종석 안으로 들려왔다.

-네 놈! 네 놈! 나의 하네론으로 너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노라고 존재하는 절대적 존재에게 맹세한다!-

하먼 소위는 하네론이라 불린 이족 보행 병기가 푸르게 빛나는 1미터 길이의 검을 꺼내 내리치는 모습에 놀라 노획한 리니어 라이플로 막아냈다.
총신 표면에 알 수 없는 처리가 된 라이플은 칼과 맞부딪치면서 반투명한 파장을 일으켰다.

"플라즈마 소드로군!"

두부의 기관포가 불을 뿜으며 떨쳐내자 하네론은 어느새 다시 공중으로 치솟으며 도주하려 하고 있었다. 한 손에는 여전히 에너지체를 소중하다는 듯이 움켜쥔 채로.
하먼 소위는 급히 총신이 반 이상 녹아내려 쓸모가 없어진 리니어 라이플을 내던지고 기체를 상승시켰다. 대체 뭘 어떻게 오인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저 망할 물건을 얼른 적절한 곳에서 처리해야 되었다.


“젠장! 제발, 제발 진정해라!”

균형을 잡으려 노력하며 슈프레거 대위는 천천히 기체를 하강시켰다. 조종간을 꽉 쥔 채 감속을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끝장 날 판이었다.
이윽고 살라만다 전투기는 아슬아슬하게 착륙하는데 성공했다. 슈프레거 소위는 땀으로 뒤범벅이 된 얼굴로 캐노피를 열어 재끼고 서둘러 전투기 밖으로 나왔다.
동체 중앙 상부에 올려진 엔진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으며 주익은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정말 기적적인 착륙이었군. 슈프레거 대위는 폭발로부터 안전한 거리로 뛰어나가다가 입을 딱 벌리면서 경악했다.
파충류들의 중심 건물로 부터 얼마 안 떨어진 곳에서 거의 100여대가 넘는 무수한 전차와 장갑차, 차량의 잔해들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널브러져 있었다.
용케 형체만 구별될 정도로 파괴되어 있었는데 그가 알고 있는 독일군 기갑 장비는 물론이며 독일 최강의 중전차인 티거 2보다 더 뛰어난 파충류들의 전차조차 맥없이 고철로 변해 있었다.
슈프레거 대위는 멍한 눈길로 석양빛에 물드는 파충류 녀석들의 기지를 살펴보았다. 그가 볼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지옥과도 같은 화염이 요염한 춤을 추고 있었고 검은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오른 채 그 최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에 시달리던 공군 비행장 시절이 생각났다.
슈프레거 대위는 레츠테 바탈리온 사단과 총통의 마지막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된 것을 막연히 깨닫고 지친 얼굴로 주저앉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하늘 저 너머에서 폭음 비슷한 소음이 들려오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모든 것을 망친 그 로봇과 파충류 대장 녀석의 로봇이 치열하게 사투를 벌이며 하늘로 상승하고 있었다.
해가 저물면서 비춰지는 핏빛 석양을 배경으로 그들은 점차 작아지더니 이내 그의 시선에서 사라져버렸다.



"쏠 수 있는 건 그것 뿐 인가 보군!“

하먼 소위는 하네론의 양 어깨에서 쏘아대는 열선 포를 아주 간단하게 피해내며 입자 빔을 연속적으로 토해냈다.
동시에 발디온의 곡선형 오른팔이 분리되면서 회전, 실체검으로서 나타났다. 무광의 그 흑빛 검은 마치 우주 공간을 그대로 잘라낸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실체검과 플라즈마 소드가 맞부딪치는 순간 또 다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왜! 대체 왜 우리들을 공격하는 것이냐! 대체 왜 우리들을 살상하고 도륙하는 것이냐!-

하먼 소위는 어이가 없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시공 연속체를 파괴하고 개변 의도를 명백하게 띤 녀석들이 감히 시간 보호군에게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

“설명해줄 필요는 없다. 다만, 원래 있는 장소에 있지 않은 채 변화를 추구했으며 행성 멸망의 원인에 해당하는 물건을 보호하려드는 것만으로 진압당해 마땅하다”

목소리는 절규했다.

-결국 그것이 원인이었느냐! 타 행성에 도망쳐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한 것이 무슨 죄란 말이냐!-

“아하.”

그제서야 그는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이 멍청한 도마뱀 새끼는 자신들이 다른 행성에 온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항복 권고를 듣지 않은 것인가?

