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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퍼옴] 개를 기다리며

2009.02.27 01:3902.27

옛날 옛적에 넷츠고 환동에서 퍼온 것입니다. 저자인 백상현님은 퍼가는 대신 자신의 이름을 꼭
명시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리뷰 쓰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찾아냈습니다.


    [13/89] [shenne] Waiting for the Dog (1/2)


    게시자 : cadmon(백상현)                 본문크기 :28Kb
    게시일 :1998/07/29 16:15                조회 :48



개를 기다리며
                  - inspired by Popular Girl
                                                  by shenne


   새끼 얼룩말에게 일어난 이상하고도 힘 든 일들은 여느 때처럼 사자왕의 단잠을
깨우기 위해,  준비해 둔 의관을 반듯하게 들고  사자왕의 침실 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든가 하는 이상한 조짐도 없었고  새벽을 알리는
닭 대신 꿩이 운 것도 아니었다. 뭔가 이상한 것이 있다는 것을 새끼 얼룩말이 느
낀 것은  붉은 망토와 바이올렛 빛의 겉옷을 곱게 접어 양 손으로 공손히 들고 발
소리를 죽여가며 왕의 침실문 앞에 섰을 때였다.  코 고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 친숙한 소음을 매일 아침 마다 들었던 것은 아니므로 새끼 얼룩
말이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새끼 얼룩말은 저도 모르게 기분
이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새끼 얼룩말이 왕의 침실문을 열고 얌전히 들어가서 옷걸이에 망토와 겉옷을 걸
어둔 후에 아침 햇살을 막아선 커텐을 젖히고 왕을 깨우기 위해 왕이 누워있는 침
대를 향해 몸을 돌렸을 때, 사자왕은 그 부리부리한 눈으로 새끼 얼룩말을 바라보
고 있었다.  왕이 새끼 얼룩말을 향해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새끼 얼룩말은
마치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다리를 떨며 왕에게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그 위로
사자왕의 눈빛이 자기에게 쏟아지고 있음을 느낀 새끼 얼룩말은 이마가 바닥에 닿
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이미 연로한 사자왕은 황금빛 갈기가 하얗게 탈색되었
으며  아무리 열심히 빗질을 해도 사방으로 날리기 마련이어서  그나마 하루에 두
시간씩 시종들이 해주던 빗질도 그만 둔지 오래였다.  근래에 들어 사자왕은 더욱
수척해졌으며  말보다는 간단한 손짓으로 명령을 내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눈치
빠른 새끼 얼룩말은 그런 사자왕의 취향에 크게 어긋남 없이 지난 삼 년을 곁에서
지낼 수 있었다.하지만 사자왕은 처음 보았을 때와 너무도 달라졌다.  다른 것은
다 덮어 둘 수 있지만, 그 눈빛. 눈빛만은 어쩔 수 없었다. 새끼 얼룩말은 흐릿하
게 죽어버린 사자왕의 눈빛을 보면 자기도 함께 죽어가는 것만 같아  얼른 눈길을
피하곤 했다.

   사자왕이 순백색의 슬립 가운 밑에서 뭔가를 꺼내 새끼 얼룩말에게 건넸다.  새
끼 얼룩말은 두 손으로 책을 받아 들며 왕의 표정을 살폈다. 이 책을 어디에 전해
란 말인가.  왼쪽 입 언저리를 비틀면 병무대신이자 사위인 캥거루 장군에게 가는
것이고 오른쪽을 비틀면 총리대신인 하마에게 가는 것이다.  하지만, 왕은 아무런
표정 없이 그 죽음에 이르는 눈길을 새끼 얼룩말에게 고정 시키고 있었다. 도대체
뭘 어쩌란 말인지.

   - 읽어라.

   캐론이 지킨다는 저 어두운 심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가 이러할까.  새끼 얼룩
말의 손에 순간 힘이 빠지며  책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오싹하고 둔탁한 소리가
온 궁정에 울려퍼지는 것 같아  새끼 얼룩말은 두 귀를 감싸고 바닥에 엎드려버렸
다.

   - 조심.

   가뭄으로 갈라진 저 괴로운 대지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이 저런소리일까.  새끼
얼룩말은 얼른 책을 주워 품에 감싸 안았다.

   - 잘 지켜라.

   새끼 얼룩말은 고개를 들지도 못 하고 그저 끄덕일 뿐이었다.  단 한 마디도 왕
앞에서 해 본 적도 없었고 막상 하려고 해도 나오지가 않았다.  왕의 손짓이 이제
는 나가보라고 명령했다.  새끼 얼룩말은 도망치듯 침실을 빠져나와  후원의 정자
나무 아래로 달려갔다.



   언젠가 태양이 사라진 적이 있었다. 사방은 캄캄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지상의 모든 동물은 두려움에 떨었다.  모두 모여서 회의를 거듭한 끝에  거대한
붕(鵬)이 실성을 해서 태양을 삼킨 것이 틀림 없으니 누군가 용감한 자가 하늘로
올라가 붕을 진정시키고 태양으로 하여금 다시 빛나게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
러나 용기가 있어 감히 나서는 자가 없더니 개집에서 하염없이 하품하며 늘 잠만
청하여 아무 쓸모가 없다고 지천 받던 개가  분연히 떨쳐 일어나 말하길  천하가
환난에 처하면 먼저 의(義)를 생각하고 사사로운 것은 생각치 말라고 했으니  제
가 가겠나이다,  라고 했다.  모두들 내심 못 미더워 하였으나 스스로 나서지 못
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심히 부끄러워 하며 개에게 성대한 환송식을 해주었다. 개
는 자신이 기거하던 개집을 부수어 죽을 각오를 밝힌 뒤,  동서남북으로 세 번씩
절하고  공중제비를 크게 다섯 번 돈 후 하늘로 솟구쳤는데  모두들 개가 사라진
곳을 보니 어두웠던 하늘에 밝고 작은 별 하나가 새로 생겨있었다.  그로부터 일
백 일이 지나자  다시 태양이 모습을 드러냄에 모두들 기뻐하며  곧 돌아올 개를
위해 집을 짓고 잔치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개는 그 후로 다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는데,  언젠가 부여 땅에 오룡거를 타고내려왔던 해모수라는 신인이 은밀히
전하길  개가 붕과 더불어 혈전을 거듭하기를 무려 일 백 일을 하였고 마침내 붕
이 지치어 태양을 토해내고 멀리 북해로 급하게 도망가는데  개도 기진한 나머지
물고 있던 붕의 깃털을  미처 이빨 사이에서 빼낼 틈이 없었으니  망망히 멀고도
멀어 하늘의 천정 보다 더 먼 저 북해까지 함께 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말을 전
해 들은 모두는 개가 사라진 곳에 생겨난 별을 바라보며  개가 몹시도 추운 북해
에서 고생할 것을 슬퍼하니  마치 자기가 추운 것처럼 비통해 하며 개의 발이 시
려서 어쩔까 시려서 어쩔까 하였다.  이 일로 개가 사라진 별의 이름이 시리우스
(SIRIUS)가 되었으나 개의 행방을 아는 이는 없다.



   책은 신성한 개문자로 되어있었다.  소수의 사제들만이 읽을 수 있는 문자였지
만 새끼 얼룩말은 궁전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염소 대사제로부터 읽는 법
을 배워왔다. 궁중에서 새끼 얼룩말이 해야 할 일은 많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
은  사자왕의 심부름을 하는 일이었고  사자왕이 거의 말을 안 하게 된 이후로는
왕을 찾아온 손님들을 접대하고  왕과 손님이 필답을 나누는 석판을 부지런히 옮
겨야 했다.  오늘 아침에는 어미의 젖 사원의 대사제이자  새끼 얼룩말의 스승인
염소가 오기로 했다.  왕이 건네 준 책을 읽고있던  새끼 얼룩말은 책을 품 속에
넣고 단단히 동여 맨 후 빠른 걸음으로 접대실을 향했다.

