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나는 이제 어쩌나.

2008.11.10 19:1211.10

  밤에 혼자 걷는 일은, 분명히 유쾌한 일은 아니다. 상쾌한 초가을 밤 정도라면 좋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같이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어, 달은 온데간데없고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길을 걷는 것은 꽤나 으스스한 일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짙은 밤안개까지 끼어있다니 원.
  뚜벅, 뚜벅, 뚜벅 하고 걸을 때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얇은 재킷 사이로 내 살을 차갑게 식히고 지나간다. 그뿐이랴,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확! 하고 내 머리채를 낚아챌 것만 같은 섬뜩함까지 함께 옷 속으로 스며든다.
  아직도 집에 들어가려면 15분은 더 걸어야 할 텐데. 아무리 보행자 수가 적은 시골길이라고 해도 가로등 정도는 설치해 달라고. 버스의 종점부터 우리 집까지 활처럼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뻗어있는 이 길은, 오른쪽으로는 강이 흐르고 왼쪽으로는 산에 접해 있어 그야말로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향하는 “길”이외의 기능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길이다. 게다가 차량 통행량마저 적어서, 이렇게 자정 가까이 된 시각에 막차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갈 때는 마냥 섬뜩한 기분으로 종종걸음 치게 되는 것이다.
  오늘처럼 가끔 밤안개라도 끼는 날이면 섬뜩한 느낌은 정말 극에 달한다. 이 길은 강을 옆에 끼고 뻗어있는 탓인지, 안개가 한번 끼면 정말 문자 그대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 이른다. 이건 무슨, 걷다가 차에 치어 죽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부아앙- 등 뒤에서 거친 엔진음이 들린다. 1톤 트럭 정도일까? 나는 길 옆으로 재빨리 비켜선다. 오늘처럼 안개 낀 날, 긴 한복판으로 걸어가다가는 그야말로 토마토 케첩 신세가 될 뿐이다.
  휭 하고 지나가는 트럭 옆구리에서 바람이 일어, 나는 다시 목을 움츠린다. 춥다.
  쿠당탕!
  안전방지턱을 넘는 것인지, 트럭의 후미등이 안개 속에서 일렁이는 사이에 뭔가 콰당 하고 트럭에서 떨어졌다.
  “어이- 저기요!”
  이런 안개 속에서는 목소리마져 삼켜진다. 불러봤자 소용 없나. 트럭은 그대로 멀어져갔다. 이거야 원. 대체 뭘 떨어트린 거야. 위험한 물건이면 내가 치워야 하잖아. 뭐, 나는 사실 그렇게 공중도덕 같은 데 민감한 사람은 아니지만, 집 앞 길에서 안개로 인한 대형사고 같은 게 일어나는 건 즐거운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 물건이 떨어진 과속방지턱 근처까지 간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젠장, 이게 뭐야. 2미터 가량 될까 한 길이. 재질은 틀림없이 나무로 보인다. 색깔은- 아마 검정색이나 짙은 갈색 뭐 그런거겠지. 6~70센티미터 정도의 폭. 그래. 관이다. 관?!
  갑자기 오한이 밀려오는 기분이 다 들었다. 나는 부르르 몸을 짧게 떨 수 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도대체 뭐 이래.
  이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길 한복판에 이런 커다란 물건이 있어서야, 사고가 날 게 뻔하지 않은가. 적어도 길 옆으로 옮겨두기는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빈 관일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정말 꺼림칙하다. 아니,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빈 관이 아닐 수도 있잖아. 그럼 어떡하지? 경찰에 전화해야 하나? 그렇다고 열어보자니··· 역시 아무래도 무섭다.

  덜크럭!
  
  갑자기 관 뚜껑이 덜컥 하고 흔들렸다. 그래, 틀림없이 움직였어. 소리도 들었잖아! 그리고 관 뚜겅은, 내 눈 앞에서 스르르 열리-


*  *  *  *  *  *


  내가 어떻게 집까지 올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지금 아침을 맞아 퀭한 눈을 하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지는 나도 정확히 모르겠다. 어제 본 것은 틀림없는 관이었다. 그래, 관이었지. 관. 그리고 그 관은 내 눈 앞에서 덜컥 하고 움직였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야.
  그 뒤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정말 혼비백산이란 게 무엇인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었으니까. 아직까지도 뼛속이 저려오는 듯 하다. 아직 가을인데도, 한기가 돌아 담요를 뒤집어쓰고 핫초코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었을까.
  
