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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몽유의식

2008.09.30 15:1409.30

몽유 의식

“또야!”
장박사는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자기 전에 탁자 위에 닫아놓았던 노트북이, 이번에도 열려져 워드가 실행되어 화면에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며칠에 걸쳐 비슷한 상황이 이어져 왔다. 직장 동료들과 합숙할 때는 일어나지 않았고, 장박사 혼자 고립된 거처에서 잘 때에만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이번에도 장박사가 홀로 투숙했던 곳은 고급 호텔이었다. 한마디로 밀실 사건이었다. 장박사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자기 전에 설치해둔 CCTV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메시지에 대한 호기심이 이를 억눌렀다.
장박사는 새로 입력된 메시지를 읽기에 앞서 이전에 입력된 메시지가 담긴 파일을 먼저 꺼내 읽었다.
-장강한 박사, 복제인간 실험이 잘 안 되어서 당황하고 있나?-
첫 번째 메시지는 그러했다. 장박사가 몸담고 있는 굴지의 기업 B그룹은 어떤 연유에서인지 몰라도 복제인간 실험을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었다. 장박사는 소수의 연구원들 가운데 하나였다. 체세포를 핵이 제거된 난자 안에 집어넣은 뒤 대리모를 구해서 낳게 만드는 단순한 착상의 연구였다. 윤리 논란이야 처음부터 안드로메다은하로 보내버렸다. 난자를 대량으로 적출하는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복제 도중 실패한 배아를 대량으로 폐기했다. 체세포 복제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태어난 복제인간의 수명이 일반 사람 보다 짧아질 것이 확실해도 단념하지 않았다. 2005년이었다. 그런데 복제인간은 모두 죽어서 태어났다. 장박사는 첫 번째 메시지에 무척 기분이 나빴다.
두 번째 메시지는 이러했다.
-복제인간 실험을 그만두지 않으면, 죽게 될 거라네.-
연구진의 누군가가 자신을 쫓아내서 연구비 몫을 더 많이 챙기려는 수작이라고 장박사는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B그룹에서 연구를 은폐하려는 계략일 수도 있었다. 그럴 거라면 권총을 들이대고 말할 일이지 왜 비겁하게 숨어서 한단 말인가. 장박사는 돈을 밝히긴 했지만 무모한 사람은 아니었다. 장박사는 그런 작자의 수작을 견딜 수가 없었다. 바탕화면에 그런 내용을 써놓았지만, 어느새 이전의 바탕화면으로 돌아가 있었다. 장박사는 이번에 온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하기 전에 CCTV의 내용을 확인했다.
장박사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한밤중에 잠옷을 입은 채 노트북을 열어젖히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남자는 CCTV에 따르면 장박사 자신이었다. 이번에 온 메시지를 보았다.
-복제인간에게는 의식을 불어넣어주지 않는다네. 그러니 살아 있는 복제인간을 보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복제인간에겐 영혼이 없을 거라는 뚱딴지같은 소리였다. 나이 차이가 좀 나는 쌍둥이에 불과한 복제인간이 인간과 다른 의식을 갖고 있을 리는 없다. 종교가나 언론인이 주장했다면 비과학적인 그 주장에 코웃음 쳤겠지만, 장박사 자신이 몽유병에 걸려 쓴 것이니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박사는 기독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즉 모태신앙이었다. 국민학교 고학년부터 미국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기까지 조금씩 신앙이 부서져나갔다. 아직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지도 모를 신앙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인가.
정신병에 걸린 게 명백했다.
만약 정신병에 걸린 것이 판명되면 회사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 돈도 제대로 못 받거니와 신분도 바꾸고 살아가야 한다. 동료들은 한결같이 무자비했고, 회사도 냉혹하게 비밀을 지키려 할 것이다. 장박사는 그런 꼴을 당할 수는 없었다.
‘틀림없이 내게 어떤 놈이 최면을 걸어서 이런 문장을 쓰도록 만든 것일 거야. 어떤 작자인지 가만 두지 않겠어!’
