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7.첫번째 목소리

한 장 한 장을 떼어내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종이를 고정시켜 둔 것은 다이어리의 스케쥴 스티커 여섯장. 위 둘 아래 둘 옆 둘. 고정시키기엔 무리가 없지만 떼려고 하면 금새 뜯어져 나갈 정도의 접착력이다. 떼어 내고 보니 한 장이 아니라 석 장이었다. 한 장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다 다시 한 면을 깔고 한 식으로 세 장을 그렇게 붙여둔 것이다.

“어떻게 이럴 생각을 한 거야. 내가 보지 않았으면 어쩌려고.”

신이가 옆에 있기라도 한 것 처럼 나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알고 있어. 발견하지 못할 사람에겐 알려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겠지. 너는 언제나 그래. 사실은 알아주길 바라면서, 그렇게 많은 것들을 내게 말했으면서 너는 정작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어. 니가 알아주길 바라는 것들은 아무 것도. 그러면서 알아달라고 늘 호소했지. 그 눈물젖은 듯 촉촉한 눈으로.

다이어리 속지들을 하나씩 낡은 새 링에 새로 끼웠다. 몇 년 전 산 잡지에서 준 다이어리를 속지만 빼서 쓰곤 링 부분은 놔 둔 것이었다. 빼낸 속지들을 대충 보니 한 권 분량까지는 안되어도 반 권 분량은 넘어 보였다. 주간계획을 날짜대로 간추리고 프리노트를 날짜대로 간추려서 정리해 놓자, 다이어리 한 권에서 전화번호니 메모지니 하는 부분만 빠지고 내용 부분만 그렇게 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빈 종이가 있는 것은 혹시라도 높이가 다를까봐 붙인 것인 듯 했다. 날짜는 작년 초 부터였다. 첫장의 주간계획에 쓰여진 것은 두 줄. 수요일과 토요일에 한 줄씩.

‘글사랑 가입신청. 글 쓰고 싶어.’
‘글사랑 가입. june400 만났다. 딴 사람 같다.’

june400.

/어제 그 사람이 세이를 걸어서 말야./

여신이가 갑자기 PC통신에 관한 이야기를 내게 하기 시작한 게, 그러고 보니 바로 이맘 때쯤이었다.

고등학교 때 여신이는 첫 만남 이후로 내게 별로 말을 걸지 않았다. 새하얀 얼굴의 신이는 나와 함께 체육 시간에 교실을 지켰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신이는 그냥 창밖을 내다보거나 했다. 신이를 처음 만난 사월에서 늦봄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오월이 될 때쯤에는 난 체육시간에 창밖을 보고 있는 그 애를 더 이상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두툼한 대학노트 빽빽히 나는 글을 쓰고 있었다. 소설이라거나 수필이라거나 하는 이름을 붙이기조차 민망한 소녀시절의 치기. 0.5밀리 볼펜 한 자루와 그 노트 한권이면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빛 들어와. 커텐 내려줘.”

내가 먼저 신이에게 말을 걸었다. 신이가 하얀 커튼을 걷은 채로 창 밖을 보고 있어서, 직사광선이 내 책상에 그대로 비췄기 때문이었다. 여신이는 화들짝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바람에 잡은 커튼자락을 놓쳐, 내 목표는 달성되었지만.

“…그건 뭐 쓰는 거야?”
“이거? 그냥 낙서.”
“…….”

여신이는 머뭇거리며 나를 쳐다보고, 또 창쪽을 한 번 쳐다보고는 내게로 다가왔다.

“항상 쓰고 있잖아. 시간 빌 때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그 애가 유리창을 통해서 나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볼래?”

한참만에 내가 물었다. 신이는 계속 내 앞에 서 있다가 환하게 웃었다. 세상에는 저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도 있구나. 내가 내민 노트를 여신이는 조심스럽게 받아서 내 옆에 앉았다.

“이거 니가 쓰는 거야? 정말?”
“그래.”

