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실종

2008.09.22 08:1209.22

FR
free2b@dreamwiz.com

- 누나, 있잖아요.
남자는 침대로 들어가 여자 옆에 다가앉으며 말을 꺼냈다.
- 응?
여자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대답했다.
- 내가 아는 형이 하나 있는데요.
- 응.
- 그 형 여자친구가 없어졌대요.
- 없어지다니?
- 그냥, 말 그대로 없어졌대요. 어느 날 갑자기.
여자는 후,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피식 웃었다.
- 그건 또 무슨 장난이야?
- 아녜요. 정말이에요.
남자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 저랑 쫌 친한 형인데, 얼마 전에 저한테 물어보더라구요. 너 내 여자친구 본 적 있냐구.
- 자기 여자친구 어딨는지를 왜 너한테 물어봐?
- 아니, 어딨는지가 아니구, 본 적이 있느냐구요.
- 그래서?
- 없다구 그랬죠.
- 그게 뭐?
- 난 그 형이 여자친구 있었다는 걸 몰랐거든요.
- 그런데, 알고 보니까 있었어?
- 예.
- 이상한 사람이네. 그럼 왜 그걸 너한테 물어봐?
여자는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었다.
- 그 형 말로는, 나하구 자기 여자친구하구 셋이서 술 마신 적이 있다는 거예요.
-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 아 누나, 좀 들어 봐요.
남자는 짜증난 표정을 더해 가고 있는 여자의 벗은 어깨를 쓰다듬었다. 여자는 조금 표정을 풀며 한 손으로는 담배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남자의 손등을 부드럽게 만졌다.
- 나는 분명히 그 형 여자친구가 기억이 안 나요. 근데 그 형 말로는 내가 자기 여자친구를 본 적이 있다는 거예요. 이상하죠?
- 그 사람이 잘못 안 거 아냐?
- 근데 사람들이 다 그런대요. 그 형이 기억하기로는 분명히 자기 여자친구를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인데, 다들 전혀 기억을 못 한다는 거예요.
여자는 혼란스러워진 것 같았다.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고, 내뱉은 후, 말했다.
- 그거 진짜 실제로 있는 얘기야? 무슨 영화 얘기 같은 거 아니고?
- 네에, 정말이에요.
남자는 여자의 하얗고 통통한 젖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진지하게 말했다. 여자는 혼란스러운 표정 가운데 조금 호기심을 띠면서 남자 쪽으로 좀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남자는 여자가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을 보고 엄지손가락으로 여자의 젖꼭지를 가볍게 애무하며 열심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 그 형하고 내가 좀 친하거든요? 어느 날 날 불러내서 갑자기 술을 마시자고 그러더니, 원래 술 잘 못 하는 사람인데, 그 날 따라 한참을 아무 말도 안 하고 술만 들이켜는 거예요. 겁나잖아요. 그래서 왜 그러냐구, 무슨 일이냐구 아무리 물어봐도 말을 안 하더니, 소주를 두 병이나 비우고선 막 울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더니 갑자기 저보구, 너, 내 여자친구 본 적 있지? 이러는 거예요.
- 그래서?
여자는 오른손에 든 담배를 한 모금 빨면서, 왼손으로는 자기 가슴을 더듬고 있는 남자의 벗은 팔뚝을 만지면서 물었다.
- 없다구 그랬죠. 그랬더니 갑자기 마시고 있던 소주잔을 내던지더니 너 내 여자친구랑 나랑 셋이서 술 마셨잖아, 왜 너까지 이러는 거야, 이러구 막 소리를 지르면서 탁자를 다 뒤집어엎는 거예요.
-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 그러구선 완전히 맛이 가서 엎어져 버렸어요.
여자는 웃기 시작했다.
- 뭐야, 결국 술 주정이었잖아.
