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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생일 축하합니다

2008.11.10 22:1811.10

생일 축하합니다

1.

어두운 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고요함을 참지 못하는 듯한 어색한 기침 소리가 한 번 뱉어져 나왔지만 어둠 속이었기에 약한 인내심의 소유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물론 기침 소리의 당사자를 제외한다면.

“지금 들어온대, 모두 준비해.”

귀에 꽂힌 무전기를 통해 전해진 정보를 모두에게 알리던 선호가 성냥을 그었다. 어둠을 쫓아낸 성냥의 불씨는 이내 케이크에 꽂힌 하나의 초에 옮겨졌다. 주어진 임무를 끝낸 성냥불을 입으로 불어 끄는 선호의 얼굴에 비장감이 흐르는 듯 보였다. 케이크를 중심으로 둘러앉은 사람은 선호를 포함해서 다섯 명이었고 모두가 조용히 케이크와 닫힌 문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촛불이 부끄러워할 정도의 밝은 빛과 함께 한 소녀가 나타났다. 작은 키에 긴 생머리의 소녀는 앳된 모습이었다.

“어머.”

소녀는 놀란 듯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소녀의 눈동자가 초가 녹아들어가는 케이크에 고정되려던 찰나 선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여진아, 초 다 녹겠다. 어서 들어와.”

선호의 말과 동시에 여진이라 불린 소녀의 뒤에서 한 청년이 여진의 등을 떠밀며 문을 닫았다. 손에 무전기가 들린 것으로 보아 이전에 선호에게 무전을 날린 주인공인 듯 했다. 여진과 무전기 청년이 방에 들어서자 문이 닫혔고, 빛이 사라진 방안에서 촛불은 다시 의기양양한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자, 하나, 둘, 셋.”

선호의 신호와 동시에 조용했던 방안이 노랫소리로 가득 찼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여진이의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가 끝나고 박수가 끝날 때까지 여진은 멍한 표정으로 케이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밝은 표정으로 기쁨을 표현하던 수현이 여진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뭐해, 초 다 녹겠다. 입으로 ‘후’하고 촛불을 끄면서 소원을 빌면 돼.”

여진은 수현의 말에 정신을 차렸는지 이내 입으로 촛불을 불었다. 다시 찾아온 어둠 속에서 선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이게 정확히 맞는지는 모르겠다. 이 노래의 박자가 맞는지, 음정이 맞는지. 원래 케이크에는 그 사람의 나이만큼 초를 꽂았대. 그리고 촛불을 끄면서 소원을 빌고. 소원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아야 이루어진다더라. 이게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전부야.”

선호의 말이 끝나고 창문을 가렸던 커튼이 걷히자 방을 가득 채웠던 어둠이 쫓겨났다. 가만히 케이크만을 바라보던 여진이 이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방안을 채우던 침묵이 잠시 자신의 자리를 울음소리에 내주고 있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소맷자락으로 훔치며 수현이 말했다.

“여진아, 무사히 다녀와야 해. 알겠지? 가장 어린 널 사지로 몰아넣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워. 흑흑흑.”

이내 울먹이는 수현을 여진이 감싸 안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내가 자원한 일인데. 선호 오빠, 원래 생일을 맞은 사람의 나이만큼 초를 꽂았다고 했잖아. 근데 오늘 초를 하나 꽂은 건 내가 오늘 새로 태어났다는 의미 맞지?”

“그래, 맞아. 요 녀석, 어리게만 봤더니 오라버니의 깊은 뜻까지 헤아릴 줄 아는구먼. 허허.”

선호의 웃음소리와 함께 모두가 눈물을 닦으며 웃고 있었다. 울음소리에 자리를 내주었던 침묵은 여진의 웃음소리와 환한 미소를 보며 자신의 자리를 영원히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방안을 가득 채운 웃음소리와 함께 100년만의 생일 축하 자리는 계속되었다.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된다는 100년 전의 이야기를 그들은 알지 못했다.


