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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천지개벽... 19

2009.02.12 01:4002.12


19.

아담이 토성으로 향하던 때, 토성은 지구로부터 빛의 속도로는 고작 98분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블루버드 호가 토성에 도착한 건 암스트롱 기지를 떠난 지 3개월하고 며칠이 더 지난 뒤였다. 그 사이 종현은 레이놀드, 벅시와 함께 남자끼리만 할 수 있는 야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무료한 시간을 나름 즐겁게 보냈다. 물론 아담도 그런 농담을 음미하며 웃긴 했지만 목성을 지나면서부터는 조용히, 마치 관찰자처럼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만큼 종현과 레이놀드, 벅시는 더 잘 어울리며 지냈다. 자동항법 장치가 토성 궤도에 접어들었다는 신호음을 낼 때까지 그랬다.
블루버드 호가 드디어 토성의 테를 따라 토성을 돌며 타이탄의 중력권으로 다가가자 제일 먼저 그들을 맞은 건 타이탄을 비추던 거대한 반사판이었다.
설치당시 12개가 설치됐던 타이탄의 반사판은 타이탄의 온도를 -180℃에서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영상 12℃까지 끌어올렸다. 그 결과 과거 지구의 원시대기형태에서 안정적이던 타이탄의 대기가 서서히 활성화되면서 인간이 대기 중에 거주할 수 있는 첫 번째 위성이 됐다. 그러나 지금은 외계인의 침입으로 12개의 반사판 중에 6개가 사라진 상태였다. 그만큼의 추위가 타이탄을 뒤덮고 있을 터였다.
레이놀드 기장이 깊게 심호흡을 한 뒤, 조종간을 밀자 블루버드 호는 미끄러지듯 타이탄의 대기로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자 창 밖에는 마치 블루버드 호를 거부하는 듯한 거센 불길이 일어나며 기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때 아담은 암스트롱 기지를 떠날 때 봤던 블루버드 호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분명 블루버드 호는 우주셔틀보다 큰 날개가 달려있었다. 그 날개가 과연 이 불길을 견뎌낼 수 있을까? 아담은 조종간을 움켜쥔 레이놀드 기장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당장 자신을 집어삼킬 듯한 창 밖의 불길을 보는 것보다 그의 모습을 보는 게 더 나았기 때문이다.
"제대로 진입한 겁니까?"
난생처음 우주선의 대기권 진입을 경험하는 종현이 불안한 듯 아담보다 앞서 물었다.
대기권 진입 시에 발생하는 마찰에 대한 교육은 받았지만 실제로 경험해보니 새삼 불안했다. 마치 태양의 불꽃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레이놀드 기장은 기체를 안정시키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느라 어금니를 꽉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불기둥이 사라지고 기체가 안정을 되찾자 종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갑자기 불어닥친 강풍에 기체가 요동치며 굉음을 냈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당장 기체가 두 쪽이 나더라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버티고 있는 게 대단했다. 종현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불안했다. 그런데 불쑥 레이놀드 기장이 아담과 종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비상착륙을 시도하겠습니다."
레이놀드의 말에 종현이 아연실색하며 소리쳤다.
"뭐라고요?"
"당장 엉덩이 붙이고 안전벨트나 메요."
레이놀드가 단호하고 소리쳤다.
창 밖으로는 온통 퍼붓는 비뿐이었다. 그러나 고열로 달궈진 기체에 수증기를 내뿜으며 금세 사라졌다. 그것만으로도 시야가 불안했다. 더구나 빛은 고사하고 하늘도 보이지 않았다. 벅시는 계기반의 수평계를 보며 동체의 수평을 잡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비상착륙이라니! 게다가 고작 자리에서 안전벨트나 메고 비상착륙을 대비하라는 말에 종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 물었다.
"비상착륙이라뇨?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는 있는 겁니까?"
"물론이오. 연료 방출!"
레이놀드가 계기반을 확인하며 짧게 대답하고는 명령했다.
