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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기다림

2009.01.10 01:4001.10

한 터가 있습니다. 예, 모든 이들이 그렇듯이 역시 자신이 태어난 때를 기억 못할 정도의 시간을 거친 그런 터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를 늙었다고, 혹은 젊었다고 부르기 어려웠어요. 늙음과 젊음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태어난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는, 자신보다 더 빨리 혹은 더 늦게 태어난 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는 젊지도 늙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항상 기다려왔습니다. 무엇을 기다렸을까요? 약속을요? 다른 이를요? 혹은 어떠한 때가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니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기다려왔던 것을 태어날 때부터 기다렸기에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녀는 태어난 때를 기억하지 못했지요.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인이 되어서 다시 만나게 되었고, 서로 사랑하다가 결혼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그들은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어요. 그녀는 그 모든 일을 보았어요. 하지만 그녀는 변함없이 기다렸습니다.
오래된 두 나라가 있었습니다. 서로 비슷하게 무능한 왕들과 관리들, 적당히 착한 시민들과 적당한 양의 악당들, 적당한 양의 부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가진 두 나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규칙적인 사신과 불규칙적인 상인들의 교류만을 가진 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아마 서로 가지고 있는 땅이 부족하다고 느꼈나봐요. 아니면 상대방의 광산이나 유전이 탐이 났을 수도 있지요. 어쩌면 단지 서로가 서로를 나쁘다고 생각했나봐요. 어쨌든 중요한 것은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역대 전통처럼 정규 군인들을 이용해 시민들을 징병해서 전쟁터에 내보냈어요. 그리고 서로를 죽이기도 하고 잠시 화해를 맺기도 하고 비열한 짓을 하기도 하면서 서로를 공격했어요. 마침내 많은 이들이 죽고 많은 것들이 파괴당하고 많은 일들이 생긴 뒤에 전쟁이 끝났어요. 왕들과 관리들은 서로의 손익을 따지며 머리아파했고, 시민들은 그 많은 것들에 대해 슬퍼했어요. 그녀는 그 모든 일을 보았어요. 하지만 그녀는 변함없이 기다렸습니다.
몇 명의 천재가 나오고, 수만명의 수재들, 그리고 수천만명의 범재가 나온 끝에 세상은 조금씩 변해갔습니다. 인간들은 바다 속 뿐만이 아니라 저 먼 우주로도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노동자들의 피땀이 스며들었던 곳은 로봇이, 글쟁이들의 부러진 깃펜이 쌓여있던 곳은 컴퓨터가 대신하게 되었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부족했던 옛날을 떠올리며 세상이 살기 좋아졌다고 생각했으며 소수의 사람들은 그들이 잃은것들에 대해 생각했어요. 하지만 오래 전부터 인간을 지배해 온 하나의 법칙에 의해 아무도 소수의 사람들의 말에는 신경쓰지 않게 되었고 세상은 계속해서 그들이 좋아졌다고 생각한 방향쪽으로 변해갔어요. 그녀도 역시 급속히 변해갔지요. 인간들은 언제나 그녀를 깎고, 깎고 또 깎았지요. 하지만 그녀는 변함없이 기다렸습니다.
전 세계의 이목을 끈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아마 이번 전쟁은 그간의 긴 전쟁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전쟁이 될 것입니다. 전쟁의 규칙 자체를 깨트렸기 때문이지요. 전쟁은 서로 싸우는 행위입니다. 더 자세히 들어가 한쪽의 시선에서만 본다면 전쟁은 상대편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입니다. 그 어떠한 일을 해서든 상대방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것이 전쟁이지요. 하지만 이번에 일어난 전쟁은 그렇지가 않았어요. 이번 전쟁은 상대와 자신 둘 모두에게 피해를 준 전쟁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추를 눌렀어요. 단 십수발의 미사일로 전세계가 끝이 나는 듯 했어요. 그녀도 역시 급속히 변해갔어요. 인간들이 깎고, 또 깎아놓은 그녀는 다시 군데군데가 패이게 되었지요. 하지만 그녀는 변함없이 기다렸습니다.
미사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와 그것이 불러일으킨 후폭풍에 의해서 인간들은 대부분이 죽어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소수의 인간들은 여전히 살아남아 그녀의 위를 여기저기 돌아다녔지요. 곧 그들은 역시 살아있는 다른 이들을 만나서 다시 마을을 형성하고 소규모 공동체를 형성해갔어요. 그들은 그곳에서 다시 절망을 거름삼아 꿈을 심고 희망을 재배하며 처음부터 시작해 나갔어요. 하지만 미사일이 불러일으킨 후폭풍은 계속해서 지상의 그들을 괴롭혔지요. 계속해서 그들 중 일부가 쓰러져갔고, 남아있는 사람들도 극심한 환경에 힘들어 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되었어요. 그들은 지상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들을 공중 위로 떠올려 보냈어요. 옛날 두 형제의 노력으로 인간이 하늘을 개척하고 우주를 개척한 뒤로 항공 역사에 길이 남을 큰 업적이었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했어요. 그들 모두는 지쳐있었습니다. 이제 조금의 위기만 더 오더라도 그들은 쓰러질 것만 같았어요. 그녀도 역시 공중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정말 진귀한 경험이었어요. 그녀는 공중 위에 있는 그녀를 보았으며, 그녀를 올려보고 있는 그녀를 내려 보았습니다.
터는 누구보다 아래에서 모든 것의 바탕이 되며 모두를 받쳐주는 이에요. 적어도 그녀 위의 것들에게는 그랬어요. 그녀는 모든 이들의 아래에서 기다리는 이였어요. 아마 기다림의 대상이 위에서부터 내려오기 때문인가봐요. 하지만 그녀는 지금 위에 있어요. 여전히 그녀 위에는 인간들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있었지만 그녀는 그녀를 올려다볼 수 있었고, 그녀를 올려다보는 그녀를 내려다 볼 수 있었어요.
그녀는 그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녀는 기다렸어요. 변함없이 기다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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