2.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그러니까 서기 2057년 1월 1일의 일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해가 빨리 뜬다는 이름에 걸맞게 울산의 간절곶은 새해를 맞이하여 해돋이를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추운 겨울 날씨에 저항하기 위해 두꺼운 옷과 장갑, 목도리로 중무장을 했지만 겨울 바다 바람은 살을 에는 듯 차가웠다. 새해의 첫 태양이 뜨는 장관을 기대하며 추위를 견디던 사람들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할만한 평생 잊지 못할 장관을 보게 되었다. 수평선상에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한 해가 뜨는 광경이 연출되자 간절곶에 직접 나와 있는 사람들과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떠오른 태양과 함께 눈앞을 가득 채운 장면에 그들의 탄성은 이내 괴성이 되었다. 태양의 주변에서 어른거리는 검은 점들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태양의 흑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검은 점은 점점 커지며 사람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야에 확연하게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태양의 흑점이 아닌 우주선이었다. 우주선은 간절곶에 모인 사람들을 공격했다. 우주선에서 쏘는 레이저 광선 빔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형체를 알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간절곶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쓰레기더미 태우듯 태워버리고 간절곶이라는 지역을 지도에서 지워버린 우주선의 무자비한 공격 장면은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해졌고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영화 속에서만 보아왔던 화성 침공의 시작이었다. 전 세계는 경악했고, 주가는 폭락하고 유가는 치솟았다. 사람들은 벌벌 떨며 문을 걸어 잠그고 외출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공포 영화의 주인공이 귀신을 피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벌 떠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영화에서 보아온 화성인과 우주선의 공격에 맞설 초인 영웅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전 세계의 모든 전파가 하나씩 멈추기 시작했다. 화성인의 소행으로 생각되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모두가 집 안에 숨어 죽은 듯이 지냈다. 밤이 되어도 혹시나 빛을 보고 화성인이 쳐들어올까 두려워하여 전등은커녕 촛불 하나 켜지 못했다. 그렇게 암흑 같은 시간은 흘러갔다.

그로부터 석 달의 시간이 흘렀다. 정지되었던 세계의 모든 전파가 하나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라디오, 텔레비전, 인터넷을 통해 가슴을 쓸어내릴만한 소식을 들었다. 아시아를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을 공격했던 화성인의 우주선 함대가 지구 방위군에 의해 무력화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영화 같은 이야기였다. 지구 방위군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랬고, 지구 방위군이 화성인을 물리친 방법 또한 영화 같았다. 화성인의 무자비한 공격에 고전을 면치 못하던 지구 방위군이 화성인을 물리친 방법은 60여 년 전 팀 버튼이 만든 영화 <화성 침공>에서 화성인을 물리칠 때 사용한, 올드 팝송의 선율과 파장을 이용하여 화성인의 몸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방법이야 어찌 되었건 이제는 살았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환호했고, 영화 <화성 침공>을 통해 미래의 후손들이 살아남을 방법을 알려준 팀 버튼은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대한민국의 간절곶이 있었던 곳을 시작으로 전 세계 곳곳에 팀 버튼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리고 전 세계에 다시 한 번 평화가 찾아왔다.


3.

화성인의 우주선 공격에 대한 공포가 어느 정도 사라져가고 있던 2060년, 대한민국에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이 생겨났다. 일명 태양당(太陽黨, The Solar Party)과 태음당(太陰黨, The Lunar Party)이라는 두 정당이 정치 세력의 양대 산맥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것은 비단 대한민국만의 정치 패러다임이 아니었다. 정당의 이름만 조금씩 다를 뿐 전 세계의 정치를 이끄는 세력은 대한민국과 대동소이했다. 전 세계적으로 통합되어가는 듯한 정치 세력의 출현은 진일보한 정치의 발전이라는 평도 있었지만, 두 정당이 내세운 정치 이념은 원시 부족 사회의 그것과 비슷했다. 태양을 숭배하는 태양당은 생일을 양력으로 기념하는 이들을 주축 세력으로 삼고 있었고, 이와 반대로 달을 숭배하는 태음당은 생일을 음력으로 기념하는 이들이 주축 세력이었다. 과거부터 양력과 음력의 개념이 잘 잡혀 있는 대한민국과 아시아 국가들은 그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다른 대륙의 국가들은 자신들만의 양력과 음력 개념을 설정하여 적용시켰다. 예를 들면 해가 떠 있을 때 태어난 사람의 생일을 양력으로, 해가 진 이후에 태어난 사람의 생일을 음력으로 규정한 프랑스나 봄과 여름에 태어난 사람의 생일을 양력으로, 가을과 겨울에 태어난 사람의 생일을 음력으로 규정한 호주의 경우가 대표적이었다.

