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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디에프의 어둠

2009.01.31 03:3101.31


날렵한 형상의 인간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아니, 인간이 아니었다.
창조주을 흉내 낸 충실한 전투 노예가 거침없이 창공을 휘저으며 비행하고 있었다.
그의 붉은 두 눈은 구름 너머의 존재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있어서는 안 될 시공간의 하늘을 거침없이 비행하고 있는 전투기 편대를 추적하고 있었다.
그에게 굴복당할 운명의 불운한 전투기들은 어느새 구름 속을 벗어나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냈다.

“선명하군. 아주 좋아.”

이승철 소위가 조종간을 조작하자 암청색으로 도색된 거대한 오른팔이 그들을 목표로 겨누어졌고 손목 부분에서 선명한 청색 빛이 번쩍이면서 치명적 위력의 음파 충격탄이 연사되었다.
반투명한 형태의 음파 충격탄을 정통으로, 그것도 연속으로 얻어맞은 21세기 최첨단 기술력의 집적체들이 한순간에 박살나버렸다.
이제 그것들은 이 시공간에서 장검보다 못한 고철 신세로 변해버릴 것이다.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거대한 오렌지 빛 불꽃 중심부에서 강철의 거인이자 FS라 칭해지는 시간 보호군 공군의 인간형 병기는 두 눈을 붉게 번쩍이고 있었다.
FS의 머리 바로 위로는 운 좋게 살아남은 최후의 생존자가 필사적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등에 달린 일자형 비행 장비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더욱더 짙어 지는가 싶더니 연기와 추락하는 잔해, 불꽃을 순식간에 뚫고 그것은 전투기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주 찰나의 시간에 이승철 소위는 전투기의 조종사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조종사도 자신을 이 꼴로 몰아넣은 존재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얼굴 부분이 연속적으로 그어진 수직선으로 이루어진 FS는 붉은 눈을 번뜩이며 허리부에 내장된 플라즈마 소드를 집어 들었고 기수부를 겨눠 단숨에 휘둘렀다.
너무나 깔끔하게 절단된 전투기는 순식간에 폭발했다.
이제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칼레 해전에서 승리할 위험은 없어졌다.
시공을 수호하는 영원의 군사조직 시간 보호군 공군의 FS부대 이승철 소위는 오늘도 열심히 시공을 위협하는 군사집단을 격퇴시켰다.
시공간을 수호하는 군인이라.
기지로 돌아가면서 그는 싱긋 웃으며 생각했다. 이런 삶은 나쁘지 않았다.
사실 아주 괜찮았다.


"네에?"

동료들과 함께 왁자하게 떠들며 휴게실로 향하던 중 소대장의 갑작스러운 호출에 훈장을 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갔다가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디에프의 공군 감시 시설로 전속하도록."


사실 시간 보호군의 특성 탓 여러 시공간으로의 부대 이동이나 재배치는 흔한 일이었다.
내심 부대원들은 신기와 향락에 가득 찬 이풍경의 시공간을 바라고 있으며 멋진 곳이 걸리면 환호성을 지른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의 비행단, 아니 최소 소대 단위였다.

"이해가 안 가는군."

그는 퉁명스럽게 중얼거리며 조종석에 탑승했다.
선명한 모니터로 공군 지상 요원이 타임 홀 지점으로 유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디에프라. 1901년의 프랑스 해안 도시. 꽤 괜찮은 곳이라면 괜찮은 곳이라 할 수도 있지만 그가 지금까지 겪은 너무나 환상적 해변 지역에 비하면 오히려 을씨년스러울 수준이었다.
그리고 거기서는 대놓고 신나게 놀아재낄 수도 없었다.
어쨌거나 임무는 임무였다.
이승철 소위는 모니터 주변을 잠식해 들어가는 원천적 암흑을 확인하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소위는 전자 미채로 전고 15미터의 거대한 공군용 인형 병기를 완벽하게 어둠 속에 숨긴 채 비행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 시간은 밤이었다.
그는 시간을 확인했다. 원래대로라면 이 시공간의 기준으로 1901년 오후 3시에 도착해야 된다.
오류로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타임 슬립 현상 자체가 제대로 된 설명이 안 되는 정체불명의 현상이니만큼 이 정도 오류는 감수하긴 해야 됐다.
그래도 최근에는 오차가 해결됐다고 들었지만 여전한 모양이었다. 날고 기는 시간 보호군과 타임 슬립학회조차도 인공적 타임 슬립 현상 발생 수준의 기술 획득에만 머무르고 있었다.
그만큼 타임 슬립 현상은 비과학적이었다.
심지어는 시간 보호군조차 타임 슬립 현상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 사실을 시간 보호군 모두에게 깨닫게 해준 사건이 단독 전투력으로 따지면 시간 보호군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제라드 중령의 타임 홀 이동 과정 중 실종 사건이다.
시공간을 이동하는 시간 보호군의 모든 일원들은 위험을 안고 활동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군. 대원으로부터의 환대는 무리 일려나."

