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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마음 그리고 심장

2009.01.15 22:5201.15

우리는
막상 현실 속에선,
정작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결국 겁쟁이에 불과하다.

0.

“‘마음’이란 건, 어디에 있는 걸까.”
그 질문에 ‘마음’은 내게 대답했다.
‘어째서 궁금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대답대신 심장이 뛰고 있었다.

1.
순간, 심장에 금이 가버린 것처럼, 마음이 깨어질 것처럼, 아파왔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마치 7년 전 그 순간이 다시 눈앞에 펼쳐진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얼어붙어 있었던 심장이 멋대로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7년간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던 심장이 뛰어오르면서 느껴지는 고통에, 나는 그제야 나 자신이 살아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대출카드부터 제출해주시겠어요?”


기억하고 있다. 잊을 리가 없다. 그저 잃어버렸을 뿐인 시간들. 나는 잠시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면서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아아, 하필이면 거기에는 고등학교 시절의 나의 어색한 교복차림의 모습이 박혀있는 대출카드가 존재했다. 나는 미칠 듯이 뛰어오르는 심장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카드를 내밀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의 손에서 사라져가는 대출카드. 나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이젠 어찌 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과는 다르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대출카드의 바코드가 찍히면서 나의 신상정보가 떴을 뿐이었고, 평소와 똑같은 책의 대출은 이루어졌다. 나는 정말로 나의 눈이 고장 나길 바라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가슴 깨의 명찰을 슬쩍 바라보았다. 아─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우연이었다.


“대출기간은 15일입니다. 연체되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나에게는 너무나 어색한, 하지만 누가 봐도 자연스러운 환한 미소와 함께 나에게 대출카드와 3권의 무협소설이 돌아왔다. 나는 누가 봐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찰나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책과 대출카드를 집어 들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문을 열자 폐마저 얼어붙어 버릴 것 같은 차가운 바람이 나를 감싼다. 이것이 현실이다. 한없이 차갑고, 외롭고, 괴로운 것이 나의 세계였다. 그제야 나는 차가운 바람에 제정신으로 돌아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가슴이 금방이라도 깨어질 것처럼 아팠다.


괴로운 고통에 금이 간 가슴을 향해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조금씩 나아가려는 나의 발걸음은 너무나 위태로워보였다. 한걸음, 다시 한걸음을 걸으려 노력해보았지만 이미 심장이 폭주해버려 그 광기가 세계를 가득 매웠다. 이대로 집으로 뛰어가 이불 속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실컷 울고 싶은 생각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나의 의지대로 뛰지 않는 심장은 계속해서 나에게 살아있는 고통을 부여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죽어 있었다는 걸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어떠한 삶을 살아왔던 것일까. 억울했다.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최악의 인생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본 그 모습은 너무나 눈부시고 아름다워 감히 내가 다가갈 수 없는 위치에 존재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너는, 그리고 우리는 다른 세계에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더 이상 앞으로―내가 살아가야 하는 세계로―나아갈 수 가 없었다. 심장으로부터 시작된 죄어오는 고통은 이미 나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면 할수록 상상속의 나는 더욱더 뒤로 질질 끌려갔다. 그것은 마치 자석과도 같은 느낌이어서 이미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음은 멋대로 뛰고 있었다.


심장을 부수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건만―


영혼을 버리고서라도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건만―


마음을 잃어버리고서라도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건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7년 전부터 나에겐 이미 선택권이 없었다.


나는,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걸어 나갔다.


심장 대신문을 부수고 싶은 심정으로 거칠게 문을 열었다.


쾅!


언제나 약속된 침묵과 정적을 유지하고 있던 도서관의 차분한 공기가 깨어졌다. 나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금들이 모두 산산조각 나버리는 소리였다.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오직 단 한사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침착하게 걸으려고 해도 나의 발걸음은 한없이 빨라져만 갔다. 도저히 다다를 수 없을 것 같았던 내가 살 수 없는 세계. 나는 그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보고 싶었어.”