"연료 방출!"
부기장 벅시가 레이놀드의 지시를 복창하며 계기반의 적색 버튼 젖혔다.
"미쳤군, 당신 무슨 짓을 하려는 거요? 설마 여기서 활강을 하겠다는 겁니까?"
종현이 벅시의 손을 잡아채려고 엉덩이를 들썩이며 소리쳤다.
"진정하고 앉아요! 호이겐스 기지의 착륙유도장치가 고장이라 어쩔 수 없이 수동으로 착륙을 시도하는 겁니다!"
레이놀드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수동? 당신 착륙할 때 접지조작은 해본 거요? 아니, 이런 젠장, 자동유도착륙 외에 지상착륙을 시도해 본 적은 있소? 빌어먹을, 밖이 지금 보이기는 해요? 관제사는? 관제사를 불러요."
종현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
"당신이잖소."
레이놀드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뭐요?"
그제야 종현은 타이탄으로 오면서 희희낙락거리던 농담을 머릿속에서 날려버리고, 왜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됐는지 잊고 있던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지난 외계인의 침입으로 파괴된 호이겐스 기지에는 살아남은 관제사가 없었다. 아니, 관제소도 없다. 모두 파괴됐다. 그렇다면, 그걸 복구할 기술병과 이후 관제할 관제사가 필요하다. 결국 두 명을 보내야한다. 그러나 기술병과 출신의 자신을 보내면 한 명으로 모든 게 가능했다. 이런 상황을 깨달은 종현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난 남들보다 몸무게가 두 배는 될 텐데, 젠장!"
그리고 아담을 한 번 돌아보고는 길길이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어떻게 좀 말려봐! 미쳤어. 다 미쳤어. 빌어먹을, 이런 날씨에 착륙유도장치도 없이 착륙이라니, 이건 미친 짓이야! 빌어먹을, 당신들은 미쳤어. 당장 기수 올려요!"
"진정해. 우린 지금 착륙 중이잖아."
아담이 조종석으로 달려드는 종현을 끌어 앉히며 말했다.
"미쳤어? 착륙유도장치가 파괴된 기지야. 활주로가 무사할 것 같아? 당장 기수를 올려야 해. 이건 자살행위야. 젠장, 이봐요, 내 말 들어요. 비상착륙은 안 돼요. 수직 이착륙을 해야한단 말입니다."
종현은 처음 관제소가 파괴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착륙할 지 묻지 않은 자신을 책망하며 미친 듯 소리쳤다.
아담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레이놀드도 언성을 높여 소리쳤다.
"400톤급 화물선이 수직 이착륙을 할 수 있을 것 같소?"
"그럼 화물을 버리기라도 해요!"
"젠장, 저 화물을 나르려고 목숨을 걸고 온 거요. 우리에게 당신들보다 저 화물이 더 중요하다고!"
"젠장, 대기관리 시스템은 나중에라도 보낼 수 있잖아요?"
종현의 말에 벅시가 소리쳤다.
"저게 얼마짜린 줄 알아요?"
종현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내 목숨보다는 쌀걸."
성난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는 종현과 소리치는 벅시의 표정에선, 지난 3개월 동안의 시답잖은 농담으로 쌓았던 그들의 우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레이놀드 기장이 말했다.
"제발 조용히 앉아있어요. 타이탄의 자동착륙유도장치는 고장이고 시계가 안 좋아서 착륙을 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어요. 그래도 CPS로 정확한 공항의 위치를 알고 있으니 진정해요. 그리고 당신들은 반드시 타이탄에 가야하는 사람들이고, 그럼 이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요? 당장 기수 올려요. 그리고 타이탄에서 유도신호를 보낼 때까지 대기권 밖에서 기다려요. 관제사가 살아있다면 이렇게 말할 거요."
벅시가 종현에게 소리쳤다.