그는 피식 웃으며 절벽 위의 고성을 찾아 천천히 선회했다.
디에프 특유의 백악 절벽이 어둠 속에서 흰색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 실례 합니다?”

이승철 소위는 고성 아래의 비밀 지하 기지에 FS를 격납시켰지만 아무도 자신을 반기는 이가 없었다.
사실 일반인이 보면 평범한 풀밭으로 생각되는 엘리베이터 덱에 착륙할 때도 뭔가 이상하긴 했다. 통신을 연결해 도착을 알렸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었던 것이었다.
암호 코드를 입력하자 엘리베이터가 지하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5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최첨단 기기들과 설비로 가득 찬 지하 시설이 눈  앞에 펼쳐졌다.
단지 은은하게 울리는 전자 소음을 빼면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눈가림용의 고성에서 쿨쿨 잠을 자고 있으려나?

“거 참....”

그렇다고는 해도 지하 기지에 누군가가 들어오면 신호가 울려 퍼질 것이었다.
아무래도 잠이 정말 많은 대원이 이 기지를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FS의 조종석에서 벗어나 가볍게 뛰어내리자 기지 전체를 울리는 차가운 금속성 소음이 울려 퍼졌다.
정말 아무도 없는 모양이었다.

“흠....”

기지라고 하기에는 꽤나 작은 규모의 시설이었다. 서너 개 정도의 격납 시설에 그의 FS가 격납된 곳에만 선명한 조명이 자동으로 켜져 있을 뿐 다른 곳은 어두운 암흑 아래 잠겨 있었다.
뭔가 불안했다. 이 기지에 상주하는 대원에게 무언가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닌 가 의문이 들었다.
그는 그 전에 모든 시스템이 정상 작동되는지부터 확인하기 위해 전투정보사령컴퓨터가 설치된 지점으로 서둘러 걸어 나갔다.
차가운 금속성 소음이 크게 울려 퍼졌다.
매끈한 모니터가 보여주는 바로는 모든 것이 정상 작동되고 있었다.
그는 한숨과 함께 좌석에 앉아 콘솔을 조작했다.
대체 이 게으르고 잠 많은 대원은 어디에 있는 거야.
무미건조한 전자 소음이 들려오더니 모니터가 천천히 문자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현재 기지 내 생체 반응은 1명-

이승철 소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콘솔을 조작했다. 실수로 기지의 범위를 여기 지하 시설만 한정해서 탐색한 것이 아닌가 싶어 다시 재탐색을 해봐도 역시나 동일했다.

-현재 위장 시설을 포함한 기지 내 생체 반응은 1명-

이승철 소위는 기괴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뒤를 급히 돌아보았다.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젠장.
각 방에 설치된 카메라로 영상을 보내길 명령하자 침실에 해당하는 곳에 한 여성이 누워있었다.
설마하니 사망한 상태인가 의문이 들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모니터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귀를 거슬리는 공기의 파열음. 그리고 눈동자 없는 창백한 회색빛 눈이 보였다.

“으악!”

그는 놀라 좌석에서 굴러 떨어졌다.
거친 소음과 굉음이 적막으로 가득 찬 지하를 뒤흔들었다.
본능적으로 권총을 꺼내 모니터에 겨눈 채 이승철 소위는 긴장된 눈빛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니터는 정상적인 상황이었다. 방금 전의 그건 대체 뭐였지?
바이러스? 내부 시스템 오류? 여러 가능성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지금으로써는 대원으로 추정되는 여인의 생사 확인이 더 급했다.
그는 침을 삼켰다. 삼키는 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려왔다.
금방이라도 모니터에서 무언가가 뛰쳐나올 것 같은 불안감이 너무나 선명하게 그의 머리를 쥐어 잡았다.

