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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천지개벽... 22

2009.02.14 00:1602.14


22.

종현은 모니터가 쓰러지지 않도록 부서진 계기반 위에 눕혀놓고는 조심스럽게 손을 뗐다.
"좋아."
마지막 탑 쌓기에 성공한 아이처럼 종현은 흐뭇해하더니, 관제실 바닥에서 굵은 케이블을 뽑아내 그 중 몇 가닥의 선을 계기반의 한 구석에 연결하고는 이어 모니터의 케이블에 연결시켰다. 그러자 바위 거인이 굳게 감았던 눈을 뜨듯 모니터에 흰줄이 번쩍이더니 화면에 레이더의 영상이 나타났다.
"됐다!"
종현의 말에 한 쪽 구석에서 단말기를 꺼내 핵탄두의 암호를 입력하던 아담과 레이놀드가 고개를 돌렸다.
"됐소?"
레이놀드가 다가와 모니터를 바라보며 물었다.
종현은 대답대신 긴 숨을 몰아 내쉬며 레이놀드를 돌아보았다.
"이제 내 할 일은 다한 거나 마찬가지죠."
"무슨 소리야, 이제부터 시작인데."
아담이 다가와 종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니, 이제 컴퓨터가 다 알아서 할거야. 난 그냥 읽어주기만 하면 돼. 기다려라 지구야, 형님이 곧 돌아가마."
종현은 씩 웃고는 두 손을 맞잡고 비비며 말했다.
"레이더에 뭔가 나오는 건 없어?"
기뻐하는 종현과 달리 아담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에 종현의 얼굴도 다시 어두워졌다. 핸드마우스를 끼고 레이더의 영상을 바꿔가면서 구석구석을 찾기 시작했다. 관제실의 모든 모니터가 망가져 어쩔 수 없이 블루버드 호의 모니터를 떼어와 만든 화면은 레이더의 영상을 모두 담기에는 해상도가 너무 낮았다. 결국 이리저리 화면을 바꿔보던 종현은 현기증을 느꼈다. 지난 일주일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익숙하지 않은 화면분할이 더 문제였다. 이래선 관제하기가 힘들 것 같았다. 더 큰 화면이 필요했다. 종현은 어지러운 머리를 문지르며 말했다.
"우선은 없는데, 아무래도 모니터 몇 개가 더 필요하겠어. 이대로는 모니터가 너무 작아서 전체를 관제할 수 가 없겠어."
"얼마나 더 필요하겠소?"
레이놀드가 물었다.
"최소한 4개."
그러나 불시착한 블루버드에는 모니터가 3개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아담이 입술을 실룩거렸다. 더 이상 모니터를 구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전투기에서 모니터를 떼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모니터의 크기도 작거니와 30기의 전투기가 고작이었고, 52명의 생존자중 출격을 기다리는 조종사들은 42명이나 됐다. 더구나 한 대의 전투기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유로파의 갈릴레이 기지로 보급을 요청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예상대로라면 이틀 후에 외계인들의 항모가 토성의 궤도를 지나가기 때문이다.
"빗방울이 가늘어졌어요."
직육면체에 콘크리트 블록처럼 단단해 보이는 통신 장비들을 배와 가슴에 얹고 관제실로 들어서던 벅시가 말했다. 그의 말에 아담과 종현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봤다. 멀리 구름 속에서 산란하는 어렴풋한 빛이 보이는 듯했다.
마침 바랭이 렌치를 들고 들어서며 말했다.
"5시간 전에 물의 공급을 막았으니까. 조금 있으면 완전히 그칠 거요. 오랜만에 맑은 하늘을 보겠군."
그는 여전히 우의를 입고 있었다. 마치 비의 요정 같았다. 그것도 퉁퉁 부은 뚱보 비의 요정. 그 모습이 아담에게는 축복을 주는 요정처럼 보였다.
종현이 물었다.
"그럼, 수리장비는 다 쓴 겁니까?"
바랭은 뜻밖의 질문에 어안이 벙벙한 듯 종현을 보더니 더듬더듬 대답했다.
"예, 뭐. 그, 그렇지."
"그럼 거기 달린 모니터는 필요 없겠네요?"
"뭐, 당장은……"
아담이 옆에 선 레이놀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놀드는 고개를 으쓱거리더니 관제실을 나섰다. 어디로 가야하는 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바랭이 관제실을 나서는 레이놀드의 뒷모습을 돌아보다가 다시 아담을 바라보았다. 아담은 아무 일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거요? ……젠장, 이것도 군사비밀인가."