태양당과 태음당으로 나누어진 정치 세력은 전대미문의 우스운 정책을 내놓는데 합의했다. 그것은 바로 생일과 관련된 모든 행위의 금지를 규정한 ‘생일 규제 법안’이었다. 이 법안에 따르면 생일과 관련된 모든 언어와 행동을 정치적 행동으로 규정하였다. 물론 이를 어길 시에는 정치 사범 내지는 사상범으로 몰려 강력한 처벌이 뒤따라오도록 되어 있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이 언제에요?”, “생일이 양력인가요? 음력인가요?” 등의 말을 포함하여 생일 축하 노래, 생일 파티, 생일 케이크 등이 대표적인 규제 대상의 예였다. ‘생일 규제 법안’을 우습게 여기고 그동안의 관습대로 생일 파티를 열었던 사람들이 줄줄이 구속되어 처벌받는 모습이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보도되자 많은 사람들이 ‘생일 규제 법안’에 대한 반대 운동을 벌였다. 경찰에 의해 연행된 반대 운동의 주도 세력이 무기 징역을 선고받고, 반대 운동 집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실형이 선고되었다. 사람들은 지구상의 민주주의가 사라졌다는 말과 함께 차라리 화성인의 지배를 받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말마저 내뱉게 되었다. 하지만 ‘생일 규제 법안’을 제외하고는 태양당과 태음당은 그동안 정당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모범적이며 생산적인 정치를 해보였고 세계의 정국은 안정화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생일 축하 풍습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4.

이른 아침 출근 시간대,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가운데 한 소녀가 서 있다. 회색의 빌딩 숲 속에서 아무런 대화 없이 자신만의 일상을 쫓기에 바쁜 사람들에게 소녀의 존재는 무의미했다. 펑펑 울다가 온 것인지 두 눈이 퉁퉁 부은 소녀는 바닥에 놓인 상자에서 조심스레 케이크를 꺼냈다. 그리고 가방에서 작은 초를 꺼내어 케이크에 꽂았다. 소녀가 꽂은 초는 정확히 100개였다. 소녀가 100개의 초를 하나씩 케이크에 꽂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소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소녀는 라이터를 꺼내어 100개의 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케이크를 두 손에 들어 가슴 높이까지 끌어 올린 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여진이의 생일 축하합니다.”

지나가던 사람 중 몇몇이 걸음을 멈추고 신기한 광경을 쳐다보았다. 여진은 조금 더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조금은 서툴지만 선호와 수현 등이 불러주었던 그 노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자 여진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여진이의 생일 축하합니다.”

여진의 노래가 계속되면서 이를 신기하게 여긴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 둘 여진에게 고정되었다. 여진은 용기를 얻은 듯 더욱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100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나온 생일 축하 노래는 사람들의 귀를 자극했고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멀리 숨어서 여진을 지켜보던 선호 일행도 작은 목소리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여진을 응원했다. 이들의 노래는 어린 여진을 사지로 보내고 자신들은 숨어있는 상황에 대한 미안함의 표현임과 동시에 자기 위안이기도 하였다. 여진의 노래는 케이크에 꽂힌 100개의 초가 완전히 녹아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여진의 주변을 빙 둘러싼 사람들은 누군가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여진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여진의 생일 축하 시위는 그렇게 끝이 났다.


5.

정치 사범으로 분류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여진에 대한 처리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여진의 생일 축하 시위 장면이 그 당시 주변에서 구경하던 한 사람의 휴대 전화에 녹화된 것을 시작으로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휴대 전화 등의 소형 휴대 기기를 이용한 무선 인프라가 정보 공유의 주요 수단으로 여겨질 만큼 무선 인프라가 잘 구축된 현재에 여진의 생일 축하 시위 장면이 전 세계로 퍼지는 것은 채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선호와 수현을 중심으로 기획되고 여진이 실천에 옮긴 생일 축하 시위가 노리는 효과이기도 했다. 새로우면서도 더 자극적인 것을 찾는 현대인들에게 100년 동안 통제되어온 생일 축하 노래와 생일 케이크는 커다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여진의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중앙 보안국의 한순열은 최근 며칠 사이에 부쩍 주름살이 늘어난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30대에 국가 정보기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 보안국의 국장이 된 능력을 가진 한순열이 그동안 맡아서 처리해온 일에 비하자면 여진을 처리하는 일은 쉬우면서도 동시에 어려운 일이었다. 여진이라는 개인을 처리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생일 축하를 금지한 생일 규제 법안을 위반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선동하여 정부를 전복시키려 시도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받도록 유도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진의 생일 축하 시위 장면을 본 사람 수가 세계 인구 150억 명 중 10분의 1인 15억 명은 넘을 거라는 중앙 보안국의 통계가 그의 고민을 말해주고 있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한순열이 내놓은 여진의 처리 방안은 놀라울 정도가 아니라 섬뜩하기까지 했다.