   - 자네가 끓여 주는 강아지풀차는 언제나 맛이 좋아.

   염소 대사제는 만족한 듯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잔 속에 찰랑이는 강아지
풀차를 내려다 보았다.

   - 자네도 왕을 닮아가나 보네. 말이 점점 없어지는군.

   새끼 얼룩말은 대답 대신 차 주전자를 들어 염소 사제의 찻잔을 다시 채워주었
다.

   - 오늘은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 험. 눈치도 많이 늘었구만.

   염소 대사제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향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 죄송합니다. 제가 쓸 데 없는 말을 했습니다.

   - 아닐세. 온 나라가 들끓고 있는데 자네만 모를 수는 없지.

   - 나라가 들끓는다 하심은......?

   - 자네는 하늘도 안 보고 사는가?

   - ......

   - 시리우스가 발광(發光)을 했다네. 또 변경도 시끄럽고.

   새끼 얼룩말이 그 의미를물으려 할 때  접대실에 장치된 종이 울렸다.  왕께서
준비 되었다는 신호다.  새끼 얼룩말은 염소 대사제를 안내해서 왕의 침실로 모셨
다. 왕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었고  대사제가 예를 올리자  손을 들어 답례했다.
새끼 얼룩말은 준비해 둔 석판을 들고 왕의 신호만 기다렸다.

   - 석판은 필요 없다.

   왕께서 말씀하셨다.  그것도 또렷한 목소리로.  새끼 얼룩말은 당황해서 바닥만
바라보다 대사제의 헛기침 소리를 듣고는 정신을 차려 방을 나왔다.



   북풍이 삼 년 동안 쉬지 않고 불어 온 세상이 얼어 붙고 온 하늘과 땅이 눈으로
뒤덮혀 태양 조차 희미하던 때가 있었다.  모두들 개를 위해 지어 놓은 집으로 모
여 근심하며  자기들의 어떤 허물이 이런 재앙을 불렀나 하고 서로 책망하고 있을
때  북풍을 따라 흩날리는 눈발 속에 거대한 알이 날아와 개의 집 앞에 떨어졌다.
모두들 놀라워 하며  이는 필시 북해에 헤매고 있는  개가 보낸 것이 틀림 없으니
어서 안으로 옮겨 살펴보자고 했다.  모두들 알을 둘러싸고 서로 번갈아 따뜻하게
감쌌는데  희미하여 보이지 않던 태양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와 유독 알만을 비추
었다.  이에 모두 더욱 신기해 하며 알을 경외하여 절을 하고 아뢰되 장차 알에서
태어나는 분을 왕으로 모시고자 한다고 했다.  석 달이 지나서  알에서 신묘한 두
신물이 태어났는데 그 눈부심이 지나쳐 감히 그 형상을 알아보는 자가 없었다. 두
신물은 태어나자 마자  하나는 사자에 매달려 젖을 청하고  다른 하나는 돌고래에
매달려 젖을 청하였더니 그 사자와 돌고래는 빛으로 인해 눈이 멀어버렸다. 두 신
물은 스무 하루를 젖을 먹고  마침내 개의 집을 나섰는데 그 밝은 빛이 사방에 비
치자  바람이 눈들을 몰아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고,  어디가 바닥인지 알 수 없던
눈이 녹아 누런 땅이 다시 보였다. 두 신물은 각기 젖을 먹여 준 사자와 돌고래에
게 절하고 하늘로 솟구쳐 홀연히 사라지니 그 빛이 온 천지에 가득하고,  서 있던
자리에서는 꽃이 피니 그 향기가 세세토록 지워지지 않았다.  젖을 먹였던 사자와
돌고래는 얼마 있지 않아 태기를 느껴 개의 집으로 들어가 아이를 낳았는데  이들
이 바로 땅을 다스리는 사자 임금과 바다를 다스리는 돌고래 임금의 시조이다.



   - 자네는 날 따라 가세.

   책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염소 대사제가 침실을 나오며 새끼 얼룩말을 재촉했
다.

   - 왕의 허락 없이는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 왕께서 명령하신 걸세.

   염소 대사제와 새끼 얼룩말이 사흘을 부지런히 달려 도착한 곳은 황량하기 그지
없는 광야였다.

   - 다 왔네.

   도대체 이런 곳에 뭐가 있단 말인가.  새끼 얼룩말은 바쁘게 뛰어다니느라 미처
깨닫지 못 했던 궁정의 안락함이 그리웠다. 괴롭고 불만스러운 듯 입을 삐죽이 내
민 새끼 얼룩말에는 아랑곳 없이  염소 대사제는  보폭이 넓은 이상한 걸음걸이로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더니  둥근 원을 그리며 오른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무어라
알아듣기 힘들 뿐 아니라  알아 듣는다 해도 무슨 의미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말
을 쉴 새 없이 중얼거리며  염소 대사제는 한 시간 여를 같은 장소만 맴돌고 있었
다. 그때 저 멀리서 은은하게 풍경 소리가 들려왔다. 딸랑-딸-랑-딸랑. 풍경 소리
는 자욱한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멀리 지평선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새끼 얼룩말은 그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풍경 소리와 모래 먼지가 달려오는 속
도가 엄청나다는 것 그리고 그 목적지가 곧바로 자신들을 향해있다는 것을 깨닫고
는 두려움에 휩싸여 버렸다.  풍경 소리는 가까이 다가 올 수록  우뢰처럼 커져서
마침내 모래먼지가 지척에 다다랐을 때 새끼 얼룩말은 혼이 달아날 지경이었고 할
수 있다면 다시 어미의 배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자그마한 체
구의 염소 대사제는 수염 하나 꼼짝 않고 그 감당키 어려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
다.  모래바람과 풍경 소리가 자기의 몸을 뒤덮는다고 생각한 순간 새끼 얼룩말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그러나 순간, 사위는 이상할 정
도로 정적에 휩싸여 버렸다. 죽은 것인가.

   - 으하하하하.

   경망스런 웃음이었다.  새끼 얼룩말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오려다 보자  온통
가죽옷을 얼기설기 기워 입은 낯 선 자가 자기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 오랜만이요, 낙타 형제.

   염소 대사제가 방금 낙타 형제라고 했던가. 대사제들은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니
이 무시무시하고 경망스러운 자가 그 이름도 유명한 낙타 대사제란 말인가.  새끼
얼룩말은 얼른 자세를 고쳐 잡고는다시 절을 올렸다.

   - 불초 중생이 고명하신 낙타 대사제를 뵙습니다.

   - 헤. 고명하기로야 여기 염소 따라갈 자가 있나.  꽤나 급했군, 염소.  이렇게
날 부른 걸 보니 말야. 흘.

   - 말 안 해도 다 아실 터이니 긴 말 하지 않겠습니다.

   염소 대사제는 낙타 대사제에게 존대말을 쓰고 있었다. 대사제의 등급은 그들이
쓰는 마법의 경지와 공력에 따라 정해진다.  역시 소문 대로 낙타 대사제가 이 나
라 최고의 공력을 가지고 있구나. 새끼 얼룩말은 새삼 경탄스런 눈으로 낙타를 바
라보며 방금 전의그 놀라운 모래바람을 떠올렸다.

   - 알다시피, 준비된 자가 필요해.

   - 여기 데려왔습니다.

   - 이 불초 중생 말인가?

   - 왕께서 저를 시켜 오랫동안 준비 시켜 온 자 입니다.

   지금  이 새끼 얼룩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새끼 얼룩말은 두 대사제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묘한 전율을
느꼈다. 지금 그에게 무슨 엄청난 일이 일어나려 하는 것이다. 그 날 아침 왕께서
이상한 책을 주실 때부터 뭔가 수상했어.

   새끼 얼룩말은 두려움과호기심이 뒤범벅 된 기분으로 두 대사제를 바라봤다.

