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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수많은 내’가 있다.
그 ‘수많은 나’중의 하나가 다른 하나의 암살을 도모한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경진은 1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조명의 건물인지라 엘리베이터내부 역시 엷은 어둠에 쌓인 혼곤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혼자 엘리베이터를 탄 경진은 1층 로비 버튼을 누른 뒤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쳐서 등을 기댈 듯이 뒤로 물러섰다. 아무도 없는 희미한 어둠 속. 웅웅거리는 작은 진동을 느끼며 경진은 자신도 모르게 교복셔츠 앞섶을 쥐어보았다. 공기조화시설은 잘만 돌아가고 있기에, 웬만해서는 더위를 느낄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경진은 답답증을 견딜 수 없어 넥타이를 움켜쥐었다. 일반적인 넥타이가 아니라 교복에 어울리도록 넥타이모양으로 해서 목에 걸게 되어있는 장식에 지나지 않았기에 목 뒤에 손을 넣어 후크를 풀지 않는 한은 느슨하게 할 수 없었다. 경진은 넥타이를 움켜쥠으로써 더욱 자신의 목을 죄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팽개치듯 손을 떼었다.

시선이 문득 발끝으로 향했다. 교복치마에 가려 구두는 끝만 보였다. 그리고 치마 속으로 넣어 입은 흰 교복셔츠가 허리께 부근에서 봉긋 솟아있었다. 셔츠를 속으로 넣어 입으면 움직임에 따라 약간씩 빠져나와 결국은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지만, 경진은 그것이 유난히 신경 쓰인다는 듯 혀를 차며 치마 속 깊숙이 셔츠를 찔러 넣는다. 한 손으로 옆구리를 찔러 넣다가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자 이제는 양손으로 옷맵시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검은색 가방은 내려놓지도 않은 채.

부산한 움직임이 끝나고 다시 바로 서서, 경진은 어깨와 허리에 힘을 주고 곧은 자세를 취했다. 손바닥에 와 닿던 자신의 배의 촉감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 마냥 낯설었던 것을 기억해내고 작게 몸서리를 친다. 자신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데, 언젠가부터 자신의 내부에 기생하고 있는 생물이 있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짜증난다. 조곤조곤 따져보면 분명히 그 날 그 녀석과의 일이었으리라 짐작은 가지만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인지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다. 분명히 콘돔을 썼었다. 그런데 대체 왜 피임이 되지 않았는지 경진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지만 조금만 더 지나면 딱딱해지면서 배가 나올 것이다. 그전에 손을 쓰지 않으면...

6층과 5층 사이를 내려가는 때 즈음해서 경진은 엘리베이터 양옆에 붙어있는 거울 중 오른쪽 거울을 향해 마주섰다. 찰랑이는 긴 검은머리를 반만 묶은 얌전해 보이는 소녀가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본다. 눈썹도 다듬었고, 엷게 파우더도 발랐지만 결코 문제를 일으키거나 반항할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 어떻게 보면 모범생처럼 명석하게 생긴 이목구비의 소녀다. 그러나 유난히도 경진의 얼굴은 나이에 비해 지쳐있는 듯 보였다.

경진은 따분한 현실에 지쳐있었다. 지나치게 머리가 좋은 경진에게 있어 학교수업은 우습기 짝이 없었고, 같은 반 친구들의 수준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저질이었다. 차라리 머리가 텅 빈 남자들과 어울리면서 술을 마시거나 섹스를 하는 쪽이 속이 편했다. 남자들은 경진이 기하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더니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지 않았다. 듣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단지 경진이 수줍은 듯한 화장을 하고 곁에 앉아 술에 취해 은근슬쩍 기대오다가, 못이기는 척 섹스에 응해주는 것을 좋아했다. 경진이 아주 머리가 비지는 않았다는 점에 대해 가끔은 우쭐한 칭찬도 해주었지만 그것이 다였다. 그들은 경진을 한 마리의 암컷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차라리 그것이 나았다. 재수 없는 천재라고 눈을 희번덕이며 뒤에서 소곤대는 사람들에 비해 훨씬 나았다. 그래서 경진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음란하게 허리를 흔들어댔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조차 지겹다.

