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평화를 전하는 방문자들

  그들은 따스하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봄날 정오에 모두가 깜짝 놀라는 걸 보고 싶어서인지 갑작스럽게 방문했다.

  온난화 탓인지 4월 중순의 일주일 평균 온도가 평년보다 조금 높았지만 미풍이 솔솔 부는 날씨는 상쾌했고, 주가는 전 세계적으로 소폭 상승, 환율도 전체적으로 안정세였다. 업무 능률은 수월한 편이었고, 도중에 가지는 휴식 시간에 잡담을 하는 동료들의 화제는 TV 드라마나 국내외 스포츠에 관련되는 등, 평소나 다름없었다. 혀에 닿는 녹차와 커피 맛은 쓰지도, 달지도 않고 부드럽고, 목 넘김은 연한 젤리가 넘어가는 것 같았다.

  정오까지만 해도 여느 날처럼 조용한데다가 평화로운 날이었다. 지구 어디에선가는 오늘도 총탄이 날아다니고, 피를 흘리는 싸움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주위는 조용했다.

  낮 12시가 가까워지자 사람들은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있지 못하고 오늘은 뭘 먹을지 고민한다. 속이 든든하게 밥을 나오는 메뉴로 배를 채우느냐, 간단하게 먹기 편한 걸로 때우느냐는 결정이 힘든 고민이었다. 그러다가 대개는 동료들과 가까이 있는 식당으로 향하기 마련이다.
  
  정오경이 되어서 무심코 뉴스 채널을 돌린 사람들의 눈이 야구공 만해졌고, 입도 살짝 벌려졌다. 전 세계로 TV와 인터넷, 라디오 등을 통해서 긴급한 속보가 전해지고 있었다. UFO 한 대가 구름을 뚫고 태평양 한가운데 상공에 나타났다는 소식이었다. 최초 발견자는 근처에서 고기를 잡던 어선의 어부들이었다고 한다. 60억 인류는 모든 행동을 멈추고 TV와 라디오에 눈과 귀를 집중 시켰다.

  너비 9km, 높이 3km의 중형급 UFO는 나타난 지 40분 뒤인 12시 40분에 근방 해군기지에서 달려온 미 해군 함정이 촬영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이 전송한 사진과 영상 속보에 드러난 UFO는 지금까지와는 180° 달랐다. 이전의 사진과 영상은 구름에라도 싸인 듯이 맨눈으로는 판독과 진위여부가 힘든 흐릿한 점 같은 UFO만 나타나 있었지만 이번에는 표면의 무늬까지 맨눈으로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데다가, 모두 고화질이었다.

  미 해군에 의하면 이 비행물체는 느리지만 서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렸다. UFO와 가장 가까이 있는 국가인 일본에서는 UFO의 서진(西進)에 불안감이 증폭되기 시작됐다.

  일본 국회에서는 급하게 표결에 부친 결과 만장일치로 자위권 예비 발동권을 통과시켜서 공자대(空自隊)와 해자대(海自隊)에 대기 비상을 걸고, 간토 동쪽 바다에 순찰선과 정찰기를 띄워서 하늘과 바다를 정찰하게 했고, 우주에서는 감시 위성이 눈을 태평양 쪽에 두어서 UFO의 진로 탐색과 만약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긴급 사태에 대비하였다. 육자대(陸自隊)는 경찰과 협력하여 국내 질서 확립 임무에 투입되었다.

  한편 일본 국민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어져 있었다. UFO는 평화의 사도이며, 친구가 되고 싶어서 왔다는 쪽과 UFO는 파괴자이며, 부숴야 할 적이라는 쪽이었다. 비단 일본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지구상의 사람들이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친구라는 쪽은 우리는 당신들을 환영한다는 피켓과 현수막, 폭죽 등을 들고 간토 쪽으로 가서 요란하게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환영 준비를 시작했다. 반대로 적이라는 쪽은 맞서 싸울 준비를 모색하거나 비상식량을 마련해서 지하 대피소로 머리부터 디밀었다. 슈퍼마켓이며 할인점, 백화점에 진열된 장기 유통이 가능한 보존식(保存食) 및 대량의 식량들이 순식간에 바닥을 보였고, 재고도 순식간에 동이 나면서 가격이 폭등했다. 하루 만에 일본 정부가 상황 조절을 위해 개입 의사를 밝혔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한편 일본과 횡으로 일직선상에 있는 대한민국과 중국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해안가에 대공포와 미사일을 집중시키고, 해․공군에 비상을 걸었다. 주한미군과 주일미군도 대비를 하면서 총사령관이 적이 적인만큼 직접 본국에 병력과 무기 지원 요청까지 해놓았다.