남자도 같이 웃었다. 그러나 곧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가서 여자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날씬하게 들어간 부분의 부드러운 살갗을 어루만지며 열심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그 때가 밤 열 한 시쯤 됐거든요? 저녁 먹자고 불러놓구선 세 시간도 넘게 암말도 안 하고 술만 마셨으니까. 그래서 그 형 자취방까지 내가 업고 갔죠. 그런데 방에 들어가자마자 막 토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원체 술도 못 하는 사람이, 그 형 소주는 서너 잔이면 완전히 다운이거든요, 근데 두 병이나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비웠으니 당연하죠. 그래서 화장실 데려가서 등도 한참 뚜들겨 주고, 방 치우고, 옷도 갈아 입히고, 옷에도 다 묻었거든요, 그거 대충 빨아 놓고, 나도 정말 착한 후배죠? 이부자리 깔고 눕혀 놓고 했더니 벌써 새벽 두 시? 세 시였나? 그쯤 됐어요. 전철도 버스도 옛날에 끊어지고 택시밖에 없는데, 지갑 보니까, 아까 그 술값을 내가 냈거든요, 딱 천 이 백 원 있더라구요. 학교에서 우리 집까지 만 원 넘게 나오는데.
-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 그냥 그 형 방에서 같이 잤죠 뭐.
여자는 웃으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남자의 목에 팔을 두르려 했다.
- 그래서, 그게 끝이야? 어머!
여자는 갑자기 자신의 팔을 탁, 쳤다.
- 왜요?
- 뭐가 물려구 그랬어. 방에 모기 있나봐.
- 여관이 다 그렇죠 뭐. 물렸어요?
- 모르겠어. 나 모기 딱 질색인데.
- 이불 덮어요, 그럼.
- 더워.
- 에어컨 좀 더 세게 틀게요.
남자는 알몸으로 일어나서 에어컨의 스위치를 '강'으로 맞췄다. 위잉, 소리와 함께 찬바람이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 어이, 써늘하네.
남자는 과장되게 추운 시늉을 하며 이불 속으로 뛰어들어 여자를 껴안았다. 여자는 깔깔 웃으며 남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한동안 두 혀와 입술이 진한 사랑을 나누고 나서 남자가 다시 말을 꺼냈다.
- 아, 참, 근데 말예요.
- 그 얘기 아직도 안 끝났어? 우리 딴 거 하자.
여자는 남자에게 몸을 바투 붙이고 남자의 단단한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불쌍한 얼굴을 지어 보이며 여자의 매끄러운 등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 아 좀 들어 줘요, 난 열심히 말하구 있는데.
- 알았어, 알았어. 얘기해.
여자가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양보했다. 남자는 여자의 어깨와 등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말을 시작했다.
- 다음날 아침에요. 내가 라면까지 끓여 가지구 그 형을 깨워서 같이 먹었거든요? 이 형이 암말두 안 하구 내내 라면만 열심히 먹더니, 담배를 한 대 딱 피워 물고는, 세상 다 산 사람처럼, 그래…, 너도 분명히 어제 내 여자친구 본 적 없다고 그랬지, 그러는 거예요.
- 그래서?
- 그 형이 너무 심각해서, 또 무슨 대답 잘못 했다간 뜨거운 라면 냄비 다 뒤집어  엎을 것 같아서 가만있었죠.
여자는 웃으며 남자의 볼을 토닥토닥 만져주었다.
- 잘 했어. 중요한 부분 데면 안 되지.
남자도 같이 웃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 이 형이 그러더니 아무 말도 안 하구, 난 그 때까지 라면 먹고 있었거든요? 내가 다 먹을 때까지 담배만 피우면서 한 마디도 안하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다 먹구 치우고, 그만 가려고 그랬더니 내 팔을 딱 잡으면서, 진짜 심각하게, 너, 내 얘기 좀 들어줄 수 있냐? 이러더라구요.
- 그래서?
- 학교 가야 된다구 말을 하려구 그랬는데, 얼굴 딱 보니까 너무 심각해서 나 그냥 가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예, 그러구 주저앉았죠.
- 그래서? 뭐래?
여자는 근육이 제법 솟은 남자의 가슴과 조그마한 젖꼭지를 조물락 조물락 주무르고 있었다. 남자는 손을 여자의 엉덩이로 옮기며 말을 이었다.
- 또 담배만 피우면서 한 마디도 안 하고 있더니, 한 십 분쯤 그러구 앉았다가 하는 말이, 너 진짜 내 여자친구 본 적 없냐? 이러더라구요.
- 없다구 그랬다며.
- 예. 나도 좀 화가 났죠. 학교도 못 가고 붙잡혀서 또 그 얘긴가, 이 형이 아무래도 술이 덜 깼구나 싶어서, 슬슬 빠져나가서 수업 들어갈 궁리를 하고 있는데, 형이 얘기를 시작하더라구요. 너 내 얘기 들으면 이 사람 미쳤구나 싶을 거다, 그래도 들어줄래? 이러는 거예요.
