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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학교의 비밀(14)

2009.01.12 21:5301.12

14.  
반면공간의 과학실에 늘어가자 요란하게 배치되어 있는 초자기구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정아가 한 번도 본적 없는 괴상한 모양의 플라스크와 유리관, 불투명한 금속제 원통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실험기구들은 폭이 과학실 전체 폭과 맞먹었고 높이만 해도 정아 키의 두 배에 달했다. 군데군데 보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가열되고 있는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 부분에 들어 있는 액체만이 기화와 액화를 반복하고 있을 뿐 초자 내로 새로 들어가는 물질도, 나오는 물질도 없었다.
정아가 과학실 내로 발을 들여놓자 축축하게 느껴지는 냄새가 정아의 코를 간질였다. 이끼가 끼어 있고 흐르지 않는 채로 썩어가는 물에서 나는 약간 시고 톡 쏘는 냄새와 흡사했다.
정아는 영어로 된 약품명들과 열화학반응식, 그램 단위를 제외하면 알아보기도 힘든 단위를 달고 있는 수치들이 새겨진 칠판 밑의 실험대로 갔다. 실험대에는 개수대까지 딸려 있었는데 정아가 실험대에 가까이 다가가자 하수구에서 희미하게 풍기는 짠 기운이 도는 썩은 내를 맡을 수 있었다. 실험대 위에는 초자기구가 아니라 전자저울이나 막자사발, 천칭, 젖은 빨래 냄새를 풍기고 깔때기가 달린 커다란 플라스틱 기계 등등이 놓여 있었다. 정아는 실험대에 딸려 있는 서랍을 열었다. 맨 위 서랍을 열었는데 그 아래에 있는 서랍이 같이 열렸다. 정아는 아래에 있는 서랍을 닫으려 했지만 뻑뻑해서 잘 닫히지 않았다. 조금 힘을 주어 보았지만 덜컹거리면서 초자기구들까지 흔들렸기 때문에 정아는 포기하고 두 서랍을 같이 활짝 열었다. 맨 위 서랍에서는 유리 굴러가는 소리가 나며 분별깔때기가 굴러다녔다. 손을 넣어 휘휘 저어 보았지만 다른 것은 없었다. 정아는 맨 위 서랍을 닫았다. 그러자 그 아래에 있는 서랍은 그대로 열린 채로 있고 맨 위 서랍만 닫혔다. 두 번째 서랍에는 손 글씨가 까맣게 들어찬 종이들이 수북이 들어 있었다. 정아는 시든 나뭇잎 같이 갈변하고 심하게 바스락거리는 종이들을 까뒤집었다. 그러자 종이더미 안에서 자그마한 고양이 인형 같은 전기충격기가 나타났다. 어쩐지 선물포장을 푸는 기분이랑 닮아서 정아는 즐거운 느낌이 들었다. 정아는 기름칠한 것처럼 검은색으로 번들거리는 전기충격기를 눈앞에 들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표면이 차가웠다. 정아는 주저하며 전기충격기의 스위치를 눌렀다. 자그마한 번개가 공기가 타는 소리를 내며 정아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 소리가 꽤 커서 정아는 흠칫 놀라며 스위치에서 손을 뗐다. 정아는 전기충격기의 몸체를 돌리고 배터리 박스를 연 다음 새 건전지를 끼워 놓았다. 오존의 불쾌한 냄새가 코끝에서 감돌았다.
정아는 실험기구 뒤편에 줄줄이 놓여 진 청록색의 시약장으로 다가갔다. 실험기구 가까이 가서인지 희미하게 부글거리는 소리가 났다. 점도가 엄청나게 큰 액체를 대량으로 끓일 때에나 들을 수 있는 소리였지만, 정확히 실험기구의 어느 부분에서 들려오는지는 특정할 수가 없었다. 정아는 시약장을 하나 둘 세며 세 번째 시약장 앞에 도착했다. 불쾌한 느낌이 드는 찬 손잡이를 쥐고 가볍게 끼익 거리는 소리를 내며 약장 문을 열었다. 배고픈 것 같다 느껴질 정도로 텅 비어있는 다른 약장들과 달리 세 번째 약장은 갈색을 띤 통통한 약병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정아는 약장의 가로 구분칸에 붙어 있는 라벨을 눈으로 따라가다 H라고 쓰여 있는 부분에서 멈췄다. 정아는 약병 사이로 손을 넣었다. 손등에 글리세롤처럼 차고 끈적한 느낌이 드는 약품이 묻어 정아는 황급히 손을 뺐다. 소매로 약품을 문질러 닦아냈지만 약품이 묻은 부분에 빨갛게 홍반이 생기며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침을 뱉은 다음 팔꿈치로 문질러보았지만 마찬가지로 통증이 있었다. 정아는 소매를 끌어내려 손을 덮고 약병을 하나씩 옆으로 밀쳐 약장의 가장 구석진 곳에 놓여 있는 과학선생의 노트를 꺼냈다. 노트에서는 땀에 절은 듯한 짠 냄새가 풍겨왔다. 노트의 갈색 가죽 표지를 여니 검은 볼펜으로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페이지마다 잔글씨로 빽빽하게 써져 있었다. 정아는 빠르게 노트의 페이지를 넘겼다. 노트의 반이 조금 넘어간 부분에서 과학선생이 마지막으로 쓴 글이 나타났다. 그때 초록색으로 썩어가는 시체를 연상시키는 큼직한 점액이 역겨운 소리를 내며 정아의 하완에 떨어졌다. 지옥에서 콧물을 가지고 온다면 꼭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중심에 잔 깨 같은 이상한 물질들이 핵처럼 박혀 있고, 그 주위에 흰자위처럼 노랗고 반투명한 개의 침 같은 끈끈한 물질이 철벅거리며 흘러 다녔다. 멍한 기분에 하염없이 점액을 바라보던 정아는 점액 중심에 있는 깨 같은 물질이 태아의 심장처럼 맥동하는 것을 깨닫고 팔을 미친 듯이 휘젓다가 발이 걸려 뒤로 넘어졌다. 그러자 천장에 매달려 있는 지옥의 편린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세 딸 중 하나인 ‘지상에 사는 딸’이었다.
