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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여우 노래

2009.02.18 10:4802.18



아이야, 너는 두려운 게지?
내 기다란 주둥이가, 솟아오른 귀가, 뾰족한 송곳니가 말이다.
허나 말이다, 아이야. 나의 등을 만져보렴.
세상천지 이처럼 보드라운 게 다시 있으려믄.
나의 꼬리를 쫓아보렴.
바람결에 흐드러지는 민들레 홑씨마냥 마음 따라 오가는 나의 꼬리를 따라오렴.
젖은 풀밭, 싱그런 내음 맡으며 나를 쫓으렴.
재주넘고 휘파람불며 조곤조곤 나를 따르렴.



여우 노래


00
하늘이 참 맑았다. 때 이른 고추잠자리가 하늘을 유영하고, 냇물을 따라 헤엄치던 송사리 떼는 아이들의 물장구에 쏜살같이 몸을 숨겨댔다. 얼굴이 까맣게 탄 사내 녀석들은 발가벗은 채로 시커먼스 흉내를 내며 여자아이들을 쫓아다녔고, 그럴 적마다 여자 아이들은 질색을 하며 서로의 등에 숨었다. 욱이는 그런 형, 누나들을 바라보며 졸린 눈을 비벼댔다. 한참 달게 자던 차, 이웃에 사는 영운의 손에 끌려나온 탓이었다. 더불어 이참에 개울에서 때나 벗기고 오라며 때밀이 수건을 챙겨 주던 할머니의 손길이 아직도 주머니 부근에 맴도는지라, 영 기분이 좋지 못했다. 해서 욱은 다른 아이들과 달리 발끝만 물에 담근 채 먼 산만 보고 있었다. 맴맴 귓가에 도는 매미 울음이 제법 시원한 오후였다.


“앗, 야! 개구리다!”


욱은 영운의 우렁찬 외침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짧은 새 잠이 들었던 건지, 바위 위에 앉아있던 몸이 어느 새 개울에 담겨 있었다. 욱은 주머니에 아슬아슬 걸친 채 냇물에 휘날리는 때수건을 주머니에 훅 집어넣었다. 그리고 주변에 누구 본 사람이 없나 눈치를 살폈다. 다행이 아이들은 영운이 말한 개구리를 찾느라 욱 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욱은 민기적대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다시 바위 위에 앉았다. 마른 바위 위로 바지에 묻은 물이 방울방울 흘러 내려갔다.


“어맛, 내 신!”
“신혜 신이 떠내려간다!”
“야, 누가 저것 좀 잡아라!”


물이 타고 지나간 길이 반쯤 말랐을 때였다. 별안간 위쪽 개울서 놀던 여자아이들이 소란을 피워대더니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사내아이들의 장난에 놀라 넘어진 여자아이가 그만 신을 흘려보낸 모양이었다.


“어쩔 거니! 우리 아버지가 서울서 보내주신 구두다, 구두!”
“야야, 저거 누가 좀 잡아라!”


이미 신은 중간 개울을 지나 아래 개울로 내려오고 있었다. 아이들과 떨어져 있던 욱은 그 빨간 구두가 제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봤다. 잘만 하면 손을 뻗어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마침 욱을 본 영운이 부리나케 소리를 쳤다.


“욱아, 그 신 잡아!”
“이 나쁜 녀석, 신혜가 울잖니!”


우는 아이를 달래던 여자애 하나가 부아를 냈다. 그러자 영운의 친구 중 하나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영운은 친구를 덩달아 구박하며 욱의 이름만 연신 불러댔다. 결국 욱은 바위를 내려가 다시 개울로 들어갔다. 땡볕에 미지근해진 물이 발목을 타고 흘러갔다. 욱은 빨간 구두를 옮겨오는 개울물을 바라봤다. 수면에 부서지는 빛을 견디며 물을 보고 있자니 별안간 현기증이 돌았다. 아이는 겨우 정신을 다잡고 개울 중간 즈음으로 걸어 나갔다. 발목을 겨우 웃돌던 물이 어느 새 무릎을 넘어 허벅지 중간까지 차올랐다.


