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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천지개벽... 42

2009.03.05 01:5403.05


42.

아담은 힘겨운 몸짓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신이 혼미했다. 진정제를 너무 많이 투여한 듯했다. 미치지 않고선 힘든 삶이다. 아담은 여전히 하얀 병실에 있었다.
옆 침대의 레이놀드는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단지 그의 머리맡에 걸린 모니터가 그가 아직 살아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건너편 침대에는 바랭과 벅시가 그저 눈만 깜빡이며 누워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살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난 비계가 많아 방사능이 깊이 침투하지 못하지."
갑자기 바랭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잠겨있었다. 그의 몸은 전자렌지의 열에 녹아 내린 치즈 같았다.
"젠장, 놈들이 우리를 죽이고 있어요."
벅시 역시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준장님은 별이라고 잘 해주나봐요."
벅시는 침대에 누운 채 눈을 내리깔고 아담을 바라보았다.
아담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농담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정말 농담인지, 아닌지 벅시의 표정을 봐서는 도무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농담이라면 입가에 작은 미소라도 지었으련만 말라버린 입술은 전혀 움직일 기미가 없어 보였다.
"글쎄."
기자회견이 있던 그 날을 빼고, 석 달 동안 무균실에서 전문적인 방사능오염 치료가 시작됐지만 상태는 아무도 호전되지 않았다. 더구나 종현은 중환자실로 옮겨진 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그건 안나와 제임스도 마찬가지였다. 스카이포트에 도착한 뒤 그들은 부부라는 이유로 특별히 함께 병실을 사용했지만 그들의 모습을 못 본지 두 달이 넘었다.
"어제, 안나의 비명소리를 들었대요."
"……"
아담은 고개를 돌려 벅시를 바라보았다.
"바랭이요."
벅시는 알아서 대답했다.
"그리고 의사들이 작은 상자를 천으로 덮어 내갔다더군요. 그게 뭐 같으세요?"
아담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로파를 지나던 날, 임신했다던 안나의 말이 생각났다.
"종현 대령님도 죽었대요. 그 얘기 들으셨어요?"
아담은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놈이 우리가 죽길 원한대요."
"……"
"자기 종족을 죽였다고 우리가 죽길 원한대요. 그래서 의사들이 우리를 치료하지 않는대요. 게다가 우리 가족들에겐 이미 전사자 통보를 했대요."
"누가 그런 소리를 해? 콜록콜록."
전사자 통보라는 말에 아담은 발끈하며 물었다. 그러나 그의 분노는 기침과 함께 감춰졌다.
"바랭이요."
벅시는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멍청이, 자넨 바랭의 말을 믿나? 콜록콜록."
아담이 기침을 해댔다. 전보다 심해졌다. 말할 때마다 기침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콜록콜록, 어떻게 날이 갈수록 우리 증세가 나빠질 수 있죠? 콜록콜록."
아담은 대답대신 고개를 돌려 복도를 향해 난 창을 내다보았다. 그 간호사와 의사들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있었다. 아담은 침대 아래 있는 리모콘을 집어들었다. 아령처럼 묵직하게 느껴졌다. 간신히 텔레비전을 켰다. 아름다운 해변에서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는 아리따운 비키니 아가씨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러나 비키니 아가씨의 모습을 보기 위해 간호사와 의사들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있을 리가 없다. 아담은 천천히 채널을 돌렸다.

- 오늘 기공식에는 달란씨가 참석해 자리를 빛냈습니다. 이로써 세계적으로 300개의 지하도시가 건설되게 되어, 40%의 인류가 우주의 종말에도 대비할 수 있는 주거공간을 갖게 됐습니다.

"지하도시라니, 빌어먹을 오징어가 콜록콜록, 우리 인간을 두더지로 만들겠다는 건가. 콜록콜록."
바랭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담은 멍한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러나 눈빛만은 빛나고 있었다.
"놈들이 우릴 통조림으로 만들고 있어요. 그쵸?"
벅시가 힘겹게 고개를 들고 말했다.
"시간을 벌겠다더니 시간만 줬어요, 그쵸?"
"그래."
아담은 힘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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