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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천지개벽... 20

2009.02.13 00:2402.13


20.

관제실은 말 그대로 폭격을 맞았다. 창문으로는 연신 빗물이 들이치고 있었고 천장에 붙어있어야 할 장비들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종현은 마치 자신의 애를 떨어뜨린 것처럼 가슴 아파하며 쓸만한 부품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각오한 듯 전쟁터의 최전선에 떨어졌다는 충격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살아있는 목숨이니 어떻게든 살아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이겐스 기지의 장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냉소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먼지 쌓인 계기반 위에 기대어 담배를 꺼내 피는 워커와 군데군데 흩어져 앉은 그의 부하들을 향해 아담이 3차원 영사기로 외계인들의 이동경로를 보여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달에서 이곳으로 출발한 지 50일 뒤에 이 자료를 받았습니다. 이번에 나타난 녀석들도 지난번에 왔던 놈들과 같은 비행선을 사용하고 있고, 거기에 거대한 우주항모가 50척이나 됩니다. 이들의 속도로 봤을 때, 늦어도 두 달, 빠르면 한 달 안에 놈들이 타이탄의 작전권내에 도착할 겁니다."
"그래서?"
워커는 태연히 담뱃불을 붙이고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마치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했다.
"그래서라뇨? 이곳과 유로파, 화성의 남은 병력을 모아 저들을……"
"이보게, 중령. 내가 볼 때는 말이오, 만일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지난 번 놈들이 확실히 훑고 지나갔으니 이번에는 우리를 그냥 비켜갈 것 같은데. 게다가 저들의 예상 경로는 우리 쪽이 아닌 토성 반대편이오. 그만큼 우리를 그냥 지나칠 확률이 매우 높다는 거지. 지난 번 유로파를 지나간 것처럼 말이오."
워커가 자신의 부하들을 바라보며 냉소적인 미소를 짓자 부하들도 따라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요?"
아담은 그들의 미소에 이를 악물고 물었다.
"그래서는 내가 한 말이오."
"그럼 대령님께서는 지금 지구로 가는 적들을 그냥 통과시키고 우리끼리만 살아남자는 겁니까? 겁쟁이가 되자고요?"
"겁쟁이? 흥, 난 겁쟁이라고 하진 않았소, 중령. 당신은 우리가 겁쟁이라고 생각하시오?"
"그럼 뭡니까?"
"우린 겁쟁이가 되자는 게 아니라 살아남자는 거요."
"살아서 뭐할 겁니까? 우리의 고향인 지구가 사라질텐데."
"지구가 사라질 뿐, 우리가 사라지는 건 아니오, 중령. 유대민족이 수천 년에 걸쳐 세계를 떠돌아다녔어도 죽지 않은 것처럼 말이오."
"그것과 이 일은 좀 다르죠."
"뭐가 다르다는 거요? 일부가 살아남았고, 또 고향을 잃은 건 같지. 우린 성서에서 많이 배우고 있소."
"하지만, 이번에는 돌아갈 고향도 떠돌 세상도 없을 겁니다."
아담이 힘주어 말했다.
"그건 능력이오. 우주를 여행할 수 있는 지금 우리가 떠돌 곳은 그 어느 때보다도 넓소.  지구가 우리의 고향일진 몰라도 우리가 사는데 꼭 필요한 곳은 아니라는 거지. 그저 언젠가 떠났어야할 어머니의 품일 뿐이오."
"지구의 가족들은 어쩌고요? 그들을 모두 죽게 내버려두겠다는 겁니까?"
아담은 워커보다 모인 장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은 그들의 설득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일 것 같았다.
"중령, 이게 현실이오. 저들이 멍청이가 아니라면 어차피 두 번 같은 실수를 하진 않을 거요. 그땐 우리가 지난번처럼 운 좋게 저들을 이길 가능성은 없소."
"제가 아는 워커 대령님이 맞는지 의심스럽군요. 지난번에는 핵을 써서 끝까지 항전하셨던 분이……"
"그랬지."
워커가 발끈하며 아담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끝까지 항전했소. 하지만 그게 최선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 우린 너무 자만했어. 그 결과 난 내 가족과도 같은 전우들을 잃었소. 그게 현실이오, 중령.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 있는 법이오."
"그래서 이렇게 연합사령부와 연락을 끊고 혼자서만 살아남겠다는 겁니까? 아쉬울 때만 연락하고?"
아담이 언성을 높이자 워커가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다가와 아담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는, 마치 당장 물어뜯기라도 할 것처럼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건 사령부야. 빌어먹을 지구가 축제에 빠져있고 영웅을 찾을 때, 그때까지 우린 죽은 전우들의 시체도 다 수습하지도 못하고 매일 얼었다 녹는 죽은 전우들과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났어.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싸우라고? 나보고 다시 부하들을 죽음으로 내몰라고? 흥, 영웅? 좋아하네, 이번엔 자네가 직접 나가. 그리고 진짜 영웅이 되어보는 게 어떤가, 중령."
"그게 모두의 생각입니까?"
아담이 워커의 뒤에 선 워커의 부하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답대신 자신들과는 무관하다는 듯 안개 같은 담배연기만 내뿜고 있었다. 마치 누가 죽어나가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한 서부시대의 무법자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모습은 분명 워커의 생각에 공감하는 표정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아담의 편에는 서지 않겠다는 뜻이다. 순간 아담은 자신의 허리에 총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관제실에서 쓸만한 장비를 챙기던 종현이 놀라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성을 내고 있는 사람은 워커와 아담뿐이었지만 그 뒤로 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편 레이놀드 기장과 벅시 부기장은 총을 차고 있었다. 그러나 둘은 나서야할지 말아야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워커의 부하들은 흐트러진 모습으로 앉아있었지만 모두가 총을 차고 있었고, 수적으로도 그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오?"
워커 대령이 물었다.
"아무리 대령님이 이곳의 지휘관이라고 해도 이런 결정은 따를 수 없습니다."
이미 아담은 워커와 그의 부관들의 기세에 눌려있었다.
"날 몰아내기라도 하겠다, 이건가?"
자신감 넘치는 워커의 말에 아담은 다시 관제실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함께 온, 추락한 화물선의 기장 레이놀드와 부기장 벅시, 그리고 종현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담을 바라보는 눈빛은 제발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아니오."
아담이 힘없이 대답했다.
"현명한 선택이군, 좋아. 이 친구들에게 잠시 쉴 곳을 준비해 주게."
워커가 돌아서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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