“야, 얼른 잡지 않고 무얼 하는 게냐!”
“내 신, 내 구두!”
“김욱, 잡아!”


멀리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욱은 슬금슬금 더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 새 물은 허벅지를 넘어 골반 근처를 스쳐가고 있었다.


“아!”


욱은 길게 팔을 뻗어 구두를 낚아챘다. 여자아이가 울며불며 외치던 빨간 구두였다. 잔뜩 물을 먹은 싸구려 구두를 뻗어 올리자, 발을 구르며 초조해하던 아이들이 만세를 부르며 기뻐했다. 욱은 괜히 우쭐해지는 마음에 씩 입가를 올렸다. 그리고 막 돌아가려 몸을 트는 차, 별안간 무언가가 발목을 잡아왔다. 가느다란 촉감이 수초인 것 같았다. 욱은 수면을 봤다. 허나 어느새 빨라진 물살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욱은 덜컥 겁을 먹었다. 하여 수심도 무시하고 수초를 벗어나고자 마구 발을 굴렀다. 그때였다. 몸이 둥실 떠오르는가 싶더니,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물살에 휘말렸다. 욱은 순간 시야를 채우는 옥빛 물에 서둘러 다리를 저었다. 그러자 수면이 가까워지며 하늘이 보였다. 욱은 정신이 없는 중에도 아이들이 몰려있던 곳을 찾고자 애썼다. 허나 이미 물살에 갇힌 건지, 인기척 같은 것이 전혀 닿지 않았다.


“살, 살려줘! 푸흡, 할, 머니, 파아.”


아이는 허우적대며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허나 입을 열적마다 들이닥치는 옥빛 개울물에 점점 숨을 쉬는 것이 어려워져만 갔다.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욱은 집에 있을 할머니를 떠올렸다. 오늘 장에 다녀오신다며, 오는 길에 네가 좋아하는 과자도 사다주마 약조했던 것도 떠올렸다. 허나 코며 입으로 밀려드는 물이 자꾸만 눈꺼풀을 잡아 당겼다.


“정신 놓으면 안 돼.”
“으앗!”


욱은 덜미 쪽에 느껴진 아픔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이윽고 제대로 눈을 떴을 땐 옥빛 물이 아닌 파란 하늘과 마주해있었다. 허나 그 뿐, 욱은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물살에 저항을 해댄 탓이었다. 유난히 흰 태양이 욱의 젖은 몸을 비춰주었다. 욱은 태양을 마주보며 아련히 눈을 감았다. 어쩐지 이대로 잠이 들면 저녁도 거르고 쭉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눈을 떠야지, 감으면 어떻게 해. 할머니를 뵈러 가야지.”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욱을 깨웠다. 아이는 감았던 눈을 겨우 들어 올리고 정면을 봤다. 여전히 눈엔 파란 하늘만 보였다.


“물 뱉으렴. 담고 있어서 좋을 물은 아니다.”
“우욱!”


욱은 순간 배를 움켜잡았다. 어디선지 모르지만 갑작스레 다가온 충격 탓이었다. 욱은 몸을 일으켜 삼켰던 물을 모두 게워냈다. 억지로 위장이 틀리며 뱃가죽이 당겨왔다. 아이는 진이 다 빠진 양 상체를 휘청거렸다. 태양이 자꾸 달려드는 것만 같았다. 그때 등 뒤에서 보드라운 손이 뻗어 나와 욱의 등을 받쳤다. 겨우 중심을 잡은 욱은, 그 손에 몸을 기댄 채 마저 속을 게웠다. 이윽고 더 게워낼 것이 없어지자, 등을 받치고 있던 손이 배로 다가왔다.


“아아.”


