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등용문

2008.11.10 17:2211.10


방 안을 둘러본 윤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누우면 발끝이 문짝에 걸릴 만큼 좁은 방이었지만 뭐 고시원이 다 그렇지 않은가. 생각보다는 벽지가 깨끗했고 창문도 답답하지 않을 만큼 컸다.

“휴게실에 가면 큰 냉장고 두 개하고, 전자렌지가 한 대 있어. 정수기도 있으니까 밤중에 커피 마시거나 라면 먹고 싶으면 내려오라고. 빨래는 옥상에서 말리면 되고, 중앙난방으로 온수가 하루 종일 나와.”

머리가 벗겨지고 두꺼운 밤색 뿔테 안경을 쓴 원장은 어느 고시원에나 있는 편의 시설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고학생인 윤수가 다소 평범한 옵션의 이 고시원을 고른 이유는 어디까지나 저렴한 입실료 때문이었다. 점점 고급화되어가는 요즘의 고시원들과 비교하면 이 고시원은 가격 외에는 메리트가 없었다.

“아저씨, 진짜 18만원 맞아요? 몇 달 지나고 올려달라고 하는 거 아니죠?”
“아이 참! 내두 젊었을 때 어렵게 공부한 사람이야. 어차피 지금 비어 있는 방이고, 학생도 형편이 어렵다고 하니까 특별히 깎아서 내주는 거라고. 다른 방들은 다 25만원에서 40만원까지 받는다니까.”
“좋아요. 나중에 딴 소리하시면 안 됩니다.”
“걱정 마! 학생은 1년 동안 계속 18만원만 받을 테니까.”

윤수는 품에서 구겨진 흰 봉투를 꺼내어 원장에게 내밀었다. 원장은 봉투를 날름 받아 챙기고 낡은 장부를 꺼냈다.

“사시 한다고 했든가? 공부 열심히 허라고. 우리 원생들이 보통 열심히들 하는 게 아니야. 응, 아주 독하게 한다니까.”
“네, 열심히 해야죠. 진짜 이제 죽기 아니면 살기에요.”

윤수는 씁쓸하게 웃었다. 지방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있는 부모님은 요즘 돈을 부치는 날짜가 부쩍 늦어졌다. 안부전화를 걸면 주변에 대형마트가 들어서서 장사가 안 된다고 죽는 소리를 했다. 윤수는 돈 부쳐달라는 소리가 목구멍 속으로 자꾸 기어들어가서 없으면 없는 대로 버티는 데 익숙해지고 있었다. 윤수는 입실료를 아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앓던 이 빠진 것처럼 시원해하는 원장의 표정과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재영은 책상 앞에 앉아서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터져 나오려는 비명과 울음보를 속으로 꾹꾹 눌러 삼키려니 끅끅 이상한 소리가 났다. 원통하고 미칠 노릇이었다. 올 해에도 합격점수에서 단 몇 점이 부족했다. 어떻게 매 번 이럴 수가 있을까. 채점위원이 자신을 고의로 떨어뜨리려고 마음먹지 않은 다음에야 어떻게 매년 몇 점 차이로 낙방의 쓴 잔을 마시게 한단 말인가.

재영은 법무부 홈페이지에서 받아 적은 자신의 성적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과락은 없었으나 헌법이 평균점수에 턱없이 모자랐다. 너무 자만했던 게 탈이었다. 모의고사만 보면 헌법 점수가 높아서 ‘헌재위원장’이라는 농담까지 들었던 재영이었다. 사실 시험을 한 달 앞두고 헌법은 이제 이만하면 됐다 싶었다. 취약과목인 민사소송법을 집중적으로 파는 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올해는 민소법이 어려울 거라는 소문도 돌았다. 나머지 과목은 매년  평균 이상은 받아온 재영이었다. 민소법을 들고 파면서 나머지 과목은 요약집 위주로 공부하고, 헌법은 그냥 제쳐두었다.

하지만 막상 시험장에서 재영의 앞길을 막은 것은 헌법이었다.

..........갑과 을은 대형쇼핑몰이 대형 쇼핑몰이 초중등학교 근처에 있다는 이유로 영업을 금지하는 위 조례가 자신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므로 위헌이라고 주장하여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였다.
1. 위 조례에 대한 갑과 을의 헌법소원심판청구가 적법한지 여부를 논하시오. (5점)
2. 위 조례가 법률의 근거 없이 제정되었을 경우 갑과 을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이 허용되는지를 논하시오. (15점)
3. 위 조례가 갑과 을의 직업의 자유 및 재산권을 침해하는지 여부를 논하시오 (30점)

어찌된 일인지 그 동안 공부했던 그 많은 판례와 조문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속을 지우개로 싹 지워놓은 것 같았다. 답안지를 채우긴 했지만 핵심은 놓치고 변죽만 올린듯하여 시험장을 나오고도 영 찝찝했었다. 결국 헌법 점수는 겨우 과락만 면하는 수준이었다. 다른 과목에서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헌법이 평균을 깎아먹었다.

재영은 눈물을 닦고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벽지 위로 아버지의 강파른 얼굴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몰라도 아버지는 더 이상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뭐가 그렇게 어렵냐? 네가 돈을 벌었냐, 밥을 굶었냐? 내가 학비를 안 대줬냐, 용돈을 안 줬냐? 하는 거라곤 밥 먹고 책 보는 일 밖에 없으면서 시험에도 떨어지면 어떡하냐? 내가 언제 수석합격이나 연수원 수석졸업 하라디? 그냥 붙기만 하라는데 그 것도 못하니?

