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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학교의 비밀(12)

2009.01.04 06:2101.04

12.
삼학년 이반 교실은 피투성이였다. 정아와 지수는 교실문에 서서 망연한 표정으로 난장판이 된 교실을 바라보았다. 교실은 초현실적인 힘에 의하여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찢겨 있었다는 표현의 축자적인 의미에 따라 교실이 실제로 찢겨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정아는 우주적인 힘에 의해 사방으로 흩어진 교실 내의 물품들을 보며 그러한 표현을 떠올렸다. 교실은 언뜻 보기에는 난잡한 방식으로 어질러져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조금만 주의 깊게 관찰한다면 이성적인 냉정함과 극한의 악의에 의해 차근차근 ‘고문’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수가 교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더니 작은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정아도 그곳으로 뛰어갔다. 과학선생이었다. 피바다 속에서 이상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지수가 무릎을 꿇고 과학선생의 목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때 과학선생이 눈을 떴다. 초점이 흐리고 뇌손상을 입은 것처럼 눈동자가 향하는 방향이 달랐지만 어쨌든 눈을 뜨고 의식이 있다는 징후를 나타내었다. 지수는 눈을 감고 있는 듯이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정아는 지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수가 정아를 돌아보았다가 정아가 손가락으로 가르키는 방향을 보고 과학선생이 눈을 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학선생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왼쪽 눈의 검은자위는 아직도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했지만 오른쪽 눈의 검은자위는 의식의 통제 하에 있는 듯이 정아를 지나 지수에게 가서 닿았다. 과학선생의 입이 움직였다. 지수가 고개를 더욱 숙이고 과학선생의 입에 귀를 가져다 댔다. 하지만 과학선생이 발작적으로 기침을 하며 피를 토하자 반사적으로 귀를 뗐다. 과학선생은 목에 피가 끓는 듯이 ‘헐헐’소리를 내며 목을 가다듬더니 다 죽어가는 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성량은 조금 약했지만 입 바로 앞에 귀를 가져다 대지 않고도 똑똑히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난.. 더 이상 무리야. 너희가 해 주어야겠다. 내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들을 말해 줄게,”
“하지만...! 상처부터 치료해요!”
정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과학선생의 눈이 천천히 정아에게로 와서 멈추었다. 지수는 아무 말 없이 과학선생의 손을 자기 두 손으로 꼭 감싸 안고 있을 뿐이었다. 정아를 바라보는 과학 선생의 눈은 어쩐지 비난하는 어조를 띄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난 괜찮아..”
과학선생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정아와 미선이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 서적들을 태우고 트라페조헤드론을 통해 요그-소도스를 소환하는 것이었다. 과학선생은 어떻게 그 일들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들이 그 일을 해낸다면 모든 일은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과학선생이 다시 기침을 하며 피를 쏟았다. 그 눈이 더욱 게슴츠레해진 것 같았다. 지수가 과학선생에게 무어라고 말을 했다. 하지만 과학선생은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정아가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체육선생이 서 있었다. 정아의 눈이 무엇에 이끌리듯이 체육선생 뒤쪽의 사물함에 어른 머리만한 크기로 나타난 기묘한 현상에 가 닿았다. 사물함의 한 부분이 조금 갈라져 있었는데, 그 안에서 요동치는 것이 무엇인지 정아는 기억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요동치는 분홍색 살덩어리들을 뚫고 다른 인간들이 교실로 나오고 있었다. 두 번째 사람이 몸을 완전히 빼자 정아는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육상부원이었다.
다른 육상부원들도 계속해서 이공간으로부터 빠져 나왔다. 정아는 주춤주춤 지수가 있는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지수가 정아의 뒤쪽에서 일어났다. 무서운 생각이 들어 정아는 흠칫 뒤를 돌아보았지만 지수의 화난 듯한 눈동자는 체육선생을 향하고 있었다. 체육선생은 오싹할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허옇게 분칠한 모습이 흡사 흡혈귀를 연상시켰다. 어쩌면 진짜 흡혈귀일지도 모른다.
지수가 정아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이 눈으로 보아서는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움직임으로 정아를 살짝살짝 창문 쪽으로 잡아당겼다. 정아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정도는 이해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제발 하지 마!’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지수가 정아의 팔을 놓더니 창문 쪽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정아는 출발이 늦었다. 지수는 창문을 열더니 배관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정아는 창문 쪽으로 달려가는 도중 길쭉한 무엇인가가 금속성의 소음을 내며 왼쪽 귀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 배관에 손이 닿을 거리까지 가서 정아는 망설였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바보같이 뒤를 돌아다보고 말았다. 교실 안은 미쳐 버린 동물로만 가득한 맹수의 보금자리 같았다. 늑대, 호랑이, 사자, 여우, 살쾡이 등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맹수들이 사람 몸을 가지고 날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짐승머리를 한 마귀들은 그들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체육선생만을 남겨 둔 채 교실 밖으로 줄줄이 빠져 나가고 있었다. 정아는 그 중 하나가 과학선생의 머리를 들고 있다는 것을 보고 순간 까무라치는 느낌을 받았다. 짐승들을 움직임을 보아서는 아마 정아보다는 지수를 포획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체육선생은 사람의 머리를 하고 있었지만 옥과 같은 녹색 눈을 하고는 귀밑까지 찢어진 입에서 더위 먹은 개처럼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얼굴은 하얗게 분칠하고 말이다. 그리고 두 손으로 길쭉한 금속을 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삼차원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끊임없이 덩어리진 모습을 바꿔가면서 스스로 지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움직였기 때문이다. 아까 정아의 왼쪽 귀를 스친 것도 이것인 것 같았다. 정아는 왼쪽 귀에서 뜨끈한 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체육선생은 그 물체로 정아의 머리통을 쪼개려는 것 같았다. 한 번만 맞아도 정아의 머리는 두부처럼 으스러질 것이다.
