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천지개벽... 12

2009.02.08 00:4202.08


12.

지애가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병원로비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품엔 축 늘어진 루시아가 안겨있다.
"응급실이 어디죠?"
산발이 되다시피 한 머리와 빨갛게 달아오른 지애의 표정에 병원 로비를 지키던 경비원이 덩달아 다급히 대답했다.
"왼쪽 복도 끝이요!"
지애는 루시아를 힘겹게 들어올리고는 다른 이들이 도와줄 새도 없이 곧장 응급실을 향해 달렸다.
조금 어두운 복도를 지나 환한 응급실로 들어서자 지애의 눈에는 모든 것이 아찔하게 보였다. 정신 없이 주위를 살폈다. 군데군데 바닥까지 드리워진 커튼이 시야를 가렸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그때 데스크 앞에서 차트를 보고 있던 의사와 눈이 마주쳤다. 지애는 다짜고짜 그 의사에게 루시아를 던지듯 떠 안겼다.
얼떨결에 루시아를 받아 안은 의사는 깜짝 놀랐다. 난데없이 나타나 아이를 떠 안기는 지애 때문이 아니다. 불덩이 같은 루시아의 고열 때문이었다. 당황한 의사가 곧장 루시아를 가까운 침대에 던지다 시피하며 눕혔다.
지애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오늘 아침에 안 일어나서 보니까, 애가 불덩이였어요."
"원래 무슨 병이 있었나요?"
의사가 청진기를 귀에 꽂으며 물었다.
"결핵이요. 근데 제가 요즘 바빠서 약을 며칠 챙기지 못했는데……"
지애는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우리 루시아, 루시아야."
그러나 루시아는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대답이 없었다.
"……보호자 분은 우선 나가 계세요."
의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곁에 있던 간호사가 지애를 뒤로 밀어내고는 커튼을 쳤다.
"우리 애는 괜찮겠죠?"
지애가 커튼을 치는 간호사의 손을 붙잡고 다급히 물었다.
"이러시면 환자에게 전혀 도움이 안 돼요."
간호사는 지애를 살짝 밀쳐냈다.
지애는 다른 사람들에게 떠밀려 응급실 밖으로 밀려났다.
지애의 머릿속은 온통 하얬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그저 답답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다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잠시 후, 덜컹 소리가 나더니 응급실의 문이 열렸다.
"결핵이 있다고요?"
응급실 앞에 길게 놓여진 의자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쥐어짜며 기다리던 지애에게 응급실의 의사가 다가와 물었다.
지애는 마치 고문을 받고 일어서는 죄인처럼 허리를 숙이고 힘겹게 일어섰다.
"네."
"아니, 그럼 약을 잘 챙겨주셨어야죠."
의사는 마치 엄마가 맞느냐는 듯 지애를 바라보았다.
"……."
"우선 물은 뺐으니까요. 원무과 가서 입원 수속하세요."

지애는 전쟁터에 있을 남편에게 딸의 증세가 심하다는 걸 비밀로 해야겠다고 생각할 만큼은 현명했다. 그러나 남편의 전화가 석 달이 넘게 한 통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남편이 걱정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문득 화가 치밀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전사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봤으면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살아 돌아오면 자신의 손으로 죽여버리겠다고까지 생각했다. 게다가 그런 지애의 화를 돋구는 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지애는 원무과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애써 숨을 몰아쉬며 침착하게 안내판을 확인하고 화살표를 따라 원무과의 접수대 앞에 섰다. 이른 아침이라 접수대는 한산했지만, 지애는 한참을 멍하니 기다려야했다. 병원 원무과 직원들은 전쟁이 일어나 세상이 끝장났다며 일손을 놓고 있었다.
"이봐요. 일들 안 해요?"
지애는 부글거리는 속을 진정하지 못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원무과의 직원들은 잠시 고개를 돌려 지애를 보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리고는 다시 벽에 걸린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지애가 목을 빼고 본 텔레비전 화면에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전투기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봐요, 당장 처리해줘요! 도대체 왜들이래요."
지애가 텔레비전 앞에 모인 직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차피 죽게 생겼는데 입원은 무슨 입원이요. 그냥 집에 가세요. 그리고 전쟁이 나면 이곳 병원은 군인들이 써야해요. 그럼 일반 입원환자는 무조건 퇴원해서 집으로 가야해요."
원무과 직원의 말에 지애는 접수대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우리 애는 방금 응급실에 왔어요! 그리고 전쟁에서 우리가 이기면 되는데 뭐가 걱정이죠! 빨리 우리 애 입원 수속이나 해줘요!"
지애의 성화에 원무과 직원이 마지못해 바라보던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고 지애의 카드를 받아들었다.
"환자 이름은요?"
"루시아."
쿵쿵쿵.
직인을 찍는 소리가 대지에 떨어진 포탄소리만큼 크게 들렸다.
텔레비전에서는 어디서 찍었는지 화염에 휩싸인 추락한 전투기가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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