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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On your mark

2009.01.24 21:5401.24

곧 있을 올림픽 육상 100미터 남자 결승 경기를 알리는 장내 아나운서의 방송이 나가자 스타디움은 관중의 환호성과 박수로 들썩거렸다. 마치 대규모 종교집회를 보는 것 같았다. 나를 포함한 8명의 선수들은 각자 배정받은 트랙에서 다리를 툭툭 털거나 허리를 접었다 펴기도 하면서 몸을 데우고 있었다. 나는 8명중 꼴찌로 결승에 턱걸이 했지만 우리나라에선 이 종목에 첫 결승진출이라는 이유로 화제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내 기분은 들떠있었다. 그사이 내 옆으로 이탈리아 선수 마르첼로가 다가왔다. 올림픽에서 수상경력이 있었던 선수는 아니지만 출전경험은 몇 번 되는 선수였다. 나는 그를 가까이에서 본적은 없었기에 괜히 그를 살펴보고 싶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그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어색한 미소만 보이고 시선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내게 맑은 미소로 답했지만 나는 그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느새 1번 레인부터 선수 소개가 이어졌다. 선수들의 표정에는 분명히 긴장감이 흘렀지만 자신의 국가와 이름이 소개될 때에는 손을 번쩍 들어 관중을 향해 밝은 웃음으로 응원에 화답했고 그 모습은 동쪽 관중석 위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클로즈업 되었다.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심장은 두근거리고 호흡은 거칠어졌다. 나는 이런 종류의 긴장감에 잘 단련되어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곧 내 이름을 부르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는 긴장하지 않으려 애쓴 덕분에 딱딱한 자세와 부자연스러운 미소로 내 소개를 마쳐야 했다. 나는 스크린을 쳐다본 것을 후회하며 황급히 팔을 내리고 허리를 좌우로 돌려보았지만 불쾌한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어차피 우승 후보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도, 내겐 처음 겪는 큰 무대라는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곁눈질로 본 마르첼로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듯 하더니 이내 주먹을 쥐었다 펴는 모습은 꽤 도움이 되었다. 이 녀석도 '이 느낌은 너무 벅차!'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선수소개가 끝나면 경기는 시작될 것이다.
불쾌감을 떨칠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대형 스크린에는 'On Your Mark'라는 크고 붉은 문구가 깜박이며 선수들을 출발선 앞으로 몰아세웠다. 훈련한 대로 하는 것 외엔 도리가 없었다. 허리를 숙이고 팔을 벌려 출발선에 맞추어 트랙을 짚었다. 긴장한 몸이 차가워서인지 트랙은 오히려 따뜻했다. 고개를 숙여 스타팅 블록에 두 다리를 신중하게 밀착 시켰다. 두 다리 사이로 저 멀리 지나가는 다른 종목의 선수들과 심판 복장의 몇 명 그리고 수많은 관중들이 보였다. 필드 위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거꾸로 보였지만 관중석의 사람들은 거꾸로 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꿈꿔오던 큰 무대에 서게 되었는데도 차라리 지금은 저 사람들 속에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해진 나는 다시 허리를 낮추고 '준비'구령을 기다렸다. 나와 선수들은 일제히 엉덩이를 치켜 올려 중심을 앞으로 옮겨 실었다. 관중석은 당겨진 활시위처럼 일어서다시피 한 사람들 때문에 금방이라도 와르르 무너질 듯 위태해 보였다. 지금 이 순간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두렵기까지 했고 주위는 순간 고요해졌다. 눈앞의 모든 색은 옅어지면서 결국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계의 분침소리도 들릴 것 같이 고요한 그때 마르첼로가 자신의 다리 근육을 조이는 소리가 들렸다. 신기했지만 나는 그걸 의심하지 않았다. 불어 놓은 막대풍선을 비트는 듯한 그 소리는 연달아 몇 번 더 들렸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도 들려왔다. 