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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탄생] en-human 1

2012.02.20 20:4102.20



                                            en-human

1통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비밀 편지입니다. 암호를 입력하십시오.
(읽을 의향이 있다면 senseofcrisis.com에서 제공하는 패스워드를 입력하십시오)
                                                                                 pw: ******

허락도 없이 메일을 발송하여 죄송합니다.
저희는 자살사이트 회원들을 상대로 이 메일을 보내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당신이 진실로 위기를 느끼고 계시다면 저희와 접속하시기 바랍니다.
주소는 아래와 같으며 암호는 ‘위기감’입니다.
  
                      http://www.en_human.com


  

file 1. PW:위기감
선택하셨습니까? 저희의 고객이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희 ‘엔휴먼닷컴’은 지금 당신에게 가장 절실한 것을 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비용이 많이 드는 일입니다. 자세한 가격과 서비스 절차를 알고 싶으신 분은 유료회원에 가입해주십시오.
‘엔휴먼닷컴’은 영리단체이지만 모든 분께 서비스를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에게 자격이 있다면 저희의 회원이 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비밀리에 운영되는 저희의 공간을 발견하신 당신은 이미 여러 차례 올바른 선택을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당신의 행운이 끝까지 이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그것이 숨기고 싶은 것일지라도!’
이것은 회원 여러분에 대한 서비스를 간략하게 표현해낸 저희의 캐치프레이즈입니다. 저희는 당신이 가진 모든 문제를 완전무결하게 처리해 드릴 것입니다. 서비스의 비용은 많이 듭니다. 그러나 당신은 어떤 식으로든 그 비용을 지불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기감’을 선택한 당신 앞에 최상의 해결책, 최고의 서비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신중한 판단을 위해 저희는 충분한 자료를 보내드릴 것입니다. 하나 하나의 파일을 주의 깊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단, 회원 등급에 따라 열람이 제한된 파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료 열람 시 정확한 판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모든 파일을 검색하신 후에는 자동적으로 회원자격을 얻게 되실 것입니다.
                            (빠른 서비스를 원하신다면 바로가기를 클릭하십시오.
  서비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시다면 좀더 설명서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이 메일을 받은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선택이 그저 우연이었다고요? 그렇다면 수많은 정보 중에 당신이 클릭 하신 이 파일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최근 저희 고객의 사례를 통해 추정 가능한 우연들을 열거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단, 순간순간 선택에 신중함을 발휘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파일의 암호는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입니다.)  

