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신이여, 마법이여, 안녕히 잠드소서>
Ver. 08-09-23

지은이: 볼티(김 청)


1.

  엄숙한―정확히는 그렇게 들리려고 애쓰는―목소리가 법정에 퍼졌다.

  “피고 갈릴레이 갈릴레오.”

  붉은 예복을 입은 남자의 말에 노인은 눈을 떴다. 노인은 주름살투성이의 앙상한 손을 단상에 올려놨다.

  “주의 이름으로 묻겠다.”

  방청석이 웅성거렸다. 노인을 가리키며 수군대는 중년 남자들에서부터 칭얼거리는 아이의 입을 틀어막는 부인까지, 방청석을 지배하는 건 신성한 중압감이었다.
  예복의 남자가 말했다.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겠는가?”

  노인의 퇴색한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허리가 굽은 노인은 석고상처럼 단상을 짚은 채 마냥 서 있었다.
  침묵이 흐르고 방청객들의 헛기침 소리가 늘어났다. 예복의 남자는 눈살을 찡그렸다. 그리고 좀 더 큰 소리로 물었다.

  “주의 품으로 돌아가겠는가?”

  “…….”

  노인은 말없이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바닥은 심하게 짓뭉개져 있었다. 어깨를 수그린 노인에게 수백 명의 눈총이 쏟아졌다.
  노인은 한숨을 흘렸다. 그 속에는 여러 감정이 뒤엉켜 있었다. 분노일수도, 혹은 허망함일수도 있었다.
  노인의 얼굴을 짧은 떨림이 훑고 지나갔다.

  “돌아…가겠습니다.”

  방청석의 술렁임은 더 커졌다.

  “주께 회개하겠는가, 갈릴레이?”

  승리를 확인하듯 예복 입은 남자가 물었다. 노인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래서 방청객들은 깊게 패인 노인의 주름살을 볼 수 없었다.
  침울하고 낮은, 세월에 쉰 목소리가 흘렀다.

  “…회개합니다.”

  “성서에 맹세하라.”

  노인은 두툼한 책을 받았다. 노인이 손을 올리자 책은 붉은 빛을 뿜었다. 그 빛을 본 방청객들은 두 손을 깍지 끼며 눈을 감았다.
  고통이 손을 타고 온몸에 퍼졌다. 노인은 신음하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예복의 남자가 느긋하게 말했다.

  “주의 자비를 깊이 새길 지어다. 주께선 언제나 함께 하시리니. 잠들기 전에 성서를 외우며 주를 생각하라. 일용할 양식을 베푸시는 주의 은총에 감사하라. 주께서 너의 생명을 거두실 때 기뻐하라.”

  빛이 잦아들었다. 노인은 숨을 헐떡이며 손을 뗐다.
  검은 상처가 노인의 손등에 패여 있었다. 두 막대기를 직교시켜 놓은 상처였다. 노인은 다른 쪽 손으로 감싸 쥐어 상처를 가렸다. 그의 앙상한 어깨가 떨렸다.

  “이것으로 재판을 마친다.”

  예복의 남자는 선언했다.


  뾰족한 지붕을 가진 재판소가 노인을 토했다. 육중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햇살이 뜨거웠다. 사방이 샛노랬다. 노인은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가늘고 볼품없는 자신의 그림자에 붙들려 걸었다.
  그러다 손등에 생긴 상처에 눈길이 닿았다. 노인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햇빛이 작렬했다. 눈을 감았는데도 시야가 붉었다. 그런 모습으로 노인은 한동안 무언가를 느꼈다.
  주름이 자글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흐릿한 미소였다.

  “그래도… 이미 지구는 돌고 있다.”

  아아.
  승리자는 노인이었다.

2.

  “괴롭나, 갈릴레이?”

  머릿속까지 얼어붙을 추위. 혼미한 의식 속에서 사내는 자신의 이름을 들었다.
  사내는 신음했지만 눈을 감진 않았다. 그 작은 행동조차 강한 인내심과 자제력, 그리고 반항심을 필요로 했다.
  존재는 찬란히 빛나며 사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진작 얼어 죽었을 영하의 강풍이 사내를 맞받았다. 바람은 얼음궁전의 통로들을 따라 요동치며 울어댔다.
  이히히히히. 이히히히히.
  그건 미친 여자의 통곡처럼 들렸다.