  세 나라가 국가적으로 그렇게 긴밀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일본 다음으로 UFO와 가까운 대한민국과 그 너머의 중국의 국민들도 일본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역시 환영의 피켓과 현수막을 들고 해안가에 모여들고 있는 인파(人波)도 있었고, 싸우겠다며 의지를 불태우는 사람과 도망부터 갈 준비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세 나라의 TV에서는 의견이 둘로 나뉜 사람들이 며칠 동안 오전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끝없는 논쟁을 벌였다.

  이틀 후 오후가 되었을 무렵에 UFO는 간토 해안에서 600km 떨어진 곳까지 왔다는 속보가 전해졌다. 그리고 천천히 이지만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서진(西進) 4일 째가 되었다.

  UFO는 속력을 붙여서 오전 11시 경에 간토 동남쪽 지방에 상륙했다.
  
  해변에 모인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지만 UFO는 그냥 지나쳤다. 자위대 쪽에서 교신을 계속 시도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통제실에 있는 여럿 통신사들의 얼굴빛은 ‘적’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상급 장교의 명령에 따라 ‘UFO는 우리의 친구’ 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비난과 욕설에도 불구하고 공자대 전투기 한 대가 미사일을 쏴봤지만 무언가에 막힌 듯이 UFO에는 닿지도 않고 터져버렸다.

  UFO는 그대로 도쿄만을 가로질러서 계속 서쪽으로 향했다. 교토 부근을 지나칠 즈음에는 더 속도를 붙여서 전진하여 오후 5시 경에는 대한민국 부산 앞바다를 스치듯이 지나치고 여수 앞바다를 지나서 불과 1시간여 만에 제주도 제주시 앞바다를 지나쳤다.

  제주도 서쪽 끝에서 2시간 동안 멈춘 UFO는 오후 8시 경에 다시 전진을 시작, 오후 12시 경에 중국 장쑤성 앞바다에 닿을 수 있었다.

  UFO는 그 장소에서 1시간을 머물러 있었다. 정지한 지 45분 만에 중국 측에서 대량의 미사일을 발사하여 UFO를 격추시키려고 했으나 보이지 않는 막에 가로 막혀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는 일본 공자대의 행동과 함께 전 세계의 UFO 우호 세력에게 큰 비난을 샀다.

  정확히 2시간 후에 UFO는 재가동을 시작했고 진로를 약간 아래로 틀어서 중국 내륙을 횡단하기 시작했다.

  서진 6일, 착륙 0일 째가 되었다.

  UFO는 속도가 점차 빨라져서 티베트 지역을 지나치고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는 네팔까지 이틀이 걸렸다. 뉴스에서 전문가들은 지금으로서는 UFO의 목표가 전혀 밝혀지지 않았고, 알 수도 없지만 진행방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간다면 이삼일 내에 히말라야 산맥에 도달할거라고 말하였다.

  각 나라들이 첨단 기기를 동원하여 교신을 시도했지만 연결은 전혀 되지 않았다. 세계의 아마추어 무선 통신사들도 각자 기량을 총동원하여 UFO와 우호적인 이야기를 해보려고 했지만 단단하고 높은 벽에 가로막힌 듯이 모든 전파는 도달하지 않았다.

  에베레스트를 몇 km 남겨두고 느린 속도로 상승하기 시작한 UFO는 자정 12시를 몇 초 남겨두고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멈춰 섰다. 더 움직이지 않게 되자 밖에서 보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떠받쳐지고 있는 듯이 정상에서 수m 떠 있는 형태였다. 전문가들은 반중력(反重力) 엔진의 영향이라고 말하였다.

  유럽의 어떤 지질학자는 그 위치에서 초과학력이라도 사용해서 아시아 판을 건드린다면 유례없는 대재앙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여서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주었지만 UFO에서는 며칠 동안 아무 반응도 없었다. 착륙한 날짜부터 카트만두로 세계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착륙 5일 째가 되었다.

