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학교의 비밀(10)

2009.01.01 06:1401.01

10.
정아는 도망쳤지만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도움을 청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아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살인을 하고 있거나 정아의 말을 믿지 않거나 믿더라도 교장과 맞서 싸우기에는 무력한 사람들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이 잘 돌아다니지 않는 장소만 골라서 이리저리 방황하던 정아는 공중화장실로 숨어들어가 그곳에서 한참을 보냈다. 하지만 곧 결심이 섰다. 온갖 생각으로 괴로워하던 정아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생각의 폭을 좁혔고, 남아있는 생각 중에서 이 난리를 끝마칠 수 있는 방법을 골라냈다. 과학선생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책들이 이 사건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한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과학선생의 말에 따라 도서관의 책을 모두 불살라 버린다면 녀석들의 세력도 위축되지 않을까? 정아는 이번 사건의 유일한 정보원이 과학선생이라는 생각에 과학선생이 자신에게 설명한 말들은 정성을 들여 기억하고 있었다. 책이 어떤 식으로 그들에게 영향을 주는지는 몰라도 책을 불사르는 행위가 교장 패거리들에게는 두 가지 치명상 중 하나라는 이야기였다.

교장 패거리가 학교의 출입구를 잠글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아는 최대한 서둘렀다. 인화성이 있는 물질을 구해야 했는데, 일단 머리에 떠오른 것은 휘발유였지만 주유소까지 가서 휘발유를 구해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터였다. 또 주유소에서 정아가 들고 뛸 수 있을 만큼 적은 양의 휘발유를 넘겨 줄 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정아가 생각해 낸 것이 에탄올이었다. 소독용 에탄올이라면 양도 적당하고 약국에서 싼 값에 쉽게 살 수도 있었다. 정아는 지갑의 돈을 탈탈 털어 많은 양의 에탄올을 구입했다. 아울러 동네 슈퍼에서 성냥도 구입한 정아는 빠른 걸음으로 학교로 향했다.

일단 학교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어디로 들어갈지가 문제였다. 애초에 조용히 들어가기는 포기한 상태이므로 담임이 죽은 복도와 멀리 떨어진 1층 복도의 창문을 깨고 들어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 창문은 바로 계단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재빨리 두 층을 올라가 적당한 곳에 숨어 있다가 단숨에 도서관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돌로 깨니 창문은 쉽게 깨졌다. 경보 같은 것도 울리지 않았다. 정아는 창이 깨진 부분으로 들어가려하다 그냥 손을 집어넣어 잠긴 창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재빨리 계단을 뛰어 올라가서는 화장실에 숨었다. 3층 복도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정아는 화장실 문을 닫고는 걸레물을 담는 데 쓰는 양철 양동이를 가지고 적당한 칸을 찾아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리고 에탄올을 양동이에 쏟아 부었다. 도서실로 들어간 다음 양동이에 든 에탄올을 한 번에 쏟아 붓고 불을 지르는 것이다. 구교사는 문과 바닥이 목재로 되어 있으므로 운이 좋다면 필요한 것을 전부 불살라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양동이가 어느 정도 찼는데도 에탄올이 남았다. 정아는 잠긴 문을 열고 다른 양동이를 하나 더 가져와서 에탄올을 채웠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아는 두 손에 양동이를 들고는 도서실 앞까지 종종걸음으로 내달렸다. 도서실문은 잠겨 있었지만 정아는 문의 유리를 깨고 걸쇠를 푼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누군가 있을지도 몰랐지만 정아는 그런 것에는 신경을 끄고 가까운 곳에 있는 서가에 에탄올을 뿌리고는 불을 붙였다. 에탄올에 젖은 책들은 불길에 휩싸였지만 대부분 에탄올이 증발하자 쉽게 꺼졌다. 정아는 적당한 책을 한권 잡고는 성냥으로 불을 붙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책을 열고 페이지 하나에 불을 붙였다. 이번에는 잘 타들어 갔다. 서가에 남아 있던 불씨도 소규모지만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연료를 넣어 발화점에 도달시키기만 한다면 도서실 전체를 홀랑 태워먹는 것도 꿈은 아닐 것이다. 정아는 책을 닥치는 대로 뽑아 서가 사이에 더미로 쌓아 두고는 그 위에 에탄올을 조금 끼얹고 불을 붙였다. 하지만 이 책들은 목표로 하고 있는 책들이 아니었다. 정아가 목표로 하고 있는 서가는 도서실과 연결된 다른 방에 있었다.
