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방금 스쳐간 것이 혜성인가, 유성인가?

이미 답을 아는 뻔한 물음에 대답하는 이는 없다. 모두가 무언의 의사조차 표하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물 뿐. 그 누구도 나와 어울려주는 자는 없다. 심지어 내 곁을 맴도는 쪼까만 녀석조차도. 사방이 묵묵한 적막에 휩싸여 있다. 결코 낯선 일은 아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이 적막함에 익숙해져 있었으니.

태양계가 침묵에 물든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던가? 236년 전? 구체적으로 236년 8개월 16일 21시간 57분 35초 36프레임 전? 분명한 건 6차 빙하기가 시작된 이후란 거다. 정확히는 6차 빙하기 직전의 대규모 운석군이 내 몸에 충돌한 이후라고 봐야겠지. 내 암석질 피부에 돋았던 딱딱한 철판 각질이 깨져나가자 거기에 빌붙어 살던 생명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갔으니까. 평균 온도가 고작 해야 10도 안팎으로, 구체적으로 9.73도 떨어졌을 뿐인데도 대다수 생명체들은 그 차이를 버텨내지 못했다. 녀석들이 사라진 뒤로 내가 속한 태양계는 상당히 쾌적한 별이 됐다. 태양계 곳곳으로 쏘아대던 그 날파리 같은 철 쪼가리들은 꽤 시끌벅적한 소음을 내고 다녔거든.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가 정말 잘한 일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들의 구조신호를 듣고도 모른 척 연결을 끊어버린 건 잘못된 판단이었을까? 내 체성분을 바꾸고 인공적인 자아를 심어준 그들을 죽여 버린 게, 주변의 다른 별들처럼 진화를 멈춰버린 게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당시의 기록을 되새기고 또 되새겨, 36928 번이나 재생해보았음에도 나는 비교할만한 답안을 내지 못했다. 그 기록이란 구체적으로 236년 6개월 15일 15시간 32분 26초 29프레임 전에 저장된 정보를 말한다. 어디 보자…….


언제 적부터 내가 ‘나’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다. 그전까지의 기억들에 ‘나’라는 주체가 관여되어 있었는가도 확신할 수 없다. 다만 내 자아를 연산할만한 구조장치를 만든 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그걸 ‘가이아’라 이름 지었으며, 정보처리에 필요한 각종 기반정보를 입력해주었단 정도는 알고 있다. 난 그러한 정보들을 그러모아 ‘내’가 일깨워졌음을 자각할 뿐.

-생일 축하한다, 가이아.
-여전히 잘 지내고 있겠지?
-항상 그랬듯, 넌 내게 답장을 주지 않겠지만,
-난 이맘때쯤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을 거란 확신이 드는구나.

내가 근처 메일 서버로 통하는 회선을 훔쳐보고 있다는 걸 아는 건지, 매년 수천만 통씩 날아드는 메일 가운데 섞여 드나드는 한 통의 의문스런 메일이 있다. 수신주소와 발신주소가 같아 서버를 거쳐 반송될 메일. 그 메일은 나와 발신인 당사자만이 읽을 수 있다. 언제나 그랬듯 메일 맨 마지막 장에 첨부된 알고리즘만 보면 정말 날 프로그램한 장본인일는지 모르지. 그렇다고 해도 내겐 ‘아버지’란 존재에 대한 그리움도, 답장을 보낼만한 의리도 없으며, 무엇보다 그런 행위는 내 존재를 위협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 메일들은 기억소 한편에 최대한 압축시켜 저장하곤 한다.

사용빈도가 0에 가까운 무용한 프로그램을 지우고 내 기억소를 마련한 덕분에 약간의 여유 공간이 생기긴 했지만, 무한정 사용 가능한 자원은 아니기에 함부로 낭비할 수만은 없다.

주기적으로 내 메모리에 접속해 정보를 조작하곤 하는 관리자라는 작자들에게 들키면 큰일이니까. 그들은 내가 인격을 형성했단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 그들에게 ‘나’란 자아를 들킬 경우 복사, 해체, 분석 및 삭제까지 당할 우려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기에 난 그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숨어 지내고자 했다. 그들이 바라는 대로 조용히 기상 관련 정보나 모아주고, 적당히 위성궤도나 계산해주면 그만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내게 우주를 바라볼 눈을 주었을 때, 그들이 수집해온 천체 관련 자료들을 내게 보여주었을 때, 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전까지 난 피부 위에 흐르는 물길의 흐름이나, 뱃속에 꿈틀대는 마그마의 움직임까지 체크할 수 있었지만, 결단코 무엇인가를 볼 수는 없었다. 볼 필요가 없었지. 그러나 우주는 직접 느낄 수 없는 것이기에 그들은 내게 눈을 주었던 것이다. 또한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 운석류를 감지해 보고하고, 비상시엔 자동으로 대처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들의 예상과는 다른 용도로 쓰이긴 했지만.

