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어느 날 술 한잔

2009.01.26 23:1301.26

[어떤 한 남자가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를 보기 위해서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은 없지만, 그가 있어서 행복하다는 사람들은 있었어요.
하지만 그는 두려웠지요.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그가 사라졌을 때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을.
그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이... 그래서 그는 칵테일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물망초-영원히 나를 잊지 마세요.-그의 영혼으로 만든 이 칵테일을 마시면 그 마시는 사람으로 인해서 그는 행복해지니까요. 하지만 잊지 마세요. 영혼으로 만들 수 있는 건 단 한잔뿐... 소울 바텐더 가이드북 150P에서...-]

“뭐 주문하실 거라도?”

이상한 바텐더네. 말투도 이상하고. 하긴 처음 오는 가게에 뭘 바라겠어. 나는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별로 할 말이 생각나지가 않더라고. 술에 떡이 되어서 그랬을 수도 있어.

“술을 안 먹게 할 수 있는 칵테일.”

“헤에. 그런 것도 있군요.”

“저기, 당신 이 동네 처음이야? 날 모르나 본데?”

“음?”

바텐더는 컵을 닦다 말고 날 쳐다보더라고. 소문을 전혀 못 들었나봐.
그것보다 이 잔 좀 봐. 이 푸른 빛, 마치 바다빛깔같지 않아? 물론 구정물같은 해수욕장의 그 빛깔말고, 저어기 남태평양의 푸른 빛깔같지 않느냐고?
그 위에 약간 오렌지빛을 띈 노란색이 감도는 게 너무 멋있어. 한잔...하고 싶은데. 비싸겠지? 주머니에 얼마 남았더라...아니, 아니...그것보다.

“뭘 보세요?”

퉁명스런 바텐더야. 정말. 나가버릴까보다. 근데 이거 아까워서 못 나가겠어.

“아니, 이거 말야. 색깔이 예뻐서.”

반삭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바에 어울리는 껄렁한 외모의 그는 빙긋 웃더라고.

“뭐,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입문하시는 분도 계시답니다.”

잘난척 하긴.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법이지. 내가 칵테일을 마신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는데...하긴 가게 이름부터 들으면 확실한 거 아냐?
가게 이름은 소울 바텐더. 그다지 예쁜 이름은 아니지 않아?
마치 소울메이트와 바텐더의 합성어같아.

“근데 칵테일이 이렇게 그냥 놓여져 있어도 돼? 마실 사람이 잠시 나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롱이든 숏이건 오래 놔두면 안되는 거 아니냐고? 벌써 이걸 본지 30분은 넘은 것 같은데?”

근데 소울 바텐더라는 말도 나름 잘 어울리는 것 같기는 해. 술과 소울 메이트라. 하긴 술앞에서만 마음을 풀 수 있는 나 같은 여자도 있으니까.

“음, 예약된거라서요. 롱이든 숏이건 상관없다고...”

자랑은 아니지만 그래서 술에 대해서는 잘 아는 편이지. 요조숙녀는 아니라서 대학시절 부모님 몰래 칵테일 바나 술집을 여러군데 다녔거든. 그래서 술값 후려치는 가게라던가, 안주가 맛있는 집이라던가, 비장의 술을 등장시키는 술집들을 잘 알지.
덕분에 나이에 안 어울리게 술상무도 하고 있다고.

"언제 예약된 건데?“

“으음...1시간 전에?”

1시간이라고? 소주같은 거면 모르겠는데, 이건 칵테일이잖아.
맥주도 내버려두면 기포 빠지는데!

“김빠지겠다.”

“손님, 이건 맥주가 아닌데요.”

보면 볼 수록 탐이 나는 칵테일이야. 1시간이나 지나서 맛은 없을 것 같지만.

“킵 해놓으시라고 그만큼 말씀드렸는데...”

“당신 초짜지?아니면 임시던지. 칵테일에 킵이 어디 있어?”

“음...”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어.

“뭐, 임시는 아니지만, 비슷하긴 하겠네요. 굳이 설명하자면 전 초짜는 아닙니다. 그리고 킵이 가능한 칵테일도 많아요. 딴데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여기는요.”

아니, 철이 든 이래로 하루에 1잔씩을 꾸준히 실천해온 내 앞에서 이게 뭔 소리야!
참을 수 없지.

“그런 게 어디 있어? 공기가 안 들어가도록 뚜껑을 덮지도 않았으면서!”

“여기 있습니다.”

“당신 본명이 혹시 사사쿠라 유야?”

“그건 누굽니까? 전 한국제에요!바텐더 수업은 그루쩨니코프에서 받았지만.”

“......”

사사쿠라 유 흉내 내는 건 아니군. 그런데 신기하네. 이 칵테일. 정말 보면 볼 수록 신기한 것이...노랗고 파란 것이 아주 예뻐. 칵테일 초짜 입문자도 아닌데, 이런 데 마음이 끌리네...

“내기해.”

심술도 나고, 어차피 맛이 없어지긴 했겠지만 아깝기도 해서 말을 걸었지.