“좋아. 아주 좋아.”

침착하자. 방금 그건 분명 잘못 본 것일 것이다. 요 근래 독한 보드카를 너무 과하게 즐겨 마신 것 같기도 했고 타임 홀 통과의 여파가 의심이 되기도 한다.
이승철 소위는 점차 멀어져가는 컴퓨터에 시선조차 떼지 않고 음파 충격총을 겨눈 채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는 천천히 심호흡을 한 후 단숨에 몸을 돌려 재빨리 계단을 올라갔다.


이승철 소위는 거대한 고성의 어둠 속에서 거칠게 숨을 고르고 있었다.
얼굴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삐걱 거리는 소음과 창밖으로 울려 퍼지는 바람 소리가 뒤섞인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두 눈이 어둠 속에서 적응되길 기다리면서도 긴장된 얼굴로 어둠 이곳저곳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볼 수 없었다.

“난 괜찮아. 괜찮아.”

벨트에 부착된 여러 장비를 손으로 더듬으면서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되뇌었다.
간신히 핸드랜턴을 찾아낸 그가 최대밝기로 불을 켜 전방을 비추어 보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매끈한 광택을 뽐내는 바닥과 목제 회전의자 하나 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빛과 어둠의 묘한 대비로 인해 으스스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들을 수 있었다.
이승철 소위의 정신적 감각과 육체적 감각 모두를 불유쾌하게 만드는 소리를.
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생체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 여인이 누워있는 침실로 천천히 걸음을 내딛기만 했다.
소리는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자신을 따라오는 것인가 아니면 이 공간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그것이 두렵고 또한 궁금했다.
굳이 설명하자면 날카로운 현악기의 소리가 그나마 가깝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완전히 이 소리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 어떤 힘센 사람이라도 비올라나 바이올린을 이렇게 찢어질 듯한 괴성으로 연주하면서 낮은 저음과 아우러지면서 음침하게 노래 할 수는 없었다.
사람이라면 말이다.
이승철 소위가 숨소리조차 조심스럽게 내쉬면서 고성의 어둠 속을 헤맨 끝에 간신히 목표로 하는 곳에 당도할 수 있었다.
손잡이를 보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시대의 물건처럼 보이게 위장은 되어 있었지만 본질 자체는 최첨단 전자부품으로 이루어진 방어 장치였다.
이런 으스스한 분위기의 고성을 헤매다가 이런 물건을 만나니 실로 반갑기 그지 없었던 것이다.
이승철 소위는 시간 보호군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암호 코드를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묵직한 금속성 소음이 울려 퍼졌고 이승철 소위는 잠시 긴장된 눈빛으로 손잡이를 노려보았다.
이내 결심을 한 그는 손잡이를 천천히 돌리면서 문을 열었다.
방 안 역시 짙은 어둠에 잠겨있었지만 이미 어둠에 충분히 익숙해진 이승철 소위는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볼 수 있었다.
문을 닫고 방의 중심부에 널찍하게 자리 잡고 있는 침대로 향하는 이승철 소위의 심장은 맹렬히 두근거리고 있었다.
차라리 무수한 지상전을 치룬 일반 보병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좀 더 덜 두려워하고 침착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승철 소위 그 자신은 거대 병기의 파일럿이었으며 그에 따른 한계점은 분명했다.
그는 긴장감과 공포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이 저택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할 수 있다는 불길한 가능성을 떠올렸다.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은 허황되면서도 두려움과 공포의 근원이 되는 그 가능성.
이승철 소위는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잠시나마 공포감을 몰아주었다.
아마 기계가 고장 났을 것이다. 시간 보호군과 관련된 기계 장비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고장이 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자존심 센 기술자 녀석들이 몰래 덮어버렸을 수도 있지 않은가?
아무리 시공을 초월한 시간 보호군의 일원이라고 해도 그들 역시 피와 살이 흐르는 인간에 불과했다.
실수의 가능성은 엄연히 존재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침대는 너무나 편안하고 안락해보였다.
그녀는 편하게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너무나 편안하게 수면을 취하고 있는 걸 멍청한 기계가 제대로 생체 반응 파악을 못한 것이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이승철 소위는 그 사실 하나에 기대를 걸고 침대에 향했다.