가슴이, 그리고 마음이 새하얗게 사라져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녀만이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환상처럼 7년 전의 슬픈 웃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나는 7년전, 그때처럼 또다시 이기적인 구원을 얻었다, 라고 가슴 깊이 깨달았다.


“오랜만이야.”


울고 싶었다. 심장이 너무나 아파서 기뻤다.


어쩌면, 그녀가 나의 심장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런 나날들이 조금씩 떠올랐다.





(2).


그때부터, 착각이라고 믿고 싶을 정도로, 심장이 아파왔다.

그녀는 단 두 명뿐인 문예부에서조차도 쓸쓸히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억울했다. 금방이라도 입에서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치고 싶은 것처럼, 바닥이 꺼져라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을 만큼, 주먹이 으스러져라 꽉 쥐고 있음에도 분이 풀리지 않을 정도로, 분했다.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었기에 더욱더 화가 났다.


하지만 나는 겁쟁이라서 따지기는 커녕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하얀 하복의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밖엔. 결국엔 그녀의 무신경한 권유에 나는 문예부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어째서 나는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심장이 뛰어야만 하는 걸까. 가슴이 아파야만 하는 걸까. 자꾸만 눈길이 가는 걸까. 그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불리하고 억울한 일이었다. 누군가가 계속해서 신경 쓰인다는 건 꽤나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새하얗고 작은 손.


발표문을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으로 읽어나가는 입모양.


선풍기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얇은 목 주변.


아아, 나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불리한 상황에 이르렀을까. 정말이지 나 자신이 미울 정도로 나는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문제는 그녀는 나만큼 괴로워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고, 그것이 나를 더욱더 초라하게, 그리고 초초하게 만들었다.


“오늘 제가 나누고 싶은 책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입니다. 우선 괴테는 독일 고전주의의 대표자로서 대표작으로는 ‘파우스트’, ‘마왕’,‘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있습니다. 이중에서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일기형식이지만 대화체를 쓰고 있음으로 해서 독자들과 대화를 하는 듯한 느낌의…”


그녀도 내가 자신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 아마도 모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더욱더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와 잘 지내왔는데. 그녀가 무엇을 하던, 무엇에 관심을 가지던, 무엇에 즐거워하던,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전쟁처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는데.


어째서 나는 이런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심장이 고장나버린 계기라던가, 원인이라던가, 분명 그런 것들이 있었는데, 이젠 이미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려서 잊어버렸다. 나는 그런 사실을 깨닫고는 나 자신이 아마도 그 사실에 대해서 기억해내고 싶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문제는 원인이 아니라 이유였다. 어째서 나는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야만 하는 것일까.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심장병에 걸려버린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에겐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살아가는 건 불가능 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고 나는 도저히 이런 비참해진 나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녀에게로부터 눈을 돌리고, 귀를 막고, 신경을 끊어버리면 그만인데 그것이 쉽게 행동으로 옮겨지지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마음’이란 녀석의 깊숙한 곳에서 나는 싫은 척하면서도 원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사실을 깨닫고 있음에도 나의 행동은 고쳐지지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더욱더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베르테르는 결국 자살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에게 있어선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베르테르는 영원히 그녀, 로테를 마음속에서 지울 수가 없을 테니까요.”


마음.


순간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불쾌한 환상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마음. 마음? 계속해서 읽으니 마치 내가 모르는, 의지와는 동떨어진 단어의 느낌이 들었다. 마음. 마음. 마음. 마음. 마음. 마음. 마음. 마음. 마와 음. 마음. 이 녀석 때문일까? 마음이 내게 시켜서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확실히‘마음’이란 건 확실치 않고, 변동이 심하며, 착각하기 쉬우니까. 하지만 마음이란 건 어디에 있는 거지?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에 ‘마음’ 이란 녀석 때문에 이런 감정이 자꾸만 드는 거라면, 결국에 나는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조그만 희망이 생겨났다. 하지만 마치 도망칠 곳을 찾아낸 겁쟁이와 같은 기분이었다.