손은 담요라도 되는 양, 욱의 배를 덮어주었다. 욱은 눈꺼풀을 끔뻑이며 그 손을 바라봤다. 학교에 있는 경숙 선생님 손보다 몇 배는 흰 손이었다. 흙이라곤 만져본 적도 없는 귀한 손 같았다. 아이는 지친 중에도 손을 들어 그 손을 잡았다. 보드라운 감촉이 젖은 손바닥 가득 퍼졌다. 욱은 고개를 살짝 틀었다. 그러자 등 뒤에 숨은 이가 얼굴을 마주봐 왔다. 동그랗고 커다란 눈에 오뚝이 솟은 콧날, 무엇보다 희기 그지없는 살갗이 꼭 텔레비전 속 예쁜 누나만 같았다.


“누구세요?”
“궁금해 하는 것을 보니 정신이 든 게로구나.”


상대는 쌜쭉 미소를 지었다. 붉은 입술 새로 가지런히 난 치아가 살짝 비쳤다. 그 고운 모습에 욱도 덩달아 입가를 올렸다.


“욱아! 김욱아!”


그때 멀리서 동네 어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의 째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사람들이 오는가보다. 그만 가봐야겠구나.”
“아.”
“반가웠다, 또 보자. 초록 때수건 아가야.”


말이 흩어지는 동시에 배를 덮고 있던 손길이 귀신처럼 사라졌다. 욱은 등에 와 닿는 나무껍질의 질감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견딜 수 없을 만치 쏟아지는 졸음에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작열하는 태양, 따가운 자갈 속에서 욱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01
욱은 잠에서 깼다. 문 너머로 새들어오는 할머니의 목소리 탓이었다. 아이는 길게 하품을 내뱉으며 이불을 걷어냈다. 한기가 끼쳐왔지만 때가 때인지라 이내 살갗선 땀이 베어났다. 욱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문을 젖혔다.


“예끼, 못된 놈! 동생 데리고 나간대서 누룽지까지 쥐여 줬더니, 물귀신을 붙여 돌아와?”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노기 어린 음성이 욱의 귀를 갈겼다. 새삼 놀란 욱은 문지방을 잡은 채 밖의 기척을 살폈다. 어느 새 어두워진 마당엔 이웃에 있어야할 이모부와 영운이 나란히 서 있었다. 욱은 그제야 할머니의 말이 저를 향한 게 아니란 걸 알고 문을 마저 열었다. 그리고 미적미적 밖으로 나왔다.


“장모님 이제 그만 하세요. 살아 돌아오면 된 거 아닙니까.”
“자넨 가만히 있어! 저런 천둥벌거숭이를 가만 두면 그 뒤엔 또 어떤 일이 나라고! 그리고, 애가 무사히 돌아왔다던가? 목덜미 못 봤어? 여우한테 물려갈 번 한 건 어떻게 할게야!”
“그 미신을 여적 믿으시네. 장모님, 그건 옛날 어른들이 아이들 놀리려고나 하시는 거지요. 욱이 목덜미에 난 상처, 그거 돌에 찍혀서 난 상처래도요?”
“이, 이!”
“할머니.”


욱이는 억지로 음성을 짜내 할머니를 불렀다. 동시에 세 사람의 눈이 아이에게로 쏠렸다.


“아이고, 내 새끼!”


할머니는 단숨에 달려와 욱을 품에 품었다. 등을 토닥이는 손은 퍽퍽 소리가 날만치 매웠지만, 욱은 가만히 할머니의 가슴에 안겼다. 그녀는 아이를 보듬으며 고름 끄트머리로 눈가를 훔쳐냈다. 그리곤 눈물 가득한 눈으로 욱을 다시 한 번 살피며 말했다.


“어이고, 내 아가야. 안 깨는 줄 알고 할미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누? 어째 그리 되어서는.”


