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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천지개벽... 21

2009.02.13 00:2402.13


21.

어두운 백색랜턴의 차가운 조명으로 보이는 무너진 격납고의 작은 사무실은 먼지로 가득했다. 간신히 깨어진 창문이 환기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차갑고 습한 공기대신 사무실의 눅눅한 공기가 곧바로 코끝을 간질였다.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깨어진 창문으로 밖을 살펴보던 레이놀드가 고개를 돌려 아담에게 물었다.
아담은 낡은 철제침대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그 상태로 레이놀드를 바라보았다.
"뭘 말이오?"
"대책이 있을 것 아닙니까?"
"이런 경우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소."
아담은 남의 일처럼 무뚝뚝하게 말했지만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맙소사, 그 대령 눈빛, 아니 거기 있던 사람들 눈빛 다 봤잖아요? 여긴 완전히 무법천집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대령에게 총살당할 지도 몰라요."
벅시가 불안한 듯 말했다.
그때 바랭이 한 손에 으깨진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들고 터벅터벅 걸으며 나타났다. 다른 한 손에는 자신의 입을 가득 채운 빵이 들려있었다. 그는 잠시 테이블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포기하고 발끝으로 쓰러진 의자를 세워, 그 위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좀 먹어둬요. 내일부터 바쁠 테니까."
"설마 우리를 노예로 쓰기라도 하겠다는 건 아니겠죠?"
종현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노예? 하하하."
바랭의 입에서 빵 조각이 분수처럼 튀어나왔다.
종현은 미간을 찡그렸다. 바랭은 입주위로 튀어나온 빵 조각을 다시 입안으로 밀어놓고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흠흠, 대령이 무뚝뚝하고 말을 좀 공격적으로 해도 원래 좋은 사람이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지구가 당하는 걸 그대로 보고만 있을 사람은 아니니까."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죠?"
아담이 재미있어하는 바랭의 모습에 눈을 돌려 물었다.
"내가 워커를 알고 지낸 지 20년이오. 게다가 이 빌어먹을 기지에서만 5년을 같이 지냈소. 고등학교시절 첫 데이트했던 여자이름도 알고, 이곳에 지원한 후임자가 없어서 근무연장을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 음, 그래, 고등학교 졸업파티의 파트너도 알고 있었는데 아마, 아마, 아 엘리자베스 스위노파라는 여자였지. 흐흐, 그때 그 어색한 19세기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군. 하여튼 뭐 워커는 전처말고는 미워하는 사람이 없지. 원래 좋은 사람이오."
"전처요?"
종현이 물었다.
"3년 전에 이혼했지. 서면이혼 말이오, 자네들은 아직 전처가 없나?"
바랭이 오히려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휘둥그래 뜨고 되물었다.
"대단하군. 그 노하우 좀 알려주게, 내가 다시 재혼하면 말이야. 하하하. 하여튼 워커도 그렇고, 나도 내 전처가 지금 지구에 사는데 가끔 확 죽어버렸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지. 중령, 당신도 그런 전처 없소?"
바랭이 히죽거리며 물었다.
아담이 고개를 저었다.
문득 머릿속에 지구에서 아픈 딸을 홀로 돌보고 있을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워커 대령의 현재 모습이 3년 후의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메시지라도 전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대단하구만, 이혼도 안하고 중령까지라, 허긴 워커도 대령을 달고 1년 정도 더 유지하긴 했지. 하여튼 그 전처 생각 때문에 그랬을 거요. 뭐 사실 나도 워커의 말에 속이 시원하던걸.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진 마시오. 원래 이런 곳에 오래 있다보면 말수도 적어지고 그럼 좀 괴팍해지게 되지.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아. 워커가 이곳 우두머리지만 결국 군인이잖소. 이미 조종사들과 회의를 하고 있지."
"회의요?"
종현이 혹 자신들을 처형하려는 회의는 아닌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확히 말해 설득이라고 하는 편이 옳겠지. 원래 워커 대령은 혼자 결정하는 걸 좋아하지 않소. 더구나 이젠 이곳이 완전히 폐허가 됐으니, 스스로 그들의 지휘관이라고 하기도 어색하겠지. 게다가 워커가 당신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정확히 얘기하면 그가 당신들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부하들이 당신들을 싫어하는 거요. 어찌 보면 배신감을 느끼는 건 그보다 그의 부하들이 더 하지. 죽은 것도 그의 부하들이고, 죽어야하는 것도 그의 부하들이니까."
벅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럼 허울뿐인 대장이 아닙니까?"
"허울뿐이라니? 워커는 부하들의 기분을 대변해 준 것뿐이오."
그리고 지금 바랭은 워커 대령을 대변하고 있다.
레이놀드가 아담을 보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거의 항명수준입니다. 이대로 놔두면 여긴 군기지가 아니라, 무법자들의 피신처밖에 되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반우주연합전선 놈들의 기지가 될 수도 있겠죠."
레이놀드의 말에 바랭이 발끈하며 말했다.
"놔두지 않으면 워커가 어떻게 이곳을 통제할 수 있겠소? 모두 죽이고 나와 둘이 남아서?"
"이건 통제가 아니라, 묵인입니다."
레이놀드가 반박했다.
"멍청하군. 그의 권위가 지금 어디서 나오는 것 같소? 사령부에서 승리의 축제를 벌이면서 저들을 이 동토의 땅에 내팽개친 우주연합사령부? 흥, 어림없는 소리지. 만약 부하들이 그를 존경하지 않았다면 당신 말대로 이곳은 무법천지가 됐을 거요. 그럼 당신들이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을까?"
"쓸데없는 말을 하는군, 바랭."
갑자기 워커 대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부턴지 사무실 문 앞에선 워커는 아담과 그 일행을 천천히 훑어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로 관제실에서 보았던 부관 몇몇이 따라 들어섰다.
워커 대령이 그의 부관과 함께 나타나자 아담일행은 모두 경계의 눈초리로 워커의 동태를 살폈다. 그러나 워커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하게 행동했다. 그는 우선 낡은 의자를 당겨 앉고는 담배를 꺼내 긴 연기를 내뿜으며 다리를 꼬고 의자에 기대었다. 그의 자세는 완전히 무방비상태였다. 레이놀드와 벅시는 여차하면 그를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바랭의 말대로라면 문제는 뒤에 있는 그의 부관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레이놀드와 벅시에게 무관심한 듯 보였지만 자세는 전혀 흩뜨리지 않고 당당하게 서있었다.
"그래, 좋은 계획이라도 있소, 영웅나리?"
워커가 물었다.
아까 와는 달리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친절한 미소가 배어있었다.
아담은 변한 워커의 표정에 당황했고 여전히 경계를 풀지 못했다.
"어차피 버려진 몸이니까, 우린 더 이상 우주연합의 방위군이라고 생각하진 않소. 하지만, 빌어먹을 가족들이 지구에 있지. 어쩌겠소, 우리도 살아야하지만 가족도 살려야지. 그게 우리 같은 쓰레기 군인이 할 일이지. 물론 나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 순간 아담은 워커가 나, 자신이라고 말했지만 분명 부하들의 뜻일 거라고 생각했다. 워커 대령은 자신을 빗대어 부하들의 뜻을 전하고 있었다.
아담은 망설였다. 그건 워커의 부하 때문이 아니라 암스트롱에서 세운 작전계획 때문이었다. 아무리 워커 대령이 아무리 자신의 편을 들어준다고 해도 그의 부하들이 자신이 가져온 작전계획을 거부한다면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될 터였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도 없다. 지금 바로 유로파로 돌아간다고 해도 마땅한 대책은 없었다. 지금 아담에게 필요한 건, 아니 지구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건 타이탄의 핵이기 때문이다.
아담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선 이번에도 지난번과 같은 작전이죠. 하지만, 더 강력한 공격을 시도할 겁니다."
"강력한 공격?"
워커 대령이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설마……"
워커의 눈살이 찌푸려진 만큼 아담의 표정도 어두웠다.
사실 레이가 말한 정치인들의 간단한 방법이 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핵을 이야기하게 될 줄은 암스트롱 기지를 떠날 때만해도 상상도 못했다.