“베르테르에게 그녀를 지우는 방법은 죽음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나는 베르테르처럼 그렇게까지 치열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나는 겁쟁이에 불과했다. 그저 후덥지근하게 달아오르는 여름의 열기에 새빨간 얼굴을 가리고, 어느새 송글송글 맺혀 있는 식은땀을 닦아내고, 세상의 어떤 목소리보다 더 큰 심장의 고동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그런 겁쟁이에 불과했다.
그녀는 언제나 사막에 홀로 남겨진 듯한 쓸쓸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가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그녀를―


하지만 나는 무엇이 두려웠던 것일까.


3.


솔직히 말하자면 후회했다. 후회할 것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도저히 나의 충동을 감출수도, 멈출 수도 없었다. 정말이지 어리석고 한심한 선택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은 내게 말했다. ‘넌 겁쟁이구나.’ 라고. 나는 더 이상 도망칠 용기조차 없었다. 그녀는 이젠 내가 아닌 새하얀 김이 올라오는 종이컵의 귀퉁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에는 차가운 겨울 햇살에 반짝이는 은색 빛줄기가 나를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체 그저 고개를 푹 숙여 시선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정말 오랜만이네. 한 8년만인가?”


“7년.”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해 계속해서 커피가 든 종이컵을 입에 가져갈 뿐이었다. 7년 동안 세상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그리고 나, 그리고 그녀가 살아가는 세계 또한 변해 있었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서로가 서로에게서 멀어져 있었다. 나는 26살의 백수에 불과했고, 그녀는 도서관 사서로 어느새 우리는 변해 있었다. 하지만 7년 전 그 때의 나날들이 마치 어제와도 같았기에 나는 이러한 우리의 모습이 거짓 연기처럼 느껴졌다.


일상이었던 교복에서 허름한 운동복과 단정한 정장으로, 일상이었던 두발규제에서 멋대로 헝클어진 머리와 핀을 통해 단정하게 고정되어 있는 머리로, 일상이었던 운동화에서 슬리퍼와 하이힐로, 그리고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있는 우리 사이의 거리도, 일상으로부터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어설픈 거짓말처럼 어색했다.


“그 동안 뭐하고 지냈어? 라고 일단은 물어 봐야겠지?”


“…그냥. 그럭저럭 잘 지냈어. 너는?”


정말이지 누가 봐도 아무런 생각이 없는 말투라고 나 스스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외에 다른 대답을 상상조차 할 수도 없었다. 정말로 말 그대로 나는 특별할 것 없는 인생을, 그리고 지금에서야 죽은 채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나에겐 최선의 대답이었지만 그렇기에 조금은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그럭저럭 잘 지냈어.”


자꾸만 종이컵이 입으로 다가왔다. 무의식중에 나는 이미 커피를 다 마셔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보고 싶다.’라는 생각에 견딜 수 없이 괴로워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녀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 있어선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기에, 나는 또다시 ‘겁쟁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


“그래…”


이따금씩 자주 쓰는 표현인 ‘그래.’ 조차도 묘한 무거움을 남기고 흘러간다. 여러 가지의 말을 함축적이면서도 가슴 시린 단어 속에서 우리는 서로 말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욱더 가슴이 메말라가는 것을 느꼈다. 심장은 여전히 고장 난 것처럼 쿵쾅거리며 내 귓가에 울리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 자신이 화가 나기보다는 오히려 슬펐다. 어째서 나는 이런 지경까지 와버린 ‘겁쟁이’가 된 것일까.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썼을 뿐, 나는 아파서 괴로웠고 그리고 그녀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그 뿐이었다. 나는 결국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핸드폰 있지? 가끔씩 연락 주고받자.”


그것이 나에겐 마지막 인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떡일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알고 있을까. 내가 이렇게나 미안해하고 있음을. 아니, 차라리 몰랐으면 한다. 이렇게나 한심한 ‘겁쟁이’의 속내 따윈 알 필요도 없다. 결국 그녀에게서 먼저 도망친 건 나였으니까.


‘다음 내리실 역은 강변역입니다.’