  카트만두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UFO를 환영하는 사람들과 호기심으로 모인 사람들로 북적거려서 때 아닌 UFO 특수를 맞이하고 있었다. 몇몇 산악인들은 인류 대표라면서 UFO가 있는 에베레스트를 향해 등정을 시작했다. 그들을 산 밑에서 응원하는 사람들의 열기는 히말라야의 만년설을 녹여버릴 듯 했다.

  전 세계의 방송국은 특종을 잡기 위해서 헬기며 비행기며 있는 대로 동원하여 취재에 나섰고, 지상에서도 총력을 동원하여 교신을 계속 시도했다. 주변국들은 전투기 및 정찰기로 UFO 감시에 나섰고, 미국은 이를 핑계로 벵골만에 항공모함 1척을 파견했다.

  중국과 인도가 미국에게 공식 서한을 보내기도 하고, UN을 통해서도 항의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전 인류가 모든 분쟁을 그만두고 하나로 뭉쳐야 할 때라고 연설하였다.

   이처럼 지구에서 갖가지 반응이 나와도 UFO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닷새째가 되자 성급한 사람들 중에서 ‘실은 UFO는 지구 관광하러 온 거다.’ 하는 주장도 나오기 시작했다.

  착륙 7일째가 되었다.

  그동안 아무런 반응도 없어서 관광이라는 비아냥거림을 사기도 했던 UFO에서 드디어 움직임이 있었다. 꼭대기에서 길쭉한 안테나 같은 것을 두 개나 뽑아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나는 원추기둥에 둥근 구가 달려있는 형태였고, 옆가지 같이 뻗어 나온 긴 것은 여느 안테나나 다름없어 보였다. 안테나 같은 것에서 어떤 신호가 나오고 있다는 걸 맨 먼저 알아챈 쪽은 인도 뉴델리의 아마추어 통신사였다.

  흡사 모스 부호 같은 파장이 연속적으로 나오고 있는 걸 발견했는데, 파장은 다른 아마추어들도 들을 수 있어서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여러 언어에 대입시켜봤지만 철자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의미를 해석할 수 없는 엉망진창인 문장들만 나왔다. 심지어 고가의 최첨단 장비를 갖추고 있는 국가 수준의 통신사들과 단체들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표준시로 밤 11시가 될 무렵에 UFO에서 각국의 방송국에 접속 및 방송 허가 요청이 들어왔다. 물론 지구 방송국들은 회의 같은 건 거치지 않고 그 요청을 허락했다. 그러자 UFO는 1시간 뒤에 영상․음성 메시지를 보내겠다는 뜻을 방송국에 전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시청률들이 폭증하기 시작했다.

  착륙 8일째로 넘어갔다.

  약속대로 정확한 시간에 UFO에서 영상․음성 교신이 시도되었다. 아나운서들은 입을 모아서 이날을 외계인과 60억 인류가 동시에 접촉한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보도했다.

  외계인은 자기들을 희뿌연 안개 같은 것으로 위장하여 잘 보이지 않았지만, 실루엣은 인간과 많이 비슷했다. 배경인 UFO 내부만 슬쩍 보이고 있었는데 누가 보아도 지구의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외계인들은 자신들을 머나먼 우주의 녹색별에서 왔다고 소개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메신저라고 말하였다. 그 순간, 에베레스트 밑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이 큰 소리로 환호하였다.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가 최선의 선택이 됩니다. 이상적인 평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욕심이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외계인이 전하는 메시지 중에서 한 부분이었다.

  외계인들은 자기별의 역사도 지구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발전된 과학의 힘으로 역사서에 피와 힘과 무기와 전쟁의 시대에 종언을 고했다는 문장을 추가할 수 있었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괜찮다면 지구 전체에 자신들의 기술로 이상적인 평화를 실현시켜 줄 필드를 쳐주겠다고 말하였다. UN에서는 회의 끝에 찬성을 이끌어냈다. 호전적인 성격을 지닌 국가 및 세력 몇몇이 반대했지만 UN은 결정한 사항을 전달했고, 이를 받자마자 외계인들은 필드 전개를 시작하였다.