엷은 한숨을 채 끝내기도 전에 반으로 묶인 머리를 풀어 하나로 그러모으며 경진은 앞 거울에 비친 뒷거울을 보았다. 작은 방울이 달린 고무줄을 입에 문 채 손으로 대강 머리를 하나로 모으며, 경진의 시선은 앞과 뒤의 거울을 번갈아 오갔다.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으니 목 뒤에 선뜩하게 에어컨 바람이 와 닿는다.

머리를 다 묶고 난 뒤 경진은 버릇처럼 거울과 거울 사이에 옆으로 서서 양 옆머리를 확인한다. 방울이 약간 옆으로 치우쳐있는 것 같아 손으로 매만지자, 거울 속의 자신도 머리를 매만진다. 그제야 경진은 양옆 거울에 셀 수 없이 많은 자신의 형상이 끝도 없이 비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울 안에 거울이 있고 거울에 비친 자신이 또다시 다음 거울에 비쳐지고 있었다. 긴 꽁지머리를 찰랑이며 이쪽과 저쪽 거울을 번갈아 보니 거울 속의 경진도 머리를 찰랑이며 번갈아 자신과 눈을 마주한다. 그것이 양면의 거울이 빚어내는 특별할 것 없는 현상이라 할지라도 경진은 어쩐지 가슴이 뛰는 것 같았다.

나는 왜 이렇게 쓸데없이 많이 있는 걸까.

경진이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거울 속의 수많은 경진도 따라 웃는다.

‘씨팔년...’

경진은 티 없이 맑게 웃어 보이며 하나같이 똑같이 웃고 있는 자신을 향해 속으로 욕지기를 날렸다. 며칠 전 어머니에게서 들은 더러운 욕지거리가 머릿속을 메아리친다. 어머니의 음성이 울리면 경진은 속으로 그 말투까지 그대로 따라해 보았다.

‘애비랑 붙어먹을 년!’
‘애비랑 붙어먹을 년!’
‘씹창년!’
‘씹창년!’

수많은 경진이 어슴푸레한 조명 속에 활짝 웃고 있다. 수많은 경진의 허상들이 천진하게 웃는다. 진짜 경진은 목까지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것을 왈칵 쏟아내고 싶어졌다. 그러나 거울 속의 자신은 끝까지 웃고 있다.

누가, 누가 내 대신...!!!

소리도 없는 절규가 경진의 내부에 울려 퍼졌을 때, 그 때였다.

왼쪽 거울 속의 거울 속의 거울 속의 거울 속... 그 수많은 경진의 허상 중 하나가 다르게 웃고 있었다. 입술에 혀끝으로 침을 묻히면서 입 꼬리를 잔뜩 끌어올려, 마치 사마귀 암컷처럼 사악하게 웃고 있었다. 천사처럼 웃고 있는 수많은 허상들 중에 그것은 단 하나 순수한 악의 화신인 듯 했다. 경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비벼보아도 그것은 틀림없이 자신이었다. 자신이 자신을 유혹하듯, 빨아들일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경진이 웃었다. 입을 벌려, 활짝. 어둠 속에 드러난 경진의 송곳니가 유난히 하얀 색으로 빛났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현관 로비로 뛰어 들어왔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잔돈도 챙기지 않고 달리기 시작한 남자는 황급히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상승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11층에서 내려오기 시작해 중간에 멈추는 일 없이 내려와, 이윽고 스르륵 문이 열렸다. 허겁지겁 엘리베이터에 타려던 남자는 발을 안에 들이자마자 발끝에 느껴지는 카펫의 축축함과 강하게 풍겨오는 비린내를 느끼고 황급히 발을 떼었다.

