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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이단심판관

2008.11.17 12:5811.17

이단심판관


집정관은 진공 내부의 에너지 준위 차이를 이용해서 존재했다. 일반 물질도 특수한 진공이기에 집정관은 그것에도 존재를 의탁하면서 살았다. 아직 우주에 에너지가 풍부한 시기이기에 인류가 이 같은 형태를 취할 필요는 없었다. 누가 어째서 그러고 사느냐고 물어보면, 집정관은 우주가 열적 죽음에 이르러도 살 수 있는 형태를 취함으로서 미래에도 모두가 흩어지면서 살아가는 법을 연구하는 것이라 했다. 블랙홀 근방에 웅거하는 집정관은 드넓은 은하 내 영역을 세심한 전자기 촉수로 검색했다. 법이 침해된 걸 알았다. 집정관은 법을 어긴 존재를 수배하고, 그곳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심판관에게 체포를 명령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도킹을 허용하라!”
심판관은 전파로 범법자에게 일갈했다. 심판관은 감마 레이저와 준광속 물질 빔과 레일 건을 쏘면서 추적했다. 한 방에 우주 렘제트 엔진이, 또 한 방에 궤도 엘리베이터가, 또 한 방에 원반이 손실을 입었다. 기계 더미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던 범법자는 부속물들이 계속 파괴되자 구상성단 한복판에서 도주를 포기했다. 지름 1만 3000km의 범법자의 거대한 구형 우주선은 표면이 초록빛인 살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범법자의 야릿한 고기 우주선에, 심판관의 금속 덩어리 지름 430km의 우주선이 표면에 떠서 기다란 막대로 파고들었다. 범법자가 빛으로 말했다.
“난 그저 성매매를 주선했을 뿐이다.”
“성매매가 합법이 되려면 성노동자가 자발적으로 위험 없이 임해야 한다. 지금까지 종합된 정보에 따르면, 넌 그 두 가지 원칙을 어겼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어겼는지 알아보겠다. 도킹을 하겠다.”
심판관의 우주선에서 범법자의 우주선 내부로 심판관이 이동했다.
배지를 옷 위에 찬 심판관은 20세기에 플레이보이지 모델용으로나 쓰였을 법한 모에 화된 보안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늘씬하고 아름다운 젊은 여자의 모습인 심판관의 가슴은 깊게 패였고, 사타구니만 도려낸 청바지의 허벅다리 사이로 가터벨트와 비키니 팬티가 드러났으며, 롱부츠를 길게 신었다. 심판관에게 모습을 드러낸 범법자는 땅딸막한 몸에 대머리에 하얀 가운을 입었는데 안경 알 너머로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둘은 서로의 코스튬을 보고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이렇듯 옛 인류 스타일로 모습을 꾸민 것은 컨트롤러로 움직이는 탐색용 로봇일 뿐이고, 본체는 두 거대한 우주선을 충실히 채울 정도였다. 기계와 결합되어 확장된 정신은 우주선 자체를 본체로 삼아야 할 만큼 영향력이 강했다. 심판관이 말했다.
“몇 년생이신가?”
“1991년생이라네.”
“동갑이군. 봐주지 않을 테니 각오해. 검사를 시작하겠다.”
“하나만 묻지. 남자로 태어났나, 여자로 태어났나.”
“남자. 너도 남자로 태어났다고 알고 있다. 너 같은 짓은 난 결코 하지 않아.”
“난 자네를 여러모로 설득하고 싶군.”
범법자는 우주선 전체를 흔들었다. 범법자의 우주선에 이어진 심판관의 우주선은 그에 보조를 맞춰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면서 안정을 잃지 않았다. 심판관이 말했다.
“무슨 짓이냐? 공무집행 방해죄 추가할까?”
“허허, 실수다.”
요동이 멈췄다. 범법자가 심판관의 적갈색 매끄러운 살결과 구불구불한 금발을 힐끔힐끔 보면서 말했다.
“칵테일이라도 한 잔 할까?”
“싫다. 난 여자를 좋아한다.”
다리로 범법자는 심판관을 안내했다. 심판관의 우주선은 채취하고 분석하면서 범법자의 정보를 담아가고 있는 와중이었다. 즉 속임수는 쉽지 않았다. 1조의 인간들의 인권을 유린해온 범법자가 말했다.
“어째서 우주에서조차 자네 같은 이들이 있는 건가? 왜 법으로 사람들을 구속하고 다니는 이들이, 전 은하계로 인류가 퍼진 상황에서조차 존재하느냔 말이야. 난 우주로 인간이 나가면 완벽한 자유가 기다릴 거라고 믿었다. 어느 한 사람이 자유하려면, 다른 이의 자유는 그만치 억압된다. 즉 자유는 권력이고, 특정 이권을 둘러싼 자유는 독점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더욱 패권적일 수밖에 없지. 그 누가 우주선을 지배하는 자의 자유를 흠집 낼 수 있게 될 거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너는 왜 남의 자유를 해치는 거냐?”
“자유가 정녕 권력이라면, 난 아무 생각 없이 널 해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난 원칙에 따라서 움직인다. 누군가를 붙잡고 처단하여 억압하고 감금하는 건 결국 사상의 문제지. 내가 동의하는 사상을 가진 이가 많다면 이는 힘이 되고 그것으로 너 같은 말종을 누른다.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 범죄로 취급되는 일의 종류는 다양해서 어떤 시대나 어떤 경우에는 살인이 죄가 아니었다. 또한 물질의 측면만으로 본다면 어떤 일도 죄는 아니야. 고로 범죄는 사상의 문제기에, 난 이단 심판관으로 불린다. 일정한 선에 맞춰 뭔가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는 너 같은 작자들을 심판하는, 특정 세력의 이익에 봉사하는 집단이라는 뜻이지.”