  “칭찬해주마.”

  존재가 말했다. 사내는 신음을 삼킨 뒤 주먹을 움켜쥐었다.

  “방한마법(防寒魔法)을 이 정도까지 사용한 인간은 네가 처음이다.”

  “기쁘지 않소, 그런 칭찬은.”

  사내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존재는 냉소 지었다.

  “홍염의 신을 잠재운 자가 홍염의 신이 만든 마법 덕분에 살아 있다니. 그대는 가증스런 모순덩어리다.”

  “부정하지 않겠소. 그러나 어쩔 수 없었소. 인간을 초월한 자는 인간을 초월한 힘으로만 상대할 수 있으니까. 당신만 봉인할 수 있다면 난 뭐든 감수하겠소. 그게 모순이든 위선이든 아무래도 상관없소.”

  사내가 입술을 움직이자 입김이 새어나왔다. 하얀 안개의 형상을 흉내 낸 것도 잠시, 김은 살인적인 추위에 굳어 바닥에 흩뿌려졌다.
  존재는 웃음을 거뒀다.

  “그대에게 묻겠노라.”

  “답하겠소. 만물의 지배자여.”

  “그대는 지상 최대의 마법사다. 그런데 어째서 마법을 없애려느냐? 왜 나를 봉인하길 원하지?”

  “인간의 세계를… 지구를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기 위해서요.”

  “본래의 자리?”

  “그렇소. 지구는 스스로 움직여야 하오. 절대자 덕분이 아닌 제 힘으로.”

  “세계를 망칠 작정인가?”

  “그렇지 않소.”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바랄 뿐이오. 밤을 위해 달의 신에게 기원할 필요가 없는, 태양의 신이 강림하지 않아도 아침이 되는… 그런 세상을 말이오.”

“대체 무엇 때문에!”

  존재가 호통 쳤다.
  광채가 심해지며 바람이 꿈틀댔다. 사내의 몸은 강풍에 휘청거렸다.
  얼음벽이 깨져 날렸다. 날카로운 조각이 사내를 때렸다. 시뻘개진 사내의 얼굴은 추위를 견디다 못해 고통을 내질렀다. 머리카락에도 허연 서리가 엉겨 붙었다.
  그러나 사내는 침묵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기 위해서요! 의존만 해선 세계의 일부 밖에 알 수 없으니까!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들은 스스로의 손으로 삶을 만들어야 하오. 절대자에 기대어 자립하지 못하는 종족을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오!”

  “자립?”

  “그렇소.”

  “나약한 인간들이 말이냐? 보살핌을 받지 않고서는 한시라도 살 수 없는 너희들이 말이냐!”

  “바꾸어 나가겠소!”

  사내는 웅크렸던 몸을 폈다. 자잘한 얼음조각이 얼굴에 부딪쳤다. 추위로 굳은 살갗이 터져 피를 흘렸다.
  사내는 광채를 뿜는 존재를 응시했다. 존재 역시 사내를 마주보았다.
  이히히. 이히히히히. 둘의 침묵을 광풍이 헤집고 지나갔다.

  “우리는 당신들의 마법을 이용하며 살아왔소.”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사내를 바라보는 존재 역시 노기를 거뒀다.
  사내는 단어를 하나씩 곱씹듯 말했다.

  “마법은 편리했소. 하지만 인간의 것이 아니었소. 마법의 주인이 신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지….”

  “그래서?”

  “힘의 종속은 정신의 종속을 가져오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신에게 미뤄둔 채 살아갈 뿐이오. 자신이 결정하지 못하고 신의 판단에만 따르고 있소. 그게 당연한 것 인양.”

  “…….”

