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천지개벽... 13

2009.02.09 00:1602.09


13.

아담은 머리 위로 손을 올려 풀어놨던 시계를 더듬거리며 찾았다.
06시 25분.
기지내의 원자시계와 연동하게끔 만들어진 네트워크 시계는 우주에서도 지구의 그리니치 표준시(GMT)를 정확히 따르게끔 만들어져 있었다.
아담은 늦은 시간까지 계속된 복구대책 회의로 피곤했지만 오랜 군생활에 익숙해진 기상시간에 맞춰 로봇처럼 눈을 떴다. 그런 자신이 밉기도 했지만 우선은 몸을 일으켜야했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고 쉽게 떠지지 않는 눈을 비벼 뜨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중령으로 진급하면서 갖게된 개인실은 접이식 침대와 테이블만으로도 꽉 차는 작은 방이었다. 그래도 달의 지평선이 보이는 창문이 있어 좋았다. 물론 그 창문으로 지구처럼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진 않았지만 가끔은 지구를 내려다 볼 수도 있었고 지구에서는 감히 쳐다볼 수 없는 태양을 노려볼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아담은 그렇게 태양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그건 마치 자신과 태양을 동일한 존재로 인식시켰다.
문득 어두운 우주를 가로지르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우주정거장 스카이포트로 향하는 화물선이었다. 물론 지금은 달에서 싣고 갈 화물은 없었다. 달에서 채광한 광물은 곧장 정제되어 기지의 확장에 사용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광물대신 외계인의 침입으로 증원됐던 인원이 화물선을 타고 스카이포트로 귀환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우주엘리베이터를 타고 지구로 귀환하게 된다. 가끔 귀환자중에는 예전 종현처럼 우리가 짐이냐며 투덜거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건 귀환하지 못하는 기지요원들에게 미안해서하는 우스개였다.
아담은 피식 웃었다. 자신도 기지확장 작업만 끝나면 다시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화물선 뒤로 초승달 같은 지구가 나타났다.
"좋은 아침이다. 지구야."
삐익.
벽에 붙은 인터폰이 울렸다. 아담은 습관처럼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일어났네."
"예?……"
상대방이 대답도 하기 전에 아담은 버튼에서 손을 떼버렸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이 시간이면 당직사병이 간부들을 깨우기 위해 호출을 한다. 아담은 가끔 이런 호출이 밤새 무사했냐고 묻는 듯 느껴져서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때 다시 인터폰이 울렸다.
"젠장."
아담은 다시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일어났어!!"
"아……"
아담은 대답도 듣지 않고 다시 버튼에서 손을 떼버렸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매일 하던 가벼운 스트레칭도 생략하고 바지부터 챙겨 입었다. 그때 다시 인터폰이 울렸다. 그러나 아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을 나섰다.
"멍청한 녀석, 손가락이 휘었냐."
방을 나서자 아침점호를 준비하는 사병들이 바쁘게 복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비좁은 복도였다. 아담은 몸을 비틀어 그들을 피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잠시 후, 공동세면장으로 가는 복도로 돌아서자 바쁘게 움직이던 병사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하얀 복도의 바닥을 마른걸레질하고 있는 청소로봇만이 보였다. 지금이 씻기에는 적기였다. 여전히 수용인원을 2배나 초과한 암스트롱 기지에서 지금처럼 공동세면장이 한가한 때는 없었다. 그건 비단 자신만의 편의를 위한 건 아니었다. 사병들과 같은 시간에 씻기 위해 령관급 간부가 나타나는 건 사병들도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상의를 탈의하고 나타난다고 해도 얼굴에 중령이라는 도장이 박혀있는 한 말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담 바이블린 중령님."
청소로봇이 길을 내주며 말했다.
"응, 그래. 너도 좋은 아침."
"감사합니다."
청소로봇을 뒤로하고 아담은 세면장으로 들어섰다. 넓은 세면장 안에는 이미 몇몇 장교들이 가볍게 젖은 수건으로 세수를 하며 잠을 쫓고 있었다.
아담은 종현의 모습을 찾았다. 그도 늘 이 시간에 세면장을 찾았다. 그러나 오늘은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종현이 당직이라는 걸 기억해낸 건 아담이 자동면도기에 턱을 대고 원하는 면도 부위를 선택한 후 긴 한숨을 내쉬면서였다.
잠시 후, 면도가 끝나자 아담은 젖은 수건을 뽑아 얼굴을 문질렀다. 그리고 가볍게 두세 번 얼굴을 마사지하며 면도가 제대로 됐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울 옆에 달린 세척액으로 손을 씻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세면장을 나서려는데 출구 맞은 편 복도에 벽을 따라 걸린 빈 전화기 한 대가 보였다.