“멍청이.”

하먼 소위는 하등하기 그지없는 이 미래에서 날아온 도마뱀 자식이 탄 로봇의 팔 부분을 날려버렸다. 찢겨져 나간 오른팔이 폭발을 일으켰고 카르노타 대령의 하네론은 필사적으로 치솟고 치솟고 또 치솟았다.

-제발, 제발 우리 종족에게 구원의 기회라도 주란 말이다!-

에너지 포가 오른쪽 무릎 부분에 명중했다. 그럼에도 대령의 하네론은 멈추지 않았다. 대류권을 돌파하고, 성층권을 돌파하고 그는 계속, 계속 상승했다.

“젠장!”

기관포의 궤적과 에너지 포가 녀석을 제압하려 노력했지만 완전히 박살 못 낸다는 하먼 소위의 의중이라도 읽은 듯 카르노타 대령은 아슬아슬하게 피해나갔다.
어느새 머리 위로는 검은 하늘이 펼쳐지고 있었다.
대기권을 돌파할 때가 기회라고 하먼 소위는 생각했다. 대기권 돌파의 충격과 함께 중력의 속박에서 벗어난 발디온의 센서 및 시스템이 우주전용에 맞게 재구성되었다.
그리고 정면 모니터에는 대기권 돌파의 충격과 우주 공간에서의 익숙지 못함으로 인해 흐트러진 모습의 하네론이 비춰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에너지체는 놓치지 않고 있는 모습이 가히 용했다.
발디온의 기관포 관제 시스템이 하네론의 양 어깨에 탑재된 열선 포를 정확히 포착, 파괴시킴과 동시에 하먼 소위는 출력을 높여 돌진했다.
하먼 소위는 발디온의 붉게 빛나는 쌍안 듀얼 센서로 파악해낸 조종석 위치 근처에 강하게 펀치를 먹인 후 그대로 얼굴 부분을 잡아 쥐었다.
그 정도 충격이면 조종사가 기절할 수준이었지만 여전히 하네론은 허우적대며 저항을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내 말을 들어. 닥치고 내 말을 들으란 말이야!”

허우적대던 하네론은 필사적으로 외치는 하먼 소위의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

“네 놈의 부하들을 공격하고 기지를 파괴한 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나로서는 막중한 임무가 있었다. 시공 연속체와 이 행성의 안전을 위해서.”

하네론의 붉은 두 눈동자는 아무 말도 없이 조종사의 의지를 대변하고만 있었다.

“네 놈들의 세계는 멸망하지 않았다. 단지 너희들이 타임 슬립 됐을 뿐이지. 그래, 인류라 칭해지는 지적 생명체가 지구를 지배하던 때의 과거로. 너희들은 큰 착각을 하고 있었어. 여기는 외계가 아니다. 다만 과거의 역사와 그 모든 것을 잊고 새롭게 시작한 어느 미래의 지구에서 오게 되어 착각했을 뿐이지. 그리고 저 물건!”

하네론의 손에 쥐어진 에너지체를 가리키며 하먼 소위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말을 했다.

“바로 저것이 네 놈들이 행성이 멸망한다는 위협으로 인해 도망치게 된 물건이다. 우리는 하프아 힌몸 미디엄이라 부르지만 독일 측에서는 니벨룽겐의 반지라고 불렀나 보군. 그렇다. 이 에너지체는 너희들과 같이 타임 슬립에 휘말려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미...믿을 수 없다...믿을 수...-

하먼 소위는 카르노타 대령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모든 감각은 하네론의 손에 쥐어져 있던 에너지체가 갑자기 요동치다 하나의 아름다운 붉은빛 결정체로 변하는 광경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결정체는 공허한 우주 공간을 한 구석을 밝히기라도 하듯 끔찍할 정도로 아름다운 붉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세상에, 결정체가 폭발하려고 하고 있어!”

빌어먹을. 이제는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저 망할 녀석을 어서 우주 한 구석으로 가지고 가 처리해야만 했다. 결정체와 지구는 여전히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카르노타 대령의 통신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 내용은 역겨운 자기변명이었지만.

-우...우린 몰랐소. 설마 모양과 색깔도 달랐고 분명 강력한 에너지를 제공했단 말이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으면서 잠시 동안 변질했을 뿐이지.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사실 지금까지 폭발 안 한 것만도 기적이지. 자, 이 행성을, 미래의 너희 세계를 구하고 싶다면 어서 그 망할 물건을 내놔!”