“이 가게가 엄청난 가게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내버려두면 맛이 없다못해서 버릴 정도가 될 테니까. 마셔줄게.”

“안돼요!”

“마시고 나서 맛이 있으면, 당신 솜씨 인정하고 이 가게 보조로 들어갈게. 직장도 때려치고 말이야.”

“흐음. 직장인이었어요? 난 술상무인줄 알았어요. 그리고 보조는 필요 없어...앗!”

술밖에 친구가 없는 미혼 여성이 얼마나 외로운지 알아? 나는 성격이 그렇게 활발한 편이 아니라서 술자리와 일상생활의 괴리가 심해. 그래서 오해도 참 많이 받았지.
술을 마시는 순간의 그 해방감, 활발함. 그래서 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술을 한잔씩 하곤 했어. 술이 깨면 내가 왜 술에 취해서 그런 행동을 했을까. 하고 후회했지만 사람들은 잘 모르더라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셔버리면 어떡해요!”

그래도 어쩌다보니 사내에서 좋은 남자를 만났지. 왜 흔히들 그러잖아. 사내연애 참 힘들다고. 결혼하기 직전에 깨지는 커플이 많아서 그런건지도 모르지만.
결혼할 생각같은 건 없었는데,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조금씩 조금씩 희망같은 게 생기더라고...
하지만 희망만큼 약간의 불안도 있었어. 만나기 전에 술 1잔씩은 꼭 마시고 만나거나, 아니면 만나는 자리에서 술을 같이 마셨으니까 내 진짜 모습을 모르는게 아닐까하고.
그런데...

“어...어라?”

“왜 그러세요.”

부루퉁한 표정으로 바텐더가 말했어.

“이럴...리가 없는데?”

“뭐가 이럴 리가 없어요? 말했잖아요. 이건 시간이 지나도 맛이 안 변한다고요. 특별 주문 칵테일이니까.”

이 칵테일 새로워. 처음 마셔보는 스타일이야. 그래스 호퍼, 사이드카, 마티니, 솔티독, 마가리타, 싱가포르 슬링, 호스넥, 러스티 네일, 레드 아이, 불독...
이때까지 마셔본 것들과 너무 달랐어.
매끄럽게 목으로 넘어가는 건...그래, 맞아. 생크림의 맛.
그건 알렉산더의 느낌?
하지만 카카오가 들어가지 않았고, 생크림의 맛과 어우러지는 건 와인의 맛. 그래, 굳이 설명하자면 이건 블랙 밸벳의 느낌에 가까워.
보르도인지 상파뉴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맛. 탄닌인 듯 하면서도 쏴하고 쏘는 듯한 약간 건조한 포도의 느낌이...
부들부들 하면서도 쏘는 듯하고, 뱃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화악하고 퍼지면서 심장까지 스며드는 이건 와인과도 비교가 불가능한 그 어떤 맛이었어.
이건 그래, 그 사람의 맛이야.
같은 과에서 근무하면서 스쳐지나갈 때 느껴지던 그 사람의 살내음.
열심히 일하면서 미소 짓는 그 사람의 미소.

[언젠가 한번 우리 진지하게 이야기 할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둘 다 술을 마시지 않고 진지하게 이 이야기 할 날이 있을 거야.]

상견례를 언제 하자면서 칠레 와인을 들어올리던 그 남자의 손가락.
생크림과 화이트 와인의 푸르티한 그 느낌.
항상 내게 생크림과 와인을 떠올리게 했던 그 사람.

“저기...”

“왜요.”

“이 와인...”

“아니, 칵테일인데요.”

“그...그래. 이 칵테일 이름이?”

“영원히...”

뭔가 더 말하려던 바텐더는 말하다말고 뒤켠에 있는 시계를 쳐다봤어. 자정이야.

“아...끝났군. 하여간 흔한 칵테일은 아니에요. 우리 가게에선 그 칵테일을 칵테일의 여왕이라고 부르죠. 만들기도 힘들고, 마시기도 힘든 거죠. 근데 그걸 그냥 마셔버리다니. 근데 맛은 있던가요?”

“보조 필요없어?”

“필요 없는데요.”

바텐더는 잔을 닦으면서 말했어. 뽀득뽀득 소리가 나는 게 아주 화가 많이 난 것 같더라고.

“소울 바텐더니까요. 영혼을 섞는 바텐더는 한명이면 되거든요. 가끔 손님같이 어거지부리는 사람들 때문에 보조가 필요하단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니지만.”

“당신 정말 사사쿠라 유같아...”

“그거 누구에요? 도대체!”

갑자기 눈물이 다 나오네. 오늘 같이 이렇게 굉장한 칵테일을 발견한 날, 그 사람이 없다니.
이런 날에는 땅콩을 까면서 한잔 같이 하는 게 좋은데.
하필이면 장례식이라니.

"왜 울어요. 갑자기?“

“바텐더 치고는 정말 말주변이 없네, 좀 상냥하게 할 수 없어?”

