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2009.03.05 00:3703.05


어느 날의 일이었다. 등교길에 발끝을 보며 걸어가던 나는 새삼스럽게 내가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다리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다리는 생각하는 중에도 움직인다.
'나는 지금 8자로 걷고 있을까, 아니면 11자로 걷고 있을까?'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계속 8자로 어기적어기적 걷고 있었다면 그것만큼 꼴불견인 것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이제부터 11자로 걷자.'
나는 힘차게 무릎을 들고 그대로 곧바르게 대지를 향해 내리찍었다. 머릿속에서 두웅~하고 큰북이 울렸다. 너무 힘차게 내딛은 내 다리는 저릿저릿하기까지 했다. 내 발이 닿은 지면에서부터 파장이 시작되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멈춰선 탓에 양 옆을 수많은 학생들이 스쳐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처럼 소음이 귓가에 밀려들어 온다. 학생들의 무리가 나를 두고 멀어져 간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안면 근육을 구겼다.
나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주의 깊게 보면서 학교로 향했다. 관찰은 책상 앞에서 끝났다.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았다. 곧 담임선생님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제와 다름없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에게는 얼굴이 없었다.
나에게도 얼굴이 없었다.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며 그것이 누구인지는 대강 알 수는 있었지만, 하나의 이미지로서 얼굴형상이 조합되지 않았다. 언제부터 사람들의 얼굴이 없어졌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언제부터 나의 얼굴이 없어졌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문득 깨달았을 때 세상 속에 얼굴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얼굴이라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문제될 건 없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위로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학생이 내 세계관을 뒤흔들어버렸다.
"안녕? 난 '영'이야. 잘 부탁해."
돌연히 나타난 한 명의 학생이 내 옆에 놓인 빈 책상의 의자를 빼며 그렇게 말했다. 전학생인가? 그 학생은 눈이 없는 나에게 똑바로 시선을 맞춰왔다. 숨이 멎었다. 그 전학생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의 유일한 ‘얼굴’이 나를 보며 웃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나는 사물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눈은 없다.
나는 밥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입은 없다.
영은 나에게 여러 가지를 묻는다.
“수학 진도 어디까지 나갔니? 국어는?”
“내일 시간표 어떻게 되니?”
그러나 눈이 없는 나는 영에게 시선을 맞출 수 없었다. 입이 없는 나는 영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질문을 퍼붓는 영에게서 도망쳤다. 그러나 도망치면 도망칠수록 영은 나를 끈덕지게 따라왔다. 영이 웃는다. 아름다운 미소를 띠고.
“왜 아무 말도 없니? 아, 어디 가? 나도 같이 가도 되지?”
책상을 박차고 일어서는 내 앞에 영은 또다시 얼굴을 들이밀며 말을 건다. 어쩌면 그렇게도 정갈한 이마를 가졌을까. 다듬지 않아도 날렵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눈썹. 길고 까만 속눈썹 아래 큰 눈동자는 촉촉하게 젖어 있다. 상기된 두 뺨이 발그레하다. 흰 피부에 붉은 입술이 그린 듯이 선명한 미소를 띤다.
세상에서 유일한 '얼굴'을 가진 영. 너무나 아름다운 영.
나에게 영이라는 존재는 공포 그 자체였다.

영은 집요했다. 내가 가는 곳이라면 화장실이든 어디든 따라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아무것도 되돌려줄 수 없는 나에게 영은 대체 무얼 바라고 있는 것일까. 영의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바라보면 심장에 사정없이 바늘이 꽂히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렇게 아무런 그늘 없이 웃을 수 있는 거지? 왜 나에게 그렇게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내는 거지? 영의 미소는, 아름답게 웃으면 웃을수록 나를 상처 입혔다. 나는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상냥한 미소를 보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모든 것을 비쳐내는 투명한 눈동자가 두려웠다. 그 투명한 눈동자에 얼굴 없는 내 얼굴이 비쳐지는 것이 두려웠다. 마치 내 존재가 완전히 짓밟히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영은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 덕에 덩달아 나도 함께 사람들 눈에 띄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주목받고 싶지 않은 나에게 있어 영의 존재는 성가실 뿐이었다. 그러나 제발 나를 혼자 내버려두라는 말 한 마디 나는 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입이 없으므로.

