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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천지개벽... 39

2009.02.28 01:3602.28


39.

아담과 그 일행이 옮겨진 곳은 하얀 침대와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병실이었다.
병실에는 다섯 개의 하얀 침대가 놓여있었다. 각 침대에는 주인이 이름과 그 옆에 안정이 필요하다는 안내판이 걸려있었지만 침대는 텅 비어있었다. 그리고 정작 침대의 주인들은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었다.
아담과 종현은 나란히 링거대를 세워놓고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로 레이놀드와 벅시가 퀭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 지금 우리 셔틀이 서서히 다가가 외계인의 우주선과 도킹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흥분한 기자의 목소리와는 반대로 셔틀은 천천히 외계인의 우주선과 도킹을 시도하고 있었다.
스튜디오의 앵커는 그 사이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지금까지 상황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8월 17일, GMT 18시 33분에 인류에게 보내는 외계인의 메시지를 수신한 우주연합방위군은 즉각 대책회의를 갖고 지난 8월 20일 18시 정각에 외계인에게 회신을 보내 화성 위성 데이모스에서 오늘 GMT시각 9월 14일 18시 정각에 접촉을 시도한다고 통보했습니다. 그리고 현재시간 9월 14일 18시 5분, 외계인 우주선과 도킹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저 오징어들을 왜 만나겠다는 건지, 콜록콜록. 이미 지긋지긋하게 봤을 텐데, 뭐가 좋다고 저렇게들 호들갑이지."
바랭이 심드렁한 얼굴로 간간이 힘겹게 기침을 토해내며 말했다.
"놈들이 항복을 하러 큼, 왔을지도 모른다잖아요. 큼큼."
벅시가 답답한 듯 말했다.
"항복? 웃기는군. 놈들은 우리를 잡아먹으러 온 녀석들이야. 콜록콜록.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자네 설마 화성에서 우리가 시체하나 찾지 못한 걸 잊은 건 아니겠지? 놈들은 우리를 언제든 잡아먹을 수 있는, 콜록. 괴물들이라고. 빌어먹을, 양치기에게 늑대가 항복한다면 그걸 어느 놈이 믿어."
"그래, 바랭의 말이 맞아, 놈들은 우리를 식량으로 쓰고 있어. 그런데 항복이라니 이해할 수가 없군. 사자가 가젤에게 머리를 숙이는 격이지."
종현이 바랭의 말에 동조하며 말했다.
"뭔가 다른 게 있겠죠."
"다른 거라니?"
벅시의 말에 레이놀드가 물었다.
"그러니까 뭐, 새로운 식량을 구했거나. 아니면, 하여튼 뭐 그런……"
"흥, 이런 건 어때? 놈들한테 시체를 주는 거야. 시체를 녀석들 식량으로 재활용하는 거지. 매장할 필요도 없고, 화장할 필요도 없고. 완벽한 친환경적 처리지. 좋잖아?"
종현이 빈정거리며 말했다.
"좀 콜록, 조용히 해봐. 콜록콜록."
아담이 팔을 휘둘러 종현의 입을 막았다.
텔레비전에선 외계인의 우주선과 우주연합군의 우주선이 도킹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입술을 맞댄 파리처럼 보였다.
"우웩, 켁켁. 빌어먹을."
종현이 토악질을 해댔다. 그러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지긋지긋하게 보아온 모습이었다.
텔레비전에선 아나운서의 설명이 계속 됐다.

- 지금 여러분은 우주연합사령부에서 제공하는 화면을 보고 계십니다. 잠시 후, 아, 네. 막 도킹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외계인과 인간의 첫 도킹입니다. 도킹은 현지시각 18시 10분 정각에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현재 외계인과의 접촉이 이뤄졌다고 합니다. …… 어,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고 계신 영상은 우주연합사령부에서 제공하는 화면으로 화성까지의 거리와 위성을 통해 중계되는 관계로 약 3분 32초의 시차가 있습니다. ……

"갸악, 퉤퉤, 웃기는군. 사령부에서 사전 검열을 하는 거야."
종현이 입안을 헹구며 말했다.
"지금 화성과의 거리는 가장 가까운 때야 2분대면 족하다고, 그런데 3분 32초라니, 1분이 넘게 차이가 나잖아, 콜록콜록."

- 아, 지금 외계인과 도킹 스테이션에서 만나는 장면이 오, 이런 오, 맙소사. 그 외계인입니다. 지난 5월에 지구를 공격해왔던 그 외계인의 모습입니다. 오, 맙소사. 정말 끔찍, 아니, 좀 다릅니다. 뚱뚱한 오징어, 문어처럼 생겼습니다. ……어, 네. 지금 우주연합사령부의 발표에 따르면 외계인은 우리 인류와 평화협정을 채결하고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면서 협력하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달해 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편 우리측 대표인 레이 우주정거장 참모장은 ……