그녀는 말을 잊지 못하고 다시 눈물을 찍어냈다. 욱은 할머니를 측은히 바라보다, 영운에게로 눈을 돌렸다. 대체 얼마나 운건지 빨갛게 부어오른 눈이 안쓰러운 꼴이었다. 영운은 비척대는 걸음으로 다가와 욱이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는 엉엉 소리를 내며 다시 울기 시작했다. 영운은 그 와중에도 뭐라 지껄여댔지만, 마당에 모인 사람들 모두 미안하단 말 외에 다른 것은 알아듣지 못했다. 욱은 고사리 손으로 영운의 등을 쓸어주었다. 그런 욱이를 보며, 영운의 아비는 아이의 정수리를 두 어 번 토닥이곤 이웃, 자신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영운은 쉽게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할머니도 이따금 눈물을 훔쳐냈다. 욱이는 잠시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다 가까스로 입을 뗐다.


“할머니, 나 배고파.”



02
그 날 저녁상엔 백숙이 올라왔다. 신을 잃어버렸던 아이 네에서 사과 차 가져온 것이었다. 덕분에 물에 빠졌던 욱도, 펑펑 울어 눈도 못 뜨는 영운도, 아무 일 없었다는 양 아귀아귀 밥을 삼켜댔다. 눈물을 지었던 할머니도 허겁지겁 밥을 삼키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뼈를 발라낸 닭고기를 소금에 찍어 밥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한참을 먹어 앙상한 뼈만 남았을 때에야 욱과 영운의 숟가락질이 멈췄다. 영운은 급히 먹느라 목이 막혔던지 단숨에 물 한 그릇을 비워내곤 바로 바닥에 엎어져버렸고, 욱도 부른 배를 두드리며 할머니 곁에 기댔다.


“맛나게 먹었누?”
“응, 할머니.”


욱은 고개를 끄덕이다,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바닥에 누웠다. 할머니는 욱의 더벅머리를 쓰다듬어주다 목덜미를 살폈다.


“아무리 봐도 여우 잇자국인데.”
“할머니, 왜 아까부터 여우를 찾아?”
“응? 아무 것도 아녀. 너 그만 가라. 느이 어매가 찾으러 오기 전에 건너가서 자.”
“싫어! 욱이랑 놀 거야. 김욱, 나가자.”
“이것이 아까도 그래 데려가 일을 쳐놓고, 또! 얼른 못 가?”


영운은 슬쩍 멈칫하다 욱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곤 여보란 듯 문을 박차고 도망을 쳤다. 뒤로 할머니의 성난 음성이 들렸지만, 둘은 멈추지 않았다. 정확히는 영운이 욱의 손을 놓지 않았다.
아이들은 집 뒤편 대나무 숲에 닿았다. 영운은 그제야 욱의 손을 놓아주곤 헐떡헐떡 숨을 골랐다.


“배부른데 뛰게 하고, 배 아프잖아.”
“시끄러! 쳇, 할머니는 만날 나만 미워한다. 너나 나나 똑같은 사내놈인데.”


욱은 말간이 영운을 바라봤다. 투덜대는 모습이 우습기도 했거니와, 생각하는 것이 일곱 살 난 저보다도 훨씬 어려 보인 이유였다. 허나 욱은 아무 말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내어보았자, 돌아올 것은 매운 주먹뿐이란 걸 잘 아는 모양이었다. 대신 욱은 조금 전 할머니가 흩어버리듯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형, 여우 본 적 있어?”
“여우? 없지. 그런 건 산에나 있지 이런 데는 없어. 못 살아. 내려오면 당장에 가죽부터 뺏길걸?”


스스럼없이 서늘한 소리를 뱉는 영운에, 욱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아, 그러고 보니 여우 이야기가 있다. 우리 엄마가 나 어렸을 때 해준 이야긴데, 여우는 죽을 사람한테 다가와선 혼을 물고 도망간대. 그래서 죽는 거래.”
“무섭게 왜 그런 말을 하고 그래.”
“무섭긴, 다 어른들이 우리 겁주려고 하는 말이야. 고작 그거에 겁을 먹냐. 어린 녀석 같으니.”


