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8.Blue Mirage

출판사에 원고를 넘기고 또 책 한 권을 받아왔다. 독자들은 번역한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책의 표지에 저자의 이름과 번역한 사람의 이름이 같은 크기로 나란히 적혀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보는 것은 작가 이름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일을 좋아한다. 사방으로 날을 세워야 하는 군중 속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한 두 번 몇몇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일을 끝낼 수 있기 때문에.

“누나!”

완이 저만치서 내게 뛰어왔다.

“…여긴 어쩐일이야?”
“집으로 전화했더니 누나 출판사 갔을 거라고 그래서. 아슬아슬했네.”

숨을 고르며 완이 웃었다.

“저녁 안 먹었겠다.”
“응, 누나. 우리 초밥먹자.”

완의 앞선 걸음을 따라 조금 떨어진 초밥집으로 들어갔다. 번듯한 일식집은 아니지만 초밥이라는 것이 절대 서민들의 음식은 아닌 것이다. 저녁시간인데도 자리가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무리하는 거 아냐? 비싸잖아.”
“오늘 방학했거든. 어제 알바 페이도 받았고. 그리고, 누나 초밥 좋아하잖아.”

완은 머쓱한 얼굴로 앉았다. 나도 그 앞에 앉았다. 그래, 하고 나는 그냥 조금 웃는다. 초밥을 좋아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신이. 내가 초밥을 싫어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이는 김말이 초밥이라든가 새우초밥을 끔찍할만큼 좋아했다. 완이 웃고 있는 걸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신이도 저 표정을 좋아했을까, 라든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들.

“PC통신을 해 볼까 해. 너도 통신한댔지?”

갑작스런 내 말에 어? 하고 완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글을 쓰고 싶어져서…. 내 글을.”

내 안에 신이가 들어온 것처럼,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남의 말처럼 어색하다.

“…신이 누나는 바다넷에 있었는데. 그거, 신이누나 단골 멘트였는데 누나가 말하니까 좀 이상하다.”
“그랬니?”

어색하게 나는 초밥 하나를 입 안에 밀어넣는다. 매운 느낌에 입안이 얼얼해진다. 완은 조금 굳은 얼굴로 덧붙였다.

“나도 바다넷 쓰거든….”

심장이 두근, 뛰어 나는 얼른 입안의 것을 삼켰다. june400이 너니? 라는 말은 물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하면, 어떻게 하려고?

“2future가 내 ID. 누나도 ID 잘 생각해서 만들어. 한 번 정하면 못 바꾸니까.”
“그렇구나. 글 읽어보고 쓰고 하려면 어떻게 하면 돼?”

완의 얼굴이 조금 굳어지며 으흠, 헛기침을 한다.

“신이 누나는 글동에 있었어. go guldong."

완은 다이어리를 펼쳐서 guldong이라고 적어 내게 건넸다. 나는 애써 웃으며 고마워, 했다. 완은 뭘…, 한다.

“누나.”
“응?”
“내가 잘못 짐작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누나가 걱정하는 일 글동 안에선 없었어.”

마음을 들킨 듯, 얼굴이 화악 달아오르는 것 같다.

“신이 누나. 그 안에선 정말 활기차 보였어. 난 그렇게 즐거워하는 누난 딴 데선 못봤어.”

나는 완에게 june400이 누구인지 물을 수 없었다. 완이 2future라는 걸 알았을 때 느꼈던 안도감도 말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난… 확신이 필요해.”

물끄러미 식탁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린다. 완의 표정이 어떤지 볼 수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난 내가 신이를 그렇게 만든거라고밖엔…”
“누나!”

완의 목소리가 흔들린다.

“…그렇지 않다는 확신이 필요해. 완아.”



BlueMirage. 푸른 신기루.

푸른. 이라는 말은 특이한 느낌을 준다. 파랑, 이라고 말하면 입안 가득 새파란 색이 맺힌 것처럼 상큼해지지만 푸른, 이라는 말은 어쩐지 슬픈 느낌이 묻어나는 것이다. 나는 바다넷에 아이디를 신청하고 컴퓨터를 껐다.

노트북을 살 때에도 굳이 모뎀을 사지 않은 건, 통신에 어떤 매력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있으려고 하는 것일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세상에는 그렇지 않아도 너무 많은 사람들과 만나야 하고, 이야기해야 하고, 소위 인간관계의 사슬은 그렇게 복잡하기만 한데.