   - 어이, 얼룩말. 자네 소원이 뭔가?

   낙타 대사제가 물었다.  그는 공력이 대단하니까 그동안 이 새끼 얼룩말이 품었
던 소원을 말하면 바로 이루어 주실지도 모를 일이지. 하지만 새끼 얼룩말은 주저
했다. 그냥 소원이나 들어 줄 분위기가 전혀 아니잖은가. 낙타 대사제가 주저하는
새끼 얼룩말을 보고 다그치는 눈빛을 보냈다.

   - 예, 전 그저 평범하게, 예쁜 마누라하고 자식 낳고 살고 싶습니다.  재미있게
말이죠.

   낙타 대사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 이번 일만 잘 되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일세.

   -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 자네는 삶에 목적이 있다고 믿나?

   - 잘 모르겠습니다.

   - 솔직하군.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 그게 정답이야. 하지만 지금부턴
있다고 믿게.

   - 생각해 보겠습니다.

   - 아니, 생각하지 말고 그냥 믿어. 믿음이야 말로 모든 기적과 마술의 근본이지.

새끼 얼룩말은 무언가 이상하고 어려운,  게다가 복잡하기까지 한 일에 자신이 끌
려 들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더 무서운 것은 그것이 스스로 선택한 것도 아닌 강
제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거부 할 수 있는 일입니까?

   - 아니. 자네는 무조건 따라야만 하네.

   - 도대체 어떤 권위가 내리는 명령이기에 제가 거부할 수 없다는 겁니까?

  - 위대하신, 태양의 구원자이시며 시리우스의 창조자,  이 나라의 아버지이신 개
님의 명령이시다.

   새끼 얼룩말은 온몸에서 힘이 죽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흠개님의 명령을 과
연 누가 거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새끼 얼룩말은 단정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
여 복종의 뜻을 밝혔다.

   - 들으라.  나는 개의 사원과 광야의 대사제로서 신성한 개님의 권능을 빌어 선
포 하노니, 새끼 얼룩말은 성스러운 편지를 읽는 자로 준비되었고 선택되었다.

   염소 대사제와 낙타 대사제가 새끼 얼룩말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을 했다.

   - 이제, 본격적으로 몸을 정화하고 영혼을 고양시키는 마지막 준비를 해야한다.

   염소 대사제가 새끼 얼룩말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추방 되었던 코끼리 장군이 변방의 도적을 몰아
오는 중이라 저는 왕을 도와 신전을 방어해야 합니다. 시리우스의 축복이 있기를.

   염소 대사제는 낙타 대사제와 새끼 얼룩말을 남겨 둔 채,  왔던 길을 되돌아 갔
다.  염소 대사제의 뒷모습이 광야의 언덕 너머로 사라지자 새끼 얼룩말은 돌아갈
실 뭉치를 잃어버린 채 미로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변방의 수비를 책임지고 있는  양 장군은 참담한 심정으로  수도인 바오밥 나무
아래로 전령을 보냈다. 벌써 십 여 일 동안 여섯 개의 요새에서 싸움을 했고 여섯
번의 싸움에서 패했다.  이대로라면 사자왕에게 죄를 청하기도 전에, 깐깐하기 그
지 없는 병무대신 캥거루 장군의 칼에 죽을 판이었다.  하지만 십 만에 달하는 코
끼리 장군의 군세를 상대해서  겨우 일 만의 군사로 십여 일을 버텼다면 나름대로
할 말은 있다는 의견이 제장회의의 지배적인 중론이었다.  그러나, 그러나,  장수
된 자로서 패배를 변명하는 명분이나 찾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이제 남은 군사는
겨우 삼천이다. 양 장군은 삼천의 군사를 마지막 변경 요새인 소머리 요새에 집결
시키고 최후의 항전을 할 작정이었다.  정찰병들의 보고에 의하면  코끼리 장군은
이미 요새 앞의 강 건너 산을  오르고 있다고 한다.  이 밤이 지나 해가 떠오르면
코끼리 장군의 군사들은 강 가에 진을 치고 총공세를 준비할 것이었다. 적군은 아
무리 못 해도 육만에서 칠만은 될 것이다. 지난 며칠 동안 계속 수도로 보냈던 전
령들은 하나같이  구원 요청과 패퇴의 소식만을 갖고 갔었다.  내일이라도 캥거루
장군의 구원병이 온다면.  양 장군은 현기증이 나는 듯 휘청거리며 막사로 들어갔
다.

   -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오는 놈들마다 한결같이 하는 소리란 게,  결사적으로
대항했으나 역부족입니다, 중과부적입니다, 요새가 적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도
대체 양장군이라는 작자는 뭘 하고 있는 거야.

   - 장군, 송구한 말씀이오나, 적들은 너무 강합니다. 저희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
습니다.

   - 더 이상 듣기 싫다. 물러가라.

   전령이 물러 간 후에  캥거루 장군은 화려한 궁정의 집무실에 혼자 남아 서성거
렸다. 코끼리 장군의 군대가 그렇게 강하다는 건가.  이번에야 말로 직접 나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캥거루 장군은 느꼈다. 보고에 의하면 양장군의 국경
수비대는 이미 괴멸된 것이나 다름 없었고  그렇다면 수도까지는  어미의 젖 사원
신전 수비병과 캥거루 장군 자신이 직접 이끌고 있는 근왕대 밖에 없는 것이었다.  
다른 곳의 군대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있다. 어쩔 수 없다. 나가야 한다.

   오랜만의 싸움이라 몸이 떨려오기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런데 왜 하필이면 적
장이 코끼리 장군이란 말인가.  캥거루 장군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코끼리 장군
의 위압적인 모습을 지우려고 머리를 이리 저리 흔들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문
제는 어디서 싸우는가 하는 것이다.  근왕대를 이끌고 양장군이 지키고 있는 소머
리 요새로 가느냐  아니면 어미의 젖 사원으로 가느냐,  이도 저도 아니면 수도인
여기 바오밥 나무 아래에서 싸우느냐.

   - 장군, 왕께서 찾으십니다.

   캥거루 장군은 무거운 마음으로 왕의 침실로 향했다.



   - 찾으셨습니까.

   노쇠한 왕은 침대에 누워, 새어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거
운 침묵이 캥거루 장군의 목을 죄어왔다.  왕은 단 한 마디 말도 약간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 왕이시여, 적들이 우리 병사를 죽이고 우리의 신성한 땅을 유린 하고있나이다.
저는 나가 싸우려 합니다.

   - 그대의 힘으로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왕의 말이 캥거루 장군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 이 나라에 저 말고 싸울 수 있는 자가 누가 있습니까.

   왕은 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 들었다.  반드시 코끼리의 목을 베어  이 캥거루의
용맹함을 보이리라. 캥거루 장군은 주먹을 꼭 쥐고 부르르 떨었다.

   - 어려운 때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되, 경거망동 하지 말라.

   왕은 손을 들어 접견이 끝났음을 알렸다. 캥거루 장군은 절을 하고 왕의 침실에
서 물러나와 근왕대의 진영으로 달려갔다.



새끼 얼룩말은  하루에 일곱 번씩 무지개 빛의 물에 차례로 몸을 담궈 목욕을 하고
목욕을 하는 동안 계속해서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 준다는 주문을 외었다. 낙타 대
사제는 그런 새끼 얼룩말을 무표정하게 감시하며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목
욕이 끝나면 신성 개문자로 쓰여진 갖가지 문헌들을 읽어야 했고  밤이면 제단 주
위를 빙글빙글 도는 춤을 배워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거나 잠 들기 전에는  낙타
대사제의 어깨를 주무르고  따뜻한 물로 발을 씻겨 주어야 했다.  이럴 때면 낙타
대사제는 눈을 지긋이 감고 새끼 얼룩말에게 이것저것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 그러니까,  원래 어미 젖의 사원은 개의 사원에 속해있던 작은 부속 건물이었
다.  그러던 것이 뱀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사자왕 레오3세가 지금의 자리에 따로
사원을 짓고 호국사원으로 승격시켰다.