여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고는 다시 노트를 읽었다. 그 때 쓰고 있던 글의 내용은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아마 당시의 내 상황으로 봐서 그것은 SF거나 학원물 만화스토리 비슷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어쨌든 한참동안 신이가 너무나 열심히 그걸 읽는 바람에 난 멀뚱멀뚱 벽에 걸린 시계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거, 앞에 있는 것도 보여줄 수 있어?”
“…왜?”
“좋으니까. 이거 너무 좋아, 정말이야.”

신이는 얼굴 가득 홍조를 띄고, 노트가 마치 아주 소중한 보물인 듯이 꼭 끌어안은 채 내게 말했다.

“나경아, 너 정말 대단해. 나 앞의 것 꼭 보여줘, 응?”

뒤늦게 깨달았지만, 나는 그렇게 빽빽하게 대학노트를 채워놓았던 그런 글들을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왜 신이에게 노트를 보여 주었는지, 왜 그 다음날 나는 정말로 그 전의 이야기들이 적힌 노트를 여신이에게 건네 주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흉내를 내기라도 하듯이, 여신이는 작은 수첩에 매일 무언가를 적었다. 그 수첩이 점차 큰 것으로 바뀌고 대학노트가 되었을 때 우리는 대학생이 되었다.

내가 글을 쓰는 걸, 신이는 좋아했었다.
신이가 글을 쓰는 걸, 나는 좋아했었나?

가끔씩 신이는 내게 노트를 내밀었다. 숨이 막힐 것 같던 그 애의 글들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것은, 그래. 신경숙의 글체를 닮았었다. 부담스러울만큼 생생한 감정들에 휘말려서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 애의 글은 그랬었다.

“어때?”
“네 글답다.”

헤에- 하고 신이는 웃었다. 늘 그 화사한 웃음 끝에,

“언제나 같은 말이야, 나경인.”

했었다. 다른 말을 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느낀 것들에 대해서. 네 글은 감정이 너무나 넘쳐서 나는 어렵다, 라고. 네 글은 신경숙의 글을 닮았다, 라고. 그러한 것들, 말해줄 수 있었을텐데도 말하지 않았다.

/하루키 좋아해?/
/무라카미 하루키? 아니, 난 싫어. 그 사람 글./
/응, 나도 싫어./

반가워하던 신이. 그 애가 글을 쓰는 게 난 내 흉내내기라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읽는 작법책들을 죄다 사서 같이 읽는 신이에게 질렸을지도 모른다. 글이 쓰고 싶어서, 신이는 PC통신을 시작한 거라 한다. 거기서 june400을 만났다 한다. june400이 누구지? 그게 누군지 알면, 나는 이 답답증을 벗어낼 수 있을 것도 같다.



마음이 뒤숭숭해 지는 바람에 나는 부엌으로 나왔다. 찬장에서 분쇄기와 커피 원두를 꺼낸다. 1잔을 위해서 내가 갈아내는 원두는 수북히 1티스푼. 롯데 백화점에서 사온 모카가 손도 대지 않은 상태라는 걸 문득 기억해냈다. 무슨 생각으로 모카를 사 온 것이람.

나는 미식가가 아니다. 단 것을 싫어하지만 초콜렛은 좋아하고, 하지만 초콜렛을 좀 많이 먹었다 하면 코피가 나는 특이체질이다. 귤쨈이나 복숭아쨈 같은, 내 어머니 외에는 그리 만드는 사람도 없는 특이한 쨈을 얄팍하게 바게트에 발라 먹는 것을 좋아한다. 어머니가 만든, 가다랑어 국물에 끓여낸 어묵. 국물없이 담아내는 어머니의 오향장육. 고등어를 통째 갈아 만든 어머니의 피시볼. 나는 어머니의 음식을 좋아했다. 그리고, 신이도 그랬다.