어느 날,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서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교실 뒷문에서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 저... 이거... 읽어주세요..."
처음 보는 후배가 편지를 건네고 황급히 뒤돌아 뛰어갔다. 황망한 걸음으로 자리에 돌아오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싸늘한 표정으로 영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편지에 적힌 대로 방과 후에 교사 뒤로 갔다. 편지를 건넸던 후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후배는 대뜸 사귀자는 말을 한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얼굴이 없는 후배를 바라보며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결국 후배는 울먹이기 시작했고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배의 어깨 너머로 영의 얼굴이 보였다.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나는 후배에게 휘둘리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쉬는 시간마다 내 자리로 찾아와 떠들어댔고 방과 후에는 영화관이니 백화점이니 패스트푸드점이니 여기저기를 끌고 다녔다. 머리가 아팠다. 후배는 나의 어떤 점이 좋은 것일까.
"선배는 너무 말이 없어요. 나랑 있으면 재미없어요? 선배 친구라도 같이 불러서 놀까요?"
어느 날인가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후배는 그렇게 나를 떠봤다.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에 오히려 안도감마저 들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영을 두고 나를 선택할 리가 없었다.

화장실에서 돌아오는데 후배가 막 핸드폰 폴더를 닫았다. 정말로 부른 것일까.
"오늘 선배 정말 기분 아닌가보네. 기분 전환하러 갈래요?"
후배가 팔짱을 끼며 나를 끌고 패스트푸드점을 나갔다. 어두워지는 거리를 걸었다. 바람 부는 거리를 걸었다. 어쩐지 마음이 한쪽 끄트머리부터 천천히 부식되어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눈이 없어서 눈물을 흘릴 수 없다는 사실이 고마울 뿐이었다. 후배가 발걸음을 멈췄다. 엉겁결에 나도 걸음을 멈췄다.
"선배, 좋아해요."
후배가, 나보다 키가 큰 후배가 내 양어깨를 잡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당황한 나는 얼떨결에 주위부터 살폈다. 영이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후배의 손아귀로부터도, 영의 시선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없었다. 후배의 얼굴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고 영의 입술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웃는다.
영이 웃는다.
세상천지에 영의 웃음소리가 진동한다. 소름이 돋았다. 나는 힘껏 후배를 밀쳐냈다. 그리고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달려도, 달려도, 영의 웃음소리는 계속해서 따라왔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더 이상 영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날 밤은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영의 얼굴이 되살아났다. 영이 웃는다. 영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시끄럽다. 양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힘껏 찌푸려 감고 몸을 태아처럼 구부린 채 영의 웃음소리를 지우려 애썼다. 진이 빠져 지쳐 잠든 새벽녘에 나는 꿈을 꾸었다.

"선배, 좋아해요."
후배가 얼굴 없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댄다. 흠칫하고 물러섰지만 뒷머리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쇼윈도 유리였다. 다시 후배를 향해 시선을 돌리는데 눈앞에 나타난 것은 후배가 아니라 영의 얼굴이었다. 심장이 떨어질 만큼 소스라치게 놀랐다. 영의 곱고 섬세한 얼굴이 닿을 듯 가까이 있었다. 미적지근하고 습기가 있는, 어딘가 달콤한 향이 나는 것 같은 영의 숨결이 나에게 와 닿자 저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머리 꼭대기가 간질간질한 느낌이 났다. 영이 소리 내서 웃었다. 붉게 도드라진 영의 입술 안쪽에서 혀끝이 빼꼼히 나와 입맛을 다시듯 살짝 입술을 핥는다. 혀가 들어가자 흰 앞니로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며 또 웃었다. 고른 치열이 훤히 드러났다.