   - 개의 사원은  위대한 개님을 모신 사원이라는 건  저번에 말씀해 주셨습니다.
게다가 저는 언젠가 왕을 따라 가본 적도 있구요.  그런데 낙타 대사제께서는 개
의 사원과 광야의 사원의 대사제이십니다.  도대체 광야의 사원은 어디에 있습니
까? 궁중 사람들도 그렇고 염소 대사제도 그런 말씀은 안 해주셨습니다.

   - 광야의 사원은 가장 흔한 것이되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다.  그러니 잘 보이
지도 않는다. 정말 광야의 사원을 보고 싶다면 너 자신을 잘 살펴라.

   - ......



   막사에서 선잠을 청했던 양장군을 깨운 것은  병사들의 다급한 고함 소리였다.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양장군은 얼른 일어나 칼을
잡았다.

   - 장군, 적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 어느 쪽인가?

   - 남문과 동문 쪽입니다.

   - 적의 총공세인가?

   -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적의 선봉과 우익의 군사들만 움직이는 것같습
니다.

   - 나가보세.

   소머리 요새의 남문 위에서 적진을 살피는 양장군의 눈 앞에 이미 까맣게 적들
이 몰려오고 있었다.  양장군은 사용할 수 있는 온갖 수성무기들을  준비 시키고
다시 수도를 향해 전령을 보냈다.



   소머리 요새를 산 위에서 내려다 보며 선봉에게 공격 명령을 내린 코끼리 장군
은  거구의 몸에다 엄청나게 큰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코끼리 장군은 큰 칼을
뽑아 들고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소머리 요새를 노려보았다.  그 늙은 왕이
제대로 정신이 박힌 왕이라면  오늘처럼 이런 일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약삭
빠르고 남의 공을 가로채기 좋아하는, 무능한 캥거루에게 하나 밖에 없는 공주를
내준 것을 두고 두고 후회할 게 될 것이니 두고 보아라.  게다가 지금이 어느 때
인가. 시리우스가 발광하여, 세상이 뒤집힐 것임을 예고하고 있지 않은가.  머지
않아 천하는이 코끼리 장군의 것이 될 것이다.

   - 조금의 여유도 주지 말고 공격을 계속하라.

   코끼리 장군의 우뢰같은 명령이 산 아래의 들판에 울려퍼졌다.



   - 물러서지 마라. 죽기로 각오하고 싸워라.

   양장군은 필사의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스스로 베어버린 적병의 수만 해
도 벌써 수십명이 넘었다.

   - 장군, 동문이 무너졌습니다.

   동문과 남문을 오가며 소식을 전하던 전령의 말이었다.

   - 무어라. 동문이 무너져!

   - 동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이미 죽거나 모두 도망가 버렸습니다.

   - 이럴수가.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 장군, 북문이 비어있으니 어서 그쪽으로 퇴로를 찾으십시오.

   양장군은 전령과 말하는 사이에 성벽을 기어오른 적병 하나를 베었다.

   - 무슨 소린가.  나는 여기서 죽을 작정이네.  자네는 이 길로 캥거루 장군에게
달려가 여기의 상황을 전하시게.

   전령이 황망히 북문 쪽으로 모습을 감추고.  양장군은 얼마 남지 않은 병사들을
독려해서 성벽을 기어오른 적병들을 베었다.  그러나 중과부적. 양장군도 그 사실
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어쩌겠는가.  여기저기서 화살이 날아와 병사들의 몸에 박
히고 번득이는 칼날에 피가 흩뿌려졌다.  푸르른 하늘도 황금빛 태양도 보이지 않
는다.

   - 이 양장군, 목숨을 버려 싸움으로써 패전의 죄를 씻으려 하니, 하늘이시여,
부디 저에게 죄를 묻지 마옵소서. 이야-----------아.

   칼을 앞으로 겨누고 이미 성 안에 가득 찬 적병들을 향해 양장군은 돌진해갔다.

- 낙타 대사제님.

   낙타 대사제는 새끼 얼룩말에게 읽을 책 한 권을 건네 주고는 하루 종일 바닥에
앉아 뭔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 뭐냐?

   - 지금까지 여러가지를 말씀해 주셨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말씀해 주시지 않았
습니다.

   - 난 너에게 숨긴 것이 없다.

   - 편지 읽는 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낙타 대사제는 몸을 고쳐 정좌했다. 그런 낙타 대사제를 보고 새끼 얼룩말도 자
세를 고쳐 앉았다.

   - 자네가 편지 읽는 자로 선택된 것임 이미 알고 있을 터이고.

   - 네. 저는 편지 읽는 자입니다.

   - 그래,  우리 예언서에 따르면 시리우스가 발광할 때 개님의 전령이 편지를 전
할 것인데 그것은 미리 준비된 자만이 읽을 수 있다 하셨네.

   새끼 얼룩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 그렇다면 참 이상합니다. 시리우스가 발광한 것은 얼마 전 부터인데 왕께서는
몇 년 전 부터 저를 준비시켰다고 하셨잖습니까.

   - 넌 아직 잘 모르겠지만 예언서를 해독하는 비전이 있다.  왕께서는 그 비전을
통하여 시리우스가 발광할 것을 미리 아셨던 것이다. 비전에 의하면, 개님께서 하
늘로 솟구치기 전에  나라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돌아 오지 않더라도 슬퍼할
필요가 없으니 나는 쉽사리 죽지 않을 것이요, 죽더라도 그것은 죽음이 아니니 우
리는 죽음 통하여 영생을 얻기 때문이며,  죽지 않아도 돌아오지 못 함 또한 슬퍼
할 일이 아니니 내가 반드시 소식을 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다 한다. 그
리고 과연 훗날 알에서 나신 두 신물께서는 하늘로 오르기 전 젖을 먹여주었던 두
어미에게 각기 책을 전했는데 그 책에는 개님이 북해에 계시다는 말씀이 진실이며
언젠가 때가 되면 개님의 전령이 편지를 전할 것이라는 예언이 숨겨져 있다. 우리
들 신전의 사제들은 모두 그 예언의 비전을 해독하기 위해 숱한 세월을 노력해 왔
으며 마침내 이제 그 예언이 실현될 때임을 알고있다.  예언에 기록된 바, 그때가
지금이며 편지를 읽을 자가 바로 자네이다.

   - 하지만 또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그 편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 그건 아무도 모른다. 다만, 태양을 구하고 우리 조상을 구하신 개님이 보내신
편지이기에,  혼란과 도탄에 빠진 이 세상을 구원할 바로 그런 것이리라고 추측될
뿐이다.  추측은 추측으로 끝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 편지가 이 세상의 처음
과 끝의 비밀을 담고 있으리라 생각하긴 하지만 반드시 자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
다.



   근왕대를 이끈 캥거루 장군이  어미 젖의 사원에 이르러  전열을 준비하고 있을
때,  전선에서 처참한 모습의 전령들이 매일 같이 당도했다. 전령들의 모습을 본
병사들은 술렁이며 두려움에 떨었다.

   - 캥거루 장군,  양 장군이 지키던 소머리 요새가 함락되었습니다.  장군께서는
장렬히 전사하셨고 겨우 살아 남아 도망가던 병사들도 모조리 사로잡혀 죽임을 당
했습니다.

   자신을 마지막 전령이라 칭한 자는 말을 마치자 마자  대성 통곡을 하며 바닥에
이마를 부딪혔다. 캥거루 장군의 막사에 모여 이 모습을 본 장교들은 물론이고 캥
거루 장군 자신 마저 깊은 속부터 한기가 느껴짐은 어쩔 수 없었다.  캥거루 장군
은 장교들에게 일러 이 소식이 병사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단속했다.