“웃!”

남자가 발을 떼자 엘리베이터 문은 그대로 닫혔다. 남자는 방금 전에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머리끝이 쭈뼛했다. 피... 엘리베이터 안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남자가 엘리베이터에 타려다 말고 멈칫하니까 어디선가 종업원이 다가왔다.

“손님, 무슨 일이라도?”
“아, 아니, 지금...”

남자는 말을 하려다 주저했다. 너무도 터무니없는 이야기라서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 남자는 대답대신 자신의 구두 밑창을 슬쩍 확인해보았다. 로비의 밝은 불빛에 남자의 구두 밑창은 아무 것도 묻어있지 않음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남자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종업원이 동행을 결심한 듯 남자에게 몇 층에 가는 지를 물었다.

“11층입니다만.”

종업원은 1층에 멈춰서있는 엘리베이터의 상승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남자는 종업원의 어깨너머로 엘리베이터 안을 살폈다. 그러나...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남자도 뒤따라 탔다. 엘리베이터 안은 조금 사치스러운 것을 빼면 지극히 평범했다. 바닥의 붉은 카펫 때문에 착각이라도 한 것일까. 도중에 멈추는 일 없이 곧바로 11층까지 올라가면서 남자는 문득 공기 중에서 장미향의 파우더냄새를 맡았다.

“저기...”
“네?”

남자는 등진 채 말없이 서있던 종업원을 불렀다. 종업원이 돌아보자 남자는 왼쪽 거울을 가리켰다.

“거울이 깨져있는데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네? 그럴 리가?”

종업원이 당황해서 거울을 살펴보았다. 조명이 어두운데다가 산산 조각난 것이 아니라 몇 줄기 가느다란 선을 그리듯 거울이 깨져있어서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리라. 종업원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고, 남자는 어차피 어색한 분위기를 깨보려고 한 말이었기에 굳이 그 반응에 신경을 쓰진 않았다. 남자는 입을 다물고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코의 중간부분에서 한 번 금이 가있었고, 목 중간에서 또 한 번 금이 가서 자신의 얼굴이 마치 잘못 끼워 맞춘 퍼즐처럼 어긋난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기묘하게 깨져있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남자는 자신의 턱이 생각보다 희고 야위었음을 깨달았다.

“음...”

조명 탓인지 낯설게 보이는 자신의 갸름한 턱에서 시선을 돌려 남자는 층수를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문 위의 층수표시까지 시선이 도달하기도 전에 남자의 눈동자는 멈춰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 상자 내 좌우 벽면에 붙어 있는 두 장의 거울이 무한한 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장관을 목격한 것이다. 급히 달려오느라 뻗친 머리를 한 수십 명의 어수룩한 남자가 일제히 머리를 긁적였다.

“11층입니다.”

도착을 알리는 벨소리와 기계적인 안내멘트가 흘러나오고 상자가 멈췄다.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발을 내딛는 종업원과 함께 내리기 위해 남자는 황급히 머리에 가 있던 손을 내리고 몸을 돌렸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거울 면을 핥았다. 어쩐지 턱이 몸을 따라오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남자는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남자가 마지막에 본 것은 입술이었다. 금간 부분에 걸려 기이하게 웃고 있는 붉은 입술이었다.

11층에서 남자와 종업원이 내렸다.

"몇 호실에 가십니까?"
"아, 1107호입니다."
"이쪽입니다."

종업원이 앞서 걷고, 남자는 그 뒤를 따라 걸으며 무언가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사로잡혀 버릇처럼 턱을 만지작거렸다. 아침에 면도를 했건만 까칠했다. 남자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엘리베이터 쪽을 뒤돌아보았다. 엘리베이터는 11층에 멈춘 채 서있었다.


緩步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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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퓨탄 09.03.04 22:28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그 거울.. 저만 섬뜩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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