  시작 전에 외계인들은 필드를 두른 작은 바위를 에베레스트 밑에 모인 사람들 앞으로 내려 보냈다. 은은한 빛으로 둘러싸여진 것 같은 바위는 걸터앉기에나 좋을 것 같았다. 외계인들은 그것을 때릴 수 있다면 후한 선물을 주겠다고 해서 많은 이들이 도전했지만 그들의 주먹이나 발길질, 몽둥이, 심지어 총알까지 바위에 닿지 못하고 튕겨지거나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외계인들은 지구인이 가진 가장 강한 무기인 핵폭탄이나 수소폭탄마저도 필드에 흠집도 낼 수 없다고 언급하였다. 서로 적대적인 생각을 가지고 무력을 휘두른다면 인간 개개인 및 생명체들을 비롯하여 모든 물체에 둘러쳐지는 필드가 가동되고, 가해지는 모든 무력을 막아내거나 무효화 시킨다고 메시지에 섞어서 전했다. 인류는 보이지 않는 막에 대해서 이해는 했지만 솔직히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그러나 며칠 만에 필드의 진정한 위력을 체험할 수 있었고 크게 감탄하였다.

  착륙 10개월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에 지구는 짧은 시간에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그것은 혁명(革命)에 가까웠다.

  남자 A는 B와 사소한 일로 다투다가 남자 A가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쭉 뻗었다. B는 순간 움찔했지만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않기에 눈을 떠보니 외계인들이 친 필드가 발동되어 남자 A의 주먹을 막아내고 있다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말싸움을 하다가 서로 간에 합의점을 대화로 찾아나가자고 약속하였다.

  국가 R와 C는 국익이 걸린 문제를 두고 다투다가 서로 전쟁을 시작했다. R국의 전차와 무장한 보병이 C국의 국경을 넘는 순간 C국의 매복병에 의한 저항이 있었다. 교전을 시작했지만 필드에 막혀서 총알이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전차에서 발사한 포탄도, 머리 위를 날아가다가 떨어트린 폭탄도, 대포탄도 외계인들의 필드를 뚫지 못했다. R국과 C국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사령관과 병사들은 악수를 하고 도로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양국의 정상들이 통화해서 가까운 시일 내에 정상 및 장관, 실무들이 국경에서 만나서 최대한 좋은 결과를 내보자고 웃으면서 결론을 내었다.

  국가 I와 민족 P는 하루가 멀다 하고 옛 터전을 되찾으려는 명분을 내걸고 싸웠지만 필드가 쳐진 이후로는 아무도 죽는 이 없이 휴전 상태로 지내게 되었다. 그 상태로 몇 달이 지나니 긴장이 탁 풀려서 둘 사이에는 민간 간의 교류가 조금씩 오가기 시작했다.

  내전 중이었던 G 세력과 R 세력은 필드 때문에 아무런 전사자도 사상자도 없이 총알만 낭비하고, 병사에 대한 급여만 나가게 되자 필요한 병력을 제외하고 어린 병사들을 돌려보내고 서로 이야기나 해보자고 총과 칼을 거둬들였다.

  세계적인 불명예로 남았던 SK와 NK는 서로의 침입에 대비하여 지금껏 해온 군사 준비가 허탕이 되자 싫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할 수 없이 협상 석을 마련하고 마주앉는 방법 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껏 다퉈왔던 개인이나 세력, 집단, 국가 사이에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일부 층에서는 부작용도 나오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는데, 복싱이나 격투기 같은 거친 스포츠 애호가들은 선수들이 서로를 때릴 수 없게 되자 지루해하면서 다른 채널로 돌렸다. 또한 액션 영화계와 배우들의 주머니에도 찬바람이 불었다.

  그들은 TV로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고, 에베레스트 밑에 가서 피켓과 현수막을 들고 꼭대기를 향해서 자신들의 밥그릇을 보장하라며 항의했지만 그에 관한 외계인들의 특별한 반응은 없었다. 단지 TV에 ‘For the Great Good' 라는 짤막한 문장을 내보내는 데에 그쳤다.