"젠장, 이젠 늦었어요. 연료를 다 방출했습니다. 더 이상 비행할 연료는 없고, 낭비할 시간도 없어요. 우리도 지금 목숨 걸고 이 임무를 맡은 겁니다. 그러니 당장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 메고 기도나 드려요."
"아니, 잠깐만 목숨을 걸고 이 임무를 맡았다고? 결국 당신들은 처음부터 유도장치가 고장났다는 걸 알고 있었단 말이군. 아예 죽을 각오로 온 것 아니오? 하지만, 난 아니라고. 난 그저……"
종현이 따지고 들자 레이놀드가 입을 다물었다.
대신 벅시가 말했다.
"이런다고 우리가 회항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진정하세요. 우리가 밀림에 불시착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원시적인 방법으로 착륙을 시도하는데, 단지 지금 기상이 안 좋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충격에 대비하시고……"
벅시가 종현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벅시의 말에 종현은 오히려 더 불안해했다.
"빌어먹을 차라리 비상탈출을 하겠소."
종현이 좌석 밑에 있던 비상용 소형로켓배낭을 챙기며 말했다.
그러자 레이놀드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구조 신호는 어떻게 보낼 거요?"
레이놀드의 물음에 종현은 소형로켓배낭 옆에 달린 구조신호 발신기를 꺼내 보였다.
벅시가 말했다.
"지금 타이탄 기지에는 전파수신장비 자체가 없어요. 다 파괴됐으니까. 게다가 밤에는 영하 60℃까지 기온이 내려가요, 알겠어요? 처음부터 비상탈출이 가능했다면 두 분을 먼저 보내고 우리도 안전하게 당신 지시를 기다렸을 겁니다."
"아우, 이런 젠장."
결국 종현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안전띠를 메고 머리 위의 안전바를 힘껏 쥐었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옆자리의 아담은 이미 작심한 듯 입을 굳게 다물고는 머리를 무릎 사이에 묻고는 연신 숨을 몰아쉬며 긴장을 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죽을 거라면 지금 죽어도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꽉 잡아요."
부기장 벅시가 창 밖을 향한 눈을 떼지 못하고 소리치듯 말했다.
"우리 걱정은 말고, 착륙이나 잘, 젠장 정말 활주로는 비어있는 거요?"
종현이 소리쳐 물었지만 대답대신 꽝하는 굉음이 울리며 기체가 심하게 요동쳤다.
"어이쿠."
종현이 앞좌석의 상단에 머리를 처박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의 비명은 기체가 활주로 위를 미끄러지면서 내는 굉음에 잠겨버렸다. 아담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활주로 위로 기체가 끌리며 내는 날카로운 굉음에 귀를 기울였다. 행여 기체가 파손된다면 지금과는 다른 굉음이 들릴 것이다. 그 소리에 아담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굉음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조금만 참으면 될 듯했다. 이미 비상용 연료까지 모두 방출했으니 안전하게 멈추기만 한다면 화재로 폭발할 위험은 낮았다.
"젠장, 기체를 우측으로 돌려."
레이놀드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이어 엔진의 굉음이 들리더니 모든 것이 고용해졌다.
아담은 무릎 사이에 묻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리고 창 밖을 살폈다. 번개가 번쩍였다. 어렴풋이 전투기의 기체로 보이는 물체와 지상 격납고로 보이는 건물들이 보였다. 그리고 천둥소리가 들렸다.
블루버드 호는 활주로를 백여 미터 이탈했지만 다행히 푹신한 이끼들과 넝쿨들이 자란 숲의 가장자리로 미끄러져 들어가 기체는 무사할 수 있었다.
"모두 괜찮습니까?"
레이놀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젠장, 죽진 않았수."
종현이 머리를 어루만지며 다른 손으로 엄지손가락을 펴 보였다.
레이놀드는 모니터를 통해 기체의 상태를 확인했다. 우측 날개가 부러지고 없었지만, 화제는 없었다.
엔진이 꺼지고 고요해지자 기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어찌됐든 모두가 무사하자, 레이놀드는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더니 종현을 보고 껄껄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에 종현도 웃기 시작했다.