“나경아, 안에 있니?”
“응, 엄마.”

어머니는 문을 열고 나를 쳐다보셨다.

“어디 다녀왔니?”
“응. 청랑에. 새로 글 맡아왔어.”
“번역?”
“응.”

어머니는 아주 조금, 슬픈 표정을 짓는다.

“엄마.”
“응?”
“나, 학교 갈까.”

어머니는 문밖에 서 있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겨울에 시험쳐 볼까. 괜찮은가?”
“어느 학교?”

어머니는 내 옆에 화장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어머니가 방밖에 서 있다가 방 안으로 들어오고, 또 이렇게 내 옆에 앉는 행동들이 마치 영화처럼 거리감이 느껴진다. 이것이 내 일상이 아니라는, 남의 일상을 엿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

“전문대 새로 갈까 해서.”
“…전문대?”

응, 하고 나는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딸을 두고서 어머니는 단 한번도 내게 그 선택을 만류하신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늘 괜찮은가? 하고 물었다. 어머니가 너가 하고 싶으면 해야지, 라고 답할 걸 알면서도. 그 대답을 들어야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가고 싶은 과가 있니?”
“문예창작과.”
“좋구나.”

어머니는 반갑게 웃었다. 무엇이든 너 원하는 대로 하렴, 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정말로 어머니가 원하는 게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어머니가 원하는 길을 알고 있다. 내 의견에 어머니가 저렇게 반갑게 웃은 것은, 열아홉 이래로 처음인 것 같다.

/영문과 갈거야./
/…영문과? 국문과 간다고 하지 않았니?/
/영문과가 좋아./

어머니는 그 때 니가 원한다면 그래라, 라고 했다. 돌연 부전공으로 수학을 하겠다고 했을 때도 어머니는 그랬다. 묻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뭘 했으면 좋겠는냐고, 그건 그 대답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대답을 들으면 그대로 하지 않는 나, 일부러 도망치듯이 그 길만을 피해 가고 있는 나 자신을 인정해야만 할 것 같았다.

교수님이 내게 번역 일자리를 준 것은, 내가 그 길을 가길 원해서가 아니었다. 교수님은 내가 진학을 하길 바라셨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나경은 그런 사람이다. 남들이 무언가를 기대하면 곧바로 뿌리쳐버리는 거다. 그 기대가 무너지기 전에 미리부터.

“그런데 왜 전문대냐, 4년제가 낫지 않겠어?”
“부산엔 없어, 엄마.”
“그럼 서울에 가면 되잖아.”
“나 쫓아내고 싶어, 엄만?”

그러면서 나는 피식, 웃었다. 어머니는 당황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곤, 농담인 걸 알고 얼굴을 폈다. 문득, 스치는 생각. 왜 나는 여기 남으려는 걸까. 바람에 습기가 묻어있는 이 도시. 벌써 독립했어도 좋을 스물 일곱의 나이에.




그 다음날 바다넷에서는 실명확인차 전화를 걸어왔다. 이용요금을 자동이체로 신청한 덕분에 바로 사용이 가능하다는 말과 함께였다. 그러나 사용법을 알 리가 없는 내가 아는 건 go guldong하면 어쩌면 여신이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뿐이었다. 들어가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너무나 막막했다. 하루가 더 지나고 바다넷에서 매뉴얼이 도착했다. 나는 꼬박 몇시간 동안 그걸 읽고 또 읽었다.

신이도 이 얄팍한 책을 몇 번이고 읽었을 것이다.
책읽는 것이 느린 아이였으니까.

아이.

스물일곱인 사람을 아이라고 부르는 건 무리가 있을텐데도, 신이를 아이라고 부르는 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가 사실은 나보다 한 살이 많은, 아프지 않았더라면 내 선배로 있었을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더라도.

바다넷은 인터넷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인터넷 사용이 자유롭습니다.
014*7망을 사용해서 전화요금이 저렴합니다.

볼드체로 인쇄된 글씨들은 잊을 만 하면 번갈아가며 다시 튀어나왔다. 책을 덮었을 때엔 저 세 문장만이 머리에 남아있을 지경이었다. 나는 책을 옆에 두고서 책에 쓰여진 대로 바다넷에 다시 접속했다.

이용자번호 : BlueMirage
비밀번호 : june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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