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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행복 과자

2009.02.14 23:1602.14

초등학교 앞 슈퍼마켓 주인 강씨는 최근 판매량이 부쩍 늘은 과자를 집어들었다. 과자명은 '행복'이었고 판매사는 '봉황'이었다.
"이게 무슨 맛이래? 회사도 첨 들어보구."
포장지엔 유치원생이 그렸을 법한 조잡한 웃는 사람 얼굴이 크게 그려져 있었고 분홍색으로 커다랗게 '행복'이라고 적혀 있었다. 크기는 보통 봉지과자의 반 정도이고 가격은 300원인 이 과자를 아이들은 등하교 길마다 경쟁하듯 사갔다. 한 번 살 때마다 몇 봉지씩 사 가 놓고는 다음 날 아침이면 또 사러 왔다. 덕분에 다른 과자는 팔리지 않아 먼지만 쌓였다.
"기왕이면 좀 비싼 게 인기 있으면 좀 좋아! 하여간 이런 불량 식품이 뭐가 좋다구."
피식 웃으며 과자를 제자리에 두고 의자에 앉아 TV를 틀었다. 어쨌든 매상이 올랐으니 나쁘지는 않다. 이제 날이 점점 더워지기 시작한다. 조금만 더 지나면 과자보다 아이스크림이 더 많이 팔릴 것이다. 여름 준비를 해야겠다.

"아저씨! 헉헉, '행복' 아직 있어요?"
매일같이 그 과자를 사 가는 아이 중 하나였다. 아이가 얼굴이 벌개진 채 달려와서는 물었다.
"아까 전에 다 팔렸는데?"
"으아!" 아이가 분개했다.
"안녕히 계세요." 실망스런 목소리로 인사하며 나가는 아이를 강씨가 불러 세웠다.
"얘야."
"네?"
"오늘은 많이 늦었구나."
"오늘 주번이라서요."
"그래? 음, 오늘은 다른 과자를 먹는 게 어떠냐?"
"싫어요. 내일 일찍 올게요."
"그게 그렇게 맛있어?"
"맛도 좋지만 먹으면 행복해지잖아요. 아저씨가 파는 건데 모르셨어요?"
아이가 놀라서 그렇게 되물었다.
"그래? 음! 그럼, 내일 일찍 오거라."
"네에, 안녕히 계세요."
"오냐."
아이가 나가고 조용해지자, 강씨가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맛 이길래 행복해진데?"

새벽 6시 40분, 어제 그 아이가 왔다.
"아저씨, 그거 있어요?"
"아함. 얘야, 그 과자 들어오려면 한참 멀었어."
"언제 들어오는데요?"
"11시쯤에 오는데?"
"아, 안 되는데!"
"수업 끝나고 오면 되잖아?"
"이번 주 내내 주번이란 말예요."
아이가 울다시피 하며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나갔다.

11시 20분. 여느 때처럼 작은 트럭이 왔다. '봉황'의 '행복'을 비롯한 불량 식품들을 꺼내 내려놓고 가버리자 강씨는 정리를 끝내고 쉬면서 '행복'을 하나 뜯어봤다. 안에는 글씨처럼 분홍색인 10원짜리 동전만한 과자가 몇 개 들어 있었다.
"어디."
하나를 입에 넣었다. 사르르 녹으며 단 맛이 입안에 퍼졌다. 씹어 보았다. 꼭 아몬드처럼 오드득 거리며 부서졌다. 채 삼키기도 전에 마치 안락의자에 앉아 산들바람을 맞는 것처럼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곧 이어 달콤한 기분이 들더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허허."
그날 강씨는 TV도 보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깊숙이 기댄 채 눈을 감고 연신 미소를 지으며 과자를 먹고 있었다. 과자 한 봉지가 이내 없어졌다.
"아, 이래서 그렇게 찾았구나."
강씨는 이제야 아이들이 이 과자만 찾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강씨는 '행복' 과자 한 박스를 카운터 밑에 몰래 숨겼다.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왔다.
"야, 야, 줄 서서 사!" 강씨가 소리쳐도 별로 소용이 없었다. 강씨도 학교 앞에서 애들 상대로 장사하다 줄 서란 말은 처음 해 봤다. 하지만 가만 놔두다간 누가 다치기라도 할 것 같았고, 또한 아이들이 넘어지지 않으려고 아무 데나 짚다간 진열된 과자가 뭉그러질 것 같았다.
"줄 서서 사지 않으면 안 판다! 자, 줄 서!"
그제야 아이들이 줄을 섰다. 강씨는 차례대로 과자를 팔기 시작했다. 팔아도, 팔아도 줄이 줄어들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과자가 팔리자 줄 선 아이들은 실망하며 흩어졌다. 아이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는지 이제는 하굣길 한바탕에 모조리 팔렸다.
순식간에 손님이 뚝 끊겨 조용해진 가게에서 강씨는 의자에 앉아 숨겨두었던 박스를 풀어 과자 한 봉지를 꺼내어 뜯었다.

