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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천지개벽... 14

2009.02.09 00:2802.09


14.

이른봄의 햇살이 길게 병실을 비췄다. 그러나 빛은 가려진 커튼에 막혀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루시아는 고개를 돌리고 누워 낮은 볼륨에 잘 들리지도 않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에는 전쟁에 대한 공포를 잊은 듯 춤추며 노래하는 연예인들이 잔뜩 나오고 있었다. 어쩌면 전쟁에 대한 공포와 충격을 잊기 위해서 일지도 모른다.
"햇살이 너무 좋다."
의사는 햇살에 피부가 쉽게 탈 수 있다며 커튼을 치라고 했지만 지애는 루시아의 관심을 끌기 위해 한껏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죽을 환자처럼 누워있는 루시아의 모습이 안쓰럽고 답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시아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자꾸 그렇게 누워만 있으면 안 돼."
지애가 환기를 위해 커튼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창문을 열며 말했다.
창 밖으로 병원 앞에 마련된 작은 공원이 보였다. 공원에는 산책을 나온 이들이 각자의 애완동물을 끌거나 품에 안고 천천히 거닐고 있었다. 공원 밖에는 이번 전쟁으로 주인을 잃은 듯한 애완동물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예전처럼 그런 버려진 애완동물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추워."
"맑은 공기를 들이쉬려면 환기가 필요한 거야."
"추워, 춥다고."
루시아는 머리까지 담요를 끌어 덮으며 소리쳤다.
"아빠가 아시면 루시아한테 한소리 하시겠네, 춥다고 이불 속에만 있으려고 하니 말이야."
"상관없어, 난 아파. 아프니까 괜찮아."
루시아의 목소리에는 찾아오지 않는 아빠에 대한 원망이 서려있었다.
지애는 잠시 입술을 힘주어 다물고는 다시 작심한 듯 숨을 들이쉬고는 침대로 다가가 루시아의 담요를 힘껏 걷어냈다. 그리고 제법 군인 같은 굵은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꾸짖었다.
"기상. 해가 중천인데 뭐 하는 짓인가."
그러나 지애의 의도와는 달리 루시아는 다시 담요를 붙잡고 재빨리 누워버렸다. 그리고 담요 속에서 소리쳤다.
"싫어! 싫다고, 싫어!"
지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만히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왜 루시아가 그러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죠, 왜 이렇게 연락 한 번 없는 거죠. 이젠 전쟁도 끝났잖아요.'
지애가 고개를 떨구고 남편을 원망할 때 명랑한 목소리의 간호사가 주사기를 들고 나타났다. 정기적인 혈액검사를 위해서였다.
"안녕, 루시아."
평소 주사바늘을 싫어하는 루시아다. 지애는 지금은 때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간호사에게 이따가 채혈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었다.
"루시아, 피 뽑자."
간호사가 담요를 뒤집어쓴 루시아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미 간호사도 지애의 표정에서 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우선 루시아를 달래기 위해 등을 두드렸다. 이런 일엔 이미 이골이 난 간호사다. 그때 갑자기 루시아가 팔을 불쑥 담요 밑으로 내밀었다. 뜻밖이라는 듯 간호사도 놀란 눈으로 지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솜으로 팔을 문지른 뒤 피를 뽑았다. 그동안에도 루시아는 조용히 담요를 뒤집어쓰고 평소 때와는 달리 조용히 아픔을 참고 있었다. 마치 지금 이 정도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시위하는 듯했다.
띠리리리.
지애의 휴대폰이 울렸다.
아이와의 실랑이에 지친 지애는 이마를 짚으며 휴대폰을 받았다.
"여보세요?"
그러나 반대편에선 전화를 끊는 딸그락하는 소리만 들렸다.
"여보세요?"
지애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발신자 표시에는 번호대신 물음표만 세 개가 찍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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