- 그들은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거든, 핵으로 말이야. 간단히 핵을 쓰자는 건데 그게 간단하다?! 그건 아니지.

유로파를 지나 타이탄으로 오는 화물선에서 받은 작전계획에 레이가 덧붙인 내용이었다. 전문을 보낸 레이가 화면 속에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소용없소. 놈들은 핵공격에도 소용없었소."
"겉보기에는 그랬죠. 하지만, 우리 연구원들이 추락한 놈들의 비행선의 기체를 조사한 결과 방사선에 노출된 놈들의 기체가 고열로 달궈졌고, 우주에서 급랭하게 되면서 그 결과로 지구의 미사일 공격으로도 저들을 추락시킬 만큼 선체의 강도를 약화시켰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핵을 쏴라? 그것도 이번엔 놈들의 거대한 우주선의 선체가 녹아 내릴 만큼?!…… 흥, 결국 우리보고 놈들에게 핵을 쏘고 죽으라는 거군. 우리더러 가미가제가 되라 이건가."
워커가 냉소하며 말했다.
아담은 가미가제라는 말에 문득 레이가 일본인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 작전을 설마 레이가 세운 건가? 하지만, 그는 인류역사상 유일하게 핵공격을 받은 민족이다. 그래서인지 핵이라고 하면 눈살부터 찡그리던 레이 아닌가. 그런 그가 쉽게 핵을 선택하진 않았을 텐데.'
"설마 그런 거요?"
워커는 우선 화부터 냈다. 생각에 잠긴 아담을 보고 워커가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생각에 눈을 부릅뜨고 따졌다. 아담은 그런 그의 성격이 불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워커는 자신이 화를 내야 부관들이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리라고 생각했다.
"아, 그렇게 회의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선 제 말을 들어보세요. 우선 핵폭발이 있더라도 타이탄은 안전할겁니다. 이미 놈들의 예측항로를 보셨다시피 저들은 토성 건너편을 지나게 됩니다. 토성이 충분한 엄폐물이 돼주는 거죠. 그만큼 타이탄에 미치는 영향은 적을 겁니다."
아담은 워커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하지만, 전투기의 조종사들은? 이곳에 남은 핵에는 발사체가 없소. 발사체가 있던 건 지난 번 전투에서 모두 써버렸지. 남은 건 지구인들이 우리가 자기들을 향해 핵을 쏠까봐 무서워서 발사체를 다 없애버렸고. 결국 핵을 쓰려면 전투기로 핵을 날라야한단 말이오."
워커의 말에 아담은 망설였다. 사실 이 작전은 그들의 희생을 강요한 작전이었다.
언젠가 레이는 작전장교란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지만 더 많은 피를 뽑아내는 자라고 했다. 그게 적의 피든 아군의 피든.
아담은 그 말에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최선의 방법은 토성의 그림자 안에 숨어 있다가 놈들이 가까이 왔을 때, 재빨리 다가가 관성으로 핵을 날려보내고 바로 퇴각하는 거죠."
"말이라고 쉽게 하는군. 그게 말처럼 쉬운 방법은 아니오."
아담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작심하고 말했다.
"말처럼 쉽게 만드는 게 군인의 일이죠."
아담의 대답에 워커 대령은 피식 웃고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마치 자신은 아닌 듯 말했다.
"빌어먹을 지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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