영운은 으스대며 웃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영운은 먹은 것이 탈이 나기라도 한 듯 돌연 변소가 급하다며 집으로 달음박질을 쳤다. 얼결에 혼자 남은 욱이 서둘러 영운을 불러봤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욱은 주변을 둘러봤다. 깜깜한 밤, 길게 자란 대나무 아래 혼자 서있자니, 괜스레 오금이 저려왔다.


“무섭니?”
“으아, 아악!”


낮선 소리에 욱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자 목소리가 쿡쿡대며 웃었다.


“많이도 놀라는구나.”
“누구세요?”
“얼굴을 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순간 욱의 앞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유독 흰 피부와 바스러질 듯 윤기가 도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을 모르냐며 질문을 던졌다. 허나 욱이는 답을 하지 못했다. 붉은색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뒤덮은 사람은 일찍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상대가 입가를 당겨 올렸다. 그리곤 희고 긴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동시에 곱상한 외모가 드러났다.


“아.”
“이제 아니? 섭섭하네. 일찍이 알아볼 줄 알고 부러 멋도 내고 왔는데.”
“아까.”
“응, 아까.”


사내는 쌜쭉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쪼그려 앉아 욱의 뺨을 쓸었다.


“물살을 타서 그런가, 몸이 뽀얗구나. 때수건이 없어도 되겠는걸.”
“그거 내 꺼 아니에요, 할머니 꺼 예요!”
“할머니?”
“응!”
“아, 그래서 너랑 착각했을까.”


그는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허나 때수건 이야기에 얼굴이 달아오른 욱은 계속해 때수건이 제 것이 아니라고만 말해댔다. 그에 사내는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매만지는 채 말했다.


“그래, 네 것이 아니었다. 느이 조모의 것이지.”
“조모?”
“할머니란 뜻이다. 아직 배울 게 많은 나이니, 몰랐다고 해서 흉이 아니다. 개의치 말아. 헌데 네겐, 그이의 냄새가 심하구나. 혹 할머니와 둘이 사니?”


욱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알게 모르게 욱의 얼굴 가득 쓸쓸함이 담겼다. 허나 사내는 별다른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엔 커다란 보름달이 떠있었다.


“애석하게도.”
“애석이 뭐예요?”
“아무것도 아니다. 집이 어디니? 데려다 줄 테니 가자.”


사내는 욱의 손을 잡았다. 가뜩이나 흰 손이 달빛을 받아 더욱 희게 빛났다. 나란히 걸음을 옮기며, 욱은 사내를 계속해 올려다보았다. 아까 물에 빠졌을 적엔 아무래도 정신이 없어서 흘려 봤었다지만, 이렇게 제대로 보니 그는 텔레비전 속 누구보다도 곱기만 했다. 더불어 손도 보드라웠다. 갓 태어낸 강아지 털을 쓰다듬는 것처럼 만질만질해, 욱은 밭일로 거칠어진 할머니의 손 따윈 까마득히 잊고 그의 손등에 뺨을 비볐다. 그럴 적마다 사내는 샐쭉 웃으며 욱과 눈을 맞춰 주었다.
어느새 둘은 욱의 집 앞에 닿았다.


“다 왔는데.”
“그래, 예가 네 집이구나.”
“아저씨는 어디 살아요?”
“아저씨? 흠, 아저씨라. 그래, 그 즈음이면 많이 봐준 호칭이지. 아저씬 여기 사람이 아니다. 잠시 다니러 온 참이라, 딱히 머무는 곳이 없어.”


욱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허나 사내는 말없이 웃으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둘의 눈높이가 같아졌다.