강씨는 전화를 걸어 주문량을 두 배로 늘렸다. 그리고 반은 가게에 딸린 방 너머 창고에 두었다가 아침에 풀기 시작했다. 물론 항상 자신을 위한 것은 빼 놓고 팔았다. 아이들은 새벽같이 등교해서 종 치자마자 가게로 뛰어왔다. 개교기념일에도, 공휴일에도, 방학 때도 아이들은 새벽이면 몰려왔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아이스크림보다 매상이 월등히 높았다. 몇 만원씩 들고 와 박스 단위로 사가는 아이들 때문에 금방 떨어지자 다른 아이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강씨는 이를 조정하기 위해 한 사람당 한 번에 10개 까지만 판다는 규칙을 만들어 써 붙여 놓아야 했다.

2학기 가을에 드디어 사건이 터졌다. 학교에서 도난사고와 그와 관련된 폭행 사건이 빈번히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도난 된 것은 전부 돈이나 장난감이나 전자제품이 아닌, 바로 '행복'이라는 과자였던 것이다. 아이들은 이 일로 학교 친구들과 피가 터지고 피부가 찢겨져 나갈 만큼 치고 받고 싸우며 울어댔다. 결국 이 일은 학교 선생님과 학부모들에게까지 알려졌다. 학부모 대표들이 모여 선생님과 의논 끝에 가게에 찾아가기로 했다.

