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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천지개벽... 32

2009.02.21 01:3502.21


32.

도시의 입구와 마주섰을 때, 높이 솟은 해는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고 있었다.
종현은 입구를 막고 쓰러진 기둥으로 다가가 기둥에 새겨진 글씨를 확인했다. [제 4 이주도시 화이트홀]이라는 표시가 새겨져 있었다.
화성에서 잠시 근무했던 아담은 이곳이 화성의 이주도시들 중 가장 큰 놀이공원과 동물원이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넓은 개척지를 가진 만큼 그 크기는 태양계 최대였다. 당시 아내가 꼭 한 번 가보자고 졸랐지만 아담은 공무로 벗어날 때를 제외하고는 주둔지에서 멀리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함께 가지는 못하고 아내와 딸 둘만 갔다와 동물원에서 가져온 곰 인형을 안고 좋아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예전에 왔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담이 나직이 속삭였다.
"아는 곳이오?"
바랭이 물었다.
"비행장을 올 때, 두 번 지나온 적이 있죠. 여긴 동물원이 유명하죠. 도시의 반이 동물원이니까."
"팔자가 좋았군."
"놀러온 건 아니었어요. 일 때문에 왔었죠. 하여튼 듣기로는 태양계 최대의 동물원이라고 들었죠."
"그럼 먹을 건 많겠군."
아담의 말에 바랭이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그야 모르죠, 우리에서 탈출한 굶주린 사자가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덤빌지도."
바랭의 말에 종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모두의 차가운 시선이 종현을 향했다. 종현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길은 넓었지만 무너진 건물과 전투기, 그리고 외계인의 비행선에서 떨어진 듯한 잔해 때문에 앞으로 나가기가 힘들었다. 화성이라 날아가는 새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요했다. 세상에 소리란 소리는 모두 사라진 듯 적막했다.
모퉁이에 대형 상점이 나타나자 아담은 벅시와 제임스를 출입구 안쪽에 경계병으로 남겨놓고 상점으로 들어가 음식과 약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여기도 이상하지 않소?"
"뭐가요?"
바랭의 말에 종현이 물었다.
"여기도 시체가 한 구도 없잖소, 거리도 그렇고 이곳에도 시체들이 없소."
도시로 들어온 지 1시간이 지났지만 바랭의 말대로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핏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작은 하루살이와 향기를 찾는 나비만이 간간이 보였다.
"모두 좀비가 됐나보죠."
종현이 빵을 한 입 가득 뜯어 물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아직 유머를 잃지 않은 듯 보였다.
"유효기간은 확인한 거요?"
레이놀드가 빵으로 입안을 가득 채운 종현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글쎄요. 하지만, 당장 죽지는 않겠죠."
종현은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으아아악."
갑자기 바랭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런 비명에 상점 안의 일행은 모두 총을 겨누며 주위를 살폈다.
비명은 고기를 보관해둔 냉장고에서 들려왔다. 레이놀드가 앞장서서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냉장고의 붉은 불빛에 잠시 시야를 잃었다. 재빨리 자세를 낮추고 총구를 겨누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르는 바랭 외에는 움직이는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혹시 시체라도 발견했나 싶어 주위를 살폈지만 시체도 없었다.
"무슨 일이죠?"
벽에 기대 주저앉은 바랭에게 아담이 다가가 물었다.
"이, 이거 좀 봐요."
다리가 굵은 게 모양이 조금 특이했지만 사람 크기 만한 거대한 왕오징어였다.
종현은 오징어를 먹지 않는 유럽사람들의 식생활을 기억해내고 웃으며 말했다.
"왜, 해저 2만리라도 찍는 줄 알았어요? 하여튼 대개 크긴 하군."
종현의 말에 아담과 안나 역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돌아섰다.
"젠장, 같이 가요."
바랭이 혼자 남겨지자 다시 놀라 소리치며 쫓아 나왔다.

상점에 딸린 약국에서 항생제와 구급약, 음식 등을 챙기고 다시 도로를 따라 한 시간을 걷자 그들 앞에 숲이 우거진 거대한 동물원의 입구가 나타났다. 숲은 야영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긴 했지만 종현이 말한 굶주린 사자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모두들 망설였다.
"에이, 까짓 것, 우선 들어가 보죠. 모두 동물원에 놀러갔는지도 모르잖아요."
종현이 앞장을 서며 말했다.
그때 수풀사이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앞장서던 종현이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아담 등은 모두 흩어져 몸을 숨겼다. 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종현은 완전히 노출된 채 총을 꺼내 수풀 속을 겨누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나 수풀 속에선 나온 건 작은 치와와 한 마리였다.
치와와는 작은 꼬리를 흔들며 뛰어오더니 사람들을 살피고는 이내 안나의 품에 안기려고 안나의 다리에 앞발을 비비며 바동거렸다. 강아지는 사람의 손길을 무척 그리워하고 있었다.
안나가 강아지를 품에 안아들고는 목걸이에서 이름을 확인하고 강아지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 그래, ……폴리? 그래, 폴리, 그래, 너 혼자니?"
강아지는 대답대신 그저 안나의 볼을 핥기만 했다.
"어디에 있던 거지?"
아담이 폴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혼잣말처럼 물었다.
그 대답은 간단했다. 동물원 안에 해답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다시 굶주린 사자의 이야기 때문에서인지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젠장, 알았다고 알았어. 뭐, 내가 앞장서면 되잖아."
결국 다시 종현이 앞장을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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