file 2.  PW: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
이것은 회원 이치현 씨(가명)를 돕는데 필요한 첫 번째 열쇠였습니다. 저희는 이치현 씨의 의식을 추적하다가 이 익숙지 않은 용어를 발견했습니다. 대부분 우리의 무의식은 우리 자신의 관심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미지나 어휘를 증식시키곤 합니다. 아시겠지만, 그 무의식 속에는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문제나 불안감, 혹은 행운에 대한 징후가 있게 마련이지요. 평범한 순간에는 아무도 무의식의 활동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객들에게 무의식은 그냥 간단히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무의식은 너무나 많은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항공사고가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추락한 항공기의 블랙박스를 해독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고객의 무의식 분석을 우선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번거롭고 시간이 드는 작업이라 고객분들 중에는 거부감을 보이는 분도 계십니다. 이치현 씨의 경우도 그랬습니다만, 결과적으로는 모든 고객께서 이 작업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단어를 지적했을 때, 이치현 씨는 단순히 수험 시절을 떠올렸을 뿐입니다. 고고학적으로 현생 인류의 조상은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두개골은 크로마뇽에서 발굴이 되었지요. 현생인류의 바로 직전의 인류는 네안데르탈인으로 잘 알려진 호모사피엔스입니다. 저희가 조사해본 바에 의하면 사피엔스란 지혜나 슬기로움을 뜻하는 라틴 계통의 어휘였습니다. 하지만 이치현 씨의 무의식에 나타난 그 단어는 수험시절에 인지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좀더 최근의 잔상이었고, 특히 그 속에 다른 정보를 감추기 위한 위장용 단어였습니다. 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가 아니라  호모사피엔스 네안데르탈레시스, 즉 네안데르탈인이었습니다. 인간의 자아는 때로 뭔가를 숨기기 위해 거짓된 정보를 무의식에 떠올리기도 합니다. 이치현 씨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말을 듣자마자 터키에서 만난 영국인을 떠올렸습니다. 이치현 씨는 데이빗 베네딕트라는 영국기자에게서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의 조상의 관계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는 비비씨(BBC)의 과학기자인 동시에 아마추어 고고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과학 기사를 취재하는 동시에 규명되지 않은 현상들을 추적하여 책으로 엮기도 했는데, 이치현 씨는 그의 달변과 논리에 많은 흥미를 느꼈다고 합니다.    
베네딕트 기자는 네안데르탈인을 호모 사피엔스 바로 전 단계의 인류로 상정하는 고고학계를 매우 비판하였습니다.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가 함께 발견되는 것이 아주 흔한 일인데도 고고학자들은 그것을 제대로 규명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최초의 인종청소에 대한 그의 장광설은 음모론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처음 베네딕트의 이야기에 흥미를 가졌던 이치현 씨는 그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비약한다는 생각에 핑계를 대어 그 자리를 피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베네딕트의 이야기야말로 이치현 씨를 위기상황으로 몰아넣은 첫 번째 단서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치현 씨는 그것을 부정했습니다. 자신이 네안데르탈인에 대해 흥미를 느꼈던 것은 사실이지만 베네딕트는 그다지 인상적인 인물이 아니었다고 했었지요. 저희는 좀더 정확한 단서를 찾기 위해 그를 관찰했습니다.

                                  선택 1.) 이치현 씨는 잘 알려진 저널리스트입니다.
                                                   ☞(좀더 많은 정보를 원하십니까? ☞)

같은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그것 또한 당신에게 주어진 필연의 우연일 것입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당신의 의식에 떠오르는 것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저희의 일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타인에 의해 의식이 평가 당하면 심한 불쾌감을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이치현 씨나  당신 같은 분의 절망은 의식의 혼란 때문에 오죠. 그러니 잠시 동안만이라도 의식을 맡기고 그 상태를 즐기십시오. 서비스가 끝나면 당신에 관한 모든 정보는 완벽하게 파기되므로 당신은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저희의 서비스는 고도의 정밀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과 맞지 않을 때에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통제는 그 위험을 감소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이니, 서비스 기간동안에는 최대한 저희의 지시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이치현 씨는 비디오 저널리스트이면서 사진작가이기도 했습니다. 밴쿠버에서 대학을 나와 뉴욕에서 광고사진을 찍던 그는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참가하여 주목을 받습니다. 그 뒤 내셔널지오그래픽 87년도 판 6월 호에 뉴욕 서커스에 대한 사진이 실리면서부터 저널리스트로서의 경력을 쌓았습니다. 91년도에 독일 에데엘(EDR) 방송에서 방영한 '생명의 원천(Lebensborn Foundation)'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그의 작품이었지요. 히틀러의 우수인종 양육 프로젝트에 대한 이 필름으로 그는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의 고객이 되기 2년 전에 만든 티브이 다큐멘터리도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더 많은 정보를 원하시면 회원가입 후, 패스워드를 입력하십시오.
                                                   원하지 않으시면 ‘탈출’을 클릭하십시오.)

