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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말하는 화초

2009.02.26 16:0302.26

말하는 화초를 키운 적이 있었습니다. 드물지만 또한 아주 없는 일은 아니기 때문에 깜작 놀랄 일도 아닙니다. 내가 가졌던 풀은 사람을 잡아먹거나 하는 흉악한 종류는 아니었고, 꽃을 피우지는 않았지만, <어린 왕자>의 장미처럼 까탈스럽지 않았습니다. 그 풀의 이름은 마리라고 했습니다.
늦은 밤 귀가하여 드라마를 같이 볼 때, 마리는 키득거리거나, 어쩜 저럴 수가, 말도 안돼와 같은 감탄사를 내뱉곤 했습니다. 가끔은 채널을 가지고 다투기도 했는데, 대부분 내가 양보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리는 며칠씩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심술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소한 일로 화를 내는 속 좁은 식물은 아니라며 극구 부인했지만, 그렇다고 속 시원히 이유를 말해주는 것도 아니었으니 내 짐작이 맞을 것입니다.
자기 전이나 일어나서 분무기로 물을 뿌리면 ‘아, 간지러워’ 또는 ‘그만 됐어, 오늘은 설탕을 약간 타서 뿌려줄래’ 하며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간이 그녀에게는 가장 기분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끔 내가 클라이언트와 문제가 생겨서 걱정하고 있을 때는 제법 그럴 듯한 충고도 해주며 위로했는데, 어쩜 그렇게 꼭 필요한 조언을 해 주는지 깜짝 놀랄 때가 많았습니다.

- 나 말할 것이 있어.
- 뭐지?
- 좀 난처한 이야기인데, 괜찮을까?
- 말해봐.
- 나 아이를 갖고 싶어.
- 어떻게? 아, 그렇구나, 뭐 나쁘지 않겠지.
- 그렇게 쉽게 이야길 할 것이 못돼. 당신이 귀찮아 할 수도 있어.
- 아이가 생긴다고 해도 물주고 보살피는 일 정도는 해줄 수 있어.
- 아니, 내가 아이를 갖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뜻이야.
- 그게 뭔데?
- 밤마다 당신이 나를 안고 사랑해 줘야 해. 쓰다듬고 따뜻하게 해 주고 품어주고 하다가 그 사랑이 충분하다고 느껴지면 내가 임신을 하게 돼. 그게 우리가 개체를 늘리는 방법이야.
- 아, 그러면…
- 그래, 네가 아이들의 아빠가 되는 거지.
- 아,
- 며칠 시간을 줄 테니 생각해봐.

내 솔직한 심정은 그 전에는 친구처럼 생각되던 마리가 갑자기 부담스럽고 징그러워졌습니다. 그러면 안 된다 그러지 말자고 하면서도 마리를 마주대할 수 없었습니다. 일을 핑계로 늦게 귀가했고, 살금살금 침실로 기어들어갔습니다. 늦은 밤에 문득 마리가 신음처럼 괴괴한 울음을 내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중에서야 그 울음이 발정기 고양이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작게 숨죽여 내는 소리였지만 그 울음은 사람을 흥분 시키는 작용이 있는지 듣고 있으면 심장이 팔딱거리며 마리를 덮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울음은 곧 끊기고 밤이 지났습니다.

- 나는 네가 부담스러워졌어. 도저히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아.
- 알고 있어. 당신한테 그런 부탁을 하는 게 아니었어. 계속 해.
- 그래서, 너하고 같이 살 수는 없을 것 같고, 고민해 봤는데, 다른 주인을 구해 줄게. 너한테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말이야.

마리는 조금 당황한 듯 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 충격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습니다. 마리는 집에서 독립하면서 받은 선물이었으니까 벌써 5년이나 같이 살았는데, 이별이 쉬울 수는 없죠.

- 아직 당장은 아니고, 구해질 동안은 함께 있을 거야. 남은 기간 동안은,
- 나…
- 뭐?
- 산에다 심어주면 안될까?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산속에다가 나를 옮겨줬으면 해. 부탁이야.
- 그럴 수는 없어. 그곳에는 아무도 없고, 볼 것도 없고, 비라도 많이 오면,
- 잠깐. 미안한데, 내 마지막 부탁이야, 꼭 들어줬으면 해.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끼지 않아도 돼. 정말이야, 그것도 가능하면 빨리.

그녀는 헤어지지는 말에 의외로 담담하게 처신했습니다. 하긴 그녀가 울고불고 하는 것 따위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 뿌리가 썩어 잘라내야 했을 때도, 그 부분에 문제가 생겨 다시 잘라내야 했을 때도 며칠을 끙끙대면서도 아프다는 소리는 단 한번도 하지 않았던 그녀였습니다. 하지만, 단호하게 야산에 묻어주기를 부탁했고, 그것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주 토요일에 스모키 마운틴에 등산을 하게 됐습니다. 캠핑을 할 수 있는 곳에서 두세 시간 더 산속을 헤매고야 적당한 장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비쭉한 나무숲에서 떨어져 탁 트인 곳이었고 남향의 양지바른 곳이었습니다.