그것은 거대한 달팽이 같은 생물이었다. 머리에서 몸통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정상적인 달팽이와 흡사한 질감과 모양을 가지고 있어서 꼭 달팽이를 지옥에서도 가장 깊은 흑암에 있는 고문실에 집어넣고 일억 년 동안 고문한 다음 풀어 놓은 모습이었지만, 껍질이 벗겨진 아래쪽의 모습은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기괴했다.  
인간보다도 역겨운 신의 악의가 달팽이의 통통한 몸에 자리해 기형적으로 부풀어 오른 것 같았다. 달팽이의 하체는 천장을 온통 장악하고 있었다. 투명하고 거대한 나무뿌리 같은 역겨운 부속지가 천장 구석구석까지 달라 붙여 천천히 맥동했다. 정아의 눈에 부속지 안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구더기 같은 생물체가 보였다. 부속지가 맥동할 때마다, 보라색을 띤 체액이 개방혈관계를 따라 몸 구석구석을 순환했고 그에 따라 구더기 모양의 생물도 물에 빠진 곤충처럼 요란하게 꿈틀댔다.  
정아의 바로 위쪽에 달팽이의 머리가 있었다. 진짜 달팽이처럼 눈은 튀어나오지 않았고, 거대한 접시 모양의 눈이 머리 양쪽에 박혀 있었다. 눈은 흰자위와 검은자위까지 고등동물에 있어야 할 것은 다 가지고 있었는데, 사람의 것이라기보다는 지각없는 오징어의 것과 닮아 있었다.
입은 사람의 입이 보통 있는 부분에 입술이 없이 검은 구멍만이 뚫려 있었는데, 그 안쪽의 질감은 차마 글로써 묘사하기조차 꺼려진다. 단순히 보기만 하는 것으로도 인간으로써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파괴되는 듯 한 모습이었다. 둔한 곰처럼, 먹이를 먹더라도 교미하는 듯 한 소리를 내며 산채로 들이마시는, 그야말로 무지의 권화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입의 주위에는 통통한 지렁이 같은 촉수들이 무수히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먹이를 찾아 기쁘다는 의지를 나타내려는 듯이 바쁘게 꼼질거리고 있었다.
달팽이가 지각없는 둔한 눈을 끔뻑이더니 예고도 없이 입에서 크고 묵직한 덩어리를 정아에게 쏟아내었다. 정아는 누운 채로 몸을 피하면서 떨어지고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꼭 하수구에서 쓸려 내려오는 모습 같았다. 달팽이가 뱉은 사람은 바닥에 머리부터 떨어 졌는데, 추락한 위치가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찰흙처럼 찌그러졌다. 시체의 피부는 이상하게 노란색이어서 식초에 담가 두어 껍질을 삭힌 달걀을 보는 것 같았다. 달팽이가 눈을 이상하게 반짝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습만 보았을 때는 몰랐지만 목소리를 들으니 정아는 달팽이의 얼굴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인간의 흔적을 알아볼 수 있었다. 틀림없었다. 적어도 목소리만은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미술선생의 목소리였다.
“네가 올 줄 알고 있었다. 잡아먹어 주마아아아아아아.”