장례식때 그의 재산을 처분한다는 말을 그와 같은 과 동료의 말에서 들었을 때도 별 생각은 안 들었어. 그래, 우리는 사내 커플이야. 사귄다는 소문도 안 났고, 나는 그 사람과 아직 상견례 날짜도 잡지 않았어. 그래, 그저 선을 넘기 바로 직전의 연인이었을 뿐인걸.

100일때는 사우모임으로 해안가에 놀러가서 생맥주를 같이 마셨고, 1주년 기념때는 단골 와인바에 가서 칠레 와인을 같이 마셨었지.
단 둘이서 간건 1주년때뿐이었어. 그 외에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마셨었지. 생각해보니 추억이라고는 같이 술마신 기억 뿐이야.

“술을 선물받았었거든.”

“응?”

상처받았던 건 그것때문이 아니야. 그 사람이 선물로 주었던 술들 말이야. 나한테는 술을 전혀 선물하지 않았던 그가 준 술선물들이 그가 죽고 나서 내게 온 거였어.
그의 죽음을 전해 듣고 잠시 패닉에 빠져있던 나를 사람들이 알아차린 거였지. 아니, 진짜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어. 그냥 죽은 사람이 준 걸 간직하기 껄끄러워서 사내에서 술을 가장 잘 마시는 나한테 선물한건지도...

“근데...나는 오늘 술을 끊고 싶어서...”

애인 기념품이 사진도 아니고, 술이 다 뭐야. 정말.
그 선물들을 받고 나서 처음으로 나란 여자와 이런 동료들에게 정이 떨어졌어.
그런데 우스운 건 내가 그걸 마셨다는 거야. 장례식장에 맨정신으로 갈 생각이 안들더라고.
마셨어. 계속.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올때까지. 계속. 정신을 차리고보니 방안 가득히 빈병들이 있더라고.
근데 그건 시작이었을 뿐이야.
장례식장에서 시어머니가 될 뻔한 분을 뵈었을때였어. 뵙자마자 코를 싸쥐면서 뒤로 물러서시더라고.

[무슨 여자가 저렇게 술냄새를 풍기면서...장례식장엘...]

만난 자리에서는 그냥 뒤로 몇걸음 물러서시던 분이, 내가 등을 돌리자마자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 등이 따가웠어.

“그런 말 하는 것 자체가 술이 없으면 안되는 증거라던데요...”

이 남자, 정말 날 사랑하긴 했던걸까? 라고 생각했던 건 예약해놓은 그의 문자때문이었어.
선명히 찍혀 있던 이 가게의 간판.
마지막으로 만나기로 했던 가게.
정말, 그도 날 술꾼으로 밖에 생각을 안 했던 거야.

“뭔가 도움이 되는 이야길 해봐...”

“술집에서 술파는 사람이 술끊는 이야기를 어떻게 합니까?”

“아...”

가봐야겠다. 내일은 또 회사를 가봐야지. 이 정도로 술을 마셨으면 내일도 견뎌낼 수 있을거야.

“술값 계산해야지. 카드 되는거지?”

“그냥 가시죠.”

시큰둥하게 돌아오는 대답.

“마지막 기념이니까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하여간 그렇게 말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냥 나왔지.
나와서 뒤를 돌아보는데, 간판이 안 보여. 아까 전까지 서 있던 간판 말이야. 소울 바텐더라고 영어로 삐뚜름하게 걸려 있던 그 싸구려 간판이, 겹겹이 빛나는 모텔들의 번쩍거림 때문에 안 보이는거야.
그리고는 잊어버렸어.
1주일 뒤에 그때 마셨던 칵테일 생각이 나서 가보니 그 가게는 없어졌더라고. 그리고...
나는 그때 이후로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아. 그때 마셨던 술 이상의 술을 마실 수가 없어서야. 다른 술은 당기지 않더라고.
하지만 지금도 애인은 생각나곤 해. 술을 같이 마실 때보다 마시지 않았을 때의 그 남자의 모습이 떠 올라. 서구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고 하던데. 러시아였던가? 당신이 만약 어떤 술을 마시고 추억이 떠오른다면 그건 그 사람의 영혼이 그 술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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칵테일을 잘 마시는 편이라던가, 술을 좋아한다던가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호기심은 있는 편이라, 어느 날 칵테일 바에 들어가서 혼자서 칵테일 3잔을 마신 적은 있군요. 그 다음날 숙취때문에 매우 머리가 아파서 더 이상 시도는 하지 않기로 했던 기억이 나네요...ㅎㅎㅎ
하지만 뭐 극적인 경험이라던가 실연을 했던 건 아니고요...;;;;;;;;
만화 바텐더를 좋아합니다. 사실 칵테일을 마셨던 것도 그 만화때문인데 현실과의 괴리가 심하다고 생각한 순간 그 만화에 대한 애정도도 많이 낮아져서...T.T
하지만 최고의 인생만화라는 생각은 합니다.;;;;;;;뭐 모티브의 대부분은 사실 거기서 나온거죠.;;;;;;;;
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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