핸드폰 액정에 남겨진 생소한 번호. 그녀는 이미 번호를 바꾼 모양이었다. 나는 아직 그대로였지만 모른 척 그녀에게 전화번호를 불러주었다. 그녀는 내가 부른 번호를 받아 누르고 바로 핸드폰을 닫았다. '번호 안 변했네? 나중에 연락할게.'라고 말했다. 여전히 그녀에겐 어울리지 않는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혹시 아직도, 심장…아프니?”


나는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심장을 날카로운 칼날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파서 그녀는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결국 나는 ‘그럼 나중에 또 보자.’ 라는 말과 함께 여기로 와버렸다. 그녀를 거기에 그냥 내버려두고, 나는 나의 행동이 올바르다고 거짓말을 하며 쓰러지지 않고 용케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에게서 벗어났는데, 그럼에도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어오르고 있었다. 가슴을, 그리고 심장이 꿰뚫린 것처럼, 그리고 그 구멍으로 공허한 바람이 스쳐가는 것처럼, 아파왔다. 쓰려왔다. 그저 괴로울 뿐이었다.


‘다음 내리실 역은 성내역입니다.’


‘사실, 그때 네가 나를 잡아주지 않아서 고마웠어.’


그녀는 환하게 거짓웃음으로 내게 말했다. 어째서 마지막에 그런 잔인한 말을 그녀는 내게 했던 걸까. 가슴을, 그리고 심장을 움켜쥐고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하지만…그래도 하지만…나는 또다시 그녀가 보고 싶었다.





(4)


베르테르는 위대하다. 그는, 그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하지만 베르테르는 미련하다. 그는, 이기적이기에 목숨을 버렸다.


그것은 전혀 그가 결국엔 위대한 겁쟁이였음을 의미한다.


“사실 나는 네가 무서워.”


그녀는 자신이 겁쟁이라고 내게 말했다. 나는 전혀 외의 한마디에 무어라 할 말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온 세상을 뒤덮은 눈이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목소리를 먹어버려서 주변은 지극히 고요했다. 그저 세상은 이미 멸망해 우리 밖에 남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빛나는 졸업장이 구겨지는 것도 모르고 그녀는 떨며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사실은 가까스로 용기를 내 너의 손을 잡을 때마다 나는 현기증이 일어난 것처럼 아찔했어. 이대로 어디론가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하지만 그래도 무섭거나 두렵지는 않았지. 하지만 이대로 너와 안아버린다면 나는 아마도 되돌릴 수 없을 거야.”


조금씩, 나는 지금이 이별의 시간이란 걸 깨닫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 이미 우리는 다른 학교라는 세계로 가야만 했다. 그리고 나와 그녀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랬기에 이별은 기정사실이었다.


“무슨…소리야”


정말 모르겠다. 어째서 그녀가 저런 말을 해야 하는 지, 어째서 나란 겁쟁이를 겁내고 있는 건지, 나는 왜 아무것도 할 수 없는지. 세상은 모르는 것 투성으로 가득하다. 심장의 박동마저도 사라진 그녀와 나의 시간 속에서 나는 ‘마음’이란 정말 어디에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했다. ‘마음’이라면 나에게 현명한 정답을 안겨 줄지도 모른다.


“나는…너를…”


그리고 그녀는 오열로 가득한 침묵으로 흐느꼈다.


“…아냐…이겨 낼 거야. 시간 앞에서 영원한 건 없으니까.”


“…설명해줘. 도대체 무슨 일이야.”


“싫어. 바보야.”


그녀는 울며, 웃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보여주는 밝고 환한 웃음이었다.


“여기서 우린 이제 끝…아니, 시작도 없었으니까…‘영원’이야.”


끝이라는 말보다, 영원이란 말이 더욱더 가슴이 아팠다. 의미도 모르면서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마치 그 한마디가 영원히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는 선을 그어버린 것 같아서 억울했다. 하지만 납득은 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이건 모두 내가 겁쟁이라서 비롯된 결과이니까.


“넌 겁쟁이구나.”


아무것도 몰랐지만, 세상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느꼈던 시절.


나는 그렇게, 너무나도 간단히 간파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이야. 네가 겁쟁이라서.”