   - 이제 더 이상 남하할 필요가 없어졌소.  우리는 여기에 계속 머물면서 전열을
가다듬고 신전 수비대와 함께 적군을 맞이할 것이오.



   소머리 요새를 마지막으로 코끼리 장군은  사자왕의 영토의 관문이었던 일곱 변
경 요새를 모두 점령한 샘이었다. 코끼리 장군 휘하의 병사들은 사기가 올라 언제
라도 싸우기만 하면 이길 것처럼 의기양양하고 강해졌다. 코끼리 장군은 부상병들
을 치료하고 무기를 점검하며 잠시 휴식을 취하도록 지시하고 본격적인 침입을 위
한 작전을 구상하는 중이었다.

   - 장군,  방금 들어온 첩보에 의하면 캥거루 장군이 이끄는 근왕대와 신전 수비
대가 어미 젖의 사원에 진을 치고 있다고 합니다.

   - 그렇겠지.  여기서 바오밥 나무 아래까지 있는 거라곤 그거 하나 밖에 없으니
까. 그래, 적의 수는?

   - 대략 오만 정도라고 합니다.

   - 비슷하군.  흠. 하지만 캥거루 그 놈이 군사에 대해 뭘 아는 게 있어야지. 병
사들을 준비시켜 내일 아침에 어미 젖의 사원으로 출발한다.

   - 알겠습니다, 장군.



   - 하마 총리.

   - 네, 전하.

   말 수가 적고 늘 졸리운 듯한  하마 총리는 사자왕의 부름을 받고  궁정 뒤뜰에
와있었다.  총리대신인 하마로서도  사자왕이 침실을 떠난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 전황은 어떻다 하오?

   - 소머리 요새가 함락되었고 적들은 그 기세를 몰아 곧바로 어미 젖의 사원으로
진격 중이라 하옵니다. 시일로 봐서는 이미 당도했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 캥거루 장군은 사원을 최후의 결전지로 택했구나.

   - 어미 젖의 사원 외에는 마땅한 곳이 없는 상황이옵니다.

   - 모두 헛수고일세.

   - 우리 병사들과 캥거루 장군은 목숨을 다해 싸울 것입니다.

   - 아까운 목숨들만 버릴 뿐이네.

   - 전하, 심기를 굳건히 하옵소서. 전하께옵서는 이 나라의 기둥이옵나이다.

   - 되었소. 이 나라는 안전할 것이오.

   - 심중에 무슨 비책이라도......?

   - 두 분 대사제께서 이미 실행 중이오.

   - 그러하옵시면?

   - 맞소. 알다시피 시리우스가 발광했고 곧 신성한 편지가 당도할 것이오. 그 편
지야 말로 이 나라를 수호하시겠다는 개님의 의지가 아니겠소.  두고 보시오. 그
편지를 펼쳐 읽는 순간,  나라를 환란에 빠지게 한 모든 적들과  어둠의 세력들이
사라질 터이니.

   - 전하의 지혜에 고개 숙일 따름이옵나이다.

   - 이제 우리도 신전으로 갑시다. 삼 일 후면 편지가 당도할 것이라 낙타 대사제
가 전해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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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가 1/2입니다, 500줄 제한으로 자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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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89] [shenne] Waiting for the Dog (2/2)


    게시자 : cadmon(백상현)                 본문크기 :22Kb
    게시일 :1998/07/29 16:18                조회 :27



   어미 젖의 사원은 호국 사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도 방어의 요새로 설계되었
다.  중앙의 사원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높은 성벽이 견실히 서있었고 성벽 바깥에
는 깊은 해자가 준비되어있었다. 캥거루 장군은 정찰병들의 보고로 조만간 코끼리
장군의 군사들이 공격해 올 것임을 알고있었다.  이제는 결전이다. 아마도 나라의
운명을 건 최후의 싸움이 이 곳에서 벌어질 것이고, 그 중심에 바로 이 캥거루 장
군이 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캥거루 장군은 두려웠다.  시체의 목까지 잘렸다는
양 장군의 소식은 이미 군사들 사이에서도 공공연한 비밀로 통하고 있었으니 만약
이 싸움에서 캥거루 장군이 진다면  그보다 더 심한 일도 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기느냐 지느냐의 문제라기 보다는 이제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다. 병사들이 부
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던  컹거루 장군은 막사로 들어갔다.  벌써 며칠째
그는  남 모르게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미 젖의 사원 십 리 밖에 진을 친  코끼리 장군은 견고한 신전을 공략할 방법
을 찾느라 고심하고 있었다. 비슷한 수의 군사가 싸운다면 성 안에서 지키는 쪽이
훨씬 유리하다.  그러면 성을 포위하고 지구전으로 들어간다면 어떨까. 아마 굶어
서 지쳐 버리겠지. 아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적군들이
규합해서 배후를 칠지도 모를 일이다. 너무 오랫동안 이 싸움을 끌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신전 안에 웅거하고 있는 적들을 들판으로 끌어내는 방법 밖에 없다. 캥
거루는 머리가 나쁘고 쉽게 흥분하니까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래,  바로
그거야.

   - 장군, 급보입니다.

   - 무슨 일인가?

   - 사자왕이 어미 젖의 신전에 당도했다 합니다.

   - 크하하하. 늙은이가 제 발로 죽으러 오다니. 잘 되었다. 우리 수고를 들게 되
었구나.

   - 하지만, 장군. 적병들의 사기가 올라갈 것입니다.

   - 흥.  병 든 늙은이가 나타난다고 무슨 사기가 올라가겠나.  우리는 이미 연전
연승, 우리를 이긴 자는 여태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병사들을 배 불
리 먹이고 충분히 쉬게 하라. 내일부터 신전 공략에 임한다.

   - 네, 장군.



   - 이틀 남았다.

   - ......

   - 우리도 슬슬 신전으로 가보자. 가서 준비할 것도 있고 하니.

   - 두렵습니다.

   - 너는 이미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우고 익혔다.  부족한 것은 없다. 너 스스로를
믿어라.

   - 제가 어찌 그렇게 막중한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자, 가자.

   낙타 대사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벌써 저만치 가고있었다.

   - 대사제님, 먼 길을 가는데 그냥 가시는 겁니까?

   - 따라 오기나 하여라.

   새끼 얼룩말이 낙타 대사제 곁으로 뛰어가자 대사제는 새끼 얼룩말의 손을 잡았
다.  순간, 새끼 얼룩말은 몸이 가벼워진 듯한 기분을 느끼며 주변의 풍경이 재빨
리 변하는 걸 감지했다.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나면 왕의 시중은 그만 두고 대사제
에게서 마술이나 배워야겠다.  새끼 얼룩말이 뒤를 돌아보자  끊임없이 예전의 그
모래 바람이 거대한 꼬리를 지평선 너머까지 끌고 있었다.



   - 왜 못 들어가게 하는거요?

   - 캥거루 장군,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전하의 분부이십
니다.

   - 지금은 전시요.  군사 책임을 맡고 있는 내가 왕을 만나지 못 한다는 게 말이
나 되오?

   - 죄송합니다.

   하마 총리는 캥거루 장군의 항의를 감당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사자왕은
신전에 도착하자 마자  신전의 꼭대기에 있는 비밀 방으로 들어가 전혀 모습을 보
이지 않았다. 심지어 캥거루 장군은 사자왕이 신전으로 온다는 사실도 몰랐고, 사
자왕이 왔을 때에도 얼굴 한 번 보지 못 했다.

   - 그래, 사자왕께서는 도대체 무얼 하고 계신단 말이오?

   - 글세올시다. 그저 조용히 할 일이 있으니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고만 하셨소.
다만......

   - 다만, 무엇이오?

   - 낙타 대사제께서 오시면 안으로 들여 보내라고 하셨소.  그 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소.