- 그래서?
- 뭐, 어쩌겠어요. 얘기해 보라구 그랬죠. 궁금하기도 하구.
- 그래서? 뭐래?
- 그 형 말이, 작년 이맘때쯤 그 문제의 여자친구를 만났대요. 진짜 영화처럼 우연히 만났대요. 누구 만나러 어떤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가다가, 그 때 그 여자친구는 거기서 나오고 있어서, 부딪쳤다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들었는데 눈 딱 마주친 순간 홀랑 반해 버렸대요. 멋있죠?
- 이야, 진짜 낭만적이다.
여자는 편편하고 단단한 남자의 배를 어루만지며 감탄했다.
- 그래서 그 길로 쫓아가서 자기 전화번호 주고 도망쳐 나와서, 다음날 하루종일 기다렸는데, 전화가 안 오더래요. 그래서 끝장이다, 차였구나, 그러구 실망하고 있는데, 사흘 뒤에 전화가 왔대요. 그렇게 해서 다시 만나서 차 마시고 얘기하고 밥 먹고, 저녁때 헤어질 때 용감하게 전 그쪽한테 첫눈에 반했습니다, 저랑 사귀실래요, 그랬더니 그 아가씨가 웃으면서 끄덕끄덕 하더래요. 그래서 사귀게 됐대요.
- 그래? 잘 됐네. 그래서?
여자는 슬슬 지루해지는 표정으로 몸을 돌려 침대 옆 탁자 위의 담배를 다시 뒤적거렸다. 남자는 조금 초조해져서 열심히 말을 이었다.
- 그 여자친구는 S여대 다니는 학생이었구, 나이는 형보다 세 살 아래구, 그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었대요. 그래서 그 형, 그 커피숍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맨날맨날 가서 커피도 수십 잔 마셔 주고, 일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고, 집까지 데려다 주고, 그 아가씨 친구들한테도 밥도 사 주고, 그 아가씨도 형 친구들이랑 같이 밥도 먹었고 술도 마셨고, 형 친구들도 만나본 사람들은 다 그 아가씨 정말 이쁘고 성격도 좋고 똑똑하고 괜찮다고 그랬대요. 그리고 나도 그렇게 해서 그 아가씨랑 같이 밥도 먹었고 술도 먹었다는 거예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인가 세 번인가 그랬다는 거예요. 내가 그 형이랑 좀 친하니까.
- 넌 그 아가씨 기억이 안 난다며?
여자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며 물었다.
- 예. 어쨌든 형이 그랬다니까 가만히 있었죠. 또 뒤집어 엎으면 어떡해요?
- 뭐 하여간. 그래서?
여자는 후,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다시 물었다.
- 그렇게 6개월쯤 사귀었대요. 사귀면서 한 번도 싸운 적도 없구, 그 형도 그 아가씨한테 정말정말 잘 해 줬구, 그 아가씨도 형을 굉장히 좋아했대요. 그 형은 그 아가씨 사귀면서 너무 행복해서 정말 인연을 만났구나, 평생 같이 살아야겠다, 이런 생각까지 했대요. 하여간 그렇게 좋아했는데….
남자는 의미 심장하게 말을 멈췄다.
- 좋아했는데?
여자는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며 물었다.
- 어느 날 둘이 같이 디비디방엘 갔대요. 한 반쯤 보다가 이 아가씨가 잠깐 화장실 갔다 오겠다고 나갔대요. 근데 그 길로 없어졌다는 거예요.
- 화장실에 빠졌냐?
여자는 피식 웃으며 말하고는 다시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 아뇨, 장난 아니구 진짜루, 오 분 지나구 십 분 지나구 영화 다 끝날 때까지 안 들어오더라는 거예요.
- 그 형이라는 사람이 이상한 짓 한 거 아냐?
여자는 담배 연기를 후, 뿜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 이상한 짓이요?
- 디비디방 갔다며. 순진한 여자애한테 수상한 짓 하려고 그런 거 아냐? 그러니까 여자가 화가 나서 뛰쳐나가 버리고 다신 안 만나 주는 거고?
- 에이, 그건 아니에요. 뒷얘기까지 다 좀 들어 봐요.