그는 잠시 모든 것을 잊고 말았다.
침대에 누운 채 잠들어있는 그녀를 본 순간 이승철 소위는 마치 FS가 뒤통수를 때린 크나 큰 충격이라도 받은 표정으로 멍하게 그녀의 얼굴만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실로 잠자는 미녀였다. 그는 오직 그것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잠자는 미녀였다.
이승철 소위는 공포심마저 잊은 채 그녀만을 멍하게 쳐다보다가 등골을 차갑게 얼어붙게 만드는 알 수 없는 감각에 제정신을 차렸다.
순식간에 그를 덮친 그 정체불명의 현상에 그의 눈동자는 다시 공포로 물들었다.
이승철 소위는 점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가는 심장의 진동을 온 몸으로 느끼며 침상의 여인에게 천천히 손을 뻗어나갔다.
그리고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온기와 따뜻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연약하고 냉혹하며 창백한 빛의 살아있지 않는 듯한 기이한 아름다움이었다.
이승철 소위는 입술 부분 바로 위에 뻗은 손을 한참이나 거두지 못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정말 죽었단 말인가? 정말로?

“으아아아아!”

이승철 소위는 최후의 희망이 무너짐과 동시에 정신을 갉아 들어가던 공포의 공상에 물들고 말았다.
그는 그녀에게 달려들어 어깨를 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빌어먹을, 제발 일어나! 지금 장난...컥!”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는 말할 수 없는 감각. 조금 전에 느낀 그 감각과 유사했지만 차원이 달랐다.
귓가에 들려오는 소음은 점차 선명해지고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의 등 뒤로 강렬한 존재감과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무시하면 좋았지만 그는 군인 특유의 본능적 감각으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거기에는 여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순수한 검은 빛깔의, 심지어 주변의 어둠과도 유리한 듯한 원초적 흑빛 머리카락이 산발해있었다.
긴 앞머리에 가려 눈동자는 언뜻 보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살짝이나마 드러내고 있었다.
이승철 소위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드러난 피부는 푸르면서도 하얗게 빛나는 창백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녀, 아니 여성이라 생각되는 그 존재는 자신이 예전에 보았던 한국 공포 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흰색 소복 같은 단순한 형태의 백색 옷을 걸친 채였다는 것이다.
19세기 유럽의 고성에서 이승철 소위는 그가 두려워하고 지금까지 설마 설마하며 상상해 온 존재와 마주쳤지만 그 존재가 설마하니 매우 동양적인 처녀 귀신의 형태로 나타날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런 당황스러움도 바로 앞에서 물씬 풍겨져 나오는 차가움과 공기를 뒤흔드는 알 수 없는 감각, 그리고 소음, 그리고 정말 눈 앞에 존재하는 귀신의 존재 앞에서는 오직 공포로 탈바꿈할 뿐이었다.
이승철 소위는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하려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그는 뒷걸음질쳤다.
너무나 무서웠고 이 빌어먹을 공간에서 도망쳐 바로 지하의 첨단 기계와 자신의 의지를 충실하게 대변하는 기계 하인의 곁으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아무리 초자연적인 존재라도 그 곳에서는 그 힘을 잃을 것이다.
이승철 소위는 등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감각에 숨이 탁 막혔다.
그의 등에는 오직 벽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이승철 소위가 공포에 질런 눈동자로 그 처녀 귀신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천천히, 그리고 아주 우아하면서도 품격 있게 다가오고 있었다.
심연의 끝을 담은 것과도 같은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언뜻 본 순간 이승철 소위는 끝내 기절하고 말았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본 것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아름다운 음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정신이 들어요?”

이승철 소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긴장된 눈초리로 주변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그녀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그는 조금 전까지 바라보던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의 정체는 아마...

“당신은...이 기지의 대원이로군요.”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철 소위는 정신이 점차 명료해지고 맑아지면서 그녀가 그가 죽은 것이라 판단한 그 여인과 동일인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하지만 당신은 분명 숨이...”