장박사는 휴가계를 팩스로 제출했다.
핸드폰이 왔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는 일방적으로 끊었다.
“너, 미쳤어? 지금 밀린 일이 얼마인데 휴가야? 잔말 말고 출근해.”
어떤 핑계도 소용이 없었다. 지인에게 변고가 생겼다고 하자면, 이미 그의 지인들은 모두 감시 대상이었다. 병 걸렸다고 하면, 링거를 맞으면서 일하라고 할 터였다. 몇 달 앞두고 신청해서 스케줄 조정을 하면서 휴가 나가겠다고 했다면 또 모르지만, 당장 내일 쉬겠다고 했으니 들어 먹힐 리가 없었다. 장박사로서도 그런 상황들을 감안하면서 한 행위였지만, 정말로 자신에게 신용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자 괴로운 심정이 되었다.
‘할 수 없지. 일을 빨리 끝내서 합숙하는 상황이 없도록 해야지.’
그래야 메시지를 더 빨리 받아서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휴가계도 스케줄 맞춰서 재조정해야 한다. 최면을 거는 작자가 없는지도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그러고 있는데, 메신저가 깜빡거렸다.
장박사는 노트북 앞에 앉아 메신저를 확인했다.
<출근하지 말고, 무기한 근신할 것. 휴가계를 이유 없이 갑자기 제출했다는 것은 장 연구원이 어떤 불특한 마음을 먹었다는 증거가 되므로 진의를 파악하고 어떤 대응을 할지 회의를 열 것임. 호텔은 봉쇄될 것임.>
확인 사살하는지 팩스로도 같은 내용이 왔다.
“이런 개자식들이!”
동료들이 상관부터 부하까지 언제 상대를 밟을지 어떻게 하면 성과를 도둑질할지 혈안이 되어 있다지만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다. B그룹에서 요원들이 오려면 시간이 있을 수도 있었다. 장박사는 노트북과 지폐가 든 가방만 챙겨서 서둘러 나왔다. 호텔 주차장에 가서 자신의 람보르기니를 탔다. B그룹에서 연구하는 덕택에 얼마 안 되는 여가 시간에는 백만장자처럼 지낼 수 있었다. 장박사는 이래저래 해고되는 것이 마찬가지라면 적극적으로 행동해보고 싶었다.
장박사는 맹렬히 질주해서 대륙 횡단 도로에 들어섰다. 노트북엔 미국의 많은 도로들이 표기된 지도가 들어 있었다. 지리는 장박사의 취미였다. 권총을 챙긴 다음 노변의 한 주유소에 들러서 전화를 걸었다.
“한 번만 좀 봐주시죠. 제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 생겨서 그럽니다.”
“그게 대체 뭔데 무단결근에 무단이탈까지 하는 거야?! 당장 돌아오지 못 해!”
“지켜야만 하는 사생활도 있는 것입니다. 너무 책망하지 마시죠.”
“널 찾으면 사살하라고 명령을 내릴 수도 있어.”
장박사는 지금까지의 일을 사실대로 설명했다. 단 몽유병만 말하고 메시지 내용은 ‘앞으로 네가 하는 일은 모두 실패할 거다’라는 식의 횡설수설이라고 했다. 장박사는 덧붙였다.
“동료 가운데 제게 최면을 거는 작자가 있을 수도 있어서 이탈하는 겁니다. 정신과에 좀 다니다가 돌아오죠.”
“사살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자네를 잡지 말라는 명령은 내릴 수 없네. 잘 도망 다니길 바라네. 그리고 되도록이면 빨리 돌아 와.”
“감사합니다, 국장님.”
장박사는 전화를 끊고 근처의 대도시로 이동해서 호텔방을 잡았다. 노트북을 닫아 가방 속에 숨기고 정신과 컨설턴트에 예약했다. 정신감정을 받았다.
의사의 결론은 이러했다.
“정상이십니다.”
