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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천지개벽... 41

2009.03.04 01:1503.04


41.

지애는 세면대 위의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반년동안 루시아를 돌보며 병원에서 보낸 시간의 흔적이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잠시 쓰러져 쉬고 싶었다.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정부의 명령은 선택이 아닌 의무였다. 전후 피해를 복구한다는 미명 하에 선택의 자유와 개인의 사정은 없었다. 결국 아픈 딸을 혼자 남겨두고 남의 아이들을 돌봐야하는 지애는 마치 전쟁터로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문득 아직도 부대에 있을 남편의 심정이 이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실로 들어서자 평소와 달리 몸을 허리를 곧추세우고 텔레비전을 바라보는 루시아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 딸의 모습에 지애는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루시아를 불렀다.
"루시아?"
지애의 목소리에 루시아는 더 반가운 얼굴로 텔레비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엄마, 저기, 저기 아빠가 텔레비전에 나왔어."
지애는 놀라 뛰어들었다. 그리고 루시아가 가리킨 텔레비전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화면은 이미 마이크를 든 기자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 대사의 방문으로 그동안 요원했던 평화의 길이 열린 듯……
"에이, 지나갔다."
루시아는 아쉬운 듯 입술을 한발이나 내밀며 투덜거렸다.
루시아는 아빠의 모습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활기차 보였다.
지애는 잠시 남편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거의 반년이 넘게 목소리조차 듣지 못한 남편의 얼굴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가끔 보던 화장대 위의 사진도 루시아를 입원시키고, 병원에서 출퇴근을 하면서 더는 볼 수 없었다. 결국 기억 속의 남편은 그저 아련한 느낌으로 남아있었다. 그건 단지 시간의 탓만은 아니었다. 오랜 병원 생활로 지친 지애의 기억 속에 그 이전의 생활은 모두 아련해졌다. 문득 그런 남편의 얼굴을 루시아가 어떻게 기억하고나 있는지 의아해졌다.
"정말 아빠였어?"
"맞아, 내가 아빠 얼굴도 모를까봐."
지애와 달리 루시아는 확신에 차있었다.
"어, 또 나온다."
지애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텔레비전을 보았다. 스치듯 남편의 얼굴이 지나갔다. 그는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왠지 낯선 모습이었다.
"뭐해?"
멍하니 텔레비전을 바라보는 지애에게 루시아가 물었다.
"어, 아니야, 루시아. 엄마 일하고 올게. 그 동안 간호사 언니 말 잘 듣고, 약 잘 먹어야 한다."
환하게 웃던 루시아가 갑자기 대답도 없이 돌아누웠다.
"루시아, 왜 또 그래?"
병실을 나서려던 지애가 걸음을 돌려 다시 루시아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빠는 텔레비전에도 나오면서 나한테 연락도 안 하잖아."
"바빠서 그러시잖아."
"몰라."
"루시아, 아빠 전화 오면 엄마가 막 혼낼게. 그럼 됐지?"
"……"
지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초침이 재촉하듯 달리고 있었다.
"루시아, 이럼 엄마 못 가."
"그럼 가지마."
루시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루시아, ……엄마, 이제 가야해. 엄마 일하고 올게. 간호사 언니 말 잘 듣고, 약 잘 먹어야 한다. 엄마, 루시아 믿는다. 알았지?"
"몰라."
지애는 한숨을 쉬고 병실을 나섰다.
서둘러야했다. 파괴된 도로와 철로 때문에 출근전쟁은 더 심해졌다. 군인들의 전쟁은 끝났을지 몰라도 민간인들의 전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지애는 서둘려 걸음을 옮겼다. 달리듯 병원의 복도를 걸어갔다. 구두의 굽 소리가 거리는 딸깍딸깍 들렸다.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 막 문이 닫히고 있었다. 지애는 재빨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다시 열리자 안에 타고 있던 환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미안합니다."
지애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옷매무새를 고쳤다.
삐리리리.
전화벨이 울렸다.
지애는 당황한 손으로 서둘러 가방에서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여보세요?"
- 나야.
"……"
지애는 당황한 나머지 말을 잇지 못했다.
- 여보세요?
"응?"
- 나야.
갑자기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응."
- 잘 지냈어?
"응."
딩동.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러나 지애는 멍하니 문 앞에 서있었다. 뒤에 사람들이 지애를 밀쳐내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지애를 힐끗 쳐다보았다.
- 루시아는 어때?
다시 문이 닫히자 엘리베이터에는 지애만이 남았다.
"지금 루시아의 안부를 묻는 거예요?"
지애는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 왜?
"정말 왜 그러는지 몰라서 묻는 거예요?"
- 그럼 누구의 안부를 묻지?
수화기 건너편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됐어요. 근데 어제 의사가 그러는데 애한테 신약을 쓰든가 아니면 수술을 해야한대, 또 아니면 맞춤형 치료를 하던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 글쎄. 약이 낫지 않을까?
"그렇겠지?"
- …… 어, 미안해, 끊어야겠어. 미안해, 사랑해.
지애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수화기에선 뚜뚜 하는 신호음이 둘렸다.
"사랑해요, 피터."
지애는 나직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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