  이치현 씨는 직업상 많은 잡지를 구독하고 있었습니다. 저명한 저널리스트였던 그에게는 전세계의 많은 잡지가 배달이 되었지요. 우리는 그의 위기가 시작되었다고 여겨지는 몇 년간 그가 보았을 가능성이 있는 잡지들을 수집했습니다. 그리고 그 잡지 중에서 이치현 씨가 흥미 있게 보았을 만한 목록-즉, 이제까지 그의 작품과 관련 있는 단어 목록을 뽑아 잡지를 분류했습니다. 워낙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분이라 꽤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치현 씨가 만족할만한 첫 번째 반응을 보인 것은 어떤 과학잡지 광고에 대해 물어보았을 때였습니다. 이치현 씨는 그 잡지를 홍보하는 광고를 보고 그것을 구하기 위해 한동안 노력한 적이 있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내용이 있다는 것에 흥미를 느꼈던 것이지요.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끝내 손에 넣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치현 씨는 중국의 펑황티비(Phoenix Chinese)에서 의뢰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신비>라는 다큐멘터리였는데 오랜 전승으로 알려진 설인(雪人)이라는 괴물의 흔적을 찾기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는 설인(雪人)이 산다는 히말라야지대를 중심으로취재를 했지만, 설인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점점 더 산 속 깊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석 달 째되는 날, 설인을 목격했다는 제보가 가장 많았던 티벳의 네팔접경 지역에서 잠복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는 눈이나, 산, 설인에 질릴대로 질려 있었습니다. 그나마 그를 위로해 주었던 것은 그가 가지고 왔던 책과 잡지 꾸러미였죠.
그는 설인에 대해 매우 흥미를 느꼈습니다. 자주 목격되지만 잡히지 않는 존재를 자신의 손으로 포착하고 싶다는 욕심은 비디오 저널리스트라면 어쩌면 당연한 욕심일 수 있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열악한 자연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먼저 설인에 대한 증언을 의욕적으로 촬영해 두었습니다. 증언은 넘칠 정도로 많았습니다. 고산지대에서만 평생을 살아온 노인과 여자들의 증언이 거짓일리 없다는 확신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뿐, 세상 사람들에게 내놓을 확실한 정보는 없었습니다. 여섯 달 가까이 계속되는 추적에도 그는 설인의 발자국조차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점점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고, 고산이라는 폐쇄된 지형에서 그의 집요함은 일종의 강박증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잠시 도시로 내려가 쉬라는 중국인 안내원의 말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날카로워진 신경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잡지를 자주 손에 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읽을 것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잡지의 광고까지도 낱낱이 읽게 된 것입니다.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에 대한 이야기-정확히 말해 그 일부-가 실린 잡지는 ‘고현으로부터 시작된 물길(Water Road from GuXian)'이라는 표제의 과학잡지였습니다. 사실 과학잡지라고는 하나 확인되지 않은 선정적 사건들로 도배가 된 타블로이드 잡지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광고에서 그가 읽은 단락은 기사가 아니라 잡지에 실린 단편소설의 일부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것을 읽은 그는 살해된 고대 전설 속의 거인이 실재하고 설인 또한 그들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선택 2.) 그 광고에 실렸던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