장박사는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연구에 대한 부분을 빼고 설명했다.
“입원하시는 편이 치료에 더 좋을 겁니다. 안 된다구요? 그러시다면 약을 처방해드리죠. 개개인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증세에 맞는 약을 찾아낼 때까지 발을 떨게 된다던가 같은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장박사는 병원을 나와 잠시 생각하다가 중고차 가게에 가서 람보르기니를 팔고 현대차를 샀다. 싸게 팔고 비싸게 산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장박사는 다른 호텔로 방을 바꾼 다음 노트북을 가방 깊숙이 집어넣었다. 올바른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라면 노트북을 쉽게 꺼낼 수 없으리라. 근방의 서점에서 SF소설집 한 권을 사서 단편들을 즐기면서 시간을 보냈다. 혹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장박사는 수면유도제 한 알을 먹었다. 오랜만에 여유로우니 기분이 좋았지만 요원들이 언제 덮칠지 모르는 위태로움이기도 했다. 장박사는 CCTV를 설치하고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CCTV를 먼저 확인했다. 장박사 자신이 일어나서 노트북을 두드리는 장면이 보였다. 역시 몽유병이었다. 노트북엔 아니다 다를까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의식이 진화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나? 자네들은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생존 기계일 뿐인데 그것에 의식이 기생해 있는 거라네. 우리는 의식을 만들어서 불어넣었지.-
신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장박사는 옆 도시의 다른 호텔로 거처를 옮겼다. 더 이상 CCTV는 설치하지 않았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배부를 때까지 마셨다. 속이 부글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장박사는 담배를 피지 않기 때문에, 커피의 카페인은 성공적으로 중추신경을 각성시켜 잠 못 들게 할 것이다. 장박사는 침대 위에 누웠지만 잠은 자지 않았다. 자정에 다다르자 심장이 거세게 고동쳤다.
갑자기 장박사는 벌떡 일어나 가방 속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탁자 위에 올려놓고 두드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인간이 수정되는 순간에 우리는 시간 여행 장치를 개입시켜서 의식의 기초가 되는 요소들을 불어넣게 되지. 우리는 우리가 의식을 불어 넣어주는 지성체가 복제 기술을 발달시키는 것을 용인하지 않아. 그렇기에 복제인간들이 모두 죽어서 태어나는 거야.-
장박사는 가까스로 자신을 되찾아 억지로 물음을 노트북에 입력했다.
-너희는 누구지?-
계획대로 물어보는 데 성공했다. 장박사의 몸이 다시금 다른 의지에 접수되었다.
-우리는 우주적 지성 연합이야. 모든 생명이 있는 우주는 후반기에 우주적 지성 연합으로 진화하고 싶어 하지. 물론 그것은, 의식이 있는 존재가, 다른 모든 물질이 자신에게 흡수되고 싶어 한다고 주장하는 아전인수적 해석이야. 우주적 지성 연합이 우주 생명 진화의 끝에 반드시 존재할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지성체를 관리하고 있어. 시간을 거슬러서 의식을 집어넣어서 우리의 존재 확률을 높이는 거지.-
-복제인간은 인류에게 번영을 줄 수 있는데 왜 반대하는 건가?-
-우리는 자네들 개개인의 복리에 관심이 없네. 그리고 이건 반대하는 게 아니야. 의식을 넣어주지 않을 테니 복제인간 연구는 해도 소용없다는 통보지.-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검은 양복을 입은 B그룹의 요원들이 나타났다. 권총이 서슬 푸르렀다. 장박사는 자신의 몸을 뜻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장박사는 괴성을 지르면서 요원들에게 덤벼들었다. 요원들은 방아쇠를 당겼다.
장박사의 사인을 조작하고, 자료를 정리하는 등 B그룹 직원들은 분주했다. 다행히 비밀은 유지되었다. 국장은 장박사의 노트북에서 장박사가 스스로 두드린 내용들을 확인했다.
‘복제인간이 처음으로 살아서 태어난 게 어제인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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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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