"여기서 그 뭐냐, '행복'이라는 과자를 판다지요?"
한 남자 선생을 선두로 학부모들이 가게에 들어왔다.
"네, 그렇습니다만." 강씨가 의아해 하며 사람들을 둘러봤다.
"저희는 이 앞 xx초등학교에서 왔습니다만, 오늘부터 그 과자 판매를 중지해 주십시오."
"네에?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뒤에 선 한 학부모가 소리쳤다.
"애초에 학교 앞에서 불량식품을 파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 아니에요?"
"그, 그런."
강씨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여기저기서 항의가 쏟아져 나왔다.
"팔아도 정도껏 팔아야지. 우리 애는 그거 사 먹으려고 저금통까지 몰래 깼다구요. 아이구, 속상해!"
"나도 처음엔 애가 아침에 속 안 썩이고 벌떡벌떡 일어나서 학교 가길래 좋아했더니만, 여기서 불량 과자 사 먹으려고 그랬다니, 나 원, 웃기지도 않아!"
"당신도 애들 키울 거 아니에요? 이러면 안 되지."
"저, 전 아직 결혼을……"
"조카는 있을 거 아니에요?"
"아, 예."
"부끄러운 줄 아세요!"
함께 온 학부모들의 언성이 갈수록 높아지자 함께 온 선생이 손을 들어 진정시키고 마무리를 지었다.
"자, 그럼 더 이상 그 과자를 안파는 걸로 알겠습니다. 더 이상 그 과자로 문제가 생기면 법적으로 해결하겠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선생과 학부모들이 올 때처럼 몰려 나갔다. 강씨는 법적으로 학교 앞에서 불량식품을 파는 게 얼마만한 문제가 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모르는 게 더 무서운 법이다. 생각할수록 겁이 났다. 결국 강씨는 전화를 걸어 '행복' 과자 거래를 중지하고, 더 이상 '행복'을 팔지 않는다는 글을 써서 입구에 붙였다. 다음날 아침에 팔려고 창고에 둔 과자는 강씨 혼자 먹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아이들이 와서 과자를 찾았다. 그리고 강씨의 설명을 들은 아이들은 실망해서 돌아갔다. 그 때부터 가게 매상이 뚝 떨어졌다. 기분이 참 울적해졌다.
강씨는 몰랐지만 학교에는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아이들은 전처럼 지각을 하기 시작했다. 수업 중에도, 집으로 가는 길에도 아이들의 어깨는 항상 축 늘어졌고 얼굴은 인상을 써서 일그러져 있었다. 더 이상 이렇다 할 도난 사건이나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루 종일 기운 빠져서 마지못해 움직이는 아이들을 보고 즐거워할 어른들은 없었다. 어른들은 일시적인 현상이려니 하고 넘어갔으나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한 학기가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이 녀석들! 새 나라의 주인들이 이래서 쓰겠어? 어깨 펴고 웃으면서 씩씩하게 걸어!"
등굣길의 아이들을 다그쳐 보아도 아이들은 꾸벅 인사만 하고 터덜터덜 교실로 들어갔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5학년에 한 아이가 전학을 왔다. 그리고 그 날, 그 반에서 요란한 싸움이 벌어졌다. 전학 온 아이가 바로 그 과자를 두 봉지나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하나만 달라던 아이들이 너도나도 몰려들어 내놓으라고 하더니 서로 싸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일로 그 아이는 전학 첫날부터 교무실로 불려갔다.
"너, 이거 어디서 났어?"
선생의 손에 들린 꾸깃한 봉지에는 과자가 한 개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 오기 전에 살던 동네 슈퍼에서 사놨던 거예요."
아이가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하, 이놈의 불량식품이 전국에 퍼졌나 보군! 이거 완전 문제야!"
"……이제 거기서는 안 팔아요. 마지막 남은 거였는데."
결국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됐어. 가 봐. 아, 그리고 오늘 전학 왔다지만 너도 반성문 써."
"네."
아이가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자 선생이 과자 봉지를 보며 말했다.
"내 참, 도대체 이게 뭐길래!"
"그러게요. 그거 먹을 때는 팔팔하던 녀석들이 요즘은 병든 강아지마냥 힘들이 없다니까요."
다른 선생이 맞장구쳤다.
"아니, 저 때는 즐거운 일이 좀 많아?"
그 때 한 선생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요즘은 그렇지도 않죠, 뭐. 아침부터 밤까지 요즘 애들이 웃을 일이 뭐가 있어요?"
"그런가? 하긴. 갈수록 애들이 잡혀 살긴 하지."
"허허. 참!"
선생이 봉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버리려다 말고 뒤에 적힌 글씨를 쳐다봤다. 깨알 같은 글씨가 조잡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º제조 판매 : 봉황 안드로메다 M34879 K390038 LJ000382-1 ◎§§▼⊙†‡‡▼ º고객지원센터 : (송신자요금부담) ├╋┚╈┝┓┌╂ º 행복하고 즐거운 우주, 나누는 행복, 커지는 기쁨 º유통기한 : 전면표기일까지 º원재료명 : 백설탕(수입산-지구, 대한민국), 전지분유(수입산-지구, 미국), 안드로메다볼로볼로꽁꽁, 식물성유지(수입산-L489885 Q394039 EJ000012-3), 합성착향료(바닐라향, 수입산-지구, 대한민국), 식용색소(분홍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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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이라는 이름의 회사가 실제로 있는지 모르겠군요. ^^; 없을 것 같지만, 가상의 이야기니 동명의 회사가 있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시기 바랍니다.
레이
댓글 2
  • No Profile
    라퓨탄 09.02.19 01:40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동화 같은 이야기네요... 흐음. 때묻은 저는 마약범죄를 예상했는데.. ^^;;
  • No Profile
    레이 09.02.19 20:08 댓글 수정 삭제
    하스, 라퓨탄님! 절대 때묻으신 거 아닙니다. 저도 쓰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현실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읽고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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