그리고 언제나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다.


나는 변명할 생각도 하지 못한 체 웃고 있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라는 생각을 했으니 나의 얼굴에 그렇게 쓰여 전달이 되었을 것이다. 당연히 나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음에도 대화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냥. 다행이야.”


하지만 나는 겁쟁이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기적처럼 내게 찾아온 그녀라는 행운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서 모른척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덜컥 겁이 들었다. 상사병이 걸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니 그저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갑작스러운 그녀의 고백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장난감이 아닌 진짜 자동차를 쥐어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좋아했고, 소중했지만 어떻게 가져야하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것이 나를 더욱더 혼란스러워 하는 겁쟁이로 만들었던 것이다.


어째서 나 같은 녀석일까. 그녀에게 나는 어울리지 않는데, 오히려 그녀가 모자란 나로 인해 피해를 볼지도 모르는데.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그녀가 나란 녀석에게 오히려 상처를 입진 않을까.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겁쟁이라는 대의명분도 존재했다. 세상 사람모두가 나에게 아무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랬다. 나는 지금 그런 현명한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잘하고 있다. 나는 무지하게 잘하고 있다. 정말로 스스로에게 칭찬이라도 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도 나를 원망하지 않고 있을까?


‘마음’이 내게 물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무슨 의도인지도 모르겠지만, 마음이란 녀석이 내게 이렇게까지 확실한 의사를 표현한 건 처음이었다. 언제나 우유부단함을 분해하면서도 눈감아 주었던 ‘마음’이 내게 말했다. 그것은 마치, 심장에 금이 가는 것처럼 금방이라도 깨어질 듯한 아픔과 세상을 울리는 살아있는 박동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꾸역꾸역 나를 죽여 갔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를 싫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에 나는, 역시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겁쟁이니까. 이런 사실마저도 그녀는 알고 있었을까.


처음 누군가를 좋아했던 우리는 겁쟁이였다.


“10년 후에도 우리는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젠 가르쳐줘. 베르테르. 이제 나는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 걸까.



(6)


뜻하지 않은 사랑은 그래도 나에게 찾아왔다.


“어째서 제가 싫은 거죠?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건가요?”


그렇지 않다. 오히려 나란 녀석을 좋아해준 것만으로도 나는 갚을 수 없는 고마움에 감사하고 싶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의 몸은, 그리고 마음은 또 다른 그녀에게로 움직여 주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또 다른 그녀에게서 멀어지려 노력했다.


“싫은 점이 있다면 고칠게요. 제가 싫은 이유라도 제발 말해주세요.”


그녀는 처절했다. 나처럼 겁쟁이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 너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잘못은…아마도 나라고 생각해.”


거기서 나는 무언가를,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기억상실증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기억을 다시 되찾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또 다른 그녀에게선 나의 심장이 반응하지 않았다. 가슴도, 마음도 괴로운 고통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또 다른 그녀에게 더 이상 다가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변명에 불과했다. 나는 그녀를 아직 잊지 못했던 것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본, 마음속에 파도처럼 밀려오던 설레임, 마음속을 날카로운 무언가가 박혀 있는 듯한 아픔, 그리고 언제나 살아있는 고통을 내게 안겨 주었던 심장. 그리고 마음.


그 모든 것이 내겐 특별했었던 것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서야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영원이란 것이 없음을 원망하며 그녀에게로 부터 도망치고 있었음을.


어차피 인간은 영원할 수 없는데, 그것은 너무나 어린아이와 같은 투정이었다.





7.


더 이상 도망칠 수 있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음이란 건, 마음대로 되지가 않아서 괴로웠다.


그녀의 말대로 심장에 마음이 있다면, 이미 나의 마음은 미쳐버렸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컨트롤 할 수 없는 심장은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려는 것처럼 날뛰었다.


그만해…그만해…이젠 그만해…네가 만들어낸 감정과 기분 따위에 나는 더 이상 놀아나지 않아.


그러자 마음이 내게 말했다.


“내가 이러는 건 너 때문이잖아.”