"뭐야, 레이가 우주정거장의 참모장이 됐다고? 콜록콜록, 빌어먹을."
종현이 흥분한 얼굴로 아담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아니, 녀석이 뭘 했다고 참모장이야. 콜록콜록, 빌어먹을. 놈들을 막아낸 건 우리라고. 안 그래? 레이가 한 일이라고는 고작 무전으로 수다떤 게 전분데, 콜록콜록. 저런 녀석이 무슨 참모장이야."
"그만해. 흥분하면 안 좋아. 기침이 계속 나오잖아."
아담은 차분한 목소리로 다독거렸지만 흥분한 종현은 계속 떠들었다.
"내가 흥분 안 하게 생겼어? 콜록, 저런 녀석이 참모장이 됐는데, 빌어먹을 녀석. 난 처음부터 녀석이 마음에 안 들었어. 너무 정치적이었잖아. 분명 아니 어쩌면 위에선 자네 공을 모르는 게 아닐까? 콜록콜록."
"종현아, 이제 그만 해! 콜록콜록"
아담이 결국 버럭 소리치고 기침을 해대자 종현도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휠체어에 앉았다.
"그래, 여기서 백날 떠들어봤자 무슨 소용이야, 젠장."
"그런데 저 놈 우리가 화성에서 봤던 놈이랑 좀 다르죠?"
벅시가 화면에 나온 외계인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머리부분이 더 크고, 몸통은 작아 보이는군. 거의 몸과 머리가 1대 1이야."
레이놀드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만큼 뇌가 크고 무게가 나간다면 지능이 얼마나 될지, 머리의 크기로만 보아서는 인간의 뇌보다 적어도 5배는 클듯했다.
"정말 웃기지 않아요? 머리 위에 몸통을 짊어지고 다니는 거요."
벅시의 말에 종현이 키득키득 웃다가 다시 기침이 났다.

- 아, 지금 우주연합사령부와 외계인간에 조약이 체결됐다고 합니다. 조약의 내용은 현재, 네, 알려진 주요내용은 현재 평화협정을 채결하고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면서 인류의 보존을 위해 힘쓴다는 ……

"왜 아주 우릴 가축처럼 기르겠다 이건가, 젠장."
바랭이 빈정거렸다.
그때 병실의 문이 열리며 무균복을 입은 은발의 사내가 들어섰다.
아담은 낯익은 그의 얼굴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랜만이군, 아담. 타이탄으로 자넬 보내고 처음이지?"
위스본드였다.
위스본드 소장, 아니 이제 그는 중장이었다.
아담이 몸을 바로 세우고 힘겹게 다리를 모아 거수경례를 했다.
"충, 콜록콜록."
아담의 기침을 하며 허리를 숙이자 위스본드가 다가와 아담을 부축했다.
"무리하지 말게."
"죄송합니다."
위스본드는 병실에 있는 사람들을 천천히 돌아보고는 다시 아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 몸은 어떤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아담의 말에 바랭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좋아진 거 좋아하네."
"저 친구는 누군가?"
위스본드는 빈정거리는 바랭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물었다.
"타이탄의 대기관리시스템을 관리하던 루이 바랭입니다."
"민간인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렇군."
위스본드는 다시 차가운 시선으로 바랭을 바라보고는 아담을 침대에 걸터앉혔다. 그리고 바랭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돌아서 아담과 종현, 레이놀드와 벅시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자네들의 영웅적인 희생이 오늘을 있게 했네. 무슨 뜻인지 알겠나?"
"전쟁이 끝난 겁니까? 콜록."
종현이 물었다.
"그렇네."
아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화 좋죠. 놈들의 항복 조건은 뭔가요?"
"항복? 이건 항복이 아니라, 평화협정 체결이네."
"항복이 아니라고요? 콜록콜록."
종현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중장님, 우리가 얼마나 많은 군인과 민간인을 잃었는지 잊으신 겁니까?"
"알고 있네. 하지만, 그건 우리만 알고 있으면 돼."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레이놀드가 물었다.
"지구는 외계인 함대의 공격을 받았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었네. 아무도 놈들에 대해 몰라."
"아무도요?"
아담이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아담은 눈앞의 위스본드가 그동안 알고 있던 그가 아닌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징어 외계인들은 지구의 대기권에 진입한 후, 한 달 동안 세계 각 국을 공격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고, 외계인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외계인들이 한 달이나 인간을 잡아먹지 않았다면 결국 굶어죽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도마뱀 똥 같은 건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위스본드의 말은 사실이었다. 도마뱀 똥으로 존재를 숨긴 인간들은 외계인들이 인류를 식량으로 한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무사히 살아남은 인간들은 군인들이 진실을 숨기고, 눈이 먼 선량한 외계인들을 도살한다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외계인의 침략까지도 방위군이 외계인들을 선제 공격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며 군을 비난하기까지 했다.
"물론 정치인들은 알지. 그들이 정치적 판단을 내리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정보니까."
"그런데 모른 척하자는 겁니까? 화성의 민간인들은요? 그들은 몰살 당했습니다."
벅시가 분개하며 말했다.
"시체는 한 구도 없었네."
위스본드가 담담하게 말했다.
"시체가 없었다고 그 많은 사람들을 모른 척 하자는 겁니까?"
"모른 척 하자는 게 아니라 말하지 말자는 것 뿐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아담은 이미 대답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다시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저들의 약점은 저들을 막기에는 충분하지만 저들을 이기기에는 부족하다는 거지."
"그래서요?"
"정치적인 판단이 우선이네. 더 이상의 희생은 원치 않아."
위스본드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설마 이 평화가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시간은 벌 수 있겠지."
시간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아담은 입을 다물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아담은 어금니를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번다는 건 곧 대책을 마련할 거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과연 대책을 마련할까?
"모두 믿겠네."
위스본드는 그렇게 병실을 나섰다.
바랭이 그 뒷모습을 보고 말했다.
"시간? 또다시 놈들이 몰려올 시간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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