드립퍼 위에 거름종이를 깔고 막 갈아낸 원두를 넣는다. 모카의 향은 진하다. 끓기 시작한 물로 유리서버를 데웠다가 물을 비우고, 서버 위에 드립퍼를 놓는다. 물이 다시 끓으면 그 때, 주전자를 다른 주전자로 옮긴다. 주전자의 밑부분에서부터 가느다란 주둥이가 곡선으로 일정한 굵기로 휘어져 있는 긴 주전자는 물을 끓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주전자를 충분히 그러나 너무 높지 않게 들고 물을 드립퍼 위로 떨군다. 뜨거운 물을 받은 원두는 조금 부풀어 소복하게 일어오른다. 잠시 후 새로 주전자에서 뜨거운 물이 원두 위로 떨어질 때, 바닥으로 커피 물이 또옥 또옥 떨어지기 시작한다. 물은 언제나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게 서너번으로 나누어서, 서버에 짙은 갈색의 커피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 커피가 나올지 예상할 수 있다.

/난 나경이 커피가 좋아./
/위산과다한텐 커피 안 줘./
/하지만 한 잔쯤은 괜찮은걸./

자메이카의 원두를 앞에 두고 그 애는 참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였었다. 날 찾아서 이 집으로 들어왔던 첫 아이. 어머니는 그래서인지 신이를 무척 좋아하셨다. 아홉시건 열시건 신이에겐 더운밥을 지어 먹여야만 하실 만큼. 어머니의 밥상 앞에서 신이는 환하게 기쁜 웃음을 지어 보일 줄 알았다. 때로는 그 두사람이 훨씬 더 모녀간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들곤 할 정도로.

‘내가 치울테니 들어가서 쉬어라.’는 어머니 말씀에 신이는 네, 하고 대답했었다. 그러나 그 둘 모두 어머니가 방에 들어가고 얼마 후 신이가 설거지를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신이와 마실 커피를 갈고, 물을 끓이고 하리라는 것도. 신이가 다시 의자로 돌아가는 것은 내가 물을 끓이기 시작하는 때다. 내가 유리서버와 커피잔을 쟁반에 들고 식탁으로 오면 신이는 어머니에게 그랬듯이 환하게 웃으며 일어나 쟁반을 받아든다. 내가 괜찮다 라고 말해도, 서버를 들고 커피를 따르는 것 외엔 신이는 내게 할 일을 주지 않았다. 알고 있었을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여신이가 어떨 때는 오싹하리만큼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었다는 걸.

/세상에 겁먹지 말아라. 세상에 너는 하나 뿐이야. 두려워하지 마. 그래도 두려우면 주먹을 쥐어라. 세상을 노려보는 거야. …알겠니, 나경아?/

문득문득 멀리서 이런 음성들이 떠오른다. 누구의 음성인지도, 언제 들은 말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목소리들이.

머리카락이 후두둑 날려 시야를 가렸다. 이 고층아파트에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은 때로 사람들을 화들짝 깨워놓곤 한다. 내 앞에 놓인 서버에 커피가 다 걸러진지 오래였다. 주전자에 남은 더운물로 잔을 데우고 커피를 잔에 붓는다. 무심결에 데운 잔이 여신이가 좋아하는 머그컵이었다. 모양은 지극히 평범하지만 꽃문양이 섬세한. 그 잔에 쓰여진 글씨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june" …june400.

팩스가 울리는 소리가 났다. 난 컵을 든 채 방으로 와 팩스가 뱉아내는 종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출판사에서 온 거다.

「 이나경씨. 내일 5시까지 최종 원고를 넣어주셔야 한답니다. 평소엔 오늘쯤 들어올텐데 혹 잊으셨나 해서 연락드립니다. 전화가 안되는군요. 괜찮으시면 회사에 한 번 들러주십시오. 부탁드릴 원고가 있는데 직접 보시고 결정하셨으면 합니다…」

어떻게 알아내야 하는가. june400이 어디에 있는 ID인지 어떻게 알아서. 신이는 내게 그 통신사 이름을 알려 주었었나? 아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문득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나는 정말로 june400이라는 사람이 ‘그들’ 중의 하나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구나. 무심히 커피를 들이키다 쓴 맛이 울컥 넘어온다. 무슨 생각으로, 모카를 사 버렸을까. 자학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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