- 좋네.
- 정말 괜찮겠어?
- 그만. 이런 식의 이야기로 마지막 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 저쪽으로 꽤나 먼 곳까지 보이는 것이 시원하다.
-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야. 나중에 시간이 나면 찾아올게.
- 절대 그러지마!
그녀는 소리를 빽 질렀습니다.

- 당신이 가끔이라도 찾아온다면 나는 그것을 기다리다가 말라 죽을 거야.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절대 찾아오지마. 절대. 약속해, 절대 찾아오지 않는다고, 빨리.

그녀의 화난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약속을 했고, 그렇게 몇몇 시답지 않은,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하산했습니다. 그 후, 몇 주를 폭우에 쓸려가거나 말라 죽어가며 원망에 찬 저주를 퍼붓는 그녀 꿈을 꾸면서 괴로워했습니다. 그녀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했고, 홀가분하다는 파렴치한 느낌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녀가 원했던 일이라는 알량한 위안도 있었어요. 이런 복잡 다난한 심정은 내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스모키 마운틴의 기상예보에도 관심을 가지며 일년을 지내다가 클라이언트로 저명한 식물학자를 모시게 됐습니다. 그에게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런 종류의 풀이 야생에도 꿋꿋하게 살 수 있다는 그런 정보였습니다.

-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직접보지는 못했지만 미스터 최가 키운 풀이라는 것이 아우라폴립 네이키코른 이라는 종류인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 아, 그렇군요.
- 그 생식의 방법을 봐도 정확히 들어맞죠. 그 식물이 발정기 때 내는 소리는 인간을 극도로 흥분 시켜 주인으로 하여금 덮치게 하고, 그렇게 생식을 하는 거죠.
- 마리는 그런 소리를 거의 내지 않았는데요.
- 일종의 자존심이겠지요. 그 종류의 풀에게는 흔한 심성입니다. 그런 성향 때문에 거의 멸종했다고 합니다.
- 아,
다른 손님들의 접대 때문에 대화가 끊어졌다가, 파티 끝 무렵에서야 그 식물학자에게 묻고 싶은 것을 물을 수 있었습니다.

- 야생에서도 살 수 있을까요?
- 미스터 최에게는 안된 이야기이지만, 살아있기 힘들 겁니다. 애초부터 야생에서 자랐으면 모를까, TV나 인간과의 잡담에 길들여진 아우라폴립 네이키코른은 종종 고립된 상황을 못 견뎌 하지요. 하지만, 워낙 자료가 적어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식물학자와 면담을 한 뒤 오히려 자책감은 더해졌고, 그 동안 안 꾸던 악몽을 다시 꾸게 됐습니다. 당장이라도 찾아가 마리에게 사과를 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 불편한 관계를 영원히 끊고 편하게 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풀과의 사랑 또는 섹스라니…… 아무래도 거북했습니다. ‘이런 것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다. 하지만, 내게는 책임이 있다.’ 이런 생각들이 가지를 치며 심란하게 했습니다.

날이 밝을 때까지 잠이 들지 못했던 내게, 제일 무서운 생각은 그 곳에서 그녀의 말라 비틀어진 시체를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더 무서운 것은 식물학자가 말한 미쳐버린 풀을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지고 가기에는 벅찬 십자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은 그녀와 같은 풀에 관심 있는, 그래서 성심성의껏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스모키 마운틴에서 그녀를 심은 곳을 가르쳐 줄 테고, 그는 등산객인양 그녀를 찾아가 친해지고, 데려다 키우면 됩니다. 나에게는 그 후 딱 한번만 그녀의 소식을 전해 주면 됩니다. 잘 있고 내가 데려다 키우고 있다든지, 이미 죽었다든지 하는 그런 소식 말입니다. 이런 행동이 그녀가 싫어하는, 자신의 양심만 위로하는 치사한 방법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최선인 것 같아요.

그녀는 드라마 시청 시 같이 하기에 즐거운, 완벽한 동반자이며,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적절히 위로를 할 수 있는 조언자이며, 되도 않는 이야기를 지어내서 주인을 웃게 만드는 익살꾼입니다. 이런 그녀를 책임지고 맡아줄 수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은 연락주세요. 저는 그녀에게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어떻게 됐나, 한 줄 소식만 전해주면 됩니다.

미리 고맙습니다.

- JUN -
댓글 2
  • No Profile
    라퓨탄 09.02.27 01:21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근데 아우라폴립 네이키코른.이라는 종이 진짜 있는 건가요?
    검색해보니 나오는 게 없는데...
  • No Profile
    초극성 09.02.27 16:23 댓글 수정 삭제
    워낙 자료가 적어서 저도 잘,,, 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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