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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증오와 숨쉬라는 강요.




4월 14일 월요일. 오후 9시 경.

야자시간이었다. 나는 길었던 수업시간으로 인해 지쳐있었으므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책을 읽었다. 아직 잠자고 싶을 정도로 피곤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야자시간은 늘 그렇다. 야자시간은, 야자가 없었다면 놀고 있을 시간이다. 적당히 피곤해서 놀기 딱 좋은 시간. 그래서 야자시간에는 놀아야겠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적당한 시간이 흘러, 야자가 진행되고 있는 독서실의 고요함에 안심한 사감선생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원래는 야자 도중에 자리에서 이탈하지 못하지만, 교칙일 수도 있는 것을 어기면서 3학년 선배가 나를 찾아왔다. 아니, 나를 찾아온 게 아니 질도 모른다. 그냥 가는 길에 들렸을 수도 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선배가 나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 선배는 어렸을 적에 친했던 형인데, 지금의 나는 학업에 시달린다는 것과 고독을 즐긴다는 연유로 인해 대개의 사람들과는 제법 서먹서먹한 편이다. 제법, 말이다. ‘꽤’ 친한 사람조차 한 손으로 꼽을 수 있게 된 지금의 나이다. 가끔 외롭기도 하지만, 보통은 즐겁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 형도 내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터 거의 소통하지 않은, 이른바 옛날의 친한 사람, 즉 친했던 사람이다. 중학교 때니까, 4년 전에 친했던 사람이다.
그 형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형에게서, 그저 얼굴만 마주치며 대화는 나누지 않는 급우에게서 느끼는 친밀감과 한없이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그것이 바로 그 형이 내게 말을 걸어왔을 때, 내가 순간적으로 귀찮다는 감정과 짜증을 느낀 이유이다. 아니, 그 형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내내 귀찮았다. 익숙하지 않았고, 그래서 대처하기가 어려웠다.
“길동아.”
그 형이 내게 건넨 첫 마디였다. 참고로 내 직업이 의적인 것도 아니며, 성이 홍씨인 것도 아니다.
“아, 응?”
왠지 작은 목소리가 나와 버렸다. 말을 안 하고 살다보니 뭔가 말을 하면 늘 이렇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책만 읽지 말고 숨도 좀 쉬어야지.”
나는 순간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반사적으로 지금 느낀 의문을 발성할 뻔 하였으나, 말을 적게 하고 싶어서 참았다. 나는 침묵했다. 침묵의 미덕이 아니라 침묵은 미덕이다.
그 형은 돌아갔다. 이후 나는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리고 책에 집중이 안 돼서 짜증이 일어났고, 짜증은 분노로 승화되었다.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겠지만, 결국 나는 그 형을 증오하게 되었다. 머릿속에서는, 온갖 방법이 동원되어 그 형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일일이 다 세지는 않았지만, 대충 20번 정도 죽이고 나니까 덜 신경 쓰이게 되었다. 증오가 풀렸다기보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퇴색했다는 말이 더 옳으리라. 어쨌든 나는 간신히 책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

4월 15일 화요일. 오후 7시 경.

책을 읽고 있을 때, 이번에는 어제의 그 형과는 다른 형이, 그러나 거리는 어제의 그 형과 비슷한 형이, 어제의 그 형과 같이 소리 없이 찾아들었다.
그 형은 약간 인상을 짓는 듯, 아니면 무서워 보이려는 듯, 아니면 불빛 때문에 얼굴에 그림자가 져서인 듯, 어쩐지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숨 좀 쉬라니까.”
그러면서 책을 강제로 덮었다. 나는 가만히 쳐다보았다. 남의 손에 책이 덮이는 모습은 어째서인지 상당히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대항하지 않는다.
그저, 가슴속에서 조용히 사그라졌던 증오가 다시 불타올랐을 뿐이었다.
나는 그 형을 무참히 살해했다.

***

4월 16일 수요일. 오후 5시 경.

어제는 새벽 두 시까지 야자를 해서, 나는 수업시간 때 피곤함을 느꼈다. 눈이 뻑뻑했다. 그래서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아주, 아주 잠시 동안.
“이길동!”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후회했다. 왜 나는 그리도 다급했는지. 그래서 눈은 천천히 떴다.
“숨 셔!”
꼴 보기가 실어서 눈을 감았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근육이 굳어서 표가나지 않을 것이다. 증오하는 마음은 없었다. 단지 가슴이 아팠을 뿐이었다.
그래서 죽였다.

***

4월 17일 목요일. 오후 5시 경.