「…친구들도 그를 외면했다. 아니, 그는 그를 둘러싼 이들이 그를 조롱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두려운 마음에 어깨가 움츠려들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몸집은 점점 부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눈을 비볐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자신의 몸이 커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를 둘러싼 족속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자신이 왜 그들을 친구라 여겼는지 오히려 의아할 지경이었다. 그들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족속이었다. 비록 낯익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 새로운 족속은 그의 친구였던 존재를 죽이고 그를 속여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마지막으로 그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죽어야 해, 지금 당장!”
또 다른 그가, 아니 방금 전까지 자신과 똑같이 닮았다고 생각한 인간이 그에게 소리를 쳤다. 그는 예전과 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모두가 기다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다른 그가 소리를 질렀음에도 그는 죽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하나밖에 남지 않은 족속이지만 그는 그 족의 마지막 우두머리였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족속 모두를 태어나게 한 아버지였다. 기쁨과 떨림으로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지켜본 자인 그는 자신도 모르는 성스러움을 풍기고 있었다. 그를 죽이고 싶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했다. 그는 그와 너무나 닮아있는 새로운 인종의 우두머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새로운 그 역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족속의 우두머리가 마주서고 있는 동굴 안은 저 깊은 곳의 물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했다. 하지만 그의 귀에는 억눌러져 있는 아우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새로운 인종의 우두머리가 된 그 역시 수십 명이 웅얼거리고 있는 단어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소리는 뭉개지고 흐려져서 곧 멸망할 족속의 유일한 개체인 그의 귀에는 단순한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제법 큰 물소를 향해 달려갈 때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끌려나오는 호흡의 소리, 아주 익숙한 소리였다. 그는 사냥의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도 잊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새로운 그는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점점 또렷해지는 말소리를 따라 그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손을 위로 뻗어 거대하지만 어리석은 구세대 인종의 목 줄기를 잡았다.
“죽여, 죽여, 죽여, 죽여!”
들이킨 숨이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죽어 가는 존재의 귀에도 말들이 꽂혀왔다. 그의 몸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발끝을 떠난 떨림은 심하게 구부정한 허리를 타고 그의 정수리까지 올라왔다. 그는 마지막 힘을 모아 새로운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 옛 종족의 말을-너무나 익숙하지만 더 이상 표현할 방법을 잃어버린- 볼 수 있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사라질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 불려진 적 없었던 하나의 이름이 영영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연민을 가지고 새로운 그를 보았다.
거대한 그가 마침내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자 약속했다는 듯 수십 명이 달려와 그의 불필요하게 큰 몸집을 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새로운 종족의 우두머리는 멍하니 선 채 방금 그의 손에서 죽어간 마지막 존재가 그의 귀에 속삭였던 말을 되새겼다.
“기억해, 너는 목숨을 훔치지만 피만은 내 안에 있다는 걸.”」
          