나는 놀라지 않고 재미있다는 듯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극적인 반전은 어떤 진통제보다 효과가 좋았다. 나를 괴롭히던 긴장감은 찰나에 사라지고 만족감에 휩싸인 내 몸은 어느 때보다 가벼운 기분이었다. 그래 이건 좋은 징조다. 어쩌면 메달을 따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 고국으로 돌아가 TV출연도 하고 광고도 찍고 돈을 벌면 멋진 여자와 결혼도 하게 되리라. 신이 났다. 살다보면 아무 근거도 없이 일이 잘될 거란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그래도 신이 났다. 얼마 전 나의 삼촌은 새로 시작한 사업을 한 달 만에 말아 먹었고 백수인 친구는 수년째 온라인게임에 빠져있지만 내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나는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이제 폐가 터지도록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여전히 주위는 고요하고 눈앞은 아른거렸지만 느낌은 개인 최고기록을 세웠을 때보다 더 좋았다. 이제 십초만 지나면. 그래 십초만 지나면... 마침내 피스톨의 방아쇠가 당겨지고 선수들은 총성을 따라잡겠다는 듯 튀어나갔다. 구원받을 시간이 이제 십초밖에 남지 않은 신앙인처럼 사람들은 고함을 질러댔다. 선수들은 결승선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갔고 단 몇 명의 에너지로 수십만 관중을 날뛰게 하는 멋진 광경이 펼쳐졌다. 그렇게 스타디움이 떠나갈듯 했지만 내 주변은 여전히 고요했다. 한심하게도 나는 출발 신호를 듣지 못한 것이다. 나는 멍하니 서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는 선수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뭔가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순간 내 시야엔 오직 달려가는 8명의 선수만 보였다. 이건 세계적으로 웃음거리가 되고 말고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중에는 나도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태극마크와 744번 등번호를 달고 있는 내가 똑똑히 보였다. 게다가 나와 선수들은 대략 30미터쯤 지난 곳에서 고작 두 걸음도 채 가지 못하고 사라졌다가 두 걸음 전으로 돌아와 다시 달려 나갔다. 레코드판이 튀듯 1초도 채 안되는 장면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어리둥절해 있었지만 이내 침착해질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출발 직전에 내가 달콤한 상상에 빠져있는 동안 내 육체는 출발 신호를 듣고 반사적으로 (그동안의 훈련이 성의 없진 않았던 거다) 영혼을 놓아둔 채로 달려가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육체와 영혼은 완전히 분리되지는 못하고 시간 체계에 오류를 일으켜버렸다. 나는 처음에는 시간에 갇힌 거라 생각했지만 다시 그 생각을 고쳤다. 죽음 후의 일을 알 수 없다고 해서 그것까지 모두 죽음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죽음도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면 결국 나는 죽음에 갇힌 셈이다. 그리고 이런 나의 추리가 맞는지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결론을 지어 홀가분해지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가장자리로 갈수록 불분명해지는 시야만 있을 뿐 내가 누웠는지 서있는지도 알 수 없었으며 육체와 영혼이 아직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내겐 우스꽝스럽게 반복되는 장면을 도리 없이 바라보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육체에서 벗어난 영혼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건 당치않은 얘기다. 나는 영혼을 어떻게 움직여야하는지에 대해서 배운 적도 없을뿐더러 어떤 노력을 해야 할 지도 몰랐다. 어쩌면 인간의 영혼은 육체 없이는 한 발짝도 갈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영혼은 스스로라면 불멸할거라 주장하며 육체를 거추장스럽게 여기게 되고 육체도 영혼 때문에 더 피곤한 삶을 살아야 한다며 티격을 벌이는 상상을 하면서 그 둘은 결국 이혼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합의가 없었다. 이 이혼은 내 탓이 아니라고 영혼은 외쳤지만 내 몸은 대답 없이 뛰고 또 뛰었다.