카르노타 대령의 통신은 기묘한 잡음과 함께 끊겼다. 대체 뭘 생각하는 거지?
결정체의 발하는 빛은 누가 봐도 그 절정에 달한 것 같았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차가운 진공의 공간 속에서 탑승자의 의지를 충실히 대변하는 기계인형들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침묵의 시간은 10초뿐이었으나 하먼 소위로서는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참다못한 하먼 소위가 결정체를 빼앗으려 손을 뻗기 직전의 순간, 카르노타 대령의 통신이 다시 들려왔다.

-아름답군. 과거의 모습이긴 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워.-

카노르타 대령의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끝나고 하베론의 각부의 비행 장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광이 한층 짙어지기 시작했다. 검은 하늘을 수놓는 푸른 에너지광.
하먼 소위가 그의 의도를 깨달았을 때 만신창이의 하베론은 우주 저편으로 고속 항행을 펼치고 있었다. 우주에 적합한 기체도 아니고 파손된 채 속도를 극대화했으니 탈출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누가 봐도 뻔했다.
소행성에 부딪친 카르노타 대령의 하베론의 손에서 결정체가 거대한 붉은 빛을 뿜어내면서 거대한 구체를 일으켰다.
마치 태양과도 같은 빛의 구체는 소행성 두 개를 집어삼키면서 팽창하다가 서서히 수축하면서 이내 사라졌다.
우주는 다시 침묵과 고요를 되찾았다.
그 광경에 뭐라 말하기 힘든 느낌을 받은 하먼 소위는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멍청한 놈.”

만약 그가 결정체를 잡았다면 보다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카르노타 대령은 헛죽음을 한 셈이었다. 하먼 소위는 그렇게 필사적으로 자기 합리화했다.


“크윽...”

그는 눈을 떴다. 우주가 아닌 땅 위에서 그는 신음했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존재들이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는 경악했다. 이제 겨우 지능을 가지고 자연에게서 생존하려는 원시적 파충류들이 있었던 것이다.



시공간과 타임 슬립 입자에 혼선을 일으키던 결정체가 소멸하면서 시공간 통신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타임 홀을 통해 장갑보병단과 그의 소대원들이 뒤늦게 섬에 와 뒤처리와 수습을 맡게 되었다.
레츠테 바탈리온. 광기에 찬 나치 독일 제3제국의 마지막 계획은 무너졌다. 그리고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시간 보호군에 모두 포로로서 압송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재교육을 통해 시간 보호군에 입대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일부는 기억이 지워진 채 고향으로 돌려보내질 것이다. 케이스들, 카르노타 대령의 대대원들 또한 마찬가지의 일이었다.
하먼 소위는 발디온의 머리 옆에 걸터앉은 채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꺼내기 전 그는 카르노타 대령을 생각해보았다. 종족을 구원하겠다는 잘못된 망상에 사로잡힌 그 불쌍한 대령을.
하먼 소위는 처음으로 시간 보호군의 존재 의의, 그리고 행동 방식에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저들은 개변군이 아니었다. 아니, 지금까지 자신을 포함한 시간 보호군이 시공간을 초월하며 진압한 개변군들.
그들은 그 출신 시공간대도, 그리고 그 종족도, 그리고 그 기술력도 제각각인 불쌍한 표류자들 일 뿐이었다.
개변군이라고 멋대로 한데 뭉뚱그려 취급하기 시작한 것은 시간 보호군이었다. 처음 입대해서 교육받을 때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되던 것 중 하나가 조금 무너진 것을 느끼며 하먼 소위는 담배를 내던졌다.



타오르는 화염을 그는 응시했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그들은 기쁨의 춤을 추며 이번 사냥의 결실을 자축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도구의 유용성을 알게 된 그들 중 일부가 가장 잘 익고 좋은 부분을 잘라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기를 베어 물었다. 따뜻한 육즙을 느끼며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 자신은 자신의 종족의 시작점이 된 것인가? 나 자신이 있게 한 우리 옛 조상들의 신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곳이 과거의 알타투네인지. 또 다른 파충 인류가 존재하는 다른 세계로 떨어졌는지.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제 그들은 과학을 알게 될 것이고 문명을 이루며 발전할 것이라는 것을.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의 종족 혹은 동류를 구원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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