“숨이 멎은 상태였다고요? 오해를 드려 죄송합니다.”

그의 말을 가로 챈 그녀는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말을 시작해나갔다.

“뒤늦게나마 제 소개를 시작하겠습니다. 저의 이름은 류예네. 이 기지의 고정 관리 대원이며....”

그녀는 숨을 깊게 몰아 내쉬며 윙크를 한 후 두 눈을 감았다.
이승철 소위가 이 여자가 왜 이러나하며 의아해하는 순간 류예네라는 여자가 기력을 잃은 듯 고개가 푹 숙여졌다.
그가 당황한 순간 그녀의 머리 위로 또 다른 여성이 점차 그 흐릿한 형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승철 소위가 입만 딱 벌린 채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 존재를 가리킨 순간 그 여성은 싱긋 웃으며 대기를 진동시키는, 정신을 향해 직접 전달되는 목소리로 말해왔다.

-이게저의 본 모습이랍니다-


그녀의 설명인 즉 그녀는 모종의 사고로 정신체 생명체로 살아가게 됐는데 정교하게 제작된 의체 덕분에 일상생활이 가능하게 됐다는 것이다.
종종 의체에서 빠져나와 정신체 형태로 돌아다니기도 하는데 이러한 정신체 형태는 대부분의 일반인은 볼 수 없지만 알려지지 않은 특수한 경우에 그녀의 정신체 형태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가 이 성에 도착한 시점에 그녀는 잠이 안 와 잠깐 정신체 형태로 배회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이승철 소위가 도착한 사실에 놀라면서도 순간 장난기가 발동해 몰래 그의 뒤를 밞았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승철 소위가 이성을 잃고 류예네의 의체를 거칠게 흔드는 순간 그녀가 장난의 너무 심하게 쳤다는 사실을 깨닫고 급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승철 소위는 억울하고 또 무안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 그러면 왜 대체 산발하고 다니는 겁니까?"

-어..음, 정신체 형태는 자연적이고 원초적 형상으로 나타나거든요. 사실 헤어스타일에 집중하기에는 너무 힘들어요-

"그럼 옷은 왜 백색 소복인 거죠?"

그녀는 당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왠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알몸으로 다닐 순 없잖아요? 저의 정신적 능력으로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무채색인 의복 만들어내는 게 한계에요-

아하. 결국 그는 자신을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간(그녀의 말에 의하면 거품까지 물고 기절했다고 한다!) 흰 소복의 산발한 처녀귀신의 정체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알아낼 수 있었다.
솔직히 그는 지금까지 고양이 머리를 한 장교나 괴상한 날개와 꼬리가 달린 부하도 보긴 했지만.
세상에 귀신을 동료로 만나다니!
그나마 진짜 귀신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 순간 문득 스쳐지나가는 상상에 그는 물끄러미 정신체 형태로 둥실 둥실 허공에 떠있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진짜 귀신이고 뭐고 사실상 자신이 상상한 처녀 귀신의 정의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존재가 아닌가?
이승철 소위는 잠시 생각하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이승철 소위는 지하 기지를 내려가면서 등 뒤에서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심장병 걸리겠군.

"왜 그러십니까?"

여전히 흐릿한 형체로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니 속삭였다.

-생각해보니 제대로 된 환영식을 못해드렸군요.

"아 괜찮습니다."

그녀가 뭐라 말하려 하는 순간 그녀의 얼굴은 경악과 놀라움으로 변해버렸다.
이승철 소위는 놀라 그녀가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가 싶다가 그녀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깨닫고는 피식 웃으며 자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저의 전용기 게비니드(Gebinied)입니다!”

그녀는 멍한 눈길로 천천히 게비니드를 향해 다가갔다.

-노...놀랍군요. 지금까지는 수직이착륙전투기 같은 평범한 항공기만 보아왔어요. 이런저런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이승철 소위는 미소와 함께 그녀 곁으로 걸어 나갔다.

“그럼 천천히 구경하시죠.”

-아, 멋지군요! 거대한 팔과 손! 그리고 다리!-

그녀의 흐릿한 형체는 가볍게 진동을 일으키며 어느새 게비니드의 머리 부분 바로 앞에 떠올라 있었다.