연결된 다른 방으로 통하는 문은 재질이 나무이기는 했지만 꽤나 두꺼워 보였고 굳게 잠겨 있었다. 정아가 있는 방에는 다행히 불길이 꽤 커져 있었다. 정아는 평소에 사서가 앉아 있는 책상에서 의자를 빼 와서는 문에다 힘껏 던졌다. 소리만 요란했지 성과는 없었다. 정아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초조해지기 시작하면 언제나 결과가 나쁘다는 것은 정아도 알고 있었다.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기분이 들었지만 정아는 이 문도 태워버리려는 계획을 세웠다. 한동안 문과 씨름하다 뒤를 돌아본 정아는 쾌재를 불렀다. 불길은 벌써 꽤 커져 있었다. 회색 연기가 펑펑 뿜어져 나와 정아는 자세를 낮추고 움직여야 했다. 정아는 한 양동이에 조금 남아 있는 에탄올을 나무문에 뿌리고 불붙은 책을 몇 권 문에다 던졌다. 산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창문도 몇 개 열어 놓았다. 에탄올 덕분에 불길은 금세 일어났다. 그때 굳게 닫힌 나무문 안쪽에서 걸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정아는 화들짝 놀랐지만, 누군가 도서실에 들어 올 수도 있다는 것은 이미 예상한 일이므로 재빨리 양동이를 들고 공조기 뒤에 숨었다. 나무문 안쪽에서 나온 것은 다름 아닌 학교 사서였다.
정아는 책이 교장 패거리들과 관련이 있다면 사서또한 교장 패거리에 속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마 지금 사실로 드러난 것 같았다. 사서가 인간이라면 도저히 낼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커다란 개처럼 킁킁거렸기 때문이다. 사서는 방금 정아가 던져 놓은 불붙은 책을 발로 차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어니 있냐! 이 방에 숨은 것 다 안다! 이나이 이나이!”
갑자기 도서관의 유리란 유리가 전부 깨져버렸다. 유리 파편은 건물 바깥쪽이 아닌 안쪽으로 쏟아졌지만 정아는 이제 그런 것에는 놀랍지도 않았다.  
“응그라이 크라하 파라쿠르스 메켄나이!”
사서가 짐승 같이 킁킁대는 소리로 이상한 말을 내뱉자 불이 점차 꺼지기 시작했다. 사서는 잔뜩 악에 받힌 듯한 위협적인 몸짓으로 서가 한가운데로 가더니 이상한 붉은 빛이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범인을 찾기 시작했다. 정아는 갑자기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숨을 들이쉬면 기체가 몸 안으로 들어오고 내쉬면 나가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점차 숨이 막혀왔다. 정아는 이미 담임에 의해 숨이 막히는 기분을 생생하게 경험한 적이 있으므로 착각할 리가 없었다. 목이 졸리는 것도 아니었고 공기의 출입이 부자유한 것도 아니었는데 숨이 막혔다. 정아는 퍼뜩 산소를 떠올렸다. 애써 붙여놓은 불이 점차 꺼지고 숨이 막히는 것으로 보아 산소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창문은 모두 깨져서 열려 있었지만 도서실 안에서 산소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꼼짝없이 죽을 판이었다. 정아는 양동이에 있는 에탄올을 바닥으로 쏟았다. 양동이를 자신이 숨어있는 장소와 먼 곳에 던져 사서가 눈이 팔린 사이에 기어서 도서실 밖으로 빠져 나간다는 계획이었다. 그때였다. 정아는 아까 운동장에서 삽을 휘두르던 경비가 이번에는 마대자루를 들고 화난 얼굴로 도서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사서는 서가를 뒤지느라 경비가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경비는 도서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숨이 막히는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경비는 사서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정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정아는 호흡곤란 때문에 윙윙거리고 웅웅거리는 소리만에 귓가에서 울리고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의 경비는 사서 뒤로 성큼성큼 다가가서는 마대자루를 번쩍 들고 사서의 머리통을 내려쳤다. 그러자 갑자기 창을 통해 도서실 안으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산소도 있었다. 정아는 서둘러 원 없이 숨을 쉬었다. 하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고 빠르게 숨을 쉬어서 머리가 어찔어찔했다.
