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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끝없이 우는 사람

2009.01.28 14:3501.28



“안녕.”
작고 빨간색 무늬가 선명한 물고기였다.
“안녕.”
“내 이름은 ‘우는 사람을 위로하는 물고기’, <미치>야. 아저씨는?”
“내 원래 이름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잊혀진 것이지만, 새와 바람은 ‘끝없이 우는 사람’, <다우린>이라고 부르더군.”
“하하, 이름대로라면 내가 아저씨를 위로해야 하는군.”
“.”
“내가 위로해 드릴까요?”
“마음대로.”

그날부터 미치는 시원에서 다우린과 함께 살았다. 사실 이름하고는 별개로 미치는 위로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랐지만, 하류에서 다른 물고기 형제들과 장난치던 이야기라든지, 수달 형제를 놀려주던 이야기라든지, 맛있는 벌레나 수풀을 얻는 방법이라든지 그런 이야기를 다우린에게 해 주었다. 다우린은 붉은 피 같은 눈물을 흘려대는 일을 빼고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조용히 듣기만 했다. 시원은 본래 고요했지만, 특히 밤이 되면 단 한 마리의 풀벌레 소리도, 바람이 나무를 스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런 날은 미치가 노래를 불렀다. 그녀의 생김처럼 작고 심플하지만 아름다운 울림이었다. 가사도 없이 반복되는 음은 마음을 편안하게 어루만졌다.

“미치, 너는 왜 여기까지 오게 됐니?”
오랜 침묵을 깨고 다우린이 물었다. 미치는 다우린이 말을 한 것에 깜짝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음, 뭐랄까, 내가 살고 숨쉬는 물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궁금했거든. 그게 아저씨 눈물일 것이라고는 짐작도 못했네.”
“그렇군.”
“나도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다우린이 대답 하지 않았지만, 미치는 계속했다.
“아저씨는 왜 끝없이 울지? 뭐가 그렇게 슬퍼?”
잠시 조용한 시간이 흘렀지만, 곧 다우린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원래 어떤 나라의 왕이었지. 정략에 의한 결혼 이었지만, 아내를 사랑했고, 많은 자식을 낳았지. 왕자가 일곱이고, 공주가 일곱이었다. 하나같이 착하고 예쁜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왕비의 허영으로 여신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모두 죽었다. 왕비는 여신보다 자식이 많은 것을 자랑했거든.”
“아, 저런.”
“나는 왕비를 용서할 수 없었지. 그녀는 겁에 질려 있었고, 비탄에 잠겨 있었다. 그녀를 죽이려 했지만, 또한 가련하게도 생각이 됐지. 나는 혼자 내 방으로 돌아와 목을 맸지.”
한숨처럼 바람이 사그락거렸다.
“자살은 실패했고 깨어나보니 왕비는 지금의 내 꼴처럼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는데, 몸은 굳어 돌이 됐더군. 슬픔이 깊으면 돌이 된다는 말은 사실이었어. 다시 죽으려는데, 흉측하게 생긴 노파가 나타나 신탁을 내렸지.”
“어떤 신탁인데요?”
“딸을 만나기 전에는 죽지도 못하고, 돌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다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맞아. 다 죽었지. 하지만, 그 신탁을 들었을 당시는 희망에 부풀어 여행을 떠났다. 단 한명이라도 살아서 숨쉬고 있는 아이를 꼬집어 보고, 비벼보고, 안아보고 싶었거든. 그 신탁은 내게 희망이고 살아가는 이유였지. 긴긴 여행으로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지쳐서 이곳에서 잠깐 쉬는데 덜컥 눈물이 쏟아지는 거야. 절대 내 아이를 다시 만날 수는 없겠구나 하고 비로소 깨달은 거야. 다 여신이 노파로 변해 장난친 거지. 심지어는 죽지도 못하게 하고,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거야. 그때부터 나는 늙지도 죽지도 못하고 이렇게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아침이 되자 미치가 말을 꺼냈다.
“당신을 대신해서 딸을 찾아 드리겠어요. 신탁이 거짓이라 생각되지 않아요. 내가 지금은 작은 물고기지만, 몸집이 더 커지면 바다로도 나가겠어요.”
“그럴 필요 없어. 딸이 살아 있었다 해도 내가 늙지도 죽지도 않는 몸으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 백년은 지났으니 다 부질없는 짓이야.”
그런 부정적인 예상에도 불구하고, 미치는 씩씩하게 시원을 떠났다.

바람이 바뀌어 꽃이 피고, 또 바뀌어 단풍이 지고, 또 바뀌어 어떤 계절인가가 됐지만, 다우린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 때, 작은 물고기가 나타났다.
“미치.” 다우린이 반가워 소리쳤다.
“아저씨가 다우린이군.”
그 물고기는 미치보다 붉은 색 무늬가 옅은 편이었다.
“나는 ‘오랜 친구의 소식을 전하는 물고기’, 세올 이예요. 미치의 딸이고요.”
“미치의 딸? 미치는?”
“엄마는 나를 낳고 죽었어요. 우리는 아이를 낳으면 금방 죽으니까요.”
이제는 무덤덤해진 마음 속에서도 통증이 느껴졌다. 한번은 더 볼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엄마의 말을 전할께요. ‘바다 끝까지 강 끝까지 호수 끝까지. 세상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당신의 딸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곰곰히 생각했다. 그리고 당신과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얻었다. 여기 당신 딸을 보낸다.’ 아마 거의 비슷한 내용일 거예요.”
“딸을 보낸다고?”
“내가 당신의 딸이에요.” 세올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뭐라고?”
“엄마가 또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당신의 피와 정(精)을 마시고 태어나 자랐으니 당신의 딸이고, 아들이며, 연인입니다. 당신은 결국 여신보다 훨씬 많은 자식을 키우게 됐군요.’ 랍니다.”
“직무유기야.”
반박하면서도, 다우린은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이제 마지막인데요. 이런 말을 하더군요. 당신을 사랑했다고. 할 수만 있었다면 당신의 아이를 진짜로 낳아주고 싶었다고.”
우하하하.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쩌렁 쩌렁한 다우린의,웃음소리가 시원을 가득 채웠다.

세올은 한 계절을 다우린 옆에 있었다. 세올이 떠나고, 침묵의 시간동안 다우린은 위대한 정신과 동화되며 점점 생명을 잃어갔다. 하지만, 눈물은 계속 흘렸는데, 여신보다 많은 자식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눈물은 소금기가 없어지며 점점 싱거워졌다. 소금의 재료는 슬픔이므로 그것까지 똑같을 수는 없었다.

다음 세대의 물고기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다우린은 위대한 정신과 동화되어 있었다. 꼬마 물고기는 시원에서 혼자 노래도 부르고 이야기도 중얼거리다가 한 계절을 못 채우고 형제들에게로 돌아갔다. 이제는 그 이유조차 알 수 없었지만, 두 세대에 걸친 세레모니는 그 이후에도 계속됐다.

- JUN

*<다우린>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따왔습니다. 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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