사실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와 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레시스는 사람과 원숭이처럼 완전히 다른 별개의 종(種)이라는 것이 과학계의 잠정 결론입니다. 유전자 검사로도 현대 인류와 네안데르탈인 사이에서는 유사점을 찾을 수 없다고 하죠. 하지만 이치현 씨는 영국인 기자의 말처럼 네안데르탈인이 현대 인류의 조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갑작스러운 절멸에 의구심을 가졌지요. 두뇌가 진화하지 못했다는 이전 고고학계의 설명은 근거를 뒤집을 수 있을만한 크기의 두개골들이 발견됨으로써 설득력을 잃었습니다. 광고에 실린 소설을 읽은 이치현 씨는 베네딕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네딕트는 그들이 더 평화적이었기 때문에 절멸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네안데르탈인들은 그 튼튼한 육체만으로도 늠름하게 자연을 상대할 수 있었지만 자신들의 생명을 이어가게 해주는 것 이외의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맹수를 맞닥뜨려도 거칠 것이 없는 종족들에게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힘을 축적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그들을 비웃었습니다.
우리는 이치현 씨의 의식에 영향을 준 그 잡지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었습니다. 이치현 씨는 잡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나중에는 자신이 읽은 정보의 언어가 한국어였는지 영어였는지 독일어였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세 언어를 막힘 없이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정보 감식 언어에 대한 정보를 흐릿하게 만들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운명적인 사건의 전말이 대개 무의식적 조작을 거치듯 그 역시 그 잡지를 ‘우연히’ 잃어버리고 찾으려는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가 잡지에서 읽었다는 내용조차 그의 무의식적 환상일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끝까지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새벽, 중국인 안내원과 차를 마시던 그는 마침내 설인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얼핏 곰처럼 보이는 거대한 사람-혹은 고릴라- 같은 물체가 100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서 그가 피워 놓은 모닥불을 한참 바라보다가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치현 씨는 아쉽게도 촬영 장비를 텐트에서 꺼내지 못했고, 자동카메라의 셔터를 누르자 설인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뛰어가 버렸다고 합니다. 산이 쿵쿵 울릴 정도로 육중한 몸을 가진 그 생물은 별처럼 광채를 내던 눈빛만이 사람이라는 믿음을 주었다고 이치현 씨는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느냐는 물음에 이치현 씨는 ‘언젠가 본듯한’, ‘표정을 읽을 수 있는’  등의 표현으로 매우 감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치현 씨는 설인을 본 이후 네안데르탈인에 관한 베네딕트의 의견에 동의하였습니다. 그는 제우스가 바위산에 유폐시킨 티탄들이 실은 네안데르탈인이고, 생존한 일부가 설인으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해석을 했죠. 하지만 그가 심각하게 이 문제에 천착한 것은 아닙니다. 설인을 다시 볼 수 없었던 그는 더 이상 지체하지 말아달라는 방송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캠프에서 철수했습니다. 그때까지의 그는 필요하면 언제든 균형을 되찾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교양인으로서의 기본적인 휴머니즘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사회적 성공을 해할 만큼 한 문제에 빠져드는 성격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현명한 이기주의자’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치명적인 함정에 빠지고 맙니다. 인간인 이상 누구나 안심할 수 없는 함정, 위기감을 선택한 당신이 빠졌던 바로 그 함정 말입니다. 그는 물론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사고가 확장된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는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가 신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지식과 간계를 채색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던 호모사피엔스 네안데르탈레시스를 살해하고 박해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그는 크로마뇽에서 발견된 해골의 주인들로부터 신의 이미지가  복잡해졌다고 생각합니다. 네안데르탈인에게는 한없이 포용적이고 너그러웠던 신이 크로마뇽인 이후로는 너그러우면서도 매몰차고 모든 것을 포용하다가도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모르게 변한 것이죠. 마치 정신분열을 일으킨 것처럼, 혹은 크로마뇽인이라는 종이 정신분열을 일으킨 것처럼……. 이치현 씨는 나름대로 -불행하게도- 인류가 갖고 있는 원죄의식의 본령을 찾아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이 다른 종이라구요? 처음 듣는 이야기군요. 하지만 저는 네안데르탈인이 인류가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대 인류와는 많이 다르겠지만, 그들은 자연에 철저히 순응하며 살았던, 사랑의 감정이 넘치는 인류였습니다. 그들의 무덤에 흐드러진 꽃씨의 화석만 봐도 죽은 이에 대한 애통함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지요. 고고학자들도 그 점은 인정하고 있는 줄 아는데요.”
그는 크로마뇽인의 대학살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빙하기와 간빙기가 번갈아 왔고, 땅은 점점 척박해졌을 것입니다. 늘 굶주림에 시달렸던 크로마뇽인들의 서걱거리는 마음은 미워할 누군가가 필요했겠죠. 처음부터 크로마뇽인들은 네안데르탈인을 그들과 같은 인종이라 생각할 수 없었을 겁니다. 크로마뇽인들은 네안데르탈인들과의 통혼을 꺼렸고, 자신들이 운 좋게 알아낸 것들을 가르쳐 주지도 않았죠. 게다가 크로마뇽인들은 왕성한 번식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적으로도 네안데르탈인을 넘어 설 수 있었습니다. 구석기 말기라면, 이미 채집이나 사냥만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할 만큼 인구가 늘어났을 겁니다. 인간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고 크로마뇽인들은 차츰 뭔가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불합리하게 느껴졌겠죠. 그들은 네안데르탈인을 두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네안데르탈인을 몰살시켰습니다. 살아남은 나머지는 험하고 외벽진 곳으로 쫓겨갈 수밖에 없었겠죠. 가끔 눈 내리는 벌판 위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네안데르탈인이 발견되기도 했겠지만, 그리고 나서는 우리가 아는 대로입니다. 크로마뇽인은 자연과는 완전히 분리된 삶을 팔 천여 년 가까이 끌어오고 있죠. 네안데르탈인이 살아온 수 만년의 역사를 간단히 지워버리고 말입니다.”
이치현 씨는 단지 욕심을 위해 같은 종을 단종(斷種)시킨 대학살에 대한 죄의식이 인간의 양심을 괴롭혀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그에게 단순한 소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바탕으로 하나의 휴먼 다큐멘터리를 만들 요량이었습니다.
그가 우리의 서비스를 알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마도 미래의 어느 날 그 프로그램을 볼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사람에게는 쉽게 지워버릴 수 없는 양심이 있다고 믿는 편이었습니다. 그가 특별히 훌륭한 인간이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이 사람들의 양심을 자극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들의 여론을 올바르게 선도할 수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공한 저널리스트가 된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선설(性善說)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인지, 올바름을 주장하는 저널리스트들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마련이죠. 그리하여 이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은 사회적, 도덕적 권위를 인정받습니다. 삶의 윤택함이나 행복한 가정 따위는 부수적인 보너스 같은 것이죠. 이치현 씨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삶에 대해 욕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역시 성공하고 싶었죠. 누구나 유명인사가 될 꿈을 꾸고 있습니다. 부연하자면 깨끗하고 존경받는 유명인사 말입니다. 하나의 단어는 그 사람의 어떤 것을 아주 잘 드러냅니다. 우리에게 그의 설인 경험은 매우 중요한 단서였습니다. 이치현 씨는 설인을 본 흥분에 자신의 심각한 의식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당신도 지금의 우연이 필요했다고 느끼십니까? 당신이 왜 이 단순하고 밋밋한 공간에  흥미를 느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치현 씨의 예에서처럼 위기감의 근원이 오래 전에 준비되었다는 것을 느끼셨다면 선택하십시오.
                                               (☞다음 파일의 암호는 ‘불길한 틈’입니다.)