타이탄에 도착해서 처음 들이쉰 공기는 이끼냄새가 물씬 풍기고 습했다. 인공대기조성을 위한 인공강우 탓이었다.
타이탄의 인공대기관리시스템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비를 내리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내렸던 비를 보아 다시 월요일부터 공중에 살포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길 무려 10년째였다. 아직까지는 지구의 대기와 같아지진 않았지만, 한때 오렌지색 오로라로 불리던 타이탄의 대기는 점차 푸른색을 띄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담이 도착한 날은 주말이 아닌지 시간당 20mm에 달하는 강수량에 푸른 하늘을 볼 수는 없었다.
블루버드 호의 문이 열리자 종현은 제일 먼저 떨리는 손으로 라이터를 내밀었다.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조심스럽게 라이터를 켰다.
"뭐 하는 거야?"
비옷을 챙겨 입고 나오던 아담이 물었다.
"메탄이 정말 제거 됐나 해서."
처음 타이탄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을 때, 타이탄에는 액체메탄의 비가 내린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타이탄의 메탄은 오래 전에 이주를 준비하면서 타이탄에 먼저 투입된 로봇에 의해 지면에서 채취되어 모두 에너지원으로 사용돼 제거됐다. 그러지 않았다면 호이겐스 기지의 방위군은 거대한 폭탄 속에서 사는 꼴이 됐을 터였다.
종현은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아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먼저 지면에 내려섰다. 블루버드의 중력실에서 이미 타이탄의 중력에 적응되어 있었지만 평평한 대지와 낯선 풍경, 그리고 착륙시의 충격으로 현기증이 났다. 게다가 타이탄의 대기는 지금까지 숨쉬던 공기와도 달랐다. 차갑고 축축했지만 상쾌하지는 않았다. 아담은 가슴이 답답했다. 우주선에 너무 적응한 나머지 자연과 멀어진 기분이었다.
"여어, 안녕들 하쇼."
타이탄에서 아담과 종현을 마중 나온 이는 커다란 포도주 통을 연상시키는 사내였다. 그는 제법 커다란 판초우의를 뒤집어쓰고 나타났지만 그에게는 어린 조카의 우의를 뺐어 입은 듯 보였다.
"이곳 환경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요. 무리하지 하지 마시오. 하여튼 수고들 했소."
그는 겉치레로 인사를 건네고 블루버드의 기체를 살폈다.
"기체는 무사하군."
그는 떨어져나간 날개에는 관심이 없는 듯 기체를 확인하고 화물칸 안을 살폈다. 다행히 2층이 넘는 대기관리시스템의 부품은 모두 무사했다. 그제야 사내는 아담과 레이놀드를 향해 돌아서서 웃으며 말했다.
"타이탄에 올걸 환영하오. 날씨가 지랄 같지 않소?"
"허, 지랄?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이 빌어먹을 날씨에 착륙하느라고 우린 지금 죽다 살았다고요."
종현은 사람보다 화물부터 확인하는 사내의 태도에 화가 나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말했다.
"워워, 진정해요. 우리도 날씨하면 이를 가니까. 인공대기관리시스템이 고장나서 반년 째 낮에는 비, 밤에는 눈이 내리고 있소. 미칠 노릇이지, 이런 상황에서 미치지 않는 게 죽는 것보다 더 대단한 일이라니까."
"도대체 지금까지 착륙유도장치를 고치지 않고 뭘 한 겁니까?"
종현의 불평에 사내는 그제야 이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생긴 듯 잠시 입맛을 다시더니 말했다.
"뭐, 그럴 장비가 있으면 날씨부터 어떻게 했을 거요. 사실 우리도 어쩔 수 없었소. 부품도 없고 수리할 줄 아는 사람은 다 죽었고. 게다가 그 착륙유도장치가 외계인들을 다시 이곳으로 불러들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오."
"누가 그래요?"
