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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천지개벽... 04

2009.02.01 14:5502.01


4.

여느 병원의 진찰실처럼 커튼에 막힌 햇살대신 형광등이 더 환한 진찰실이다.
젊은 의사는 루시아의 흉부의 X-ray 사진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무척 괴기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의사는 이미 그런 사진에 익숙한 듯, 반쯤 졸린 듯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어떤가요, 선생님?"
지애가 물었다.
부스스한 모습의 그녀는 멀뚱멀뚱 앉아있는 루시아와 달리 가슴팍 위에 지갑을 꼭 쥐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형광등 빛에 의지해 X-ray사진을 살피는 의사의 안색을, 마치 의사처럼 자세히 살폈다.
"글쎄요."
의사는 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는 대부분의 의사들이 그렇듯 애매모호한 대답으로 말을 시작했다.
"신생아 때, BCG(결핵예방) 접종은 하셨어요?"
"아니요, 그게, 잘은 모르지만 무슨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고 해서요."
의사는 뭔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보다 그저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듯 보였다.
"결핵을 앓았고요."
의사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그러나 듣는 지애는 마치 유죄 판결을 받는 죄인처럼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네에."
"그렇군요. 원래 결핵이라는 게 완치된다고 해도 균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라서 항상 잘 먹고, 운동도 꾸준하게 적당히 해줘야하는데."
"아이가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은 운동하는 것도 안 좋아하고, 잘 먹지도 않아요."
지애는 마치 하소연을 하듯 의사에게 말했다.
힐끗 그녀와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던 의사는 재빨리 눈을 들려 다시 X-ray 사진을 바라보았다. 괜히 환자의 가족사에 관심을 보였다가는 한동안 그 푸념을 들어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시켜야지요. 하여튼 우선 약을 처방하도록 하죠. 절대 거르지 말고 드세요. 약을 거르면 균이 내성이 생기죠, 그럼 더 독한 약을 써야하고, 그럼 아이가 힘들어집니다. 평생 갈 수도 있어요. 전신성 결핵으로 발전하거나 뇌막염이 생길 수도 있고요. 그러다 아주 심해지면 수술까지 해야하죠. 수술하기는 싫지?"
의사는 놀래주려는 듯 루시아의 얼굴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보통 그런 표정이면 아이들은 깜짝 놀라 엄마의 품에 안기거나 수줍은 듯 웃기 마련이다. 그러나 루시아는 대수롭지 않은 듯 의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 아이의 표정에 오히려 의사가 무안해졌다. 의사는 표정을 거두고 다시 허리를 펴고 앉더니 차트에 알 수 없는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루시아는 살짝 허리를 세워 그 글씨를 바라보았다.
마치 마법사의 주문 같았다. 의사들은 그렇게 글씨로 환자를 치료하는 마법사 같았다.
"우선 한 달치를 드리죠."
의사를 차트를 덮으며 말했다.
"네, 그럼 나을 수 있나요?"
지애는 약을 한 달이나 먹여야 한다는 말에 애가 타는 듯 물었다.
"아뇨, 적어도 반년 동안은 약을 꾸준히 먹어야할 겁니다."
"그렇게나 오래요?"
"그것도 약을 잘 먹을 때 얘기죠."
지애는 마치 죄인처럼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인사했다.
그러나 의사는 지애가 나가기도 전에 루시아의 차트를 구석으로 몰아놓고는 다음 차트를 펼쳐 보기 시작했다.
"안녕히 계세요."
루시아는 엄마의 손에 끌려가다가 문 앞에서 의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이의 인사에 마지못해 의사가 고개를 들었다.
"어, 그래 조심해 잘 가라."

지애가 처방전을 받아 나올 때까지 루시아는 접수대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가녀린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다리는 마치 루시아의 다리가 아닌 듯 무표정한 루시아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빠르게 흔들렸다.
"루시아."
지애가 루시아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내밀었지만 루시아는 입을 한발이나 내밀고 살짝 흘겨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단단히 삐진 모양이었다.
지애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지애 자기도 아이 못지 않게 단단히 삐쳐있었다. 남편은 한 달이 넘도록 집에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연락도 없었다.
'돌아오기만 해봐.'
지애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그가 사라진 날은 열흘 짜리 여름휴가 중에, 그것도 여행지에 도착한 다음 날이자, 그 휴가 중에 유일한 주말이었다. 더구나 그 날 지애는 그곳 대사관에서 마련한 부부동반파티에 초대되어 마음이 설레어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난데없이 찾아온 군부대 사람들과 함께, 마치 끌려가듯 사라졌다. 기다리지 말라는 이야기도 없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아직 뉴스나 신문에서는 군에 어떤 비상사태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위기라는 말조차 없었다. 그런데 남편은 그 뒤로 연락도 없이 집에 오지 않고 있었다.
사고가 난 건 아닐까?! 혹시 그 사람들이 남편을 납치한 건 아닐까?!
그러나 혹시나 하는 불안에 부대로 연락을 했을 때, 그의 동료들은 그저 극비사항이라며 말해줄 수 없다고 했다. 극비! 이미 오래 전에 군인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한 지애는 그 극비라는 말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선택권 없이 태어난 루시아는 이해할 수도, 참을 수도 없었다. 사실 지애도 결혼을 하기 전에는 이해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랑했기에 결혼을 결심했었다. 그리고 결혼하면 모두 알 수 있을 거라고,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알 순 없었다. 그저 기다리며 이해하는 척해야 했다.
그리고 루시아는 지애의 몫이었다.
"아빠가 바쁘셔서 그래, 그러니까 착한 루시아가……"
"난 착하지 않아."
루시아가 대뜸 말했다.
지애는 어린 딸이 그런 말을 하자 깜짝 놀랬지만 아이를 달래기 위해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말했다.
"무슨 말이야. 우리 루시아가 얼마나 착한데."
"착한 아이가 왜 아파. 난 나쁜 아이니까 아픈 거야. 그래서 아빠도 오지 않는 거고."
"아니야, 루시아. 아빠는……"
당돌한 루시아의 말에 지애가 아이를 달래려고 입을 뗐지만 루시아는 듣지 않았다.
"아빠가 그랬어. 엄마 말 잘 듣고, 건강하게, 착하게 지내면 온다고, 근데 안 오잖아. 그럼 내가 나쁜 거잖아. ……내가 엄마 말 안 들었어?"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보는 루시아의 눈동자가 눈물에 잠겨있었다.
"아니야, 우리 루시아가 얼마나 착한데."
"근데 왜 안 와."
"지금은 바쁘셔서 못 오시고, 이따가, 조금 이따가, 우리 루시아 병이 다 나으면 오실 거야."
지애는 애써 미소 띤 얼굴로 루시아를 안아주며 말했다.
그러나 루시아는 세상에 홀로 버려진 외톨이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아빤 오지 않아."
그 목소리에 지애는 깜짝 놀랬다. 아이를 안은 채 잠시 할말을 잊고 얼어버렸다. 그러나 다시 미소를 지으며 루시아의 얼굴을 붙잡고 물었다.
"루시아가 어떻게 알아?"
"……"
지애는 입을 굳게 다문 루시아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곧 오실 거야. 정말이야."
"안 오면?"
"그럼 그땐 엄마랑 아빠 혼내주자."
지애는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짓고 루시아의 눈앞에 주먹을 살짝 쥐어 보였지만 루시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 지애는 힘없이 주먹을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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