  TV에 출연한 한 철학 교수는 외계인들의 이런 처사에 대해 무척 분개해했다. 인간이 가진 가장 순수한 투쟁 본능조차 반강제로 억압당하는 것이고, 이는 지배당하는 거나 다름없다며 외계인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공감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절대 다수의 지구인들은 외계인들이 지구 일에 간섭하는 것도 아니고, 필드를 귀찮아하지 않았다. 먹고, 입고, 자는 데에 아무런 불편도 없고, 생업에 열심히 종사하면서 그날을 살아갈 따름이었다. 오히려 좋지 않은 게 하나 사라졌다면서 다들 좋아하고 있었다.

  철학 교수는 분노하지 않았다. 그는 천장을 쳐다보면서 허탈한 듯한 목소리로 비로소 인간은 스스로의 나약함을 증명했다고 깔깔 웃으면서 스튜디오에서 내려왔다.

   얼마 뒤에 철학 교수는 에베레스트로 가서 외계인들과 담판을 짓겠다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고 네팔로 향했다가 베이스캠프에서 얼마 못가서 눈사태가 일어나는 바람에 실종되었다는 소식만 가족과 제자들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음모론에 가까운 괴소문이 돌았지만 몇 주도 채 가지 못했다.

  착륙 10년이 다가올 즈음이었다.

  에베레스트 밑에 모여든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자 자기 가정과 직장으로 돌아갔지만 1주년 행사 때는 누가 뭐하고 하지도 않았는데 거대한 케이크를 앞세워서 우르르 모여들었다. 1주년 행사에 이어서 다음해, 다다음해에도, 올해에는 10주년 행사로 특히 성대한 행사가 열린다는 소식이 온․오프라인에 쫙 퍼지자 벌써부터 사람들이 준비를 하고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했다. 중계용 카메라와 마이크를 든 사람들도 빠지지 않고 찾아왔다.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카트만두는 반년 전부터 숙소 예약이 동이 났고, 늦은 사람들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친한 사람을 찾거나 공터를 찾아서 텐트를 칠 수 밖에 없었다.

  기념할만한 행사라고 모두 왁자지껄 했지만 에베레스트 꼭대기에 있는 UFO는 묵묵부답이었다. 72시간이 넘어서 2주년의 행사가 시작되자 사람들이 큰 환호성을 올렸다. 그때까지도 UFO는 묵묵히 필드를 유지하는 장치를 조작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산꼭대기를 향해서 축하한다고 큰 소리로 동시에 외치자 그제야 반응을 하기 시작했다. UFO 전면에 8개 지구 문자로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열한 개 문자를 내보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중계 카메라들이 부지런히 돌아가면서 집에 있는 지구 사람들의 TV와 인터넷에 감격할만한 일이라면서 이 광경을 전송하기 시작했다.

  하루 쯤 지났을까. UFO에서 움직임이 있었다. 꼭대기에 부착된 접시 부분이 분리되어 땅바닥에 내려졌고, 본체가 서서히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북쪽으로 이동을 하기 시작했는데 다른 장소에 내려 설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서서히 위를 향해 떠오르기 시작하더니 빠른 속도로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산 밑에 모여든 사람들은 환호를 멈추고 멍한 표정으로 UFO가 날아가 버린 쪽만 바라보았다.

  UFO가 두고 간 게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필드 전개 장치였고, 하나는 ‘다시 만납시다. 지구 친구들.’ 이라는 내용을 8개 지구 문자로 띄우고 있는 홀로그램 영상 장치를 남겨두고 간 것이었다. 직후 에베레스트 꼭대기에 오른 산악인들이 밖에서 온 친구들을 기념하겠다며 둘레에 끈을 둘러치고 나서 하산했다.

  그곳에서 2년간 그대로 있었다. 끈은 눈보라가 심하게 치는 날에 벗겨져서 날아갔고, 홀로그램 영상 장치는 며칠 뒤에 함께 바람에 섞여서 서북쪽으로 날아갔다. 남은 건 필드 전개 장치뿐이었다. 꼭대기에 홀로 우두커니 서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5년 뒤에 전개 장치는 수명을 다하고 기능을 멈췄다. 동시에 인류에게 쳐진 필드도 사라졌다. 그들이 이 사실을 깨닫기 까지는 한두 달이 더 걸렸다.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서 필드가 사라진 사실을 맨 먼저 알았고, 그들은 즉시 피 흘리고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시작했다.