쉬는 시간이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때 괜히 붙임성 있는 놈이 내게 말을 걸었다. 그는 괜히 붙임성만 좋은 놈이었다. 공부는 그다지 잘 하지 못하는 놈이었다. 불량아에서 불량대신 붙임성을 주면 만들어지는 인간형이었다. 결국 나중에 사회에 나가면 먹고 살기 힘들어질 타입이다.
“야!”
나는 조용히 그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와 친하지 않다. 나는 휴식을 방해받았다. 나는 그가 싫다. 그래서 나는 그를 죽였다.
“같이 숨 쉬자!”
한 번 죽은 걸로는 정신을 못 차렸나 보다. 나는 이번엔 그를 고문했다. 그가 비명을 지르는 환상이 보였다. 그렇게 비명을 지르다 결국 기절하고, 다시 깨워서 고문하고, 다시 기절하고, 다시 깨워서 고문하고.
“싫어.”
나에게 뭔가를 바라지마. 그게 싫단 말이야.
증오는 사그라졌다. 단시 상처가 더 깊어졌을 뿐이었다.

***

4월 18일 금요일. 오전 11시 경.

선생님의 명령으로, 나는 화분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심은 하고 있었지만 도중에 발이 꼬여서 넘어졌고, 화분이 깨졌다. 주위에 있던 급우들은 어쩔 줄 모르고 있고, 아니, 그냥 가만히 있고, 선생님 한분이 달려왔다. 나는 일어서서 옷을 털고 있었다. 선생님은 내게 화분을 옮기라 명령한 선생님이었다.
“그러기에 숨 좀 잘 쉬라니까!”
나는 가만히 침묵했다. 대답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았다. 그저 칼로 눈깔을 파냈을 뿐이다. 망치로 머리를 박살냈을 뿐이다. 뇌수를 꺼내서 발로 짓이겼을 뿐이다. 심장을 뽑아내고 잘근잘근 씹어댔을 뿐이다.
그저 가만히 그를 증오했을 뿐이다.
나는 습관적으로 죽였다.

***

4월 19일 토요일. 오후 7시 경.

주말이라 집에 왔다. 물론 오전수업은 하고. 주 5일제가 시행되고 있지만, 그러니까 노는 토요일, 즉 놀토가 있지만, 학교는 정부의 정책을 용납하지 않는다. 오늘은 이른바 놀토라는 거지만, 그래도 수업을 했다. 나는 거대한 악의를 느낀다.
저녁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야자시간에 뭐해?”
“책 읽어요.”
“책만 읽지 말고 숨도 좀 쉬렴.”
나는 약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부모님을 죽이는 불륜을 저질렀다.

***

4월 20일 일요일. 오전 6시 경.
몸에 밴 습관 때문에 나는 자동적으로 6시에 일어났다. 나는 누워있는 채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왜 다들 숨쉬라고 강요하는 것인지.
나는 숨쉬고 있다. 항상 숨쉰다. 들이쉬고, 내쉰다. 나는 숨을 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숨을 참으면 산소부족으로 뇌세포가 죽어간다.  
나는 항상 숨쉰다. 의식하지 않아도 항상 숨쉬고 있다.

***

4월 21일 월요일. 오후 10시 경.

“숨도 좀 쉬어야지.”
죽였다.

***

4월 22일 화요일. 오후 8시 경.

“숨 좀 쉬라니까.”
죽였다.

***

4월 23일 수요일. 오후 4시 경.

“숨 셔!”
죽였다.

***

4월 24일 목요일. 오후 2시 경.

“같이 숨 쉬자.”
죽였다.

***

4월 25일 금요일. 오후 4시 경.

“숨 좀 잘 쉬라니까!”
죽였다.

***

4월 26일 토요일. 오후 7시경

“숨도 좀 쉬렴.”
죽였다.

***

4월 27일 일요일. 오전 11시경

나는 대학교를 졸업했다. 이제 엄연한 사회인이다. 아직은 부모님 집에서 얹혀살지만.
지잉.
나는 두통을 느끼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균형감각도 잃었다. 그리곤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제는 꽤 익숙한 상황이다.
두통은 고등학교 때부터 생긴 것이었다. 의사는 숨 쉬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

어는 날. 횡단보도를 건너는 도중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졌다. 머리를 아주 천천히 쪼개듯, 고통스럽고 기나긴 시간이었다. 균형감각을 잃고 길가에 쓰러졌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밤중이니까. 한밤중까지 일할 사람은 별로 없다. 물론 나는 그 별로 없는 사람들 중 하나이다.
내가 그렇게 쓰러져 있는 사이, 나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나를 향해 다가오는, 두렵게 느껴지는 헤드라이트를 보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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