“오늘 ‘생일 규제 법안’을 위반한 이여진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왔습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피고 이여진은 지난 100년 간 화성인의 풍습이라는 이유로 금지되었던 행위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해보였다. 그리고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지 못한 대중을 선동할 우려가 있어 사형을 처한다. 사형 집행은 판결이 내려진 후 10일 이내에 우주로 추방하는 것으로 정한다.’며 이여진의 사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사건은 이로써 마무리를 짓게 되었습니다. 대법원에서 KVS 뉴스 신동우입니다.”

이여진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판결에 쏠렸던 사람들의 관심은 이제 우주로 추방될 한 소녀의 운명으로 옮아갔다. 판결이 내려진 후 10일 이내에 집행될 우주 추방의 정확한 날짜와 그 방법에 대한 추측이 난무했다. 우주 왕복선을 이용하여 지구와 인접한 다른 행성의 수용소에 보내질 것이라는 추측이 가장 설득력을 얻었는데, 수용소로 보내는 것은 사형 집행이 아니라는 반론이 나오자 그 설득력은 점점 힘을 잃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나온 추측이 여진을 캡슐에 넣어 우주로 날려버린다는 내용이었는데, 캡슐을 이용한 추방 방법이 우주 왕복선을 이용하는 방법보다 좀 더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을 때 사람들을 충격에 떨게 만든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금지된 화성인의 풍습을 재현한 이여진에 대한 사형 선고가 내린 가운데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의 우주 생물학과에서 놀라온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체포 당시 채취된 이여진의 혈액을 정밀 분석한 결과, 지구인의 혈액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성분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성분은 100년 전에 지구를 침범하였던 화성인의 혈액 성분과 일치하는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의 조사 결과 발표가 이어지자 정부는 화성인 이여진의 사형 집행을 서둘러 실시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에서 KVS 뉴스 신동우입니다.”

텔레비전 화면을 보던 여진은 가만히 한순열을 바라보았다.

“날 화성인으로 둔갑시켰군요.”

“그게 가장 간단하거든. 너희들의 똑똑한 계획에 따라 전 세계로 퍼져나간 생일 축하 장면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공포심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이야. 사람들은 아직도 100년 전 지구를 침공한 화성인에 대해 무의식중에 공포심을 지니고 있거든. 놀라울 정도로 발달한 우주 과학 기술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숙원이었던 우주 관광 사업이 시작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그 거부감 때문이니까. 하하.”

“너희라니 무슨 말이죠?”

비열한 웃음을 짓는 한순열에게 경멸에 찬 시선을 보내던 여진은 갑자기 머리를 스친 생각에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

“내 말에 눈치를 챘나보군. 그래, 내가 네가 아닌 너희라고 했지. 이미 너희 조직에 대한 정보 입수는 물론 신상 파악까지 끝난 상태지. 이선호, 한수현, 그리고 졸개들. 네가 사랑하는 언니, 오빠들도 조만간 널 따라 갈 테니 걱정 말라고.”

여진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체포된 이후 힘든 상황에서도 줄곧 참아왔던 눈물을 흘렸다.


6.

“100년간 금지되었던 풍습으로 지구인을 포섭하여 지구를 또 다시 위험에 빠뜨리고자 했던 화성인의 최후가 결정되는 날입니다. 이곳 전남 고흥 나로도 우주센터에는 화성인 이여진을 화성으로 돌려보낼 우주 왕복선이 발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사형이 선고된 화성인을 화성으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지구인들은 100년 전 화성인의 만행을 폭력이 아닌 평화적이고 인도적인 방법으로 되돌려주는 성숙된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나로도 우주센터에서 KVS 뉴스 신동우입니다.”