체육선생이 들고 있는 것을 한 번 크게 휘둘렀다.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정아는 살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아무 곳에나 번개처럼 몸을 날려 목숨을 건졌다. 그 바람에 정아는 책상 모서리에 이마를 정면으로 부딪쳤다. 눈앞에 번개가 번쩍이더니 눈을 떠도 한 밤중처럼 깜깜했다. 하지만 곧 두 번째 공격이 가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정아는 책상 사이에 길이 난 곳으로 마구 물러났다. 시야는 급속히 회복되었다. 체육선생은 평소에도 제정신은 아니어 보였지만 지금은 달을 보고 미친 짐승처럼 완벽하게 미쳐 보였다. 체육선생이 몸 전체를 숙이기 시작했다. 자기 체중까지 실어서 정아를 으깨려는 것 같았다. 정아는 나무 바닥에 손을 찔려가면서 자기 몸을 필사적으로 뒤로 쓸고 갔다.
하지만 체육선생은 그대로 엎어져 얼굴을 나무 바닥에 묻었다. 그러자 갑자기 지수가 나타났다. 정아는 체육선생의 등 뒤에 박혀 있는 잭나이프를 볼 수 있었다. 지수는 정아의 팔을 잡고 일으키려고 했다.
“정아야! 어서!”
교실 밖에서 짐승 머리를 한 육상부원들이 우워우워거리면서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에 정아는 자기 힘으로 벌떡 일어났다. 정아는 창문 쪽으로 향하려고 했지만 지수는 정아를 사물함 쪽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으윽!”
“눈 감아!”
둘은 무사히 반면공간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지수는 계속해서 정아를 데리고 달려갔다. 정아는 이때까지도 눈을 감고 있었지만 모퉁이를 돌다가 벽에 머리를 박자 눈을 떴다. 반면공간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기척이 없고 영적으로 사악한 느낌이 오심과 소양감을 일으킬 만큼 느껴진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다만 창밖으로 보이는 외부의 풍경은 현실 세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달랐다. 무지개색이 학교 외부에 가득 찬 그로테스크한 유기물과 무기물들에 달라붙어 있었다. 무지개라고 해서 물방울에 의해 나타나는 실제 무지개색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다. 유화에 쓰이는 물감처럼 번들거리고 끈적거리는 느낌이 나는 기분 나쁜 색이었다. 더 나쁜 것은 무지개빛을 띈 거대한 물체들이 역겨운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모습들을 현실 세계의 그것에 비유한다면, 사악하고 변태적인 외설이었다.
둘은 열심히 달려서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참에 도착했다. 지수가 무릎을 꿇었기 때문에 정아도 얼떨결에 따라서 무릎을 꿇었다. 지수는 주머니에서 플라스틱으로 된 병을 꺼냈다. 시럽으로 된 감기약을 담을 때 쓰는 병이었다. 하지만 그 병에 차 있는 것은 감기약이 아니라 걸쭉한 붉은 물질이었다. 지수는 정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 12망성을 그리는 방법을 가르쳐 줄게. 시간이 없으니까 잘 봐.”
그리고는 바로 별을 그리기 시작했다. 익숙해 지지 않으면 상당히 복잡해 보이는 방법이었다. 선을 그리는 순서와 방향 및 길이를 맞추는 방법이 특히 난해했다.
“한 번 더 보여줄까?”
정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는 지체 없이 원래 그린 12망성의 옆에 새 12망성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다 그린 지수가 정아를 쳐다보았다. 정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지수가 붉은 물질이 담긴 병을 정아에게 넘기며 말했다.
“이것 가지고 밖으로 나가 있어. 내가 여기서 준비를 해 놓을 테니까. 너는 이따가 열 시 반에 반면공간에 있는 과학실로 와.”
지수는 자기 뒤 쪽에 있는 올라가는 계단을 가리켰다.
“과학실은 반면공간의 삼층에 있어. 이 계단을 올라간 다음 오른쪽으로 가면 나올 거야. 거기서 무기를 잡은 다음 이층의 도서실로 와. 반면공간의 도서실.”
그때 아래층에서 늑대가 울부짖었다.
“조심해.”
정아가 말했다.
“너도.”
정아는 지수가 건 낸 병을 안주머니에 잘 넣고 나서 12망성을 통해 바깥 세계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정아는 아래로 떨어졌다. 일층이 아닌 계단참을 통해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12망성을 빠져 나오자마자 눈을 떠서 가벼운 찰과상을 입는 선에서 끝났다. 정아는 서둘러 담을 넘어 아파트 단지로 숨어들어갔다. 정아는 남의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 시내 쪽으로 가서 걸어 다닐까 하다가 자신이 귀에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정아는 귀에 흐르는 피를 닦고 머리카락으로 귀를 덮었다. 그런 다음 개수대에서 얼굴을 씻었다. 옷은 조금 더럽기는 했지만 찢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정아는 아파트 단지 내에서 수풀이 나있는 으슥한 곳에 숨었다.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여차하면 앞쪽에 상가와 경비실이 있으므로 냅다 달려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정아는 숨어 있을 곳에 자리를 잡고 지체 없이 12망성을 그리는 법을 복습하기 시작했다.
지수가 설명하기조차 꺼려한 사건을 1월 1일로 하는 교단의 달력에 따르면 오늘은 4월 30일로 검은 산양을 중심으로 마녀의 집회가 열린다는 발푸르기스의 밤이 나타나는 날이다. 교장은 오늘 밤 추종자들을 끌어 모아 피의 제사를 지내고 내일, 즉 사악한 것이 기승하는 새벽이 되면 악마군단을 지상에서 일깨워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다.
Mad Ha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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