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아담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변해있었다.
병실은 텅 비어있었다. 마치 다른 이들의 존재를 잊게 만들려는 듯 침대조차 하나씩 치워버렸다.
텔레비전의 오징어 외계인은 전 우주의 평화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아담에게는 지난 1, 2차 침입 때와 같은 오징어 외계인이었다. 외계인, 그들이 자신과 동료들을 어떻게 했는지 아담은 잘 알고 있었다. 구토와 한 움큼씩 빠지는 머리카락. 그 자신이 그 증거였다. 분노로 이를 갈고 싶었지만 치아가 빠질까봐 그럴 수도 없었다. 눈물이 흘렀다. 타이탄에서 죽은 워커 대령과 이제 사라지고 없지만 우스갯소리를 잘하던 종현, 아무 것도 모르고 타이탄을 갔던 레이놀드와 벅시가 생각났다. 그리고 워커의 아담과 이브였던 안나와 제임스 스콧, 그리고 빛을 보지 못하고 죽은 안나의 아이까지. 그들이 죽은 이유는 단지 하나, 피에 굶주린 외계인 때문이었다.
'그 빌어먹을 전쟁만 없었다면.'
그런데 이제 와서 그들과 평화를 외치다니 그건 이미 죽은 자들에 대한 배신이었다. 하늘이 두 쪽이 나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두 쪽이 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어제의 적과, 그것도 전 인류의 적이었던 그들과 평화를 외치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눈이 흐려졌다. 손을 뻗어 물병을 집어들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물을 끼얹었다. 검은 선글라스에 부딪혀 물이 흘러내렸다. 물은 그대로 베개와 시트를 적셨다.
이제 그 자신이 외계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른 얼굴에 울긋불긋한 피부, 하얀 환자복, 빛을 막기 위해 쓴 검은 선글라스. 그게 지금 자신의 모습이었다.
"젠장."
거칠게 선글라스를 벗어 집어던졌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검은 우주를 향해난 창문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흐릿해진 초점이 잃어 가는 시력을 말해주는 듯했다. 이대로 또 하루를 보낸다면 영영 폐인이 될 것만 같았다. 무력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을 비웃고있을 외계인을 떠올렸다. 도움이 필요했다.
레이.
아담은 레이라면 자신을 도와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물론 그녀는 원하지는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