여진은 완전무장을 한 특수 부대원들의 감시 하에 우주 왕복선 안으로 호송되었다. 특수 부대원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검은 복면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 선글라스도 끼고 있었는데 이는 화성인과 눈을 맞추었을 때 일어날지 모를 최면과 같은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진은 특수 부대원들의 손에 들린 소총의 위압감보다는 지구에서 추방된다는 사실이 가져다준 공포에 몸을 떨었다.

“괜찮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너는 새로운 곳에서 살 수 있을 거니까. 그래도 교수대에 목이 대롱대롱 걸려 죽는 것보다는 이게 낫다고 생각하지 않나?”

여진의 호송 업무를 책임지고 우주 왕복선에 오른 한순열이 의자에 묶인 채로 앉아 떨고 있는 그녀를 보고 조롱하듯 말했다. 여진은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발사 준비를 마친 우주 왕복선은 서서히 지구를 떠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지구의 중력 범위에서 벗어났다.

“잘 보아라, 이젠 지구에 돌아올 일이 없을 테니…….”

지구의 대기권을 벗어나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한순열이 여진의 몸에 묶인 특수 밧줄을 풀어주며 우주 왕복선의 창을 가리켰다. 여진은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몸을 움직여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주 왕복선 밖으로 하나의 행성이 보였다. 점점 멀어지는 하나의 행성. 그것은 푸른빛의 지구가 아닌 붉은빛의 지구였다. 여진은 놀라서 당황한 표정으로 한순열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럴 수가. 지구는 원래 푸른빛 아닌가요? 창 밖에 보이는 행성은 붉은빛인데…….”

“…….”

한순열은 대답 대신 여진에게 책 한 권을 건넸다. 조금은 지저분한 느낌이 드는 검은 표지의 두꺼운 책이었다. 여진은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 사실에 대한 대답이 책 속에 있을 거라 확신하며 책을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조심스레 책장을 넘겼다.


7.

<묵시록>

지구력 2057년 1월 1일, 한 무리의 지구인을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지구를 식민지 행성으로 만들기 위한 절차가 시작되었다. 우리의 예상대로 지구인의 무력 저항은 격렬했으나 우리의 첨단 과학 기술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저항하는 지구인은 차례차례 사살했고, 저항 의지를 가지지 않는 지구인은 살려두었다. 그들의 생식력을 통해 멸종해가는 화성인을 되살리고, 그들의 노동력을 통해 식민지 지구 건설과 화성의 재건을 이루어야하기에 그들은 소중한 자원으로 분류하여 관리하기로 하였다.

지구력 2057년 2월 9일, 일주일 전 마지막 무력 저항을 끝으로 지구인의 공격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소중한 자원으로 분류된 지구인을 찾아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곳곳에 숨어 있던 많은 지구인을 포획하였다.

지구력 2057년 2월 14일, 갑자기 들려온 폭발음의 정체는 핵폭발로 밝혀졌다. 지하에 숨어 있던 지구 방위군의 최후 세력이 핵을 터뜨린 것으로 보인다. 지구 최후의 무기라는 핵은 지구의 생태계를 오염시켰다. 이에 우리는 지구를 떠나 화성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지구를 식민지 행성으로 건설하여 화성인을 멸종에서 구하는 계획은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지구력 2057년 3월 7일, 지구에서 포획해온 지구인들을 세뇌시키는 작업이 완료되었다. 그들에게 이곳은 화성이 아닌 지구이며, 지구를 침공했던 화성인은 지구 방위군의 우스꽝스러운 공격으로 저지되었다는 기억을 집어넣었다. 우리의 수정된 계획에 따라 세뇌당한 지구인은 이곳에서 지구인의 삶을 살며, 이곳을 지구와 같은 환경으로 바꾸어 줄 것이다. 하지만 지구를 식민 행성으로 만들기 위한 우리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구인의 엄청난 생식력을 미루어볼 때 이곳 화성도 조만간 포화상태에 이를 것이라 예상된다.

지구력 2060년 7월 19일, 지구인 중 몇몇이 이곳 환경에 대한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다시 세뇌를 시켰지만 혹시나 다시 발생할지 모를 사태에 대비하는 방법이 고안되어 실행되었다. 그것은 지구인들이 서로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방법으로 그들이 즐겼다는 생일 축하 풍습을 없애는 정치 제도를 도입하였다.