   신전 꼭대기의 비밀 방에는 가구라고 할 만한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돌로 만
들어진 텅 빈 방일 뿐이었다.  다만 커다란 창문이 동서남북으로 나있고 북 쪽 창
문 아래에 무릎을 꿇을 수 있도록  기도 방석이 놓여있을 뿐이었다.  사자왕은 그
기도 방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 북쪽 창문으로 보이는 시리우스를 응시하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 하늘이시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저는 수심에 가득 차 이 기도를 올
리나이다.  저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람에 이는 한 줄 물결에도
괴로워했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이 보시기에 부족함이 있거나 허물이 있
다면 저 타고 난 바의 모자람 때문이오니 오로지 하늘의 인자하심으로 그 죄를 사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바라옵건데, 이 나라와 이 늙은 몸을 환난에서 구하옵
소서. 인자하신 하늘이시여, 시리우스의 창조자를 우리에게 보내셨던 하늘이시여,
이미 약속하셨던 바와 같이 저 시리우스가 열리었으니 저희들에게 전령을 보내 전
능하신 말씀을 전하옵소서. 저희는 두려움에 몸을 떨고 여린 영혼 마저 떨고 있나
이다. 바라옵건데 하늘이시여, 한 말씀만 하소서, 저희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코끼리 장군은 동쪽 하늘에 해가 솟자 마자  모든 병사들을 준비시켜 신전 공략
을 준비했다.

   - 모두들 들어라. 우리는 오늘 마지막 결전에 임한다. 승리는 언제나 우리 것이
었음을 너희 용감한 전사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저 시리우스가 발광
을 시작할 때 이 승리의 길을 시작했으며 우리의 승리에는 늘 시리우스의 빛이 함
께 했다. 보라, 저 빛 나는 시리우스를.  태양 마저도 시리우스의 빛을 가리진 못
한다. 오늘 우리는 저 시리우스처럼 빛 나는 승리를 얻을 것이다. 그 승리 앞에서
부끄러운 자가 되지 않도록 모두 사력을 다 해 싸움에 임할지어다.

   사기충천한 코끼리 장군의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마치 벌써 싸움에서 이기
기라도 한 것처럼 창과 칼을 두드렸다.  코끼리 장군의 말대로, 빛 나는 시리우스
는 언제나 그들의 승리에 함께 했던 것이 사실이잖는가.



   - 장군, 적들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캥거루 장군의 막사 밖에서 부관인 비장군 소가 다급한 목소리로 캥거루 장군을
불렀다. 하지만 막사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초조해진 소 비장은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맙소사.  캥거루 장군은 바닥에 널부러져 잠들어 있었고,
막사는 어지럽게 널린 술독으로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소 비장은 캥거루 장
군을 흔들어 깨웠다.

   - 장군. 적들이 공격해 옵니다. 어서 정신을 수습하셔야 합니다.

   - 뭐야......적들이 온다......알았어.  까짓거 뭐 나가서 다 죽여주지. 그러면
되잖아. 흐하하. 어이, 부관 내 칼. 가자. 진격이다.



   견고한 어미 젖의 신전 앞까지 질풍같이 달려온 코끼리 장군과 병사들은 환호성
을 지르며 성 안으로 큰 화살을 쏘아댔다.  성벽 위의 캥거루 장군의 병사들은 깃
발만 나부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성벽 위에는 신전 깃발을 나부끼며
염소 대사제가 버티고 있었다. 성 위의 병사들도 염소 대사제처럼 미동도 없이 성
아래를 바라볼 뿐이었다.  코끼리 장군은 휘하 장수들을 불러 모아 작전을 지시하
고 진격의 북을 치도록 했다.

   - 공격.

   하늘이 찢어질 듯한 함성 소리와 함께 코끼리 장군의 병사들은 성벽을 기어오르
기 시작했다.  어미 젖 사원의 공방전이 시작된 것이다. 뒤 늦게 휘청거리며 나타
난 캥거루 장군은  성루 위에 올라가 칼을 뽑아 허공에다 휘두르며 병사들을 독려
하고 코끼리 장군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 네 이놈. 코끼리야. 뒷걸음질 치다 쥐나 잡을 놈아. 사사로운 감정을 앞 세워
죄없는 수많은 목숨들을 상하게 했으니 하늘이 무서운 줄을 알아라.

   병사들과 함께 성 아래까지 달려와 공격을 지휘하던 코끼리 장군이 캥거루 장군
을 발견하고 응수했다.

   - 뭐라 씨부렁거리느냐.  너의 무능함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남의 공적을 가로채 제 배나 채우는 놈이 어디에 나와 소리를 지
르느냐.  이리 내려와 한 번 맞붙어 보자.  네 놈에게 용기란 게 있다면 숨어있지
말고 어서 나오느라. 가소로운 것같으니.

   - 뭐, 뭐라.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이. 좋다. 네놈의 버릇을 고쳐주리라.

   캥거루 장군은 대기하고 있던 기병대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부
관인 소 비장이 그런 캥거루 장군을 말렸다.

   - 장군,  함부로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이것은 성 공격이 마땅치 않은 적들의
계략입니다.

   - 네 놈 마저 날 무시하는 것이냐.

   - 장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 물러서라. 비키지 않으면 널 베고 가겠다.

   - 장군.

   - 자, 나를 따르라.

   캥거루 장군과 기병대는 성문을 열고 우르르 몰려 나갔다.



   성문이열리고  선두에 서서 달려오는 캥거루 장군을 본  코끼리 장군은 전군에
후퇴 명령을 내렸다. 도망 가는 적병 몇몇의 목을 벤 캥거루 장군은 신이 나 더욱
속력을 높여 코끼리 장군의 뒤를 쫓았다. 캥거루 장군의 기병대가 성에서 멀리 떨
어진 협곡으로 들어 간 순간,  멀리 성에서 이 광경을 지켜 보던 소 비장은  적의
계략을 깨닫고는 성에 남아있던 수비병들을 이끌고 캥거루 장군을 구하러 달려 나
가려 했다. 바삐 병사들을 지휘하는 소 비장에게 염소 대사제가 다가왔다.

   - 이보시오. 소 비장. 우리는 신전을 지켜야 하오.

   - 염소 대사제.  전 장군의 부관입니다.  상관의 판단 착오라 하나 저는 상관의
목숨을 구해야 합니다.

   - 정 그러하다면, 근왕병들만 데려가시오.  신전 수비대에 속한 병사는 남겨 주
시오.

   - 알았습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 소 비장, 무운을 빌겠소.

   - 감사합니다.

   소 비장은 휘하의 근왕병들을 이끌고 성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 되었다. 모두 돌아 서서 공격한다.

   코끼리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우왕좌왕 도망가기에 바쁘던 코끼리 장군의 병
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대오를 갖추어  캥거루 장군의 기병대에 역습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한 캥거루 장군의 기병들은 조금씩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캥
거루 장군이 이건 좀 여의치 않겠다고 생각한 순간, 천지가 울리는 징소리가 협곡
을 가득 메우며 사방에서 적병들이 나타나 협곡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 적의 계략이다. 모두 퇴각하라.

   명령 아닌 비명을 캥거루 장군이 질러냈지만  이미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불리
해지고 있었다.  기병들은 대오를 잃고 겁에 질렸으며  제각기 살 길을 찾아 아무
곳으로나 내닫다가 적병들에게 쓰러져 갔다.

   - 분하다.  이 캥거루, 겨우 코끼리의 얕은 꾀에 넘어가다니. 코끼리 네 이 놈.
어디 있느냐.

   - 오냐, 여기, 네 놈이 그리도 간절히 찾는 코끼리가 있다. 이야ㅂ.