나는 거기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8)


“너의 글에서는 향기가 나. 눈을 감아도 귀를 막아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지만 숨을 쉬지 않으면 살수가 없잖아? 숨을 쉬다보면 느낄 수 있는 향기가 정말 피할 수 없는 현실인거지. 넌 그런 현실을 글로 나타낼 수 있어. 그것은 마치 내가 정말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조금씩 마음이 아파서 결국엔 견딜 수가 없었다.


“어?”


“아니, 이번에 쓴 글들은 그런 느낌이었다고.”


“아아…고마워…”


그리고 조금씩 젖어드는 침묵. 사실 우리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수많은 대화가 오고가는 이런 종류의 침묵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할 말이 있는 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마음'이란건 어디에 있는 걸까?”


이따금씩 그녀는 뜬금없는 말을 하기 좋아했다. 하지만 질문의 과정을 생략했을 뿐, 이미 그녀는 많은 생각을 한 끝에 나에게 질문을 했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단번에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조금 더 기다리면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부연설명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만큼 불확실한 감정은 없잖아? 하지만 이 시대의 우리들은 너무나 쉽게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그것이 분명 마음에 들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 누구도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하지. 그러면서도 우리는 마치 마음이란 걸 옛 친구처럼, 습관적인 변명처럼 마음이란 걸 이유로 삼곤 해.”


그녀는 쉽게 웃음을 만들어낼 줄 알면서도 자신의 진짜 표정을 드러내기는 꺼리는 습관이 있었다. 하지만 이럴 때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대해서 생각할 때면, 그녀는 언제나 머나먼 장소를 바라보는 듯한 쓸쓸한 눈으로 웃고 있었다.


“뇌가 아닐까? 인간의 생각은 기억에서 시작되니까. 아마도 기억이 저장되는 전두엽 같은 것일지도 몰라.”


언젠가 어릴적 과학 잡지에서 읽었던 기억에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 말을 듣자 그녀는 수긍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이며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마음이란 건 조금 더 따뜻한 곳에 있다고 생각해.”


“따뜻한 곳?”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따뜻한 곳. 나는 쉽게 떠올릴 수가 없었다. 계속되는 고민에 그녀는 나의 표정이 우스웠는지 큭큭, 입을 가리며 웃었다. 나는 민망한 기분이 들어서 생각하기를 관두려 했으나 한편으로는 나의 표정이 어떤지 궁금했다. 저런 종류의 웃음도 괜찮구나, 종종 저런 표정을 일부러라도 짓게 주고 싶었다.


“아마도 심장이 아닐까?”


“심장…”


“사람이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는 것이 심장이잖아. 뇌가 죽어도 생명은 사라지지 않지만, 심장이 멈춰버리면 되돌릴 수 없게 되어버리니까. 그리고 조금은 로맨틱하지 않니? 심장이란 거.”


“그런가…심장인가…”


그녀는 또다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지간히 나의 심각한 표정이 웃긴 모양이었다.


“뭐야.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어떡해. 내가 만약에 틀린 말이라면 나를 원망할 거 아냐.”


“아, 아냐 그런 게 아니고,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진심으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나는 확신했다.


“…그럼 나의 '심장마음론'을 신뢰해준 것에 대해 보답으로 비밀하나 알려 줄까?”


정말로 비밀스러운 웃음에 나는 대답도 잊어버린 체 촌스럽게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녀는 살짝 나에게로 몸을 기울이고 입가에 손을 가져가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저절로 더욱더 자세히 들으려 귀를 그녀에게 더 가까이 가져갔다.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심장이 아파.”


그것은 이미 전염되어버린 것 같은 심장병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터져버릴 것 같은 심장박동 소리를 뒤로 한 체, 어디론가 날아 가버릴 것 같은 미세한 호흡, 포근하지만 수수한 비누냄새. 그리고 그녀의 비밀스러운 목소리만이 세계의 전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도 죽을 것처럼 아파.”


