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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천지개벽... 10

2009.02.07 01:1802.07


10.

지애는 오늘 밤 등화관제가 있을 거라는 뉴스보도에 어안이 벙벙했다. 군인인 남편으로부터 과거엔 등화관제며 민방위 훈련이 매월 시행됐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그건 할머니, 할아버지 시대의 일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래요?"
"전쟁이 났대요."
지애의 물음에 원장선생님이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전쟁이요?"
"아니, 남편이 군에 있다면서 몰랐어요?"
지애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두 달 전 휴가에서 왜 남편이 갑자기 말도 없이 헌병들과 함께 사라졌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왜 남편이 변명하지 못했는지 이해가 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리 알려주지 않은 남편이 야속하기도 했다.
몇몇 선생님들은 외국으로 떠날 비행기편을 알아보고 있었다. 지애는 비행기가 격추되면 어쩔 거냐고 그냥 안전한 집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선생님들은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냐며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유치원의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가 찾아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유치원 원장은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부모에게 한동안 문을 닫을 거라는 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바쁜 부모를 둔 몇몇 아이들은 해가 질 때까지 유치원에 남아있어야 했다. 그러자 원장은 지애에게 유치원의 열쇠를 맡기며 말했다.
"지애 선생님은 어차피 남편이 군에 있으니까, 따로 어디 가진 않을 거죠?"
그렇게 지애는 아이들이 모두 유치원을 떠날 때까지 유치원에 남아있어야 했다.
그리고 뒤늦게 마트를 찾아 생필품을 구입했다. 다행히 대형 마트는 마지막까지 이익을 뽑기 위해 물건을 산처럼 쌓아놓고 있었다.

지애는 자신의 몸보다 더 커다란 박스를 낑낑거리며 들지도 못하고 끌고 문 앞에 섰다. 그리고 열쇠를 꽂아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서려고 했지만 상자가 들어가기에는 문이 좁았다.
"어어? 왜 이러지."
지애는 목을 빼고 이리저리 살피더니 문쪽으로 조금 튀어나온 신발장에 걸려 상자가 찌그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 아무래도 번쩍 들어 옮겨야 했다. 그러나 혼자선 무리였다.
"루시아?"
지애는 다시 박스를 복도로 빼놓고 루시아를 불렀다.
콜록콜록.
밭은기침을 하면 얼굴을 내민 루시아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이게 뭐야?"
"전쟁이 났다잖아. 그래서 비상식량이랑 물을 좀 준비했어. 아, 루시아. 너 우리 집에 방독면 어디 있는지 알지?"
지애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루시아를 붙잡아 반질거리는 이마를 닦아주며 물었다.
루시아는 귀찮은 듯 몸을 비틀더니 볼멘소리로 말했다.
"응, ……근데 그럼 아빠는 또 못 오는 거야?"
"그게 말이야. 루시아야, 아빠가 군인이시잖아, 알지? 그래서……"
"그러니까, 못 오는 거냐고?"
루시아는 말꼬리를 길게 빼며 발을 굴렀다.
"루시아, 이번 한 번만 봐주자."
지애는 손가락 하나를 펴 보이며 눈까지 찡긋거렸다.
"싫어! 아빠, 미워."
루시아는 버럭 소리치더니 곧장 자기 방으로 들어가 꽝하는 소리가 나도록 힘껏 문을 닫아버렸다.
지애는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오기가 생긴 듯 소리쳤다.
"아빠가 오기 싫어서 안 오니, 다 전쟁이 나서잖아, 그래서 어쩔 수 없잖아, 왜 아빠를 미워해, 미워하려면 쳐들어오는 나쁜 놈들을 미워해야지."
지애는 루시아가 들을 수 있도록 큰소리로 소리쳤다.
그러나 루시아는 방 안에서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베개를 뒤집어쓰고 귀를 막고 있었다.
지애는 혼자 현관 앞에 남았다. 덩그런 상자와 함께.
"아이, 정말. 이거 왜 이리 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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