지구력 2079년 3월 19일, 순수한 지구인 혈통은 이제 없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지구인들은 화성인들과 교미를 하여 지구인과 화성인의 장점을 결합시킨 후손을 만들어냈다. 순수 혈통의 지구인들은 이곳의 대기에 적응하지 못했는지 오래 살지 못했다. 그들의 호흡 기관을 바꾸기 위해 투입되었던 약품은 성공작이 아닌 것 같다.

지구력 2156년 12월 24일, 금지하였던 생일 축하 풍습을 사람들 앞에서 해보인 소녀를 체포하였다. 놀라운 사실은 소녀는 지구인의 피가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순수 화성인 계열이라는 것이다. 소녀의 행동 동기는 더 조사해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지구력 2157년 1월 1일, 지구 식민지 건설 계획 시행의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핵으로 오염된 후 약 100년의 시간이 흐른 지구의 환경에 대한 조사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꾸준한 정화 작업을 펼쳤지만 아직까지 단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가 발견되지 않은 그곳에 대한 실제적인 생체 실험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 실험은 순수 화성인 계통의 여자를 시작으로 순수 화성인 계통의 남자와 지구인과 화성인의 혼혈 계통 남녀를 대상으로 한다.


8.

<묵시록>을 넘기던 여진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책의 두께와는 달리 여진이 읽을 수 있는 내용은 채 20쪽 분량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분량은 아직 공백 상태로 남아 있었다. 여진은 충격으로 인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살던 곳이 지구가 아닌 화성이었다는 것보다 자신이 화성인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화성인인 내가 왜 지구의 잊혀진 풍습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일까? 누군가의 음모에 빠진 걸까? 여러 가지 생각에 빠진 여진을 향해 한순열이 입을 열었다.

“그 책은 원래 아무도 읽지 못하게 되어있는 책이지, 여기 우주 왕복선에 보관되어 왔으니까. 묵시록을 읽은 사람은 아마 네가 처음일거야. 지구에 가서 우리들의 꿈이 실현되도록 노력해주길 바라는 내 선물이랄까. 우리별은 이제 포화 상태에 이르렀어. 빨리 식민 행성을 건설하지 못하면 인구 포화로 인한 자원 부족 때문에 전쟁이나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군. 그럼 부탁하네.”

지금의 한순열의 태도는 여진을 조롱한다기보다는 정말로 공손히 부탁하는 것 같아보였다. 우주 왕복선이 지구에 인접했을 때 여진은 특수 부대와 순열의 비장한 배웅을 받으며 소형 캡슐로 옮겨 탔다. 지구로 향하는 캡슐의 창 밖을 바라본 여진의 눈에 푸른빛 지구가 들어왔다. 폐허가 된 지구를 향한 화성인의 두 번째 침공의 시작이었다.

- 끝 -

13579sar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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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217 단편 마리오네트가 아니다 나길글길 2008.11.24 0
1216 단편 외계인이 오지 않는 이유 니그라토 2008.11.21 0
1215 단편 이단심판관 니그라토 2008.11.17 0
1214 단편 사소한 것이 부재할 때 우리가 겪는 문제들 (12.2 퇴고분) qui-gon 2008.11.15 0
1213 단편 닫힌 방...2 라퓨탄 2008.11.15 0
1212 단편 헤라의 시녀들 Mothman 2008.11.15 0
1211 단편 스키장에서 생긴 일 유진 2008.11.14 0
1210 단편 평화를 전하는 방문자들 나길글길 2008.11.13 0
1209 단편 Black old mask1 루사 2008.11.12 0
단편 생일 축하합니다 조약돌 2008.11.10 0
1207 단편 나는 이제 어쩌나. SteelHelmet 2008.11.10 0
1206 단편 등용문 김몽 2008.11.10 0
1205 단편 하루 34000명의 아이가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세계6 짜증나 2008.11.10 0
1204 단편 躍動3 몰라 2008.11.10 0
1203 단편 간달프 코스프레 한켈 2008.11.09 0
1202 단편 기차여행 알마 2008.11.05 0
1201 단편 탑과 낚시1 알마 2008.11.05 0
1200 단편 담배 [混沌]Chaos 2008.11.04 0
1199 단편 ' 스모키 러브 ' 은기은 2008.11.04 0
1198 단편 하늘의 노래 하얀새 2008.10.3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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