  “아기는 자신의 발로 대지를 딛고 일어서야 하오. 부모의 보살핌을 받던 아이도 어른이 되어 독립하지. 그러지 못한다면 도태될 뿐이오. 그저 먹고 싸고 살아가는 덩어리로 전락하고 마오. 알겠소? 인간의 본성이란 이렇소. 우리는 그 어떤 생명보다 자유의지가 강한 종족이오. 그러나 마법 때문에 인간은 신의 테두리에 갇혀 버렸소. 당신들이 던져준 마법에 의존해서 스스로의 진정한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소!”

  사내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그것을 바꾸고 싶소. 마법이 아닌, 인간이 창조한 새로운 힘과 의지로써 살아가길 바라오.”

  “인간이 창조한?”

  존재의 물음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 힘을 과학이라 부르오.”

  존재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몸을 숙인 채 존재는 키득거렸다. 그러더니 참지 못하고 홍소를 터뜨렸다.

  “후후후후 흐하하하하 으앗하하하하하하하하!!!”

  사내는 존재의 빛으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았다.

  “좋아, 좋아, 아주 재미있어!”

  웃음을 머금은 채 존재는 외쳤다.

  “갈릴레이여! 재차 묻겠노라! 너희들의 과학이 무엇을 할 수 있나? 죽은 자를 되살릴 수 있나? 바다를 가를 수 있나? 생명을 창조할 수 있나?!”

  비웃음이 빛과 한풍에 실려 떠내려 왔다. 존재의 외침은 얼음궁전의 벽에 부딪쳐 사방에서 울렸다. 사내를 둘러싼 온 세계가 사내를 조롱했다. 이곳에서 사내는 너무 작고 보잘 것 없었다.
  하지만 사내는 당당했다.

  “아직은 할 수 없소.”

  사내의 목소리는 세계의 냉소를 헤치고 조용히 흘렀다.

  “그러나 언젠가는 할 것이오. 신과 마법이 아닌… 인간 자신의 힘으로.”

  “갈릴레이.”

  존재가 웃음을 그쳤다.

  “인간은 깨지기 쉬운 종족이다. 너희의 힘만으로 살아가겠다고? 웃기는군. 세상은 인간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없애지 못해 안달이 나 있지.”

  “…….”

  “그런 위험으로부터 우리는 너희를 보호해 왔다. 너희에게 많은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다. 우리가 바라는 건 단지 찬양이다. 우리를 믿고 우리에게 의지해라. 신의 보호와 영도 속에서 너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노라.”

  존재의 말을 듣고 사내는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행복할 거요. 마음의 평화도 얻을 테지.”

  잠시 후 사내가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듣고 존재는 미소 지었다. 그러나 뒤이은 사내의 말이 존재로부터 미소를 지웠다.

  “동물로 사육당하면서.”

  사내는 존재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사육당하는 동물은 주인에게 의존하며 편안하게 살 수 있소. 그러나 울타리 밖은 보지 못하오. 울타리 안의 좁은 땅만이 낙원이라고 믿으며 살다 죽어갈 뿐이지. …나는 인간의 가능성을 더 넓히고 싶소. 우리의 잠재력을 믿소. 신이 만든 한계도, 이 지구라는 세계도 인간은 넘을 수 있소! 그러나 신과 마법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본연의 힘을 깨닫지 못할 거요.”

  사내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래서 여기에 왔소.”

  “그대는… 그곳에 인간이 갈 수 있다고 믿나?”

  존재의 말투는 방금 전과는 달랐다.

  “오랜 옛날부터 신과 별들의 성역이었던 심연과 태초의 바다에?”

  상대를 어르는 나긋함 대신, 심장을 찌르는 냉정함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몸을 숨긴 채 용서를 빌고 싶은 본능에 시달릴 터였다.
  그러나 사내는 본능을 거슬렀다. 그리고 대답했다.

  “믿고 있소.”

  “그 말은, 신의 영역을 침범하겠단 뜻이라는 것도 아나?”

  “알고 있소.”

  존재는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한가, 마법사 갈릴레이. 아니… 과학자라고 불러주지.”