어느새 영의 양손은 나의 양어깨를 꽉 쥐고 있었다. 도망갈 수가 없었다. 영이 속눈썹이 긴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숨결이, 달콤한 향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향이 너무 강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영의 촉촉한 입술이 다가와 나의 입술에 닿았다. 나에게는 입이 있었다. 나에게는 입술이 있었다. 나에게는 치아가 있었다. 나에게는 혀가 있었다. 그 모든 사실을 영의 입술이, 영의 부드러운 혀가 깨우쳐 주었다. 영의 혀끝이 입천장을 핥았다. 나도 모르게 영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읏..."
나도 모르게 목구멍 안쪽에서 소리가 새어나왔다. 숨이 막혔다. 영의 입술은 떨어져 나갈 줄을 모르고 나의 입안을 유린한다. 질식할 것 같은 순간에 목구멍 위쪽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나는 드디어 코로 숨을 쉴 수가 있었다. 가까이서 맡는 영의 향기는 너무 진했다. 향수는 아니었다. 샴푸냄새, 파우더냄새, 복숭아냄새 같은 것들이 밀려들어와 입안에 엉켜드는 생생한 감촉을 더욱 선명하게 각인시켜주고 있었다.

"으..으..."
목구멍 안쪽에서 무언가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래, 그것은 언어였다.
"그, 그만해!"
나는 그렇게 외치며 영을 힘차게 떠밀었다. 최초의 한 마디를 내뱉고 나니 어쩐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존재를 깨달은 입은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려는 듯 끝없이 무언가를 외쳐댔다.
"그만해! 저리가! 이러지 말라구! 날 내버려 둬!"
꿈속에서 나는 이제 더 이상 눈앞에 보이지 않는 영의 존재와는 상관없이 어둠을 향해 끝없이 무언가를 외쳐댔다.

너무나 생생한 꿈이었다. 이불 속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가로지르는 빛줄기를 바라보며 한 손을 들어 얼굴에 가져갔다. 조금 말라있는 입술이 만져졌다. 안면근육을 움직여보았다. 입이 양쪽으로 찢어지듯이 끌어당겨졌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입을 통해 숨을 내보내 보았다. “하-, 하-” 하는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조금 더 목에 힘을 줘봤다.
“하-아, 아.”
이윽고 성대가 진동을 시작했다. 아직도 입술에 닿아있는 손끝에서 미약한 진동과 따뜻하고 축축한 숨결을 느꼈다. 기뻤다. 가슴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미친 듯이 웃었다. 뱃가죽이 당기고 가슴께가 뻐근해질 때까지 웃었다.

"미안해. 너와는 사귈 수 없어."
입이 생겼기에 말을 할 수 있게 된 나는 곧바로 후배에게 그렇게 전했다. 후배는 울먹이며 매달렸지만 나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뒤돌아섰다. 영이 앞을 막아섰다. 밉살스러울 만큼 환한 미소를 띠고 나를 바라보는 영. 그 예쁜 입술이 오늘따라 더욱 붉게 보였다.
"바보. 겨우 키스정도로 겁먹긴."
뱀처럼 붉은 입술. 뱀처럼 붉은 혀. 뱀처럼 붉은 적의.
"네가 상관할 일 아냐. 날 그만 내버려 둬."
"흥, 이제 말도 할 줄 아네? 제법인데?"
"저리가!"
나는 영을 살짝 밀치고 교실로 돌아왔다. 짜릿함과 초조함으로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나에게는 입이 있다.
나에게는 나의 의지를 전할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나의 뜻을 전할 수 있게 된 만큼, 나의 빈곤한 사고능력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아, 이렇게 될 바에야 차라리 입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말 것을.
“제발 나를 내버려 둬!”
“왜?”
“네가 나에게 간섭할 이유 따윈 없잖아!”
“그러니까 왜?”
“당연하잖아! 너와 나는 남인데 왜 네가 내 일에 참견하는 건데?”
“왜 너와 내가 남인 거지?”
“그, 그거야 당연하잖아!”
“그러니까 어째서?”
“그, 그야...”
“설명할 수 없으면 납득할 수 없잖아. 말해봐.”
“그러니까...”