“우주의 기축통화인 에너지를 듬뿍 주겠어.”
“뇌물수수죄 추가다. 엇? 네 놈, 내게 무슨 짓을 시도하는 거냐?”
전파로 의사소통을 하던 와중에, 범법자는 심판관의 정신에 접근해서 해킹을 시도했다. 범법자는 자신의 살덩어리 본체에 맞닿아 있는 심판관의 우주선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 지구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인류의 권력은 정신을 끊임없이 증대시켜 왔다. 정신은 물질로서 존재하는 것이기에 증폭시킬 수가 있었다. 정신을 변혁하는 방법을 계속 구입하고, 나름대로 개선시켜 왔던 범법자는 정신 개조에 자신이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넌 스스로 심판관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건 내가 마련한 역할 놀이일 뿐이다. 넌 애초부터 내 딸로서 존재해왔다.”
심판관은 멈춰 섰다. 심판관의 정신이 조작되고 있었다. 범법자는 계속 말했다.
“난 수많은 인간을 여러 경로로 만들어 마음대로 정신을 불어 넣어 왔다. 내 취향은, 열심히 살면서도 언제든 내 말을 따라 희열로서 복종하면서 심지어 자살을 열렬히 원할 수도 있는 인형이었다. 의식은 물론 세포 하나하나까지도 그때엔 내 말에 따라 자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네가 어디에서 왔든 아니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든 이는 내가 조작한 바다. 아니 네가 설령 나로부터 기원한 것이 아니라 한들 내 말에 따라 자살한다면 이는 차이가 없는 일이다. 내 뜻을 따르라.”
심판관의 우주선에서 감각기관인 각종 정보 수용 매체들이 더욱 강력하게 활동했다. 심판관은 그렇게 해서 정신의 범위를 넓히려고 했다. 종교라는 미몽에 빠져 있던 시절은, 정신을 과학적 방법으로 증대시킬 수 없었던 시기였다. 물리학과 인격 공학이 결합하면서 인간 정신은 우주적으로 뻗어나갔다.
“이런 실패했군.”
범법자는 정신 장악이 실패하자 다리 난간에 쭈그리고 앉았다.
“공무집행 방해죄 추가다.”
다리 아래로 살이 벌어지면서 범법자가 지금껏 운영해온 매음굴의 윤곽이 드러났다. 온갖 방식으로 형태로 육체가 개조된 인간들이 촉수에 둘러싸여 쾌락에 울부짖었다. 범법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취향에 어울린다면 어떤 형상이든 구현했다. 그들의 성적 기억을 파편화시키고 다양한 관점으로도 만들어 내다 팔아서 범법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사들이고 살았다. 범법자는 다리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들은 이곳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지금 상태로야 그렇겠지. 하지만 그건 상황 개선 여부에 달렸다. 인류라면 누구에게나 우주선을 타고 은하계를 쏘다닐 권리가 있다.”
“저들을 인류라고 보는가? 저들은 언제든 자살을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부터 열렬히 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저들에게 죽을 권리를 줘야 하지 않나?”
심판관은 범법자가 준 자료를 검색하고 판독했다.
“자살을 세포 내 조직 단위에서부터 단숨에 구동시킬 수 있도록 해놓았군.”
“그렇다. 의식 또한 이를 원하고 나에게 복종하는 걸 더 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이는 종교적 법열의 수준이다. 복종을 강렬히 원한다면 허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주입하여 제공한 선택지가 너무 좁았다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입당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나? 나 또한 1991년에 태어나서 내가 갖게 된 취향들도 결국 인과율에 따라 주입당한 게 아니고 뭔가. 이곳은 모든 가능한 것이 가능한 우주다. 내가 행한 행위들도 결국 가능하기에 했을 뿐이다. 원한다면 너에게 내 매음굴의 50%를 주겠다.”
“우주는 진화된 생물을 허용했고, 진화에서 살아남은 생물은 다들 살려고 한다. 인류의 모든 세포들은 전체적으로 살려고 한다. 자살은 고로 악이다. 그리고 인류의 법도는 이기주의의 일종인 이타주의가 집단에겐 이롭다는 진실 위에 세워져야 한다. 너는 그 두 가지 법도를 어겼다.”
범법자는 심판관에 의해 정신을 봉쇄당하고, 자신의 몸에 갇혀 구상성단을 영원히 헤메는 처지가 되었다. 심판관은 자신이 규정한 주관적 악을 행하는 이들을 붙잡고 다니는 이 일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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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6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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