- 그게 맞는 것 같네 뭐. 그러구선 자기가 창피하니까 남들한테는 여자친구가 없어졌네 뭐네 꾸며댄 거고.
- 아니라니까요. 끝까지 좀 들어보라구요.
남자는 조금 화를 냈다. 여자는 남자의 어깨와 팔을 쓰다듬으며 달랬다.
- 알았어, 알았어. 계속해 봐.
남자는 마음이 풀어져서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여자가 화장실 간다고 나가서 안 들어왔다는 데까지 했죠?
- 응.
여자는 열심히 이야기하는 남자가 귀엽다는 듯 웃음을 참으며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 그 사람은 그래서 영화 끝날 때까지 멀거니 기다리고만 있었대?
- 아뇨, 나가서 화장실에 가서 찾아봤죠.
- 남자가 여자 화장실엘 들어갔단 말야?
- 아뇨, 밖에서 불렀대요. 근데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서, 마침 안에서 나오는 사람이 있어서 물어봤대요. 안에 이렇게 저렇게 생긴 아가씨 없냐구. 그랬더니 안에 아무도 없다구 그러더래요.
- 그래서?
- 다시 들어가서 디비디방 주인 아줌마한테 물어봤대요. 자기랑 같이 온 여자친구 못 봤냐구. 그랬더니 대답이, 학생 혼자 오지 않았냐구 그러더라는 거예요.
- 야…. 나 무서워.
여자는 표정이 변했다. 피우던 담배를 황급히 비벼 끄고 남자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감싸 안고 쓰다듬어 주면서 말을 이었다.
- 무섭죠? 이 형이 처음에는 아줌마가 잘못 안 줄 알구, 나 몇 번 방에 들어갔던 사람인데 여자친구랑 같이 왔다, 근데 여자친구가 영화 보다 말구 화장실 간다구 나가서 안 들어온다, 혹시 어디 가는지 못 봤냐, 그렇게 차근차근 물어봤대요. 그랬더니 이 아줌마가 몇 번 방에 손님 누구 들어가고 그거 체크한 걸 보여주는데, 분명히 사람 수 한 명, 돈도 한 사람 것만 받은 걸로 돼 있었다는 거예요.
- 야…, 그만 해, 무섭다니까…. 진짜 공포영화다….
여자는 정말 겁먹은 듯 표정이 굳어졌다. 남자는 뜻밖의 효과에 만족해하면서 무서워하는 여자를 꼭 끌어안고 열심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이 형이 기억하기로는 분명히 영화도 여자친구가 골랐고, 아줌마가 아가씨 그거 새로 들어온 거라서 요즘 제일 잘 나가는 거예요, 진짜 재밌대요, 어쩌고 참견하는 것도 들었다는데, 아줌마는 그런 적이 없다는 거예요. 형이 혼자 와서 그걸 볼까 말까 하길래, 그거 재밌다고 추천해 줬더니, 그걸로 보겠다고 그러고 돈 내고, 혼자 들어가서 봤다는 거예요. 그 시간에 사람이 몇 명 없었고 특이하게 남자 혼자 와서 또 그 때 제일 잘 나가는 영화를 골라서 틀림없이 기억한다고 그 아줌마가 그랬다는 거예요.
- 야…, 정말 그만 해…. 나 진짜 무서워….
여자는 몸을 살짝 떨며 남자에게 깊이 안겼다. 남자는 여자를 꼭 감싸 안으며 말을 이었다.
- 그래서 그 형이 나와서 여자친구 핸드폰에다 전화를 했는데, 그런 번호 없다고 그러더래요. 집에다 전화해도 엉뚱한 사람이 받아서 그런 사람 안 산다고 그러고, 직접 찾아가 봤는데 그런 사람 안 산다고 딴 사람이 나와서 막 화를 내더래요. 여자친구가 일하던 커피숍에도 가 봤는데, 그 전날까지도 멀쩡하게 여자친구랑 같이 일하던 주인이랑 아르바이트생들도 다 그런 사람 모른다고 그러더래요. 학교에도 찾아가 보고 그 아가씨 친구들한테도 연락해 봤는데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기억을 못 하더래요.
여자는 남자의 품에서 조금 빠져 나와 고개를 들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 너, 그거 다 정말이야?
- 예, 정말이에요. 그 형이 그랬다니까요.
여자는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남자 품에 파고들면서 중얼거렸다.
- 진짜 이상하다….