  다시 존재가 눈을 떴을 때 존재를 둘러싼 광휘는 더욱 맹렬해졌다. 신들의 왕, 만물의 지배자, 무한한 절대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사내는 재빨리 차광마법을 암송하여 성스러운 빛으로부터 시력을 지켰다.

  “복종하는 인간들에게 우리는 관대하다. 그러나 우리와 동등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감히 신과의 동등함을 꿈꾼 어리석은 자들을 용납지 않으리라! 합당한 벌을 내리리겠노라!”

  얼음궁전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천정을 받치던 얼음기둥에 금이 가고 덩어리들이 무너졌다. 벽이 요동치며 파편을 흩날렸다.
  이히히히히히히! 이히히히히히히히!
  강풍은 들쑥날쑥해진 얼음 바닥의 표면에 몸을 긁고 회오리쳤다. 어느 때보다도 날카롭고 기분 나쁘게 울부짖었다.
  사내의 머리카락 역시 미친 듯이 나부꼈다. 그러나 사내는 움직이지 않았다.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광채를 내뿜는 존재를 마주했다.

  “내 힘은 너무 미약하오. 소멸은커녕, 당신에게 상처조차 주지 못하겠지. 하지만… 잠재울 수는 있을 거요.”

  사내가 영창하자 희미한 빛이 그를 감쌌다. 존재의 광휘에 비하면 어둠이라 불러도 될 정도였다. 그러나 사내의 빛에 닿자 날카로운 얼음 파편들은 곧 증발했다.
  더욱 가열한 광채와 바람이 존재로부터 밀어닥쳤다. 그것은 존재의 분노이자 호통이었다. 조롱과 우월감으로 뭉친, 정신과 육체 양쪽의 후려침이었다.

  “사라지거라!”

  사내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냉기 혹은 열기가 온몸을 마비시키려 들었다. 사내는 알고 있었다. 여기서 무릎 꿇으면 무(無)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주저앉고 싶었다.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 안식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내는 그러지 않았다.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비명마저 삼키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의식의 끄트머리를 움켜쥔 채,
  사내는 모아둔 힘을 개방했다.

3.

  빛은 사라졌다.
  사내의 미약한 빛도 존재의 광휘도 없었다. 혹한과 짙은 어둠만이 무너진 얼음궁전을 지탱했다. 바람은 이제 미친 여자마냥 울지 않았다. 대신 죽어가는 노인처럼 옹알거리고 있었다.

  “우습군…. 제 힘에 당하다니.”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세계를 지탱하던 그는, 얼음기둥 잔해에 깔린 채였다. 반 이상 얼어붙은 모습으로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광채를 잃었음에도 그가 가진 위압감은 여전했다.
  사내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자신의 힘을 사용했지만, 나는 당신의 힘을 사용했기 때문이오.”

  사내는 새파래진 입술을 겨우 움직였다.

  “나는 모든 마력을 방출했소. 더 이상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다르오.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신의 힘을 조금은 아껴두지. 비록 신이라 할지라도.”

  사내는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그것은 이미 손바닥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살점이 녹아 뼈가 드러났고 그대로 혹한에 굳어 아무렇게나 짓뭉개졌다.

  “그 손은?”

  “일순간이라도… 인간이 신과 대등해졌던 대가요.”

  그는 정신없이 몸을 떠는 사내를 보았다.

  “추운가, 갈릴레이.”

  사내의 체온이 입김으로 변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렇군…. 더 이상 방한마법은 쓸 수 없겠지.”

  그의 말대로였다. 그가 존재함을 부정당하는 순간, 이 세계에서 마법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내가 씁쓸하게 웃었다.

  “유감이지만 인간의 힘은 마법보다 훨씬 약하오. 아직은.”

  그 쓴웃음 속에 후회는 없었다.

  “…….”

  지금까지 몇 번이나 반복됐던 정적이 흘렀다.

  “너희들 인간은….”

  정적을 깨고 그가 말했다.

  “처음엔 자연에 복종했고, 지금까진 신에게 복종했다. 그러나 앞으론 너희의 의지대로 살아가겠지. 그대 때문에 우리는 잠들어야 하니까.”