사내는 대답대신 아랫입술을 내밀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내의 행동에 종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 외계인들을 전멸시킨 게 언젠데 아직도 외계인 타령입니까. 그럼 구호물품은 어떻게 받은 거예요?"
"내려오다 못 봤소? 잘 찾아보면 기지 상공에 기상관측용 열기구가 있소. 지구에서 타이탄의 대기를 확인하기 위해 설치한 건데 외계에서 투하하는 구호물품들은 그 열기구를 기준으로 투하하고 있지."
열기구를 이용한다는 사내의 말에 종현도 더 이상은 할말이 없다는 듯 체념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사내는 악수를 청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타이탄의 대기관리시스템의 관리자이자 호이겐스 기지의 유일한 민간인이 루이 바랭이었다.
아담이 물었다.
"그동안 보낸 구호물품 중엔 착륙유도장치가 없었던 겁니까?"
바랭은 아담이 타고 온 착륙선의 뒤로 활주로를 가리켰다.
"글쎄, 있었겠지. 하지만 그게 말이오. 다 신의 뜻, 운이오."
바랭이 어둠 속에서 보이는 울창한 숲을 가리켰다. 활주로 주변으로 찢어진 낙하산이 서너 개가 보였다. 말 그대로 운이었다.
"원시시대가 따로 없군."
종현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 통신 장비 같은 건 하나도 건지지 못한 겁니까?"
아담이 물었다.
바랭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도 요즘은 가까이 떨어지고 있소. 하여튼 한 달 전보다 많이 나아진 거요."
"한 달 전에는 어땠습니까?"
아담이 물었다.
바랭은 손을 펴고 대충 높이를 가름하더니 허리 높이에서 멈추고는 말했다.
"활주로에 이만큼 시체가 쌓여있었소."
그때 기장 레이놀드와 부기장 벅시가 배낭을 챙겨 나타났다.
"우선 안으로 들어갑시다."
바랭은 아담일행을 지붕의 반이 무너진 격납고로 안내했다.
격납고는 을씨년스러웠지만 한 쪽에 마련된 난로와 그 위에서 김을 내뿜는 커피포트가 따뜻한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한 길 높이로 쌓인 커피와 밀가루는 한겨울의 벽난로보다, 산타클로스의 선물 보따리보다 든든해 보였다.
바랭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난로에 젖은 나무를 집어넣었다. 곤장 회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종현은 자신을 향해 피어오른 연기에 놀라 몸을 빼며 어이없다는 듯 바랭을 쳐다보았지만, 바랭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돌아서 커다란 야전용 잔에 가득 커피를 따라 전쟁 후, 처음으로 타이탄을 찾은 손님들에게 한 잔씩 돌리기 시작했다.
"조종사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
아담이 커피 잔 너머로 바랭을 바라보며 물었다.
"조종사라, 전투기를 타야 조종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거의 공병이라고나 할까. 하여튼 다들 살아보겠다고 남쪽 격납고에 갔소."
"거기에 뭐하는데요?"
종현이 물었다.
"여분의 전투기 몇 대랑 100톤급 화물선이 있다더군. 그걸 꺼내서 이곳을 뜰 생각인 것 같던데."
바랭의 말에 레이놀드와 벅시가 안심한 듯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 가능한 화물선이 있다면 생각보다 빨리 타이탄을 떠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여긴……"
바랭이 말을 하다말고 구호물품의 한쪽 구석을 긁던 쥐를 향해 돌을 던졌다.
"빌어먹을 녀석,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징그러운 녀석들. 그거 아시오, 우리 인류가 저 쥐새끼들을 다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거요."
"그 중 제일 크게 키운 생쥐가 자네지."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걸어나오며 말했다.
레이놀드 기장과 벅시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며 허리의 총을 잡아 뽑으려했다.
바랭이 모두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워워, 놀라지 말아요. 여긴 인간밖엔 없으니까."