  딩동- 딩동딩동-

  너무 놀라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렸다. 이미 해가 밝은 오전인데도, 나는 한밤중인 양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문을 열자, 검은 옷을 입은 창백한 남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이상한 씨 댁이 맞습니까?”
  “네, 제가 이상한입니다만···”
  “그럼 다시 한 번 확인하겠습니다. 부친의 함자는 한자 실자 쓰시고, 조부의 함자는 성자 수자 쓰십니까?”
  “네, 맞는데요···”
  먼저 말을 걸었던 키가 크고 창백한 남자가 품을 뒤지더니 빨간 나무명패 같은 것을 내어밀었다.
  “명부에서 나왔습니다. 잠시 실례 좀 할까요.”
  명부? 그런 것도 있었나? 어쨌든 두 남자는 나의 허락도 기다리지 않고 현관 안으로 들어와 신발을 벗고 거실로 향했다.
  “저기, 무슨 일로 오셨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제가 지금 몸이 안 좋아서···”
  “그것 때문에 나왔습니다.”
  두 남자는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더니 내 양해 같은 것은 구하지도 않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키가 큰 쪽이 선임자인지, 아니면 실무자인지 이야기는 그쪽이 전담하기로 한 것 같았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명부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아, 저, 그 명부라는 데가 무슨 기관인지···”
  “명부입니다. 어두울 명(冥), 곳집 부(府) 쓰는 명부입니다. 이쪽에서는 저승이라고도 하고, 사후세계라고도 하는 곳입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그럼 저들은 저승사자라도 된다는 거야?
  “저기, 그럼 두 분은 저승사자인지 뭐 그런 분들인가요?”
  “아닙니다. 우리는 명부 요물청의 통제관인데, 어제 요물 1위(位, 귀신 등을 세는 단위)의 회수 중에 문제가 생겨서 나왔습니다.”
  어째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 어젯밤부터 이상한 일의 연속이다. 몸의 오한은 점점 커져만 간다. 소름이 돋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다. 무언가 단단히 이상한 일에, 잘못된 일에 말려들었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는다.
  “도플갱어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혀가 굳어있다. 몸은 으슬으슬 떨리고, 소름은 한껏 돋아 피부를 찢고 나올 듯하다. 도플갱어가 무엇인지는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앞의 검은 남자는 나의 반응이 어떤지는 아랑곳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도플갱어란 요물의 한 종류로, 한 인간을 복제하여 만들어지는 요물입니다. 아직까지도 어떻게 제조되는지, 어디서 만들어지는지는 불명입니다만 이 요물의 일차적 목표는 자신의 원본이 된 인간을 찾아 대면하는 것입니다. 이 요물에게 직접적인 살의나 살해욕망 혹은 살해명령 프로그래밍 같은 것이 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조사되어 있지만, 여기에 대처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 역시 아직까지 발견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근원적인 대응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채 우리 요물청을 통해 회수와 폐기처분이 내려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미봉책이죠. 이 도플갱어와 마주친 인간은 대개 심장마비를 일으켜 즉사하거나, 깊은 정신적 상처를 입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던가, 정신이 파괴되어 폐인으로 생을 마감하던가, 자신의 정신이 파괴되어 가는 것을 견딜 수 없어 자살하는 등의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게 됩니다. 타겟이 된, 즉 원본 인간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경우는 아직 보고되지 않았지만 타겟이 된 인간에 대한 피해가 너무나 치명적인 결과이며, 명부 사무국에 날아드는 민원 역시 심각한 수준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요물청에서 발견, 회수, 처분을 맡고 있는 셈입니다.”
  도플갱어, 도플갱어. 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는 거지? 나는 도플갱어가 아닌걸.
  “어제 저녁, 길에 나뒹군 관 하나를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 하게 되어서 참 유감이지만, 그것은 귀하의 도플갱어를 회수하던 케이스였습니다. 회수 도중에 행정적인 문제가 생겨서, 명부행의 화물선에 실리지 못하고 다른 짐과 뒤섞여 버린 겁니다. 게다가 그나마도 운송 도중에 귀하의 앞에 떨궈져 버렸던 거죠. 혹시 관 뚜껑을 열어봤다거나 하지는 않으셨겠죠? 물론 그러진 않으신 듯 해 보입니다만.”
  나는 이번에도 간신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뒤바뀐 회수체의 운송 경로를 역추적해서 여기까지 와 보았는데, 이미 도플갱어는 케이스에서 탈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한 발 늦은 거지요. 그래서 주의를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도플갱어의 모습을 보자마자 죽는다, 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고된 사례로는 거의 예외없이 모두 죽었습니다. 심장마비, 정신질환, 자살 등등. 가장 좋은 방법은 마주치지 않는 것이겠지만, 도플갱어는 어떻게든 본능적으로 찾아들 겁니다.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요물이니까요. 일단 우리쪽에서도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인력과 장비부족이 만성적인 상황이라서, 이정도가 한계입니다. 조심해 주십사 하는 거지요. 경호같은 걸 해 줄 수 있는 처지는 아닙니다. 일단 개개인의 수명이라는 것은 있지만, 예기치 못한 돌발사태 역시 운명의 한 톱니바퀴이며, 그것까지 어떻게 해 볼 권한은 우리들 통제관에게는 없습니다.”


*  *  *  *  *  *


  그들은 말을 마치고는 나의 어떠한 질문이나 항의도 허용하지 않은 채 가버렸다. 나는 언제 나를 찾아올지 모르는 도플갱어와 함께 이 세상에 남겨졌다. 나는 소파에 앉아, 담요를 두르고 담배를 피워물고 생각하고 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도플갱어와 마주치면 필경 나는 죽을 것이다. 그들이 진짜 명부의 사자들이든, 아니면 미친 놈들이든 그것은 별로 상관이 없다. 어제밤의 아찔한 기억과, 내 몸을 덮쳐오던 무서운 기운은 내 몸 깊숙이 자리잡았다. 나는 느꼈다. 그 관에서 튀어나오려 하던 것이 나를 파멸시키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었다.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도플갱어와 딱 마주치는 공포에 시달리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면 방법은 없는 것일까?
  나는 기가 막힌 방법을 하나 찾아냈다.
  마주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나는 인터넷을 미친 듯이 뒤져 도플갱어에 대해 조사했다. 눈 먼 사람이 도플갱어에게 당해 죽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날카로운 부엌칼 한 자루를 내 앞에 놓아둔 채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살아가기로 결정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가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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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도둑읽기만 하다가, 부족한 글을 한번 올려 봅니다.
모두들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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