  그는 점점 얼음에 뒤덮였다. 사내는 초췌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나 그 뒤엔 어떻게 될까. 인간은 통제자를 잃었다. 자유만을 얻고 절제를 배우지 못한 너희들은, 네가 말했던 새로운 힘으로 모든 것을 헤집을 것이다. 땅과 하늘을 더럽히고 다른 생명을 파괴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스스로 파멸한다. …이것이 그대가 바라는 결과인가?”

  “그렇게 될 수도 있소.”

  사내가 신음했다.

  “하지만 난 사람들을 믿을 거요. 처음엔 신의 부재에 당황하겠지만 점차 적응하겠지. 당신의 말대로 인간의 과학이 인간을 해치는 날이 올지라도 극복하리라 믿겠소.”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때가 당신들이 부활하는 날이겠지.”

  사내는 굳은 턱을 힘겹게 움직였다.

  “과학은 잊혀지고 신앙이 빈자리를 차지하겠지. 나로선 그런 날이 오지 않길 바라지만.”

  “그렇군.”

  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한숨이 섞였다. 봉인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재차 한풍이 그와 사내를 훑었다. 사내는 몸을 웅크리며 떨었다. 딱딱딱. 윗니와 아랫니가 요란하게 부딪쳤다.

  “이대로 있으면 그대는 죽겠지.”

  그가 말했다.
  사내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생각을 뻗어나갈 여유가 사내에겐 없었다. 혹한은 사내의 머리 깊숙이 파고들어 정신을 마비시켜 나갔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사내는 마지막까지 버티려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헌데 그대에겐 할 일이 남은 듯하군.”

  의식을 놓으며 사내는 쓰러졌다. 사내의 얼굴은 핏기를 잃어 시체를 연상시켰다. 그리고 곧 그렇게 될 터였다.

  “약간은 궁금하기도 해. 너희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꿔 놓을지.”

  얼음에 뒤덮이기 직전, 그의 손이 희미하게 빛났다.

  “승부다, 갈릴레이. 네가 본 인간이 옳았을까, 내가 본 인간이 옳았을까. 우선 그대가 시작해야만 해. 그러니 아직은 죽으면 안 되지.”

  그는 혼절한 사내를 향해 빛을 보냈다.

  “잘 받아주길. 이 시대 마지막 마법을.”

  빛이 사내를 감싸 안았다. 그와 함께 사내는 그의 곁에서 사라졌다.
  직후, 세상의 가장 아득한 곳에 있던 얼음궁전은 굉음을 내며 무너졌다.

4.

  “끝나지…않았어.”

  “예?”

  노인의 중얼거림에 둘째 딸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침대 맡으로 다가왔다. 노인이 떨리는 손가락으로 신호를 보내자 딸은 늙은 아버지를 일으켰다. 노인의 두 눈은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딸의 손을 잡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땐 살아야 했다. 내가 죽으면 아무 것도 남길 수 없었어.”

  손등의 상처를 만지작거리며 노인이 말했다. 딸은 그 상처가 언젠가의 재판에서 생긴 것임을 알고 있었다.
  노인이 낮게 웃었다. 기침과 구분하기 힘든 웃음이었다.

  “마법을 지닌 채 신을 없애려들었고, 신을 봉인한 주제에 그에게 회개했지. 그가 옳았어. 난 위선자에다 모순덩어리야.”

  딸은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요즘 들어 노인은 곧잘 이상한 소리를 입에 담았다. 망원경으로 하늘만 보더니 미친 모양이라고 다들 쑥덕댔다.
  노인은 딸의 손을 쓰다듬었다. 그의 중얼거림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그들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직이야. 아직 끝나지 않았어.”

  뼈가 앙상한 노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딸은 아버지와 손을 맞잡을 때의 기묘한 감촉에 익숙했다. 우연히 노인의 손바닥을 본 사람들은 경악하곤 했다. 저렇게 흉측하다니! 분명 악마와의 계약 때문이야!