그러나 레이놀드와 벅시는 번쩍이는 번개와 등불로 군복차림의 사내를 확인하고 나서야 쥐었던 총을 놓았다.
"이분은……"
바랭이 아담에게 군복차림의 사내를 소개하려하다가 그의 날카로운 눈매에 기가 죽은 듯 입을 다물고는 눈을 피해 고개까지 돌렸다.
어둠 속에서 걸어나온 사내는 태연히 난로 옆으로 걸어왔다.
"바랭, 빌어먹을 대기관리시스템은 도대체 언제 고칠 건가?"
바랭은 어깨를 들썩거렸다.
"뭐, 나도 이런 날씨가 좋은 건 아니라고. 하지만, 자네도 알잖아, 지금까진 장비도 없고, 수리를 할 수 있는 로봇도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물의 유입량을 조금 줄이는 것뿐이라고. 하지만, 이제 부품이 왔으니 슬슬 해봐야지."
"슬슬 하겠다고?"
사내가 매섭게 바랭을 바라보았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설마 그러겠어? 그리고 혼자선 안 돼. 자네 부하들 좀 꿔져야겠어."
"자네 회사에서 일당을 지불한다면 얼마든지."
사내의 말에 바랭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런 바랭을 두고 사내는 천천히 아담과 종현을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놈들, 기껏 날씨 좀 바꿔보자고 했더니, 빌어먹을 자식들까지 보내고……. 염병할 날씨."
사내는 아담일행을 힐끗 쳐다보더니 끼고있던 너덜거리는 장갑을 벗어 성난 얼굴로 난로를 내리쳤다. 그리고 숨을 거칠게 내쉬고는 아담과 종현을 향해 돌아섰다.
"그래, 당신들 중에 누가 그 작전장교요?"
사내의 냉랭한 말에 아담과 종현이 조심스럽게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나요."
종현이 사내를 경계하며 나섰다.
그러나 사내는 눈치가 빨랐다. 사내는 아담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 우리가 보낸 데이터로 영웅이 된 기분이 어떻소?"
사내가 빈정거리며 묻자 아담은 언짢은 감정을 숨기지 않고 되물었다.
"당신이 이곳의 작전장교요?"
"그 멍청이는 이 옆 격납고에서 종일 잠만 자고 있지."
사내의 말에 바랭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오랜만에 듣는 농담이라, 미안하오. 대령."
대령이라는 말에 종현이 놀라 움찔거렸다. 커피가 잔을 흘러 넘쳤다.
"앗 뜨거, 이, 이런. 죄송합니다."
종현만큼 아담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타이탄 호이겐스 기지에서 대령이라면 기지사령관 알렌 워커뿐이었다.
종현이 쏟은 커피를 닦는 사이 아담과 레이놀드, 벅시는 자리에서 일어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워커는 난롯불을 쬐기 위해 손을 뻗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못 받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지, 편히 쉬어."
아담이 긴장해 참았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보내주신 데이터 덕분에 지구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자네 인사나 받겠다고 데이터를 보낸 건 아니야."
워커는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곧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무척 뿌듯해했다.
바랭이 격납고 밖, 번개를 맞은 나무처럼 쓰러져 있는 안테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운이 좋았지. 그 데이터를 보내자마자 안테나가 쓰러졌거든."
"이곳 상황을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아담이 잔에 커피를 따르는 워커에게 물었다.
"듣지 못했나? 젠장, 최소한 이곳 사정은 알려주고 보냈어야지. ……보이는 그대로요. 비는 저 멍청이 바랭이 대기관리시스템을 고치지 못해서 한 시간도 그치지 않고 내리지."