끝도 나지 않는 영과의 잡히지 않는 대화. 영은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싱글싱글 웃으며 그 아름다운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다. 그리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인다.
“애초에, 너와 나의 구별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거지?”
“뭐라고?”
“그리고 우리는 이미 남이 아니잖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우리, 키스했잖아.”
“뭐? 그, 그건 꿈속에서!”
“거 봐. 키스했잖아. 자, 그럼 이제 남이 아닌 거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리고 어째서 네가 내 꿈을 알고 있는 거지?”

타인은 알 리가 없는 나의 무의식 세계를 어째서 영이 알고 있을까. 진심으로 어이없어하는 나를 보며 영은 한층 더 즐거운 표정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한층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 마치, 세상에 그 누구도 모르는 비밀이라도 폭로하려고 하는 듯이.
“그야, 물론, 너는 나이니까.”
“뭐?”
“너는 세계를 인식했어. 그리고 나를 만들어냈어. 자,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나를 죽일래? 아님 네가 죽을래? 그것도 아니면, 나를 네 편으로 끌어들일 건가? 뭐든 자기 좋을 대로 되는 건 아니겠지만 말야.”
영이 귓가에 속삭인다. 목덜미에서 나는 달콤한 향기에 머리가 아찔해져서 영의 말을 다 주워들을 수가 없다. ‘나를 죽일래? 아님 네가 죽을래?’ 그 말 외에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단어의 의미를 파악한 나는 황급히 영에게서 떨어졌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허둥대는 나에게서 공포를 읽은 영이 말을 잇는다.

“너, 기껏 사람 불러내놓고 자기는 피해자인 것처럼 굴지 말라구. 겁먹은 얼굴 하고는. 짜증나. 너 따위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네가 평생 얼굴 없는 저 두더쥐들처럼 땅속에 처박혀 산다 해도 나는 아무런 지장이 없지만. 아, 실수. 너는 적어도 저 두더쥐들보다는 조금은 나을 지도. 입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야. 나에게 감사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키스하지 않았으면 너는 아직도 입을 갖지 못했을 테니까. 어쨌든 기껏 세상에 나왔으니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뭐, 순순히 감사를 표명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럴 생각이 없다면 적어도 방해는 하지 말아야지 않겠어?”
영의 붉고 아름다운 입술에서 독약처럼 쓰디 쓴 말들이 흘러내린다. 계속해서 조곤조곤 이어지는 영의 독설을 들으며 내 안에서 무언가 작은 덩어리가 응고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 덩어리는 점점 더 단단하고 크게 뭉쳐지고 있었다.

“사실은 너, 나 좋아하지? 솔직히 말해 봐.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 난 들었다구. 나의 존재에 대해 아름답다고 생각했지? 부럽다고 생각했지?”
“나, 난 그런 적...”
애써 무언가 언어가 될 만한 것을 끌어와 보지만 끝맺지 못하고 입안으로 삼켜지고 만다. 영이 양 입술꼬리를 끌어올려 웃는다.
“솔직히 말해 봐. 난 알고 있어. 넌 내 손에 죽기를 바라고 있지? 난 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존재야. 넌 그걸 바라고서 나를 불러낸 거지?”
영의 아름다운 얼굴, 영의 아름다운 코, 영의 아름다운 입술, 입술, 붉은 입술. 다가온다. 다가온다. 또다시.
“자, 말해봐.”
영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속눈썹이 긴 두 눈을 깜빡이며 묻는다. ‘내 손에 죽고 싶지?’라고.

아, 그래. 다음은 눈이다.

나는 책상 위에 커터 칼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영이 웃는다. 나도 웃었다.

“꺄아아아!!!”
“선생님! 준영이가 미쳤어요!”
“꺄악!!! 난 몰라 피 좀 봐.”
“구급차 불러, 구급차!”
N여고 2학년 3반 교실. 수업중이던 담임인 국어선생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교실 한 구석으로 달려갔다. 양 손과 뺨이 피투성이가 된 채 한 손에 쥔 커터칼을 계속해서 깨진 손거울에 내리치고 있는 그 학생은, 언제나 얌전한 얼굴로 조용히 책을 읽곤 하던 김준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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