처음 2차 시험에 떨어졌을 때 그럴 수도 있다고 기운 내라고 등을 두드려주던 아버지는 점차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열두 살 때 집을 뛰쳐나와 노점과 행상으로 돈을 모아 나이 서른에 갈비집을 차린 아버지로서는 재영의 무능함과 안이함은 용서가 안 되는 것이었다.

재영은 갑자기 심한 복통이 찾아와서 배를 움켜쥐고 바닥에 모로 누웠다. 창자가 뒤틀리고 위장이 뒤집어지는 어마어마한 고통이었다. 매년 시험에 떨어진 날에는 이렇게 배가 아팠다. 낙방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복통을 불러오는 것 같았다. 재영의 신음소리를 들었는지 옆방에서 쿵 하고 벽을 두드렸다. 벽과 벽 사이는 얇은 합판이어서 코고는 소리까지 다 들렸다.

한참 있으니까 복통이 가시고 편안해졌다. 재영은 머리맡에 놓인 소형 라디오를 틀고 이어폰을 꽂았다. 종교방송이었다. 찬송가에 이어 목사님의 설교가 이어졌다.

- 고난에는 놀라운 뜻이 있고, 고난을 잘 통과하면 성숙과 축복, 발전이 있습니다. 우리의 고난을 주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재영은 마음이 더욱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웅규 목사님은 훌륭한 분이었다. 이 땅의 모든 고시생들의 고통을 헤아려 매년 고시합격자 발표가 있고나면 재영과 같은 낙방생들을 위한 설교를 해주셨다.

재영은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된다. 합격선에서 겨우 몇 점이 모자라는 상태였다. 조금만 더 올리면 붙을 수 있다. 내년에는 민사소송법이 어려울 것이 틀림없다. 재영은 다시 책상에 앉아 민소법 강의노트를 펼쳤다.

고시원 앞에는 원생들이 2천원에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밥집이 있었다. 윤수는 고시원 총무에게 산 식권 한 장을 푸짐하게 생긴 밥집 아줌마에게 건넸다. 윤수는 아직 다른 원생들이 서먹서먹하여 멀찌감치 떨어져 밥상을 받았다. 혼자서 밥을 한 술 뜨는데 고맙게도 고시원 총무가 건너편에 앉아주었다. 그는 십년 이상 공부를 하고 있는 장수생으로 총무일을 하면서 입실료를 면제받고 있었다. 항상 똑같은 츄리닝을 입고 낡은 슬리퍼를 찍찍 끌고 다니면서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하고 남 공부 방법에 이래저래 참견하는 게 낙이었다.

“404호에 있는 학생 맞지?”
“네.”
“원장님이 입실료 얼마 받았니?”
“18만원이요.”
“역시.........너구리같은 영감탱이. 왜 그렇게 싸게 받은 지 알아?”
“아뇨.”

총무는 밥알을 입에 문 채 목소리를 낮춰 웅얼거렸다.

“그 방에서 누가 죽었거든.”
“네? 정말이에요?”
“응. 재영이라는 애였는데, 몇 년 전에 합격자 발표 나고 자살했대. 약을 먹고 죽었다는데, 글쎄 밤새도록 배가 아파서 끙끙댔다지 뭐야. 옆방에 사는 대수라는 학생이 괜찮으냐고 물어봤더니, 상관 말라고 성질을 버럭 내서 그냥 잤다지 뭐야.”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뭘 어떻게 돼. 시체 발견해서 경찰에 신고하고 난리가 났지. 애 아버지가 원장님 고소한다고 길길이 뛰었는데, 원장님이 싹싹 빌고 장례식에 가서 부주도 많이 하고 해서 잘 무마됐었나봐. 집안이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라서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렀다네. 그 유명한 조웅규 목사가 임종예배를 보고 말이야. 아무튼 그 일 있고 나서 원생들 끊어져서 원장님이 골치 많이 아팠지.”

윤수는 밥맛이 딱 떨어졌다.

“세상에.........이거 정말 기분 더러운데요. 죽은 사람 방에서 어떻게 공부를 해요?”
“그러게 말이야. 나중에 원장님 보고 방 바꿔달라고 해. 지금 빈 방이 꽤 있거든. 굳이 그 방에 사람을 들이는 심보를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그 방에서 귀신 본 사람도 있어.”
“귀, 귀신이요?”
“응. 예전에 덕배라는 원생이 있었거든, 걔두 사시를 했었는데, 어느 날 술을 먹고 방을 잘못 찾아들어간 게 404호였다는 거야. 웬 녀석이 책상 앞에 앉아 있어서 너 누구냐 했더니 재영이라는 거야. 덕배가 워낙 서글서글해서 인사를 나누고 방에 아예 앉아서는 한참 얘기를 했는데 뭐라더라, 응, 올해는 민사소송법이 어려울거라고 민소법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했대. 나중에 술이 깨고 보니 아무도 없고 빈 방이더라는 거야. 하여튼 덕배는 그 귀신 말을 믿고 그 해에는 민소법을 열심히 했더니 웬걸, 헌법에서 망쳐서 떨어졌대나.”

- 끝 -
김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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