file 3. PW: 불길한 틈
   탁월한 저널리스트의 성공에 가장 중요한 자질인 동시에 걸림돌이라 할 수 있는 것은 ‘틈’을 찾아내는 능력입니다. 일상에서, 틈을 찾아내는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저널리스트로서 가장 큰 미덕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현실감각이 없다면 그 개인에게는 불행한 일이기도 하지요. 이치현 씨는 누구보다도 감식안의 함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극점을 향해 빙원을 가로지르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현실의 크레바스를 알아보기 시작한 사람은 그 어둡고 거대한 틈새를 ‘못보는’ 눈으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치현 씨는 보도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밀던 날 이런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단순하게 살자.
말하자면 그는 ‘못보는’ 눈을 잃은 대신 ‘안보는’ 눈을 갖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결심조차 그가 불안한 유형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사람의 의지력은 아무리 굳세다 하더라도 한번쯤은 풀어지게 마련이죠. 운이 나쁘게도 보폭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틈에 맞닥뜨리게 된다면, 인간은 이치현 씨나 당신처럼 그 틈새에 발을 빠뜨리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치현 씨는 늘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스멀스멀 경험을 덮어 가는 틈이 눈에 더께를 씌울까봐 그는 못내 걱정이었습니다. 남들이 찾지 않는, 극점을 향해 가는 인간만이 크레바스를 발견하듯, 일상적이 않은 삶의 어느 지점을 향해 발길 돌리는 사람만이 그 틈의 검은 아가리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 극히 일부가 결국 극점에 도달합니다. 비록 그들을 반기는 것이 악천후뿐이라고 해도 말이지요. 크레바스를 발견한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은 현대인인 당신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치현 씨는 땅 끝으로 데려가겠다는 듯 아가리를 벌리고 선 공포의 틈을 보지 ‘않고’, 어디까지나 사회에 합류하여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가까스로 촬영을 마치자마자 그는 귀국을 서둘렀습니다. 티베트 고원의 숨쉬기 힘든 높은 산정과 하루 종일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는 매복지에서 도망이라도 치듯 그는 후반작업조차 하지 않고 급히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 한 방송사의 교양물 제작 국장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대단한 것을 하나 터뜨려 보자고 그에게 제의를 했더군요. 무척 솔깃한 제안이었죠. 주제나 기법 모든 것을 이치현 씨에게 맡기기로 한데다 성공할 경우 그의 이름을 딴 토크쇼를 신설하겠다는 제의였습니다. 그는 당시에도 저명인사였으니까, 이것은 우연한 행운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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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호는 ‘조작된 우연’입니다.)


채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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