워커의 말에 바랭이 자기도 별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시체를 담을 시체가방도 없고, 땅을 팔 중장비도 없지. 임시방편으로 빈 격납고에 시체들을 옮겼으니 이제 격납고는 지하공동묘지가 됐고, 멍청이들이 떨어뜨리는 구호물품은 폭풍에 휘말려 사방으로 떨어지는데 이 비 때문에 지반이 약해져서 옮기기도 힘들고, 더구나 숲에 떨어진 건 나무가 울창해 지금은 포기해야하오. 발전소는 파괴됐고, 비상용 발전기의 연료는 완전히 바닥이지. 그 덕에 로봇들은 멈춰버렸고, 남은 건 비상전지들 뿐이지. 기지 재건에 쓸 건설자제는 로봇들이 없어서 그저 상자에 그대로 쌓여있고, 착륙할 때 알았겠지만 비상활주로도 이착륙장도 다 엉망이오. 레이더며 관제소도 파괴됐고 젠장, 말 그대로 여긴 원시시대나 다름없소. 투석전이나 벌이며 딱이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단 하나요, 발전용 연료. 그 연료라도 있으면 발전기라도 돌리고 일꾼 로봇들이라도 사용할 수 있을 거요. 그런데 왜, 어젯밤부터 왜 자꾸 무기와 전투기용 연료를 투하하는 거요? 물론 연료가 언젠가는 필요하겠지만 전투기에 들어가는 연료는 일반 발전시설에 들어가는 연료와 달라서, 현재로선 전혀 쓸모가 없어."
"왜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담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지금 전투기를 띄워서 뭘 어쩌자는 거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외계인 녀석들을 찾아가 한바탕 하라고 할까? 아니면 화성으로라도 피하자는 거요? 하지만, 전투기로는 화성까지 갈 수 없지. 게다가 무기까지 달고 말이오. 화물선도 마찬가지고, 목성에 우주정거장이 남아있다면 모를까. 물론 화물칸을 보조연료로 가득 채우면 화성까지는 갈 수 있지. 하지만 여기 생존자는 52명이오, 많지도 않은 수지만 화물칸에 보조연료를 채우면 52명을 태울 수 없소. 억지로 태운다고 해도 화물선의 산소공급장치의 용량이 52명을 수용하지 못하고. 그럼 내가 어째야겠소? 남은 대원들은 버리라는 거요? 아니면 뭐요? 도대체 그런 쓸모 없는……."
"쓸모 없는 건 없습니다."
아담이 당당하게 말했다.
워커는 자신의 말을 부정하는 아담의 건방진 태도가 거슬렸다. 이곳에 온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벌써부터 필요하다 아니다를 결정하려 하고 있다.
워커는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흥, 그럼 우리 영웅께서는 지금 무기와 전투기용 연료를 어디에 쓰겠다는 거요?"
"전투에 쓸 겁니다."
워커는 빈정거리며 말했다.
"전투? 전쟁은 끝났소, 영웅나리. 설마, 전쟁광은 아니시겠지?"
아담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외계인들이 다시 몰려오고 있습니다."
워커가 번개처럼 번쩍이는 눈으로 아담을 쳐다보았다.
"뭐?"
누구보다 종현이 벌떡 일어나 비명처럼 소리쳤다.
그 순간 종현은 생각했다.
'외계인들이 다시 몰려오고 있다니 그런 상황에서 초토화된 타이탄 전진기지에 떨어지다니, 외계인이 온다는 걸 알았다면, 젠장, 처음부터 이 임무를 맡고 싶지 않았어.'
"충분히 예상한 일이오."
당황하는 종현과는 달리 워커는 태연하게 말했다.
"분명 녀석들의 비행선은 태양계 밖에서 지구까지 날아갈 만큼 뛰어났지만, 분명 그들이 태양계까지 오려면 대형항모가 있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 그래서 지구와 연락하고 싶지 않았어. 녀석들이 위성부터 파괴하는 걸 보면서 전파가 놈들을 우리에게 안내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거든. 그래서 굳이 안테나를 복구하지 않은 거고. 기상 기구도 여차하면 잘라버릴 계획이었지. 중령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하지만, 그건 혼자만 살겠다는 생각 아닙니까?"
아담의 말에 워커는 코웃음치며 말했다.
"감당할 수 없는 적을 불러들이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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