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천지개벽... 08

2009.02.05 02:5202.05


8.

막 점심 시간이 지났을, 이른 오후 시간이었지만 병원 대기실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할머니였다. 그리고 할머니에 밀려 한쪽에 기둥처럼 선 중년의 사내들. 가끔 아기를 안고 혹은, 손을 잡고 온 엄마들이 있었다. 하지만, 루시아 또래의 아이들은 이미 학교를 간 뒤라 이제 막 대기실로 들어선 루시아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풀죽은 듯 조용히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모습은 심상치 않은 질병으로 찾아온 듯했고, 그래서 동정심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어머, 귀여운 아이네."
접수대에서 차트를 정리하던 간호사가 풀죽은 루시아의 모습에 힘을 주려고 웃으며 말했다.
간호사의 칭찬에 지애는 어색한 웃음으로 답했다. 그러나 루시아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지금 지애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벌써 두 달이 넘게 약을 먹고 있었지만 도통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변기사건 이후로 아침, 저녁은 물론 점심은 선생님에게 부탁해 먹는 걸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시아는 오히려 늘 피곤하다며 누우려고만 했고, 체중도 줄었다. 게다가 불안하게도 기침까지 심해졌다.
루시아는 지애의 옆에 걸터앉은 채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밭은기침을 냈다.
밭은기침 소리에 지나가던 간호사가 동그란 눈으로 루시아를 다시 바라보았다.
"어머, 많이 아픈가봐요? 식은땀도 흘리네요."
"네, 결핵이라는데…."
"아아, ……결핵은 약을 잘 먹으면 되는데……"
간호사가 말끝을 흐리자 지애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약을 잘 안 먹으려고 하더라고요."
지애의 푸념에 간호사는 걱정스런 얼굴로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루시아는 엄마와 간호사의 이야기가 들리지도 않는지 그저 묵묵히 고개만 숙이고 앉아있었다.
잠시 후, 루시아의 이름이 불리고 지애는 루시아를 거의 끌다시피 해서 진찰실로 들어섰다.
"어서 오렴, 루시아."
반가운 얼굴로 루시아를 맞던 의사의 얼굴이 식은땀을 흘리는 루시아의 얼굴에 굳어졌다.
"우선 등 좀 볼까? 옷 좀 올려볼래?"
의사는 청진기를 귀에 꽂고 루시아의 등에 갖다댔다.
루시아는 차가운 청진기의 감촉에 움찔거렸다. 얼음처럼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의사는 서너 번 자리를 옮겨 소리를 듣더니 청진기를 귀에서 때고, 차트에 쓰여진 글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지애가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얘가 도통 차도가 없는 것 같아요."
"네에."
걱정하는 지애의 말에 의사는 늘 그렇듯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체온계를 꺼내 체온을 잰 뒤,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에 지친 한숨인지 환자의 상태에 답답해서 한숨을 내쉬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애가 약은 제대로 먹고 있긴 하나요?"
의사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차트에 고개를 처박고 물었다.
"그럼요. 제가 매번 챙겨 먹였는데요."
지애는 대답을 하면서 속으로 움찔했다. 변기 사건을 떠올렸다. 모든 게 그전부터 잘못된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뒤로 지애는 루시아가 자기 앞에서 약을 먹는지 반드시 확인했다. 지애는 자신에게 최면이라도 걸듯 속으로 '먹였어, 먹였어.'를 반복했다.
"흠, 그래요."
의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의사는 지애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 듯했다. 이미 안 봐도 다 알고 있는 듯했다.
"흠, 그럼 우선은 약을 좀 바꿔보도록 하죠. 아이가…… 조금 힘들어할지도 모릅니다.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고요."
"부작용이요?"
"우선 약이 좀 강하다보니, 간에 무리가 갈 수도 있고…… 또, 그게 결핵균만 죽이는 게 아니라 그 주변의 다른 정상적인 세포들까지 파괴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 상태에선 그게 최선일 것 같습니다. 우선은 그렇게 하고, 위장약이랑 간에 도움될 약을 함께 처방하도록 하죠."
"나을 수는 있는 거죠?"
지애가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나아야지요."
의사는 그제야 루시아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러나 의사를 바라보는 루시아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77 장편 천지개벽... 14 라퓨탄 2009.02.09 0
276 장편 천지개벽... 13 라퓨탄 2009.02.09 0
275 장편 천지개벽... 12 라퓨탄 2009.02.08 0
274 장편 천지개벽... 11 라퓨탄 2009.02.07 0
273 장편 천지개벽... 10 라퓨탄 2009.02.07 0
272 장편 천지개벽... 09 라퓨탄 2009.02.06 0
장편 천지개벽... 08 라퓨탄 2009.02.05 0
270 장편 천지개벽... 07 라퓨탄 2009.02.04 0
269 장편 천지개벽... 06 라퓨탄 2009.02.03 0
268 장편 천지개벽... 05 라퓨탄 2009.02.02 0
267 장편 천지개벽... 04 라퓨탄 2009.02.01 0
266 장편 천지개벽... 03 라퓨탄 2009.01.31 0
265 장편 천지개벽... 02 라퓨탄 2009.01.31 0
264 장편 천지개벽... 01 라퓨탄 2009.01.31 0
263 장편 aaaaaaa aaa 2009.01.16 0
262 장편 [키오의 주먹] 01 프롤로그 DOSKHARAAS 2009.01.14 0
261 중편 학교의 비밀(14) Mad Hatter 2009.01.12 0
260 중편 겨울색 정원 #1 세이지 2009.01.10 0
259 중편 학교의 비밀(13) Mad Hatter 2009.01.05 0
258 중편 학교의 비밀(12) Mad Hatter 2009.01.04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