그 순간, 심장에 금이 가버린 것처럼, 마음이 깨어질 것처럼, 아파왔다.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는 순식간에 온몸의 피가 얼어붙어버린 것처럼 호흡하는 방법을 잃어 버렸다. 그녀는 이따금씩 뜬금없는 말을 하길 좋아했다. 나의 심장은 시간을 잊어버린 것처럼 멈춰서버렸고, 나는 동급생이라는 거리를 잃어버린 채로 멈춰 섰다.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심장이 고장 나 있었다.


저 멀리 들려오는 축구부의 고함과,


조금씩 밀려오는 후덥지근한 여름의 공기와,


언젠가는 헤어질 날이 시작되어버린 우리들의 시간을 나는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심장이라고 생각하던 마음속에 작고 따뜻한 포근함이 박혀버렸지만, 정작 나는 그 포근함을 어떻게 다루어야만 하는지 알지 못해 더욱더 불안해졌다. 나란 녀석으로 괜찮은 걸까. 이렇게나 겁쟁이일 뿐인 나란 녀석이 그녀와 함께여도 세상은 멸망하지 않는 걸까. 그럴 리가 없다. 그런 부조리가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다. 이건 분명 그릇되었으며, 영원하지 못할 스토리일 것이다.


“사실…나도…”


나는 가슴이 너무나 두근거려 더 이상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전신이 새로운 감각에 떨려오는 것 같았다. 아아―이렇게나 무서운 감각이었다면 나라는 겁쟁이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여름의 치열할 열기 속에서 나는 마음속에 들어와 버린 포근함과 비슷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을 알고 있는 비극적인 소설 속의 1장과도 같았다. 끝이 어디인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 순 없었지만 이미 우리들에게 끝을 향한 질주가 시작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심장이 너무나 아팠었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고통마저 느낄 수 없을 정도로───새하얗게 사라졌다.


나는, 언제나 나는,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세상에 영원이란 없음을 원망했다.


언젠간 사라져버릴 그녀를 가슴아파했다. 그랬기에 조금만 더 곁에서 바라보고 만족할 생각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리고 만족하자. 세상을 향해 그녀를 놓아주자. 처음부터 내겐 과분한 행운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이기적인 구원이었다.


그 비극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내게만은 사막의 모래와 같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9.


심장은 계속해서 미친 듯이 뛰었다. 마치 지금까지 죽었던 심장이 그녀에게 반응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여전히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마음을, 그리고 심장을 죽이기엔 7년으론 부족했던 것일까. 어째서 나는 다시 만난 그녀에게 또다시 이끌리는 것일까. 이런 나 자신이, 그리고 ‘마음’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마음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서관에서 그녀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을 땐, 너무나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겁쟁이인 나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금기의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겁쟁이라는 의의를 거부할 정도로 나로썬 정말로 대담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과연 그것은 나의 ‘마음’이란 녀석이 시킨 행동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마음은 내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아니, 대답해줄 수가 없었다. 무협소설 3권이 제멋대로 널브러진 방에 쓰러져 나는 여전히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녀에게로부터 또다시 도망쳤다는 사실에 나는 나를 어찌 벌해야 하나,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있었다.


핸드폰의 진동에 나는 화면을 물끄러미, 저항 없이 액정을 바라보았다.


‘내일, 저희가 약혼합니다. 많은 격려와 축복 속에서 잘 살겠습―’


더 이상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낮에 종이컵을 들고 있던 손가락 사이의 반지가 떠올랐다.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도대체 나는 어떤 인간이기에 이런 죄를 저지르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걸까.


이제 한계였다.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심장이 미친 것처럼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견딜 수 없는 죄의식이 나를 짓눌러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내게 겁쟁이라서 다행이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이 7년간 나를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도망쳤다간, 정말 베르테르처럼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정신을 조금씩 들었을 땐, 이미 나는 달리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나를 기다려 주었던 그녀에게로, 영원히 달리고 있었다.


‘마음’이란 것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심장에도, 뇌에도,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어디에나 있었다. 나의 모든 것이 그녀를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이끌렸었던 것이었다.


나는 어째서 가슴이 이렇게나 아프게 되어버렸을까.