-잘생긴 머리도 있군요! 정말 놀라워요!-

그녀의 목소리, 아니 그녀의 의사 표현은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이승철 소위가 흐뭇한 표정으로 추가적 설명을 해주려는 순간 어느새 미소로 가득 한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흑색 눈동자가 이승철 소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체 형태로는 아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모양이다.

-마치 환상 같군요! 로봇을 직접 보게 되다니!-

"정확한 명칭은 풀 프로텍터 슈츠입니다. 약칭해서 FS라고 부르지요.“

-그래도 전 로봇이란 명칭이 더 마음에 들어요-

이승철 소위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붉은 빛과 소음이 번쩍이면서 컴퓨터의 전면 모니터에 명령 메세지가 들어오고 있었다.

-1942년 8월 19일 현지 시각 기준으로 오전 7시 5분. 영불해협에 21세기 이지스 구축함 한 척이 타임 슬립. 현재 디에프로 향하고 있다. 신속히 진압하라-

"아...이거 갑작스러운 임무군요."

-괜찮아요-

그녀는 싱긋 웃었다.

-같이 가면 되니까-

그는 잠시 조종석에 충분한 공간이 있는지 생각하고는 역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되겠....!"

이승철 소위는 입만 딱 벌린 채 흐릿한 그녀를 쳐다보았다.
맙소사, 그녀는 정신체 형태로 따라 올 생각이었던 것이다.


앤드루스 중령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차갑고 짠 바닷물에서 그는 허우적대고 있었다.
캘거리 전차대의 지휘관인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이 타고 있었던 상륙함의 갑판에 포탄이 떨어진 사실 뿐이었다.
순식간에 공포와 패닉에 빠진 앤드루스 중령은 이미 상륙함이 해안에 도착했다고 생각하고 전차를 출발시켰지만 차갑고 창백한 파도가 그와 그의 전차를 덮친 것이다.

"젠장! 크헉!"

거칠게 휘몰아치는 파도 속에서 20야드 정도 떨어진 해변을 향해 필사적으로 헤엄쳐나가던 앤드루스 중령은 속에서 역류하는 구토감을 이겨내며, 연신 불쾌한 느낌의 바닷물을 먹어가며 발버둥 쳤다.
그는 간신히 해변가에 도착해 거칠게 숨을 내쉬다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목도하고는 크나 큰 충격을 받았다.
해변은 실로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여기저기 부서지고 박살난 채 불타오르는 잔해물들이 해변을 뒤덮고 있었다. 더욱이 피와 살로 뒤범벅이 된 사람들의 시체와 혹은 곧 시체가 될 부상자들이 같이 널려있었다.
앤드루스 중령은 지금까지 먹은 비린내는 바닷물과 더불어 참을 수 없는 끔찍한 광경에 구토감을 참을 수 없었다.
위액까지 쏟아내던 앤드루스 중위는 간신히 진정하려 노력했다.
그는 지친 얼굴로 도저히 현실이라고 생각지 않는 비현실적 공간의 하늘을 쳐다보았다가 상황조차 잊고 멍하게 입만 벌린 채 바라보았다.
그것은 실로 설명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흐릿한 하늘 저 편에서 거대한 인간의 형상이 두 눈을 붉게 번뜩이며 회색빛 구름 아래 펄럭이고 있었다.
수직선이 연속적으로 그어진 그 거인의 얼굴 바로 옆에서는 흐릿한 한 여인의 형상이 이리저리 활공하고 있었다.
저건 대체 뭐지? 천사? 아니면 악마?
앤드루스 중령은 혼란에 휩싸인 채 부들 부들 떨리는 두 다리를 온 몸으로 느끼며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공허한 눈동자는 여전히 거대한 거인과 여인의 형상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앤드루스 중령의 의문은 그를 목표로 한 독일군 병사의 총알을 정통으로 얻어맞으면서 끝났다.
죽음으로 이어지는 의식의 흐려짐 속에서도 그는 조금 전까지 본 광경에 대해 생각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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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월요일에 4주 군사 훈련을 위해 훈련소에 입소합니다.
공익이긴 해도 군대를 가는거죠. ㅡㅡ
군 미필자가 밀리터리와 군대를 소재로 한 SF소설을 쓰다니! 조금 우습군요.
그럼 한 달후에 다시 만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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