- 그쵸? 이 형이 그 여자친구를 한 석 달 동안 찾아다녔는데, 분명히 그 아가씨가 그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런 사람 안 산다고 그러고, 학교에 쫓아가서 과사무실이랑 학적과까지 가 봤는데 그런 학생 없다고 그러고, 여자친구랑 같이 밥 먹고 술 마셨던 친구들한테도 물어봤는데 너 여자친구 없잖아, 무슨 소리야, 이러더라는 거예요. 다들 그런 사람 자체가 없었다고 하더라는 거예요.
- 그래서, 어떻게 했대?
여자는 이제 남자에게 바짝 안겨서,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며 남자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었다. 남자는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 한 석 달쯤 그러고 나니까, 이제는 형도 내가 정말 여자친구를 사귀었나, 진짜 그런 사람이 있었나, 내가 이상한 건가, 그런 생각이 들더래요.
- 증거물 같은 거 없었대? 사진이나 선물 같은 거?
여자는 완전히 열중하여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 사진 같이 찍은 게 분명히 있었는데, 찾아보니까 하나도 없더래요. 연락처 적어놓은 것도 다 있는데 그 여자친구 것만 없고, 선물 받은 건 있긴 있는데, 친구들한테 이게 그 여자친구가 준거다, 나 분명히 여자친구 있었다, 너희들 왜 기억 못 하냐, 그랬더니 딴 사람들이 막 나서서 그거 내가 사 준 건데, 너 그거 어디 어디서 받았잖아, 그거 네가 직접 어디 가서 언제 산 거잖아, 이러더라는 거예요.
- 진짜 이상하네…. 그래서? 어떻게 됐대?
- 그 형이 나보구, 넌 나한테 거짓말하거나 날 놀려먹을 애가 아닌데 내 여자친구 모르는 걸 보면 그런 애가 정말 없었나보다, 이러더니, 담배 피우면서 또 한참 말이 없어요. 그래서 얘기 다 끝났나보다 하구 있는데, 그 형이 그래요. 그 여자친구도 너무나 보고 싶고, 사귀면서 같이 돌아다니고 같이 놀고 서로 좋아하던 그 때가 너무나 그립고, 그런 것도 괴로운데, 무엇보다도, 내가 그 사람을 정말 사귀었나, 그런 사람이 정말 존재했나, 그런 걸 의심하게 된 게 괴롭대요.
- 음….
- 자기는 정말 마음을 다해서 사랑했는데, 최소한 그 때는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 사랑의 증거가 아무 것도 안 남아 있잖아요, 형이 기억하는 거 빼고는. 근데 다른 사람들 하는 말을 들으면 그 형은 자기 기억까지 의심스럽다는 거예요. 그게 제일 괴롭대요.
- 음….
여자는 뭔가 깊이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 공포 영화로 시작하더니 뭔가 엄청 철학적으로 끝나네.
- 쫌 그렇죠?
남자는 웃었다. 여자도 마주보며 웃었다.
- 그래서 그 형이란 사람, 여자친구 아직도 찾고 있대?
- 지금도 찾고는 싶은가봐요. 그렇지만 거의 포기한 것 같아요. 잘못하다간 자기까지 정신병자 될 것 같으니까.
- 진짜 이상하다…. 그 사람이 지어낸 얘기는 아니구?
- 에이, 그 형 그럴 사람 아니에요.
- 신기하다…. 그런 소설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수가 있구나….
- 그쵸, 신기하죠?
여자는 한동안 신기해하며 남자의 품에 안겨 있다가 불쑥 물었다.
- 궁금하다, 그 여자친구란 사람. 실제로 있었을까?
- 모르죠 뭐.
다시 둘은 서로 껴안은 상태로 각자 궁금해하고 있다가, 이번에는 남자가 불쑥 물었다.
- 누나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 뭘?
- 내가 그렇게 갑자기 없어지면요.
- 찾아 다녀야지.
- 찾아도 없으면요?
- 포기하고 딴 남자 찾아 봐야지.
- 에이…. 정말 그럴 거예요?
- 너 없어질 예정이야?
- 아뇨. 그냥 말이 그렇다는 얘기죠.
여자는 피식 웃었다.
- 너 찾기는 쉬울 거야.
- 왜요?
- 서울 시내 게임방만 다 뒤지면 되지 뭐.
남자도 피식 웃었다.