아…이젠 제발 인정해. 제발 인정해줘. 그래야만 난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아.

‘너의 글에서는 향기가 나. 눈을 감아도 귀를 막아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지만 숨을 쉬지 않으면 살수가 없잖아? 숨을 쉬다보면 느낄 수 있는 향기가 정말 피할 수 없는 현실인거지. 넌 그런 현실을 글로 나타낼 수 있어. 그것은 마치 내가 정말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그것이 나의 심장이 고장나버렸던 순간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이상하게도 슬퍼보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마음이란 것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렇지만 나는 덜컥 겁을 먹고 말았다. 그것은 태어나 처음 느꼈던 새로운 두려움이었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녀에게서 눈길을 땔 수가 없었던 것이 큰 죄라고 생각했다. 나 같은 녀석은 그녀에게 빠질 자격조차 없다고 여겼다. 그녀를 영원히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 것만 같아서 괴로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가 없었다.

마음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모든 것이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와 나는 영원하지 못할 것을 이미 깨달은 심장은 아파왔다.

그래서 나는 겁쟁이가 되어 도망치기로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베르나르가 이제는 경멸스러워 졌다. 그 녀석은 바보다. 멍청이다. 하지만 겁쟁이는 아니였다. 그는 자신과 그녀를 위해 목숨을 버릴 줄 아는 종류의 용감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겁쟁이다. 하지만 겁쟁이라고 해서, 베르테르처럼 죽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까지 해서 나는 그녀를 마음속에서 지워낼 자신이 없었다.
겨우 정신이 다시 들었을 땐, 이미 시계는 3시 34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미 거리의 간판들조차 어둠에 물들어 있었고, 오랜만에 바라본 달은 반쪽이 나버린 체 유유히 새카만 우주를 떠돌고 있었다. 불안감이 점점 치밀어 왔다. 여전히 나는 겁쟁이였다. 먼저 도망쳐버린 주제에, 버틸 수 있는 자신이 없어 멋대로 다시 돌아오려고 애쓰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같은 나 자신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바보다. 베르테르도, 나도, 바보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마음에서 지워버리려 베르테르의 용기를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되돌릴 수 없는 방법보다는 영원히 그녀의 곁에 남아있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저 살아서 그녀의 곁에 있고 싶었다. 죽음을 통해 그녀를 느낄 수 없다는 사실 조차 나에겐 너무나 쓸쓸하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그녀의 번호를 눌렀다. 통화음이 들려오고 나는 세계에서 점점 벗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이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또다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 사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알지만 나는…” 그럼에도 거부감을 들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나는…”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너, 너…를…”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좋아해…”

세계의 멸망의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려웠지만, 좋았다. 이 말은 꼭하고 싶었다. ‘마음’이 아닌, 심장도 아닌, 내가 꼭 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선 정말 베르테르처럼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잠시 동안 나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묘하게 통쾌한 행방감과 함께 불안감은커녕 안도감이 밀려왔다.


새하얀 눈이 어느새 하나 둘씩 내리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나는 귀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움직임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나타난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7년 전과 똑같은 슬픈 웃음을 짓고 있었다.


“…고마워…하지만…”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너무 늦어버린 걸까.

심장이 부서지는 소리가 마음 속 끝까지 울려퍼지고 있었다.


“내가 더 좋아해.”


정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진실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새하얀 눈이 내리는 새벽 3시 34분. 나의 고백으로 인해 이 거리의 인류가 전멸해버린 지금, 나는 조금씩 또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젠 달도 없었고, 별도 없었고, 결국 남아버린 건 나 자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조금씩, 조금씩 심장이 치유되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나는 겁쟁이의 심장을 지니고 있지만, 영원한 사랑은 불가능 할지도 모르지만, 우린 처음부터 영원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 속에서 심장이 아프다면, 나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더 이상 가슴이 아파서 울지 않아도 돼?"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건, 좋아하기 때문이니까.

나의 심장도, 마음도, 그리고 그녀도.

"응. 이젠 괜찮아."

그러니까 이제 나는 조금씩 용기내어 사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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