“이 새끼! 이게 무슨 짓이야!”
경비가 화난 목소리로 사서에게 소리쳤다. 사서는 방금 마대자루로 얻어맞은 머리를 슬슬 쓰다듬으면서 경비를 노려보았다.
“누군가 불을 질렀어! 아직 여기에 숨어있어서 그랬어.”
“어이구! 저 창문 좀 봐! 불을 끄려면 나를 부르던지 하지 창문은 왜 다 깨고 지랄이야!”
“이 새끼. 문지기 주제에 감히 마법사에게 대들다니.”
“마법사가 뭐 벼슬이라도 돼? 나도 못이기는 주제에 무슨 마법사야! 그런데 누가 숨어 있다고 했지?”
경비는 잰 걸음으로 서가를 돌아다니며 침입자를 찾기 시작했다.
“누군지 잡히기만 해 봐라. 뼈마디를 조각내 주겠어.”
정아는 이제 3층에서 창문을 통해 뛰어내리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경비가 정아를 찾는 것과 동시에 창문으로 뛰어 내린다. 정아로서는 뼈마디가 조각나고 저장고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 보다는 훨씬 아름다운 방법이었다.
정아는 경비에게 정신이 팔려 바로 옆에서 공조기가 조금씩 밀려나고 있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공조기 뒤에는 사람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나 있었다. 그 구멍을 통해 손이 두개 나와 정아의 팔을 잡고 입을 막더니 구멍 안으로 끌고 갔다. 정아는 열심히 눈을 굴리며 자신을 끌고 들어온 것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쪽에서 먼저 정체를 드러냈다.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대고 정아를 향해 ‘쉿!’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지수였다.
------------------------------------------------------------------------
이 글들을 모아서 한꺼번에 단편 게시판에 올려 놓으면 안되겠죠? 장편은 아무래도 피드백이 안돼서요.....
Mad Hatter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57 중편 학교의 비밀(11) Mad Hatter 2009.01.03 0
중편 학교의 비밀(10) Mad Hatter 2009.01.01 0
255 중편 학교의 비밀(9) Mad Hatter 2009.01.01 0
254 중편 학교의 비밀(8) Mad Hatter 2008.12.31 0
253 중편 학교의 비밀(7) Mad Hatter 2008.12.30 0
252 중편 학교의 비밀(6) Mad Hatter 2008.12.29 0
251 중편 학교의 비밀(5) Mad Hatter 2008.12.25 0
250 중편 학교의 비밀(4) Mad Hatter 2008.12.22 0
249 중편 학교의 비밀(3) Mad Hatter 2008.12.19 0
248 중편 학교의 비밀(2) Mad Hatter 2008.12.18 0
247 중편 학교의 비밀(1) Mad Hatter 2008.12.18 0
246 중편 어느 경호원의 일상생활 (4) 튠업 2008.12.18 0
245 중편 어느 경호원의 일상생활 (3) 튠업 2008.12.18 0
244 장편 [인류바이러스] 첫째 날 (16) 조나단 2008.12.05 0
243 장편 [인류바이러스] 첫째 날 (15) 조나단 2008.12.05 0
242 장편 삼월토끼 03 Mad Hatter 2008.11.24 0
241 장편 삼월토끼 02 Mad Hatter 2008.11.23 0
240 장편 삼월토끼 01 Mad Hatter 2008.11.23 0
239 장편 충절의 증거 (上) [混沌]Chaos 2008.11.11 0
238 장편 충절의 증거 (下) [混沌]Chaos 2008.11.1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