활주로에선 중장비들이 사냥감을 노리는 사자의 눈처럼 이글거리는 헤드라이트로 켜고 검은 매연을 뿜으며 블루버드 호의 부러진 날개를 밀어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활주로는 실제 전투기의 이착륙을 위해 필요한 건 아니었다. 전투기들은 모두 수직이착륙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블루버드처럼 대형 화물선이나 비상착륙을 시도해야하는 전투기들을 위한 활주로였다. 아담은 워커 대령이 내일 저 활주로에 내려앉을 전투기가 몇 대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때 서서히 하늘이 보였다. 어두운 밤하늘이었다.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반짝였다. 아니, 쏟아질 듯 매달려 있었다. 너무나 아름답고, 무서운 광경이었다. 그 하늘을 바라보며 바랭은 투덜거렸다.
"젠장, 오랜만에 푸른 하늘을 기대했는데, 오그라질 밤이군. 계속 여기 있을 거요?"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바랭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홀로 관제실을 빠져나갔다.
"군인들은 예의가 없어. 기껏 고생해서 고쳐놨더니 감사할 줄도 모른다니까, 헤헤."
바랭의 어색한 웃음소리에 아담이 고개를 돌렸다. 워커 대령이 관제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활주로를 비우시는군요."
"그게 공군의 일 아니오?"
아담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일 저 활주로를 쓸 수 있을까요?"
"내일? 나는 오늘 쓸 생각이오."
워커의 말에 아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봤다.
"나는 남쪽 격납고에 있는 SC-100에 당신들을 태워 보낼 생각이오."
"우리를요?"
"당신들은 이곳 대원도 아니고, 게다가 바랭은 민간인이지. 지난번엔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바랭을 대피시키지 못했지만 이번은 아니잖소."
"하지만, 우리가 가면 관제사도 없고……"
"어차피 대기권 밖으로 나가면 토성의 반사판을 기준좌표로 삼고 갈 거요. 게다가 토성 반대편에서 작전이 수행되는데, 그럼 이곳의 통제는 필요 없소."
"하지만, 유로파의 방위군과 연계해 작전을 수행하려면 이곳 관제소의 역할이 ……"
유로파라는 말에 워커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들을 위해 남겠다면 나도 굳이 막진 않겠소. 하지만, 목숨을 소중히 한다면 오늘 떠나는 게 나을 거요."
워커는 할 말을 다했다는 듯 속시원한 한숨을 내쉬고 관제실을 나섰다. 부서진 문 뒤로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걸 지켜보던 벅시가 말했다.
"이건 만약을 대비해 말씀드리는 거지만, 우리가 만약 SC-100기로 귀환을 해야한다면 한시라도 빨리 출발하는 게 나을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SC-100은 연료를 가득 싣는다고 해도 기껏해야 화성까지 밖에 가지 못합니다. 만약, 작전이 실패하고 화성의 기지들이 재차 파괴되고 화성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면 우린 우주 미아가 될 수도 있어요. 워커 대령도 그걸 알고 있는 거죠."
아담은 잠시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종현을 바라보았다.
종현은 아담의 얼굴에서 그가 남고 싶어한다는 걸 직감했다. 종현은 몸을 돌려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건 아담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뜻이었다. 최소한 지켜보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어차피 결정권은 중령인 아담에게 있다.
"나는 남을 거요. 어차피 이곳에서 실패하면 화성에서도 희망은 없잖소."
아담은 벅시의 못내 아쉬워하는 듯한 표정을 뒤로하고 조용히 관제실을 나섰다.
종현은 말없이 모니터를 체크했다. 벅시의 한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저는 화물선의 상태를 확인해봐야겠네요."
벅시가 사라지자 종현은 주먹을 불끈 쥐고 앞의 계기반을 내리치려했지만 그랬다가 잘못해 모니터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저 들이쉰 숨을 힘없이 내뱉으며 천천히 팔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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