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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천지개벽... 31

2009.02.20 02:0302.20


31.

우주에서 보이는 화성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화성의 대기권으로 진입을 시도합니다."
레이놀드 기장이 화물칸을 향해 소리쳤다.
바랭은 이미 그물망을 붙잡고 자리잡았다. 아담은 조종실로 들어가 종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언제부터인지 붉은 색 경고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연료 게이지는 0을 가리키고 있었다.
"괜찮겠어요?"
종현이 불안한 듯 물었다.
"빨리 착륙할 곳을 찾는다면 문제없을 겁니다."
그 말과 동시에 기체는 대기권에 돌입했고, 대기권 진입과 동시에 붉은 불기둥이 기체를 에워쌌다. 마치 이대로 추락이라도 할 듯 요동쳤다. 어금니를 깨물고 있던 종현이 진동을 못 참고 기체의 진동에 맞춰 턱을 떨기 시작했다.
"어어어오."
그리고 잠시 뒤, 언제 그랬냐는 듯 푸른 하늘과 녹색 대지가 펼쳐졌다. 그리고 멀리 도시가 보였다. 창에는 화성 이주도시라는 꼬리표가 떴다. 기수를 돌려 서서히 이주도시의 상공으로 다가서자 도시는 검은 그을림에 그슬려 있었다. 마치 위장막을 둘러친 거대한 반공포처럼 보였다. 그러나 무너진 건물과 불타 검은 밑동만 남은 나무들이 도시의 반대편으로 보였다.
다시 화물칸으로 나온 아담을 향해 제임스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좀 보세요."
화물칸에 있던 안나, 바랭도 동그란 창을 통해 내다봤다. 거기에는 거대한 스타디움 같은 외계인의 항모가 대지에 처박힌 채 아직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마치 검은 달이 몰락한 듯 보였다.
"화성이 지난번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진 않은 것 같군."
아담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생존자들이 있을까요?"
제임스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그의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다.
"어느 쪽 생존자?"
제임스의 물음에 아담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물었다.
"네? 당연히 우리 쪽 생존자죠."
제임스가 놀란 눈으로 아담을 보고는 머뭇거리다 말했다.
모두가 극도로 예민해져있었지만 아담은 특히 예민해져있었다. 그건 단지 두 달의 긴 비행 때문만은 아니었다. 패배감과 하루하루 몸의 이상이 느껴지면서 그는 말하지 못할 불안감에 휩싸여있었다. 사실 그건 아담만이 아니라 모두 마찬가지였다. 단지 말하지 못할 뿐이었다. 게다가 다른 대원들을 지휘해야한다는 것도 작전참모인 그에겐 부담이었다. 물론 중대장 경험은 있었지만 당시에는 지금 같은 전시상황은 아니었다.

푸른 초원이 펼쳐진 넓은 평원에서 검은색 활주로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계기반의 연료 경고등까지 꺼진 상태였다.
"랜딩기어."
벅시가 긴장한 얼굴로 침을 삼키며 랜딩기어의 스틱을 밀어내자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계기반이 일제히 꺼졌다. 바퀴가 반쯤 나오다 멈췄다.
"젠장, 거기까진 무리였군."
레이놀드 기장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말하고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리고 서서히 활공을 시도했다. 레이놀드는 이미 맞춰진 기체의 수평을 유지하기 위해 조종간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러나 활주로에 가까이 접근할수록 군데군데 파손된 활주로가 지표면에 가까워졌다는 안도감보다는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조종간을 당겨 최대한 안전한 곳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멀리 활주로의 끝이 보이자 레이놀드는 불안감에 이를 악물었다.
"젠장."
벅시가 나란히 조종간을 움켜쥐더니 소리쳤다.
"충격에 대비하세요."
이어 기체가 지면에 닿으면서 충격이 전해졌다. 레이놀드는 힘껏 조종간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선체가 활주로의 파인 홈을 지나면서 반쯤 나왔던 앞바퀴가 부러져나갔다. 조종실이 있는 기체의 앞이 곧장 활주로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그러자 꽝하는 굉음과 함께 기체의 꼬리부분이 속도에 밀려 들리면서 앞으로 쏠렸다. 마치 물구나무라도 서려는 듯 기체의 후미가 솟아올랐다. 비명이 들렸다.
"젠장."
레이놀드는 힘껏 조종간을 밀어내며 수평날개를 엇갈려 간신히 선체를 돌렸다. 그러자 기체가 굉음과 함께, 마치 솟아오른 돌고래가 몸을 틀어 입수하듯이 모로 기울며 쓰러졌다. 날개가 부러지면서 다행히 기체를 받쳐주었다. 연료가 바닥난 탓인지 다행히 폭발은 없었다. 레이놀드는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다들 괜찮소?"
정신을 차린 레이놀드가 화물칸을 돌아보며 소리쳐 물었다.
"빌어먹을, 내 생에 이런 착륙은 처음이군. 젠장."
대답대신 바랭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물침대에 앉아있던 그는 그물에 걸린 생선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푸념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착륙이 엉망이군요. 다신 레이놀드 소령님의 비행기는 타지 말아야겠습니다."
종현이 레이놀드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펴 보이며 말했다.