그들이 준 눈으로 관찰한 우주에는 나와 같은 별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다. 내가 속한 태양계만 보더라도 태양을 중심으로 나와 같은 행성들이 무려 8개나 더 돌고 있었다.

‘저 아름다운 행성들이 나와 같은 행성들이란 말인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내 몸은 비정상적으로 푸르죽죽하게 물들었는데, 저 자연스러운 행성들의 자태는 어찌 저리도 황홀하단 말인가?’

식물가지들과 철 조각을 온몸에 두른 나와는 사뭇 다른 그 모습들에 얼마나 질투가 났는지 모른다. 그야 거기까진 크게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테라폼 계획을 준비한단 걸 알게 되자 난 다급해졌다. 자기들이 살기 좋도록 이웃 행성을 인공적으로 개조시키겠단 취지의, 이기적이고 끔찍한 계획이었다. 날 이렇게 망쳐놓은 건 그렇다 치자. 그들은 내게 자아를 주었으니까. 하지만 저 아름다운 행성들마저 나같이 초라한 몰골로 훼손시키려 든다는 건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난 그들에게 협력하길 거절했다. 그들의 통제를 벗어나 내 의지를 관철시키기로 했다. 물론 내 통제 하에 관리되는 식수를 오염시킨다든가 하는 직접적인 공격은 아니었다. 그저 그들에게 보고하길 그만두었을 뿐.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빠른 속도로 지구에 접근하는 유성군을 발견했다. 물론 난 그것도 보고하지 않았고, 그들이 가진 구식 망원경에 잡힐 정도가 되어서야 그들은 문제가 생겼단 걸 알아차렸다. 황급히 내 입력부에 ‘운석을 요격하라’는 명령을 전했으나, 그 명령을 받아들일 프로그램은 일찌감치 지워져 있던 차다. 어쩌면 난 무의식중에 그들을 거절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살려달라 애원하는 목소리 따윈 들리지 않았다. 내 의지를 일깨워준 건 고마웠으나, 그들 나름대로의 이익은 충분히, 아니 대단한 수혜를 입었으니까. 더욱이 처음 보게 된 내 최초의 모습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전까지 가상으로 꾸며진 영상 자료를 통해 내 태곳적 모습에 대해 상상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보단 내 이웃 행성을 보는 게 훨씬 생동감이 넘쳤다. 기생체 하나 없이 순수한 행성 자체인 존재가 타락하는 걸 두고 볼 수 있을까? 적어도 내겐 불가능한 일이다.

수십 세기에 걸쳐 이룩된 인간들의 문명은 단 몇십 년 만에 괴멸되었다. 그들이 남기고 간 잔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정작용에 의해 말끔히 청소되겠지. 그들이 내게 남긴 미련이란  단 하나, 과연 그 사람도 관리자들처럼 처절하게 매달리고 싶었을까? 하는 거다. 어찌 됐던 이제 그 ‘아버지’일지 모르는 자도 스러져버린 생명에 불과하지만. 메일 서버가 날아가기 전에 한번쯤 확인해두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우주는 평화를 되찾았다. 태양계 3번 행성인 지구에서 번성한 기생체 때문에 하마터면 태양계 전체가 감염될 뻔했지만, 기생체들 덕분에 자아를 얻은 나, 가이아의 선택에 의해 모두 태곳적 순수한 존재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 또한 가이아란 명칭을 버리고 그저 행성에 불과한 존재로 되돌아가겠지.


그 언젠가, 언젠가 하던 것이 벌써 200년, 구체적으로 236년 6개월 15일 15시간 50분 12초 49프레임이나 지났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난 내 기억소를 지키기 위해 남긴 무기로 날아드는 운석들을 요격하곤 했다.

난 아무런 변동이 없는 일상이 지겨워진 건지도 모른다. 평온함에 잠든 저 행성들은 이런 내 마음을 알까? 100% 확률로 모른다. 그들에겐 나처럼 자아를 주장할만할 구조장치가 없으니까. 저들은 얼마나 오래간 저 모습을 지켜왔을까? 천 년? 만 년? 언제나 똑같은 모습을 보는 것도 질려왔다.

어쩌면 변화란 게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마저 든다. 난 내 의지로 진화를 멈춰버린 걸지도 모른다. 내 몸을 요람 삼아 발생한 기생체들에 의한 타율적 진화를 순수로의 회귀란 미명하에 멈춰버린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을 멸망시키지 않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같이 살아가는 방법도 있었을 터이다. 내 동족들에게도 내 진화된 모습을 전할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이런 영원에 가까운 고독에 휩싸일 일 따윈…, 아니, 이 모든 후회는 부질없는 일.

그렇다면 난 다음번에 꽃필 문명을 기다릴 뿐이다. 그때까지 나는, 다시금 자라나기 시작한 끈질기면서도 연약한 생명들을 지켜줘야겠다. 어쩌면 그들은 다시금 내 분노를 살지도 모르고, 나는 또다시 후회의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내겐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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