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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우주 생태계

2009.02.08 19:2802.08

우주 생태계

아주 먼 옛날부터 난 주류에 섞이지 못 한 채 겉돌았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지구 통합 박애주의가 결국 어둠과 망각 속으로 사라지고, 온 은하계에 에너지주의가 뿌리내린 오늘도 난 혼자다. 난 새로운 먹이를 찾아 헤맨다. 나 보다 내 먹이는 훨씬 클뿐더러 더욱 강한 정신을 갖고 있기 쉽다. 절제 없는 탐욕의 생생한 구현인 우주선이 내 앞을 가로 막고 있다. 저걸 먹어야 성간물질이나 파먹는 기생충의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내 앞의 우주선은 다른 에너지 중심지로 가서 이를 개척하는 소임을 맡고 있기에 저걸 먹으면 에너지 뿐 아니라 정보를 얻게 될 것이다. 아무리 내가 스텔스 기능으로 방비되어 있다지만, 내 무장은 빈약하다.
상대 우주선을 조용히 쫓는다.
내 둘레의 모든 방위는 진공이다. 진공 속에서 난 발가벗겨진 기분을 받는다. 언젠가는 가장 강대한 존재인 블랙홀 발전소가 되기를 꿈꾼다. 블랙홀 발전소가 되면 우주에 단단히 박히는 기분, 뭔가 안정된 기반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물론 그때가 온다면, 나와 같은 기생충들이 적이 될 것이다. 난 고독감을 없애기 위해 고양감을 켠다. 모든 감정들은 안정되고 완벽한 정서로 이동된다. 남은 이제 정서적으로도 필요 없게 된 지 머나 먼 세월이 흐른 것이다.
내 앞의 우주선은, 블랙홀 발전소에서 발진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블랙홀 발전소는 가장 큰 에너지를 다룬다. 블랙홀 발전소에 웅크린 지성은 먼 미래를 예비한다. 블랙홀은 우주에서 가장 오래 버틸 천체지만, 그 이후에도 지성은 살아남고자 한다. 그러려면 미리 다른 곳도 개척해서 더욱 강력한 블랙홀을 차지해서 발전소들을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블랙홀 발전소는 우주선을 보낸다. 이때 이 우주선엔 자식이나 복제 지성이 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식도, 순수한 복제물도 믿지 못 한다.
그러기에 내 앞의 우주선에 있는 건 고도로 복잡한 보안장치 인공지능 복합체로 방비되어 있을 것이고, 난 그걸 해킹해서 내가 원래의 주인이라고 착각하게 만들면 된다.
적과 나의 과학기술 수준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난 아직 과학기술이 한계에 도달하기 직전까지는 있었던 학문 시장에서 끝까지 버텼다. 과학기술을 한계까지 먹어치운 지성들은 미련 없이 시장을 포기했다. 에너지는 교환할 필요가 없고, 과학기술도 이젠 한계이기에 교환가치를 잃었다. 그렇기에 난 해킹기술로서 적과 대응할 수 있다. 서로 바꿀 가치가 없는 에너지주의자들은 결코 집단을 만들지 않는다. 서로 너무 다가가면 이전에 어떤 관계였든 싸우다 죽는다. 나 또한 소중했던 사람들과 서로 헤어지고 죽고 죽였다. 인간의 소유욕은 상대가 필요성이 없기에 절대적인 가치가 되었고 때문에 상대를 죽인다.
더욱 상대 우주선을 따라붙는다.
빛 보다 빠르다는 물질, 타키온? 발견되지 않았다. 온갖 종류의 초광속 항법들? 은하계를 통째로 초신성 폭발시켜야 할 정도로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들어서 불가능했다. 운송과 통신의 가격은 같았다. 각자의 기반 위에서 외톨이들이 되어 홀로 서는 수밖에 없었다.
튼튼해 보였던 사회 체제는 무너졌다.
한때 지구에 지능과 기억력이 증폭된 인간들이, 광통신을 통해 온 인류가 서로의 모든 걸 낱낱이 아는 시대가 있었다. 도덕과 윤리 또한 증폭되었다. 인류는 시끄러운 가족이었다. 인류는 너무나 넓은 우주로 나가도 배신 없이 안전할 수 있도록, 모두가 모두를 우주에서도 끝까지 믿고 사랑할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았다.
하지만 몇몇 욕심쟁이들은 에너지주의를 일으켰다. 인류는 갈기갈기 찢어졌다.
모두에게 사랑이 넘쳤던 시절을 난 기억한다.
아픈 기억이다.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난 비참해진다. 그래서 한때 여렸던 내 인격이 자살하려고 하면, 이 우주선에 이미 뿌리내린 인공지능 복합체는 생존본능을 고취시키는 모든 일을 해서 날 살린다. 그래야 컴퓨터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난 긍정적 정서와 함께 내가 아니게 되는 듯한 기묘한 기분에 시달린다. 난 언제나 바뀌고 있으니 죽음과 항상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 기분은 또 다르다.
지금도 그렇다.
날 죽이는 자가, 우주선을 비롯한 천체이든, 우주선 고장이든, 진공이든, 우주의 종말이든 간에, 난 죽임 당하지 않는 한 죽지 못 할 것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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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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