   벽력같은 코끼리 장군의 소리에 혼비백산한 캥거루 장군은  고개를 휘휘 돌리며
코끼리 장군의 모습을 찾았다. 그러나, 그의 눈 보다 코끼리 장군의 칼이 더 빨랐
다. 엇, 하는 찰나 캥거루 장군의 머리는 주인을 잃고 바닥에 나뒹굴며 말굽에 채
는 신세가 되었다.



   - 오랜만입니다. 하마 총리.

   - 오, 더디어 오셨군요. 낙타 대사제. 사자왕께서 기다리신지 오랩니다.

   낙타 대사제와 새끼 얼룩말은 사자왕이 기도를 하고 있는 비밀의 방으로 들어갔
다.

   - 전하, 준비가 다 되었나이다.

   - 아아, 더디어 오셨구려. 편지 읽는 자도 왔구나. 참으로 수고가 많았네. 참으
로 수고가 많았어.

   - 전하, 시간이 없사옵니다. 오는 길에 보니 이미 싸움은 시작되었고, 시리우스
는 예언대로 동전만큼 커져 있었사옵니다. 곧 해가 질 것이니 제단을 꾸미고 준비
를 서둘러야 할 것입니다.

- 알았소. 내 하마 총리에게 시켜 준비를 서둘겠소.



   근왕병을 이끌고 협곡 쪽으로 달려가던 소 비장은 협곡에서 한 무리의 군사들이
몰려 나오는 것을 봤다.

   - 저기 저 군사들은 어디의 군사들이냐?

   선두에 서서 달려가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대답을 대신했다.  적군, 적군이
다. 코끼리 장군이 선두에 서서 칼을 휘두르며 달려오고 있다.

   - 물러서지 마라.  모두들 정신을 바짝 차려라.  저들은 이 쪽으로 도망을 오고
있는 것이다. 다들 힘껏 싸워 한 놈의 적도 도망 가지 못 하게 하라.

   근왕병들 중에 그 말을 믿는 자는 거의 없었지만  이미 도망가기에도 너무 늦었
다. 코끼리 장군의 붉은 망토와 충혈된 눈빛이 보일 정도였으니까.  소 비장은 사
력을 다 해 싸웠다.  그의 은 빛 나는 갑옷은 벌써 피로 뒤덮혀 원래부터 붉은 색
이었던 것처럼 젖어버렸다. 하지만 그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근왕대의 희생은 컸다.

   - 네 놈의 이름은 뭐냐?

   커다란 고함 소리에 소 비장은 놀란 나머지 말에서 떨어질뻔 하였다. 칼을 고쳐
잡고 말머리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니  방천화극을 꼬나 잡은 코끼리 장군
의 모습이 한눈 가득 들어왔다. 입에 고인 피를 뱉어 내고 소 비장이 외쳤다.

   - 나는 비장 소다. 네 놈이 코끼리임에 틀림없구나.

   - 투항하라. 네 놈은 이런 곳에서 죽기엔 아깝구나.

   - 나는 목숨을 바쳐 의를 따를 뿐이다. 내 칼을 받아라. 이요오옷.

   전력을 다 해 최고의 검법을 날렸건만  코끼리 장군은 가볍게 받아 넘기며 칼등
으로 소 비장의 등을 쳤다. 바닥에 떨어진 소 비장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성에 남아 신전 수비대를 정비하고 멀리 전장을 바라보던염소 대사제의 눈에는
그저 자욱한 흙먼지만이 보일 뿐이었다.  초조했다. 신전 수비대만으로 신전을 지
킨다는 것은 애당초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고,  염소 대사제 자신도 병법에 대해서
는 아는 바가 없었다.

   - 싸움은 어떻게 되었소?

   염소 대사제가 돌아보니 사자왕이었다. 사자왕을 본 염소 대사제와 병사들은 모
두 무릎을 꿇었다.

   - 일어들 나시오. 캥거루 장군은 어디로 갔소?

   - 전하,  캥거루 장군은 근왕대를 이끌고 적병을 공격하기 위해 성 밖으로 나갔
습니다.

   - 미련한 놈 같으니. 그토록 가볍게 움직이지 말라 일렀거늘. 대사제.

   - 예, 전하.

   - 해가 질 때까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적의 공격을 막아야 하오. 만약 캥거루
장군의 공격이 성공했다면 몰라도, 만에 하나라도 실패했을 경우에는 어려운 싸움
이 될 것이오.  내가 함께 병사들과 싸울 것이니  대사제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두시오.

   사자왕이 직접 자신들과 함께 싸울 것이라는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자 병
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곧 몰려올 적병에 대한 두려움을 씻었다.



   비밀의 방에는 하마 총리의 꼼꼼한 감시와 지휘 아래 돌로 만든 둥근 제단과 각
종 제기들이 마련되었다.  낙타 대사제와 새끼 얼룩말은 제단 앞에 꿇어앉아 향을
피우고 기도문을 외면서 곧 대지를 뒤덮을 어둠과  그와 더불어 찾아올 편지를 기
다렸다.

   - 아직도 두려우냐?

   - 아닙니다. 두려움은 저를 떠났습니다.

   - 그러면 너의 마음에 뭐가 남았느냐?

   - ......모르겠습니다. 그저 광야와 같습니다.

   - 너는 바른 길을 걸었다. 그것이 네 광야의 신전이니라.

   - ......

   - 광야에 홀로 서서 편지를 기다려라.  편지를 잡으면 온 별들과 한 알 한 알의
모래들도 들을 수 있도록 네 모든 것을 바쳐 읽어야 한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무렵,  캥거루 장군이 사라진 협곡 쪽을 주시하고
있던 감시병이 소리를 질렀다.

   - 누군가 오고있다.

   소 비장이었다. 소 비장은 단신으로 휘청거리는 발검음으로 손에는 상자를 들고
신전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가 들어올 수 있게 문을 열어준 병사들은  사자왕과
더불어 성문으로 달려갔다.

   - 어찌 되었는가?

   - 임금이시여.

   소 비장은 오열을 토하며 바닥에 꿇어 앉아  상자를 머리 위로 올려 사자왕에게
내밀었다.  사자왕은 상자를 받아 뚜껑을 열었다. 아아. 캥거루 장군의 머리였다.
병사들 속에서는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나왔다. 사자왕은 상자에서 캥거루 장군
의 머리를 꺼내 높이 치켜들었다.

   - 모두들 보아라. 여기 너희들 장군의 머리가 있노라. 그는 목숨을 다 해 나라
를 지키려 했느니라. 그는 너희들과 함께 싸우던 자이니라.  성 밖의 무도한 적들
은 이토록 인정이 없으니 그대들도 살아 도망갈 생각을 말라. 여기 신전의 기둥으
로 묘비를 삼고 우리의 피로서 비명을 삼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물러서지 않을 것
이다. 저기를 보아라. 저 시리우스를 보아라. 오늘 밤이 되면 저 시리우스를 통해
위대한 개님이 보낸 전령이 편지를 보내올 것이다. 편지 읽는 자가 편지를 읽으면
세상의 모든 어둠과 혼란이 사라질 것이니,  너희들의 수고를 들어줄 최고의 원병
이다. 그러니 두려워 말라. 이미 승리는 우리의 것이니.

   병사들의 환호와 기도 소리를 뒤로 한 채  사자왕은 캥거루 장군의 머리를 상자
에 넣어 품에 안고서 신전으로 들어갔다.



   - 늙은이는 모습을 보여라. 여기 천하제일장 코끼리가 왔노라.

   코끼리 장군의 군대는 성 밖에 진을 치고 언제라도 공격할 태세였다.  성루에서
이들을 지켜 보던 염소 대사제는 서산쪽을 바라 보았다. 이미 해는 서산에 걸려있
었다. 코끼리 장군, 그대는 너무 여유를 부렸어.  이제 조금만 더 시간을 끌련 승
리는 우리의 것이다. 염소 대사제는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코끼리 장군에게 응
수했다.