평소엔 지구의 가족들에게 전화를 하느라 점호시간에도 늘 붐비던 곳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빈자리가 있었다. 아담은 새삼 많은 인원이 귀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연이어 지구의 가족들이 생각났다. 가족? 왠지 가족이라는 게 낯설게 느껴졌다. 오랜 파견생활 때문이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지 벌써 석 달이나 됐다. 휴양지에서 급히 호출되어 스카이포트에서 다시 암스트롱 기지로, 기지에서 대기하면서 몇 차례 전화를 하긴 했지만, 아니 정확히 두 번이었다. 너무 적은 횟수라 아담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통화를 한 건, 외계인의 침입 전의 일이었다. 그건 벌써 한 달 전의 일이었다.
"나야, 피터. 당신 내가 누구랑 있는지 알면 깜짝 놀랄 거야, 크크크."
피터라는 젊은 사내는 마치 유명연예인이라도 만난 사람처럼 흥분해서 수화기에 대고 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 역시 상의를 벗고 있어서 계급을 알 순 없었지만 중위정도의 어린 나이로 보였다.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외모였지만 어딘지 어투가 귀에 거슬리는 사내였다.
"애는 어때? 아프다고 했잖아? ……그래? 괜찮겠지, 아이 때는 다 그렇잖아. ……사랑해, 물론이지 ……나도 발리에서 보낸 날은 잊을 수 없어. ……그래, 정말이야. 당신 생각밖에 없다고."
발리.
아담은 그 해안선이 보이던 발리의 호텔과 대사관 디너 파티에서 긴급호출을 받고, 우주엘리베이터를 타고 스카이포트에 올랐던 날이 생각났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달 남극의 암스트롱 기지행 셔틀을 타야했다. 생각해보니 화성의 제 3 이주도시에서 파견근무를 마치고 지구로 돌아온 지 두 달 만이었고, 휴가는 일주일이나 남은 상황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아담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피터가 아담을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피터가 수화기에서 귀를 떼며 물었다.
"어? 어, 물론."
아담은 잠시 뒷목을 어루만지고는 구석의 전화기로 다가가 수화기를 들었다. 화면이 켜지자 [이 전화기는 도감청이 가능하다.]는 보안경고 메시지가 떴다. 새삼 자신이 암스트롱 기지에 있다는 것만도 3급 보안사항이라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래도 처음 한 번은 그럭저럭 어디 있는지 말하지 않고도 아내와 얘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통화에선 아내의 인내도 한계에 달한 듯했다. 어디 있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마치 어딘지 알면 당장이라도 쫓아올 기세였다. 아마도 아이의 건강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듯했다. 그 때문에 아담은 잠시 망설였다. 아침부터 아내의 잔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았고 덩달아 언성을 높이고 싶지도 않았다.
아담은 수화기를 들고 잠시 입술을 비죽거리더니 각오한 듯 자신의 가슴팍을 더듬었다. 그러나 ID카드가 없었다.
"젠장."
서둘러 방을 나오다 두고 나온 듯했다. 다시 망설였다. 그러다 다시 각오한 듯 자신의 ID번호를 직접 누르기 시작했다. 전화기의 화면에 아담의 얼굴이 떴다. 구석에 있던 안면인식기가 레일을 타고 오더니 아담의 얼굴을 인식했다. 이내 수화기에서 위성간 교신 신호로 '뚜뚜'하는 신호음이 들렸다. 아담의 귀에는 먼 우주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1번 버튼을 눌렀다. 어떻게든 곧 갈 수 있다는 말은 전해주고 싶었다. 길어야 두 달?, 빠르면 한 달이었다. 잠시 뒤, 딸깍거리더니 익숙한 전화기의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전화기를 두드리며 잠시 서울은 몇 시인지 계산했다.
"여기 계셨군요."
불쑥 나타난 건장한 백인청년이 아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담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당직완장을 찬 사병이 아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가 아담보다 한 뼘은 커 보였다. 잠시 위압감을 느끼며 수화기에서 귀를 떼고 말했다.
"나 말인가? 나를 찾나?"
"네, 인식표를 두고 나가셔서 찾느라 시간 좀 걸렸습니다. 마침 세면장에 계실 것 같아서 이쪽으로 왔죠."
당직사병이 LCD가 큼지막한 위치 추적기를 보여주며 말했다.
아담의 인식코드가 찍힌 화면에는 암스트롱 기지의 내부도면과 함께 반짝이는 점이 있었다. 그 점은 아담의 방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아담은 턱을 주억거렸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신호음에 가있었다.
"그래서 날 군법에 회부할 건가?"
씁쓸한 듯 입맛을 다시며 말하는 아담에게 당직사병은 어깨를 들썩이더니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게 아니고, 참모장님이 중령님을 기다리신 지 15분이 지났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겁니다."
"이런 젠장."
아담은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환청인지 수화기 건너편에서 [여보세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앗, 여보……."
화들짝 놀란 아담이 다시 수화기를 들었을 땐 이미 전화의 신호음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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