  노려보고 있던 자들은 이전처럼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고, 자주 전쟁을 일으키던 자들은 본격적으로 전차를 앞세우고 폭격기를 띄웠다. 사람들 역시 그동안 묵힌 걸 다 풀어놓으려는 듯이 심하게 하면 보자마자 주먹질을 하는 일도 있는 등, 한동안 거친 싸움이 계속되었다. 지구는 외계인들이 방문하기 전처럼 원래대로 돌아갔다.

  외계인들은 고향별로, 혹은 고등 지성체가 살고 있는 다른 별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지구를 떠나서 우주로 돌아간 이래로 줄곧 달 뒤쪽에 숨어서 지구를 관찰하고 있었다.

  떠나자마자 아수라장이 된 광경을 보고 그들은 안개 뒤에서 서글픈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중 하나가 다른 이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모두들, 지구라는 별을 방문한 소감이 어떠한가?”

  말소리들은 일을 성공하지 못한 불만족에서 오는 감정 때문에 퉁명스러웠다.

  “소감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네. 그들 역시 60억이 넘는 숫자를 가졌음에도 평화라는 선물을 받아들지 못했어.”

  모두 정말로 어렵다면서 고개를 수 없이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 우리는 지나온 별들에서도 실패했잖아? 그리고 우리의 고향도 말이야….”
  “조금 익숙해졌다가도 싶어도 우리가 살짝 물러나고 효과가 없어졌다는 걸 알면 금방 서로 싸우지.”
  “나는 이걸로 확신 했어. 우리들 안에도, 그들 안에도 말할 수 없이 난폭한 괴물이 도사리고 있음을.”

  맨 먼저 말한 목소리가 지구의 책에 있는 내용이라며 들려주었다.

  “너무 그렇게 자책만 하고 있을 필요는 없지. 지구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고 하네.”

  그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다.’ 라는 짤막한 문장을 말했다.

  “지구인들은 훌륭한 지혜를 가지고 있어. 이 실패 역시 우리에게는 성공을 향한 큰 한 걸음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 책의 다른 쪽에 있는 내용이라면서 다른 이들에게 들려주었다. 안개 속에서 피식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계속 다른 생명이 있는 별들을 찾아서 여행하자는 데에 찬성하고 다음 목표를 향하여 넓은 우주를 광속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어디엔가 고등 지성을 가진 생명체가 살고 있는 별을 찾아서 평화를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뒤에 두고 있는 지구는 여전히 푸르렀다.

― 평화를 전하는 방문자들 완(完) ―
나길글길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217 단편 마리오네트가 아니다 나길글길 2008.11.24 0
1216 단편 외계인이 오지 않는 이유 니그라토 2008.11.21 0
1215 단편 이단심판관 니그라토 2008.11.17 0
1214 단편 사소한 것이 부재할 때 우리가 겪는 문제들 (12.2 퇴고분) qui-gon 2008.11.15 0
1213 단편 닫힌 방...2 라퓨탄 2008.11.15 0
1212 단편 헤라의 시녀들 Mothman 2008.11.15 0
1211 단편 스키장에서 생긴 일 유진 2008.11.14 0
단편 평화를 전하는 방문자들 나길글길 2008.11.13 0
1209 단편 Black old mask1 루사 2008.11.12 0
1208 단편 생일 축하합니다 조약돌 2008.11.10 0
1207 단편 나는 이제 어쩌나. SteelHelmet 2008.11.10 0
1206 단편 등용문 김몽 2008.11.10 0
1205 단편 하루 34000명의 아이가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세계6 짜증나 2008.11.10 0
1204 단편 躍動3 몰라 2008.11.10 0
1203 단편 간달프 코스프레 한켈 2008.11.09 0
1202 단편 기차여행 알마 2008.11.05 0
1201 단편 탑과 낚시1 알마 2008.11.05 0
1200 단편 담배 [混沌]Chaos 2008.11.04 0
1199 단편 ' 스모키 러브 ' 은기은 2008.11.04 0
1198 단편 하늘의 노래 하얀새 2008.10.31 0
Prev 1 ... 82 83 84 85 86 87 88 89 90 91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