  “이젠 내가 사라져도 누군가 뒤를 이을 거야. 그의 뒤를 또 다른 자가 잇고…. 사람들은 마법을 잊겠지. 마법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새로운 힘을 받아들이겠지. 인간이 창조한… 자유로운 그 힘을…!”

  “말 많이 하면 안 된다고 선생님께서 그러셨어요. 좀 쉬세요.”

  딸은 노인을 침대에 눕혔다. 노인은 아기처럼 딸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이불을 잘 덮어준 뒤, 둘째 딸은 노인의 이마에 입 맞췄다.

  “안녕히 주무세요.”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딸은 발소리를 조심하며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방 안에는 나른한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잠든 노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0.

  툭-

  “어?”

  청년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위를 살폈다. 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던 그의 머리를 무언가 치고 지나간 것이다.
  청년은 곧 범인을 발견했다. 피식 웃은 그는 범인을 주워들었다. 발갛게 잘 익은 사과였다. 그제야 이 나무가 사과나무임을 떠올렸다.
  나무에 열린 사과들을 올려다보며, 청년은 주워든 사과를 베어 물었다. 신맛이 가득 맴돌았다.
  과육을 씹는 그 순간, 눈앞에서 또 다른 사과가 떨어졌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풀 위에 떨어진 사과는 비탈을 따라 굴러 내려갔다. 청년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얘, 아이작!”

  청년은 시골집에서의 외침에 정신을 차렸다.

  “식사 안 할 거니?! 다 식는다!”

  그러고 보니 벌써 점심때였다. 슬슬 배가 고팠다. 사과를 한입 더 먹고, 청년은 언덕 밑을 향해 외쳤다.

  “네~ 갈게요!”

  청년의 고향은 고즈넉해서 공상에 잠기기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캠브리지보단 따분했다. 어서 페스트가 진정되어 복학했으면 좋겠다고 청년은 생각했다.

  “아이작, 아이작!”

  “지금 간다니까요!”

  읽던 책을 챙긴 뒤 청년은 집으로 달려 내려갔다.
  훈풍이 불어 나뭇잎들이 사각거렸다.


  오오.
  아름드리 사과나무에서 여무는 지혜의 열매들.

  신이여, 마법이여.
  부디 안녕히 잠드소서.


-끝-
==========================================================
  예전에 다른 곳에 올렸던 단편을 손봐서 다시 올립니다.
  요즘엔 쓰면 쓸수록 부족하고 부끄럽다는 생각만 늘어갑니다.
  그래도 써야죠.
===========================================================
댓글 2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197 단편 비엔나4 손지상 2008.10.30 0
1196 단편 한 발 내딛기1 라티 2008.10.29 0
1195 단편 추적자7 롤랜드 2008.10.27 0
1194 단편 광자력 빔의 사용승인4 김몽 2008.10.25 0
1193 단편 어느 젊은 여자 C3 청람 2008.10.19 0
1192 단편 멸망한 짐승들의 왕국 Mothman 2008.10.15 0
1191 단편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시네2 라티 2008.10.14 0
1190 단편 어느날 갑자기 누혜 2008.10.14 0
1189 단편 백미러를 부수는 여자 흰새 2008.10.08 0
1188 단편 殺犬의 추억 VANS 2008.10.03 0
1187 단편 권력 상실3 니그라토 2008.10.01 0
1186 단편 몽유의식 니그라토 2008.09.30 0
1185 단편 가슴에 꽃 한 송이 줏어듣기 2008.09.28 0
단편 신이여, 마법이여, 안녕히 잠드소서2 볼티 2008.09.23 0
1183 단편 실종2 FR 2008.09.22 0
1182 단편 운전수 야키 2008.09.19 0
1181 단편 집(고쳐 썼습니다. Thanx 2 겨울맥주님)3 DOSKHARAAS 2008.09.18 0
1180 단편 녹색 거인(Green Giant)1 나길글길 2008.09.16 0
1179 단편 대통령 항문에 사보타지7 dcdc 2008.09.14 0
1178 단편 [번역] 공상가 (The Dreamer) - 사키1 사은 2008.09.14 0
Prev 1 ... 83 84 85 86 87 88 89 90 91 92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