아담이 해치를 열자 화성의 신성한 공기가 차갑게 몰아쳤다. 아담은 종현의 도움을 받으며 해치 밖으로 나와 SC-100의 날개 위로 올라서서 주위를 살폈다.
멀리 몇 번째 도시인지 알 수 없는 이주도시가 보였다. 그러나 모두 화염에 휩싸인 듯 검게만 보였다. 그 모습은 푸른 평원과 많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상공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처참했다. 그 반대편으로는 착륙하기 전에 보았던 외계인의 원형 항모가 검은 태양처럼 기울어져 있었다. 항모 역시 검게 그을려있었다. 여기저기 나뒹구는 화성의 방위군 소속 전투기와 외계인의 우주선 잔해도 보였다. 어떻게 격추를 시켰는지 알 수 없지만 대단한 전투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방이 소름이 돋을 만큼 고요했다. 오로지 바람소리만 귓가를 매섭게 때렸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종현이 되물었다.
"글쎄, 뭔가 어색해."
아담은 뭐가 잘못됐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전쟁의 폐허 속에 있는 자신이 홀로 남은 듯 외롭게만 느껴졌다. 전쟁의 폐허 속에 남은 게 아닌 그저 홀로 남은 느낌이었다.
레이놀드 기장이 마지막으로 내렸다. 그는 마지막까지 지구와의 연락을 시도했지만 응답을 들을 순 없었다. 아무래도 보안이 강화되었거나 아니면 이제 태양계에 살아남은 인간이 자신들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밖으로 나왔다. 다시 중력을 느끼자 다리가 휘청거렸다. 벽을 잡고 간신히 기체 밖으로 나왔다. 아담과 일행은 날개 위에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마치 아래는 지뢰밭이라도 되는 듯 아무도 땅에 내려서지 않았다
"무슨 문제 있소?"
레이놀드가 불안한 듯 물었다.
"시체가 하나도 없소."
주위를 둘러보던 바랭이 말했다.
그는 이미 타이탄의 전투에서 많은 시체를 본 경험이 있었다.
"여기가 아무리 도시와 떨어진 곳이긴 해도, 분명히 비행장이 있는 방위군의 기지고, 분명 전투가 있었을 텐데 시체가 한 구도 없소."
바랭이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바랭의 말에 아담과 종현은 물론 모두가 주위를 둘러보며 시체나 혹은 있을지 모르는 생존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눈으로는 핏자국하나 찾을 수 없었다.
"시체는 고사하고 핏자국 하나 없어. 어떻게 된 것 같습니까?"
레이놀드가 물었다.
"어디에 생존자가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하지만, 혈흔도 없어요."
아담의 말에 바랭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비가 와서 지워졌겠지."
아담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다시 바랭이 고개를 저었다.
"음,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깨끗하지 않소? 내가 본 기억으로는 핏자국은 비가 아무리 퍼부어도 쉽게 지워지지 않소. 더욱 선명해지지."
"그럼 어떻게 된 것 같습니까?"
종현이 물었다.
"나도 알 수 없지."
바랭은 어깨를 들썩이며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투로 말했다.
"젠장."
아담은 우선 기지 일대를 더 수색하기로 하고 2개조로 나눠 흩어졌다.
아담은 종현, 바랭와 함께 가까운 관제소를 찾았다. 그러나 관제소가 있어야할 자리에는 부서진 계단만이 남아있었다. 통신용 안테나까지 모두 파괴되어 지구로의 연락이 불가능해 보였다.
수색은 아무 성과가 없었다. 파괴된 대공포탑과 추락한 전투기의 잔해뿐이었다. 지하벙커로 들어가는 통로는 완전히 매몰되어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었다. 안에서 자폭을 시도한 듯 보였다.
"콜록콜록, 젠장, 기침이 심해지는군."
바랭이 기침을 하며 투덜거렸다.
바랭의 기침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이미 아담과 종현 등이 경험한 증상이었다.
"중령, 이제 어떻게 할거요? 콜록콜록."
그러나 야전 경험이 부족한 아담은 마땅한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대답대신 한숨만 내쉬었다. 그러나 그의 숨도 편치 않았다. 가슴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중령, 우선 중요한 건 식량이오. 그게 없다면 우리는 서로를 잡아먹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우리는 모두 방사능에 오염됐소.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오?"
바랭의 말에 레이놀드의 입을 열었다.
"그래도 대책이 있을 겁니다. 우선 저기 보이는 도시로 가보죠. 분명 살아남은 사람이 있거나 아니면 약이라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레이놀드의 말에 아담은 고개를 끄덕이고 도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어 다른 일행도 아담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면 외계인이 우릴 기다리고 있겠지."
바랭은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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