미술선생이 이렇게 말하며 머리를 정아쪽으로 늘어뜨렸다. 천장에서 거대한 오물이 떨어지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이때의 시각적 충격은 정아에게도 견디기 힘든 것이어서 정아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가위에 눌린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 미술선생은 정아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이르자 천천히 촉수 사이에 나 있는 검은 구멍을 열기 시작했다. 가까이서 보니 달팽이의 입천장에 박혀있는 사람의 척추와 닮은 뼈대가 눈에 들어왔다. 달팽이는 입으로 호흡을 하고 있어서 호기시에 코끼리도 기절시킬 수 있을 법한 엄청난 악취가 풍겨왔다. 냄새를 맡은 정아는 마침 몸이 굳어있는 터라 손으로 입을 가릴 새도 없이 맹렬한 기세로 구토를 했다. 그러자 정아의 구토물이 달팽이의 커다란 입으로 곧장 들어갔다. 달팽이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더니 쩝쩝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사람을 산채로 먹으니까 토사물에도 별로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정아는 벌떡 일어서서 초자기구들이 놓여 있는 넓은 탁자를 빙 돌아서 과학실의 문으로 뛰어갔다.
“이노오오오오오오옴~!”
정아가 뒤를 돌아보니 달팽이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먼저 거대한 얼굴을 바닥에 대고는 팔딱거리는 부속지를 얼굴 쪽으로 거둬드렸다. 달팽이의 몸체는 무정형이라 부속지도 원래는 몸통의 일부인 것을 길게 뻗은 것 같았다. 부속지가 몸통 쪽으로 모일수록 달팽이의 몸이 점차 부풀어 올랐다. 정아는 초자기구쪽으로 뛰어가서 그것들을 달팽이가 있는 쪽으로 쏟았다. 초자기구는 달팽이가 있는 쪽으로 넘어가더니 위쪽이 시약장에 걸렸다. 하지만 곧 자체중량을 이기지 못해 중간이 쪼개지더니 끓고 있는 약품과 함께 달팽이의 전신으로 쏟아져 내렸다. 달팽이가 뜨거운 물을 먹고 기도가 댄 사람이 지르는 비명과 비슷한 비명을 질렀다. 달팽이의 더러운 내장이 꾸루룩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정아는 달팽이의 움찔거리는 머리 꼭대기에 약간의 검은 모발이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달팽이의 몸통에서 기다란 부속지 하나가 수직으로 꼿꼿이 서더니 채찍처럼 정아가 있는 장소로 떨어졌다. 정아는 다행히 몸을 피했지만 부속지가 벽을 치면서 깨진 콘크리트가 날아와 오른쪽 팔을 심하게 긁고 나무 바닥에 박혔다. 달팽이는 어느새 몸을 완전히 만들고 나서는 하얀 부분이 이상하게 많아진 눈으로 정아를 바라보았다. 끔찍한 악의가 공기를 타고 정아에게 그대로 전해져 왔다. 정아는 몸을 돌려 과학실문을 나섰고 달팽이의 부속지가 날아와 나무문을 쪼개는 소리를 등 뒤로 들었다. 달팽이가 그 거대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팽이가 뒤집어쓴 초자기구의 파편이 바닥에 떨어진 뒤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아가 한 번 뒤를 돌아보았을 때 정아가 빠져나온 과학실의 문에 달팽이의 촉수가 잔뜩 붙어있는 것이 보였다. 문은 이미 몇 조각으로 쪼개져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다. 촉수들이 더욱 많이 빠져나오더니 천장, 바닥 할 것 없이 여기저기에 달라붙었다. 갑자기 촉수 안에서 돌아다니는 벌레들과 체액의 흐름이 빨라졌다. 부속지들이 점차 굵어지면서 끈적하고 거대한 생물이 바닥을 끌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달팽이가 부속지를 팔처럼 사용해 자신의 묵직한 몸 끝자락을 과학실 문에 드러냈을 때 정아는 서둘러 몸을 돌리고 미친 듯이 도망쳤다. 달팽이는 아마 과학실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도망가는 정아를 보았을 것이다. 지축을 뒤흔드는 굶주린 괴성이 들리고, 달팽이는 자신의 사악한 부속지를 뻗고 휘두르며 복도를 가득 채운 채로 정아를 쫒기 시작했다. 정아는 복도를 뛰어가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달팽이에 의해 오염된 공기가 달팽이의 기세에 밀려 자신 쪽으로 몰려오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정아는 곧 따라잡혀 끔찍하게 죽을 지도 모른다는 자각에 흐느끼기 시작했다. 다리만 다치지 않았어도 지금보다는 빨리 뛸 수 있었을 것이다. 정아는 계단을 지나쳐갔다. 계단을 내려가려 방향을 트는 새에 달팽이가 그 끔찍한 몸으로 정아를 짓눌러 죽일 것 같았다. 계단은 저 앞쪽에 하나가 더 있었다. 동시에 그곳은 이번 층의 복도가 끝나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아는 자신이 그 계단을 정상적인 상태로 내려갈 수 있다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달팽이는 정아가 뛰는 속도보다 훨씬 빨리 이동할 수 있었고, 정아는 곁눈질로 이미 자신의 바로 뒤 쪽까지 미치기 시작한 달팽이의 부속지를 확인했다. 미술선생이 만족스러워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귓가에 징그러울 정도로 생생하게. 마치 거대한 냄비에서 점성이 극한으로 큰 액체를 지옥의 불길보다 뜨거운 온도로 끓이는 소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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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신이시여...
Mad Ha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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