“난 이제 가야해.”
“밤인데요? 이제 버스 없을 건데.”
“걱정이 되어 하는 말이니?”
“응.”
“가지 않는다면 어찌하려고?”
“우리 집서 자요! 아니, 이모네서도 되요. 방을 내놓았다고 했는걸.”
“그래?”
“응.”
“허면 네가 말해주련? 나는 여기서 기다릴게.”
“응!”


욱은 경쾌하게 답하곤 바로 영운네로 달려갔다. 낮은 돌담을 돌아 문으로 들어가자, 목간을 하고 있었던 건지 아랫도리만 입은 영운이 욱을 반겼다. 아이를 씻기던 이모부도 슬쩍 아는 척을 했다. 허나 욱은 답할 새도 없이 이모를 찾았다. 그러자 부엌에 있던 이모가 고개를 배꼼 내밀었다.


“욱이 너 무슨 일이니?”
“이모! 어떤 아저씨가 방을 찾아요.”
“방? 아, 세놓은 방말이니?”


이모의 물음에, 욱은 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치워놔야겠네. 여보, 손님이 온답니다.”
“손님?”
“방에 머물 거래요. 값이며 뭐 말하려면 나보단 당신이 낫지 않겠어요? 나가서 좀 데리고 오지요?”


이모의 말에 이모부는 별 말 없이 바가지를 내려놓았다. 순간 물이 튀며 영운이 호들갑을 떨었으나, 살짝 꿀밤을 매기며 웃고는 걸음을 뗐다. 그때였다. 멀리서 비명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별안간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곧 한 인영이 집에 다다랐다. 인근에 사는 아낙이었다.


“영운 엄마!”
“무슨 일이래? 밤에 그렇게 숨을 헐떡이고.”
“할머니, 할머니! 욱이네 할머니가 도, 도, 도, 돌아가셨어!”



03
이른 저녁, 욱은 대나무 숲 귀퉁이에 쪼그려 앉았다. 지난 3일간 입었던 삼베옷이 더 없이 까끌까끌하고, 발에 신은 고무신엔 흙이 가득했지만 아이는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 날 서둘러 돌아간 집엔, 꿈꾸듯 하늘로 간 할머니가 바르게 누워계셨다. 이모는 할머니를 붙잡은 채 한참을 우셨고, 욱은 이모부의 손에 잡혀 할머니의 식은 발만 바라봤다. 그리고 장례가 치러졌다. 3일장이었다. 상주는 사위인 영운의 아버지가 맡았다. 동네 아낙들은 음식 마련을 도우러, 사내들은 적적한 마당을 채우러 상갓집을 찾았다. 긴 밤 속에선 많은 이야기가 오갔고, 보건소 선생님은 술기운을 빌어 할머니에게 커다란 병이 있었단 말을 전했다. 너무 커다란 병이라 읍내 병원도, 도시 병원도 다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며 미안하다고 울었다. 허나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대신 보건소 선생님이 마련한 자리에 할머니를 모셨다. 동네 사람들은 그걸로 다 된 거라며 말을 지웠다.
욱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지난 번 대숲에 왔던 때와 달리, 달은 제법 홀쭉해져 있었다.


“어째 혼자 있니.”


익숙한 목소리가 욱을 불렀다. 아이는 고개를 돌려 대숲을 바라봤다. 그곳엔 지난 번 마주했던 사내가 서있었다.


“아저씨.”
“오냐. 어째 예 있어? 집에 가야지 않아.”


그는 전의 날처럼 욱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자 욱은 불현듯 그 날, 방을 구해 달라 청했던 사내의 말을 떠올렸다. 갑작스런 일로 혼이 빠져 있던 터라 그의 청을 까마득히 잊었던 것이었다. 아이는 멀건이 사내를 보다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죄송해요.”
“무엇이?”
“방.”


욱의 답에 사내는 가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참의 침묵 후에야 입을 뗐다.


