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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밤 허름한 도서관 서재에서 나는 그노스티시즘(Gnosticism) 교리서 안에 끼워져 있는 복음서 하나를 발견했다. -



  I.
   태초에 꿈이 있고,
  신은 그 불투명한 구름들을 빚어 인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인간은 달빛에 취해 반쯤 감긴 눈으로 세상을 그려 나갔다. 아직 말들이 허공을 떠돌던 시절, 그들이 보는 것들은 곧 진리였고 그들의 마음은 사물과 닮고 닳아갔다,
  사람들의 작은 삶은 잠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잠은 달이 차는 데에 필요한 재료였다. 모두의 흰 얼굴이 온전히 밤 위에 드리우는 날이 어김없이 찾아오게 되면, 그들은 영혼을 내어놓고 어떤 신과 계약을 맺었다. 그것은 금기의 의식이자, 삶의 밑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일종의 불가항력이었다. 그 신의 이름은 모르페우스다. 밤은 인간이 모르페우스에게 죽음을 담보로 맺은 계약의 갱신기간이다. 그 시간만큼은 모든 인간들이 달빛만 마시고도 취해 쓰려져 수만리를 날아가 가장 낮게 흐르는 강을 수시로 넘나들었다. 모두 영매가 된다. 그리고 신과 마주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다. 하나의 비밀, 하나의 영혼들이 수많은 존재 속을 유영했다. 어떤 이는 계약이 만료되어 강을 건너고, 어떤 이는 계약을 다시 맺기 위해 강물을 마시고 땅 위로 돌아왔다. 모두가 그 때를 “꿈꾼다”라고 불렀다. 그것은 모르페우스의 다스림 아래 치명적 위험을 끌어안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 위험을 알지 못했다. 꿈이 우리를 어디론가 이끌던 시대, 율법은 깊은 늪 밑에서 웅크려있던 시대, 아득한 먼 옛 이야기, 그것도 아니라면 현재에 잊혀진 자아의 파편.


  II.
  떠도는 말을 움켜잡는 어떤 사람이 있었다. 계약의 치명적 위험 그 자체는 그로 하여금 꿈에서 잡은 빛살들을 혀 끝으로 옮겨 고치를 틀게 만들었다. 그것은 두 번째 벽, 혹은 단단한 껍질이었다. 내부는 고독과 은총이 전율로써 함께 혼몽스러이 엉켜있었다. 둥근 달빛은 고치를 품으며 삼일 간 사람에게 날개를 기대한다. 그러면 그는 가느다란, 그리고 빛나는 사물의 말들을 뽑아냈다. 인간들의 스승, 최초의 사람, 마리의 아우름, 모두들 그를 시인(詩人)이라고 불렀다.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 달빛의 주술사였다. 설기워진 비단 몇덩이 남겨놓은 채, 온, 한 마리로의 나비가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곳에서는 하얀 얼굴을 하고 어둔 곳을 비춘다.


  III.
  비극은, 쥘 수 없던 달빛을 시인에게 물려받으며 시작되었다. 고치에서 남겨진 비단은 최초의 산통(産痛)이었다. 한 나비는 비단을 남긴 채 홀연히 떠났건만, 인간은 그 아이들에게 집을 지어 주었다. 비단으로 지은 집, 그리고 아이들을 시인의 빈 자리에 앉혔다. 더 이상 말들을 움켜잡으려 하지 않았다. 나비가 남긴 말들은 왕궁에 별처럼 박혀 있었다. 아이들은 별을 바라보며 인간 위에 서서 땅을 내려보았다. 하얀 달은 땅 위에서도 빛났다. 그 실은 인간 태초의 신물(神物)이자 저주였다.