   - 추방 당하고서도 스스로의 죄를 뉘우치지 못 하는 덜떨어진 놈아.  오늘 네놈
이 여기서 죽음은 오로지 네놈의 무지에 있음을 알아야할 것이다.  닭 대가리같은
놈.

   - 이 늙은 쥐같은 놈이. 닭 대가리라. 날 더러 닭 대가리라. 오냐, 네놈의 목부
터 베어주마. 뭣들 하느냐, 공격하라. 한 놈도 살려두지 말라.

   코끼리 장군의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성안을 향해 활을 쏘고 성벽을 기어오르
기 시작했다.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급보를 받은 사자왕은  성루에 올라 병사들을 독려하
며 큰 활을 쏘아 적과 싸웠다. 해는 점점 더 서산 너머로 모습을 감추어 갔다.



   비밀의 방에서는 낙타 대사제가 정화하고 축성한 제단 위에 새끼 얼룩말이 올라
가 왼쪽으로 원을 그리며 돌았다. 대사제와 새끼 얼룩말은 입을 맞추어 끊임 없이
주문을 외었다.



   사자왕은 열심히 싸웠다.  하지만 나이는 어쩔 수 없는가. 미쳐 몸을 피할 틈도
없이 그의 왼쪽 어깨에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염소대사제는 사자왕을 기둥을 베
고 누워있게 하고 자신은 사자왕의 큰 칼을 들고 군사들을 지휘했다. 사자왕은 눈
을 돌려 서산을 바라봤다.  해가 졌다. 서산 너머로 해가 졌다. 붉은 노을만이 하
늘에 가득할 뿐이었다.

   - 보라. 해가 사라졌다.

   염소 대사제가 사자왕과 서산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 이제 우리가 이겼다. 보라, 해가 사라졌다.

   성 위에서는 함성 소리가 진동을 하고, 더욱 격렬하게 돌과 화살을 퍼부으며 코
끼리 군을 막았다.



   - 해가 넘어갔다.

  낙타 대사제가 주문을 외다 말고 새끼 얼룩말에게 일렀다.  새끼 얼룩말은 원을
그리며 돌면서 매일 마다 연습했던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의 주문은 이제 한 곡
조 노래처럼  낭랑하게 비밀의 방을 울리고  피가 낭자한 성 밖까지 울려 퍼졌다.
낙타 대사제는 북쪽 창문 앞에 꿇어앉아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높이 쳐들고 시리우
스를 바라보았다.



   북쪽 하늘에서 빛 나던 시리우스 주변 하늘이  무지개 색으로 찬연히 더욱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싸우던 양 쪽의 병사들이 휘두르는 칼부림이 무디어졌다. 모두
들 시리우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리우스가 한 번 번쩍 하면서  그 속에서 한 줄기 흰 빛이  솟구치는가 싶더니
곧바로 하늘을 가로질러 신전의 꼭대기에 내려 꽂히며  꼭대기를 덮고있던 뾰족한
지붕을 날려버렸다.  순간 땅이 흔들리며 성벽에 매달려 있던 병사들이 떨어졌고,
겁에 질려, 들고 있던 무기를 떨어뜨리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비밀의 방 안에서 원을 그리며 춤을 추던 새끼 얼룩말을 그 빛줄기가 감싸고 있
었는데 새끼 얼룩말은 부르르 몸을 떨며 하늘을 향해 두 손을 치켜 올렸다.



   사자왕은  부상 당한 몸도 잊은 채 비밀의 방을 향해 무릎을 꿇었고  그를 따라
병사들도 무릎을 꿇었다.  코끼리 장군은 등골이 오싹해지며 오금이 저려 그 자리
에 못 박은 듯이 서서 비밀의 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심지어 바람 조차 숨을 죽였다.



   새끼 얼룩말의 두 손에 빛이 엉기는가 싶더니 황금빛 나는 두루마기가 생겨났다.
새끼 얼룩말이 두루마기를 펼치자 황금빛이 비밀의 방에서 온 사방으로 널리 퍼지
며 대낯같이 밝게 비추었다. 새끼 얼룩말은 노래 같은 소리로 두루마기를 읽었다.



   잘들 계신지. 그리운 마을의 여러분들. 아직까지 저를 기억하신다면 여러분에게
남아있는 저의 마지막 모습은 하늘로 뜀박질을 해가던 바로 그 모습이겠지요.  우
리가 생각하던 그대로 햇님을 삼킨 것은 붕이었습니다.  저는 다짜고짜 붕을 물어
버렸고 붕은 비명을 지르며 왜 이러느냐고 제게 묻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
다. 이 고약한 새야, 네가 삼킨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붕이 대답했습니다. 뭔지
모른 채 다만 밝고 아름다워 삼켰더니  이렇게 속이 뜨겁고두근거려 다시 뱉으려
하나 나오지를 않으니 어찌하면 좋으냐고 말이죠.  전 붕과 함께 어찌하면 햇님을
다시 꺼낼까 고민을 거듭했지만 답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제가 붕의 속으로 들어
가 햇님을 밖으로 밀어내는 거죠.  저의 제안을 붕은 받아들였습니다.  붕이 저를
삼키고 들어가보니 이건 정말 말이 아니었습니다.  무지 덥고 습해서 도저히 한가
하게 잠이나 잘 그런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잠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여러분
은 제가 잠보라고 놀리곤 했었죠. 그때가 정말 그립습니다. 하여튼, 저는 자던 힘
까지 다 동원해서 힘껏 햇님을 밀었습니다. 그렇게 구십구일을 했죠. 구십구일 째
되던날  햇님이 턱하니 밖으로 나갔는데  붕은 그 동안 참았던 뜨거움을 식힐려고
제 생각도 못하고 곧바로 북해로 날아갔지 뭡니까. 북해에 도착하자 마자 붕은 차
가운 물을 콸콸 삼키는데 아 그거 정말 못 견디겠더군요.  저는 햇님을 밀어낼 때
보다 더 힘들게 붕의 배 속에서 나왔는데  붕은 자기 입에서 나오는 절 보더니 깜
짝 놀라며 이러는 게 아니겠어요. 어디 갔다 이제 오셨어요.  알고 보니 붕이라는
친구 참 다정하더군요.어떤 이슬이 맛 있는지 어떤 나무 위에서 잠을 자야 하는
지, 어떻게 하면 좀 더 우아하게 날 수 있는지 참 친절하게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저는 붕이 좋았어요.

   하루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하직 인사를
했었습니다.  아, 그런데 이 붕이라는 친구가 펑펑 울지 않겠어요.  아시죠. 제가
눈물에 약한거. 도저히 떠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붕이랑 같이 살고 있
습니다.  아마도 다음 달 쯤 홀(忽)이란 북해의 임금을 주례로 모시고 결혼 할 거
같아요.  왜 아마도,라고 하느냐 하면, 제가 붕이랑 혼례를 올리기에는 아직 너무
작거든요.  붕이 시키는대로 이슬을 먹으면서 몸을 키우고는 있지만 아직 조금 더
자라야겠다는 판단입니다. 붕에게 이런 얘길 하면 또 얻어터지겠지요.  언젠가 빠
른 시일 안에 붕과 함께 여러분들을 찾아뵙겠습니다.  그러면 다시 연락할 때까지
안녕히.



   새끼 얼룩말이 편지 읽기를 마쳤다. 세상을 가득 채웠던 황금빛이 사라지고 다
시 어둠이 내려 앉았다. 발광하던 시리우스도 다시 제 밝기를 찾았다.  하지만 땅
에 엎드리거나 서 있던 모든 자들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댓글 1
  • No Profile
    르혼 09.02.27 01:56 댓글 수정 삭제
    저자인 백상현 님은 여자친구의 요청을 받고 사흘만에 이 글을 썼다고 합니다.

    여자친구의 요청은 '10가지 동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써 달라, 다만 개는 전면에 나와서는 안된다' 라는 것이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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