내 영혼은 거의 자유로워졌지만 나는 매우 괴로웠다. 시야는 흐려지고 구부러졌다. 내 눈알은 저 앞에 있지만 시야는 그 뒤를 보고 있으니 지금 나는 영혼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마음대로 잘 볼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본능처럼 계속해온 사고능력만이 내게 남은 전부였다. 나는 쉽사리 생각에 의존해가고 있었다. 튀고 있는 레코드판을 살짝 건드려주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을, 해줄 사람이 없다는 건 절망이었다. 절망과 고독이 서서히 빠르게 커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잠깐이라도 알고 지냈던 모든 사람들이 기억났지만 오래 머물러 주는 이는 없었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행복했던 시절은 저절로 떠올려졌고,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수많은 일들이(그렇게 많았는지에 놀라기도 하며) 양심을 괴롭혔다. 육체의 한계를 벗어난 영혼은 망각의 축복을 빼앗긴 채 수 없이 많은 기억들로 시달렸으며 그 기억들마다 새로운 감정을 되새김질 해야만 했다. 사랑했던 이를 또 사랑하기도 하고 후회했던 일은 괜한 후회였다며 새로 후회하기도 했다. 울며 웃다가 자책하고 위로하고 창피했다가 우쭐해하면서 차라리 육체의 처지가 부럽기까지 했다. 나는 어떻게든 생각으로부터 도망치려 노력해 보았지만 수천수만의 사물놀이패가 내 영혼을 중심으로 돌며 사정없이 휘모리치며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지옥에 떨어진 셈이다. 그동안 내가 상상했던 지옥의 모습은 마치 어린이가 무서운 꿈을 꾸고 나서 쓴 그림일기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몇 달 전 시내에서 운전을 하다가 내 차 앞으로 난폭하게 끼어든 차를 향해 '지옥에나 가라!'라고 소리 지른 기억이 떠올라 다시 괴로워졌다. 진심은 아니었다고. 오 젠장!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나가지 못하고 반복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끝날 것 같지 않던 감정의 폭풍은 다행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나를 괴롭혔던 수많은 감정과 기억들은 본래의 특성을 잃고 서로 뭉치고 섞이면서 하나의 감정으로 통일 되어갔다. 하지만 난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러다 내가 해탈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걸 원하지는 않았다. 추종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해탈자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무튼 점차 가벼운 기분이 된 나는 도토리묵으로 채워진 호수위에 누워있는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영혼이 평온해지자 나는 다시 시야를 찾을 수 있었다. 여전히 달리고 있는 육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니 웃음이 터졌다. 나는 일곱 번째로 달리고 있었고 마르첼로가 팔뚝 하나만큼은 내 뒤를 쫒고 있었다. 왠지 그는 인간적으로 꽤 괜찮은 사람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사고가 나지 않았더라면 벌어졌을 상황 - 결승점을 통과하고 후회 없는 기쁨으로 가득했을 나와 선수들을 상상하니 안타까운 코웃음이 나왔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만이라도 저 트랙을 달릴 수만 있다면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발 전 나를 소개하는 순간을 떠올리자 가슴이 벅차왔다. 그때의 어색했던 미소의 기억은 어린시절의 유치함을 회상하는 것과 같이 한결 너그러운 느낌이었다. 생애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느꼈던 흥분과 감격이 생생했다. 트랙에 손을 짚었을 때의 따뜻함이 전해져왔다. 스타팅 블록을 두 다리로 지긋이 밀어 몸을 세우면 모든 준비는 끝난 것이다. 저 앞에 보이는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일만 남았다.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피스톨 소리가 귓등을 스칠 때를 기억해냈다. 하지만 내 육체가 멀어지는 느낌은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내 머리 속은 '내가 나를 도울 때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으며 내가 있어야할 곳에 항상 내가 있었다.'는 믿음뿐이었다. 믿음은 기적이 되었고 나는 결승점을 지난 트랙의 끝자락에 서서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관중들의 환호성 속에서 어리둥절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거의 벌거벗고 날뛰고 있는 몇 명의 관중 외에는 이상한 점은 없었다. 관중 대부분은 구원받는데 성공한 듯 즐거워했다. 나는 대형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선수들의 순위와 기록과 우승자의 기뻐하는 모습이 번갈아 나타났고 나는 7위에 그쳤지만 마음은 뛰듯이 기뻤다. 꿈이 아니길. 그때 대형 스크린에 ‘On Your Mark‘라는 글자가 나타나더니 곧 사라졌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어느새 마르첼로가 맑은 미소로 다가와 내 어깨를 툭 치며 몇 마디 내뱉고 다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뛰어갔다. "자네도 봤어? 설마 우리보고 다시 뛰라는 얘기는 아니겠지? 하하".

달리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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