  IV.
  고치에 얽혀있던 실오라기들은 촘촘한 옷감이 되었고, 사물들은 스스로 그 옷을 입었다.인간은 나비의 후손을 베틀 속에 가둬버렸다. 말들이 직조되었고, 결이 촘촘해져 갈수록,  둔탁한 색조의 이름들이 세상을 수놓기 시작했다. 허공에 떠돌던 수많은 말들이 그들의 옷에 흡착됐다. 그리고 묶이고 조여져서 끝내 그것과 하나가 됐다. 사물에서는 달빛 대신 이름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꿈꾸기 위해서는 옷을 벗고 잠드는 밤을 기다려야 했다. 달의 주기가 생기는 것은 바로 이 때 부터다. 인간은 밤에만 꿈을 꿀 수 있었다. 이제 그들은 기껏해야 술이나 눈물을 통해서만 그들을 만날 수 있게 됐다. 모르페우스는 나비의 어깨에 내려앉아 밤마다 인간에게로 내려왔다. 계약은 변함 없었다. 단지 이행의 차이만이 옷입은 사물의 수만큼 빼곡하게 쌓여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입은 옷으로 이름을 지어나갔다. 꿈에 대한 명백한 계약 위반.


  V.
  모르페우스는 알고 있...... 계약파기...... 끝이라..... 파멸이......말소(抹消)라는 것......


  VI.
  떠돌 말 따위는 없었다. 모두 베틀에 넣어져 세밀하게 끼워맞춰진 그 틈새로 숨 쉴 달빛도 없었다. 재단사들은 모두 주술사의 후예들었지만, 더 이상 나비를 신뢰하지 않았다. 계약은 망각한지 오래, 그들은 달빛에 조차 그들의 이름을 입혀버림으로써 영원한 어둠을 내려받았다. 그 어둠은 깜깜했지만, 밤과는 전혀 달랐다. 밤은 그 안에 갇혀 있었다. 모든 뜻은 재단사들의 율법에 따라 입혀졌다. 그들은 스스로 질서를 가지고 변함없는 구축을 완성하였다. 완벽한 지상의 세계. 모르페우스는 이미 떠나가고 없다. 달빛으로 날아가려 고치를 만든 사람의 아들들은 하얀 얼굴에 도달하지 못한 채, 석조건축물 같은 각잡힌 이름 속에 갇혀 얼어죽었다. 나비는 영원히 하나뿐이며, 그는 달빛 안에 호젓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 모든 부연 구름 따위 들도 수많은 옷입은 집의 하나라고 굳게 믿어버렸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의식하려 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제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VII.

  마지막 고치를 본다. 그것은 이제 땅 위에는 없다. 하늘에서도 사라졌다. 비단들은 퀴퀴한 교조적(敎條的) 냄새를 내며 부패해 간다. 이제 달빛을 열망하는 자에게 유일한 길은 꿈만이 남았다. 꿈꾸는 것은 인간들의 몫이었지만, 꿈의 세계는 여전히 모르페우스의 구름 안이었다. 인간들은 꿈을 인간이 아니게 됨으로 못박아버렸다. 하지만, 꿈에서 태어난 그들은 태생적으로 아주 가끔 기적적으로 밤이 아님에도, 술과 눈물 없이도 꿈꾼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이름의 왕국에서 버림받거나 혁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여러 꿈을 가지고 있으며, 밤에는 꿈을 꾼다. 그 중에서도 사람의 아들은 나비가 되는 꿈을 꾼다. 그리고 나비가 바로 자신임을 깨닫고 달빛 속으로 돌아가 땅 위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 그리하여 땅 위에서 달빛의 향수를 그리워한 자들은 승천하며, 땅 위에 남아있는 것은 무미건조한 이름들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강을 건너는 꿈을 꾼다. 그리고 그것은 태초에 모르페우스와 맺은 가장 큰 서약이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누구도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불안해한다.
  땅 위에서 몰락해버린 달빛의 왕국이 하늘에서만큼은 호젓이 빛나기를. 너울너울.





- 나는 달빛의 몰락을 읽는다. 모르페우스는 더이상 재계약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원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용불량으로 더 이상 나비가 되어 달빛에 다가설 수 없기 때문이리라. 텁텁한 공기를 마시며, 나는 고적지(古蹟地)를 쓸쓸히 빠져나왔다.
  오늘은 여전히 망(望)이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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