“전 날, 내가 나는 잠시 다니러 온 것이라 했었지?”
“응.”
“그래. 난 다니러 왔었고, 해야 할 일도 있었다. 헌데 그를 미루려했지. 안 될 일이었다. 해서 미루지 않고 떠나버린 게야. 물론 해야 할 일도 이루었다.”
“무슨 일이었는데요?”
“네 할머니를 달나라로 모시는 일.”


사내는 아픈 표정으로 말했다. 탓에 욱은 놀라지도 못한 채 그를 바라봤다. 고운 얼굴에 미간을 구긴 모습이 좋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나는 길라잡이다. 다녀감이 끝난 이를 원래 있던 곳으로 모셔가야 했어.”
“우리 할머니도?”
“응.”
“왜?”
“하지 않음, 다른 이가 가거든. 할머니가 안 가셨음, 네가 갔어야 했다. 그이가 가장 중이 여기는 이를 데려가니.”


서늘한 바람이 두 사람의 곁을 스쳐갔다. 동시에 멀리서 매미 소리가 깨어났다. 맴맴. 싸하게 퍼지는 소리엔 청량감이 돌았다.


“네 할머니는 날 알아보셨어. 해서 아무 말 없이 내 뒤를 따라오셨고. 대신 부탁을 하나 하셨다. 세상에 놓고 오기 아까운 아이가 있으니, 곁에서 보살펴 달라고 말이다. 길라잡이는 그이의 소원을 필히 들어줘야해. 그래서 네 곁에 왔어.”
“내 곁?”
“응. 해서 네가 좋건 싫건 난 네 곁에 있어야 해. 네 할머니가 되었다 할 적까지. 그러니 애써 태연할 필요 없다. 이리 온, 기대 울렴.”


사내는 아이를 향해 팔을 뻗었다. 욱은 비척대며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곧 사내의 품에 쓰러지듯 안겼다. 그리곤 방울방울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이는 한 간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눈물이 나는 게 신기한지 동그란 눈으로 사내의 얼굴만 바라보다 이내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읍, 흐윽.”


아이는 쉽게 그치지 않았다. 지난 3일간 모르고 지나쳤던 슬픔이란 감정이 북받쳐 오른 모양이었다. 아이를 바라보며, 사내는 가만 아이의 손을 입에서 떼어냈다. 대신 그 손을 꼭 쥔 채 아이를 품에 가뒀다. 손으로 막았던 울음이 밖으로 터지며 대숲 가득 욱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허나 다행히 매미 울음소리가 아이의 울음소리를 가려주었다.
아이는 그림자가 방향을 틀었을 때에야 겨우 그쳤다. 아이는 지친 건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고, 사내는 당연하다는 양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일어났다.


“후련하니?”


사내의 물음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를 낼 힘도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앞으론 감추는 것 하지 마라. 내 앞에선 네 할머니께 했듯 어리광도 피우고, 고집도 부려. 그러라고 찾아왔다.”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
“안 물을 줄 알았더니. 희우다. 해도, 아저씨가 편하면 그렇게 부르렴. 그 호칭도 나쁘지 않다.”


희우는 샐쭉 웃었다. 그러자 욱이 그의 목에 양 팔을 둘렀다.


“이제 가자. 울었으니 배가 고플 테지. 가, 밥 먹자.”
“응.”


아이의 답에 희우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전날 나란히 걸었던 길을 지나, 욱의 집으로 향했다. 멀리 달이 기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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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입니다. 안녕하셔요?
whoi....는 "호이"라고 읽으시면 된답니다.
어쩌다보니 된 이름이라 뜻도 없고 그다지 설명을 할 것도 없군요.


댓글 2
  • No Profile
    라퓨탄 09.02.19 01:38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네요.. 여우비.라는 만화도 생각나고, 강림도령 이야기도 생각나는 그런 이야기네요. ^^;;
  • No Profile
    레이 09.02.21 15:15 댓글 수정 삭제
    저도 잘 읽었어요. 여우님은 미청년이셨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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