- 서울 말고 딴 데로 가면요?
- 어쨌든 넌 게임방, 당구장, 만화방 없이는 못 살잖아. 그런 데만 뒤지면 나타나겠지 뭐.
- 그럼 누난 나 없어지면 전국 게임방이랑 당구장이랑 만화방 다 뒤져서 나 찾을  거예요? 감동적이네.
- 나도 말이 그렇다는 얘기야. 어떻게 전국을 찾아다니냐.
- 에이, 말이라도 찾아다닌다고 해 봐요.
남자는 여자를 끌어당겨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여자는 웃으며 다시 남자에게 물었다.
- 넌 내가 없어지면 어떡할 건데?
- 나두 찾아 봐야죠.
- 어떻게?
- 음…, 서울 시내 분식집. 누난 떡볶이 없이는 못 살잖아요?
- 내가 돼진 줄 알어….
여자는 남자를 흘겨보며 가볍게 가슴을 꼬집었다. 그리고 둘은 서로 마주보며 빙긋 웃었다. 없어지면 안 돼, 하고 여자는 남자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안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남자도 여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입술이 맞닿고 혀가 뒤엉켰다. 그렇게 입맞춤하면서 곧 둘은 몸을 맞대고 부비기 시작했다. 뜨겁게 살을 섞는 그들의 머리 위로 누군가의 여자친구가 사라져 버렸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는 곧 에어컨 바람의 윙윙 소리에 섞여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밤.
남자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기척을 살피며 살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침대에서 소리 없이 빠져 나와 옷을 입기 시작했다. 팬티와 브라를 입고 티셔츠를 입었다. 청바지를 집어들고 발을 들이미는데 남자가 부스럭거렸다.
여자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 누나…?
남자가 반쯤 잠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응?
- 누나…. 뭐해요?
- 화장실 가.
- 으응…. 빨리 와요….
그리고 남자는 돌아누워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여자는 바지를 마저 입었다. 일어나서 머리를 조금 매만지고 가방을 집어들었다. 조심스럽게 신발을 신고 방문을 살짝 열었다.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여자는 주황색 조명이 어스름하게 비추고 있는 여관 복도로 걸어나왔다. 동그란 등불이 일정한 간격으로 간신히 매달려 있는 벽을 따라 불그스름한 불빛이 어둑신하게 드리워져 있는 바닥을 지나가는 여자에게는 그림자가 없었다. 검붉은 카펫이 폭신하게 깔린 복도를 따라 천천히, 소리 없이 걷다가 여자는 한 번, 자신이 방금 나온 방, 남자가 아직 아무 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방 쪽을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여자는 다시 그림자 없는 발걸음을 옮겨, 어둡고 캄캄한 복도 끝으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FR
댓글 2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197 단편 비엔나4 손지상 2008.10.30 0
1196 단편 한 발 내딛기1 라티 2008.10.29 0
1195 단편 추적자7 롤랜드 2008.10.27 0
1194 단편 광자력 빔의 사용승인4 김몽 2008.10.25 0
1193 단편 어느 젊은 여자 C3 청람 2008.10.19 0
1192 단편 멸망한 짐승들의 왕국 Mothman 2008.10.15 0
1191 단편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시네2 라티 2008.10.14 0
1190 단편 어느날 갑자기 누혜 2008.10.14 0
1189 단편 백미러를 부수는 여자 흰새 2008.10.08 0
1188 단편 殺犬의 추억 VANS 2008.10.03 0
1187 단편 권력 상실3 니그라토 2008.10.01 0
1186 단편 몽유의식 니그라토 2008.09.30 0
1185 단편 가슴에 꽃 한 송이 줏어듣기 2008.09.28 0
1184 단편 신이여, 마법이여, 안녕히 잠드소서2 볼티 2008.09.23 0
단편 실종2 FR 2008.09.22 0
1182 단편 운전수 야키 2008.09.19 0
1181 단편 집(고쳐 썼습니다. Thanx 2 겨울맥주님)3 DOSKHARAAS 2008.09.18 0
1180 단편 녹색 거인(Green Giant)1 나길글길 2008.09.16 0
1179 단편 대통령 항문에 사보타지7 dcdc 2008.09.14 0
1178 단편 [번역] 공상가 (The Dreamer) - 사키1 사은 2008.09.14 0
Prev 1 ... 83 84 85 86 87 88 89 90 91 92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