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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유서

2009.01.23 01:5501.23

가지마. 거기 가지마.
밤새도록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아침이다. 전화가 걸려왔다. 친구였다. 만나자는 전화다.
어디서?
맨날 보던데 서 보지 뭐.
가지마. 거기 가지마.
밤새 들려오던 경고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거기는 싫다고 했다.
그래. 그럼 거기 말고 XXX에서 만나. 이따 보자.
전화를 끊었다. 불안감은 가시지 않는다.

약속 시간이 다가 왔다.
지하철을 탔다. 졸음이 몰려 왔다. 밤잠을 설친 덕분이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나의 죽음을, 내 친구의 죽음을, 내가 지금 가려는 바로 거기에서 일어난 사고를.
가지마 거기 가지마
나는 경고를 잘못 해석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기 가면 안된다.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받지 않는다. 내려야 할 곳이 다가왔다. 거기 가고 싶지 않았다. 친구는 계속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거기 가고 싶지 않았다. 친구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친구는 그곳에 갈 것이다. 친구를 데려와야 한다. 하지만 머리 속에서 끔찍한 사고의 광경이 떠올랐다. 거기 가고 싶지 않았다. 친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친구를 데려와야 한다. 하지만 거기 가고 싶지 않다.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치고 말았다. 친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친구를 데려와야 했다. 하지만 거기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거기 가지 않았다. 아니 나는 단지 조금 늦었을 뿐이다. 그렇게 나는 살아 남았다. 하지만 친구는 그러지 못 했다. 나는 조금 늦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날 밤 알게 되었다. 나에게 경고를 내려주었던 것의 정체를.
그것은 바로 나였다. 나의 유령이었다. 그날 거기서 죽었어야 했던 나의 유령이었다.
아니 그날 거기서 죽었던 나의 유령인 것이다.
나의 유령은, 그날 거기서 죽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나에게 경고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친구는 그러지 못 했다. 그리고 나의 유령도 되살아나진 못했다.
어떻게 유령이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지 모른다.
어떻게 그것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 그것들이다. 세상의 모든 유령들이다.
그것들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왔다.
내 눈엔 보였다. 그 날 이후, 내 눈엔 그것들이 보였다.
그것들은 살아있는 자신과 꼭 닮아 보였다. 아니 어떤 것들은 조금 더 늙었고, 어떤 것들은 더 많이 늙어 보였다. 그들에게 남겨진 시간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살아있는 자기 자신을 쫓아 다녔다.
쫓아다니며 들어주지도 않는 자신에게 충고하고 경고하고 원망하고 절망했다.
그것들은 과거를 되돌리고 싶은 것이다.
나의 가족들의 유령도 보았다.
그들은 나를 연민의 눈초리로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미안하다. 잘못했다. 내가 몰랐다.
친구의 장례식에선 친구 부모님의 유령도 보았다.
그들은 원망 어린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넌 알고 있었잖아. 넌 할 수 있었잖아.
그렇다. 그것들은 내가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면 내가 말을 건다.
하지 말라고 해 가지 말라고 해
그리고 외면한 체 도망치는 나를 원망한다.
넌 알고 있잖아. 넌 할 수 있잖아.
그리고 나의 유령은 나를 쫓아다니며 말한다.
그건 내 몸이야 돌려줘. 내가 살려줬잖아. 왜 나는 살아나지 못 하는 거야. 돌려줘. 살려줘.
그리고 밤마다 내가 잠이 들면, 내 몸을 빼앗으려고 나에게 덤벼든다.
내 몸이야 돌려줘. 나 덕분에 살아남았잖아 왜 나는 살아나지 않는 거야. 돌려줘 내 몸이야.
내 유령으로부터 도망쳤다.
하지만 이내 발각되고 만다. 자석처럼 내게 달라붙는다.
돌려줘. 내 몸이야.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딜 가도 그것들은 있다.
도와줘. 살려줘.
못 보는 척 해도 소용없다. 그들은 알고 있다 내가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그것들을 속일 수는 없다.
넌 할 수 있잖아 넌 알고 있었잖아.
도망칠 곳이 없다. 도망칠 수가 없다.
넌 할 수 있었잖아. 넌 알고 있었잖아.
그렇다. 나는 알고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난 어떻게 하면 과거로 갈 수 있는지 안다. 난 할 수 있다.

늦기 전에 나를 찾았기를 바란다. 네가 원하는 내 몸을 돌려줄게.
난 이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내가 저지른 잘못을 바로 잡을 것이다.
궁금하다. 그날 내게 경고를 내렸던 것이 지금의 나인지. 아니면 그때 거기서 죽었던 너인지.
곧 알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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