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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천지개벽... 30

2009.02.19 00:2202.19


30.

타이탄을 떠나온 지 열흘이 지나면서 서서히 대화가 줄어들었다. 탈출에 성공한 후, 새로 맞은 젊은 부부 조종사 안나 스콧과 제임스 스콧의 연애담을 들을 때의 재미와 유로파와 연락이 닿았을 때의 기쁨도 이제는 아련한 기억 속에 사라져가고 있었다.
"저길 봐요."
레이놀드 기장이 아담에게 목성 뒤에서 서서히 모습을 들어내는 유로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햇빛을 받지 못한 유로파의 뒷면이 목성 위로 떠오르자 마치 검은 달이 떠오르는 듯했다. 이어 천천히 자전하는 유로파의 한 점 위를 가리키며 창 위로 붉은 꼬리표가 떴다. 붉은 꼬리표에는 유로파 갈릴레이 기지라는 표시가 선명했지만 기지가 있어야할 자리에는 하얀 빙하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젠장, 기지의 흔적조차 없군."
종현의 말에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지도에서 사라진다는 말이 이런 것이군'
갈릴레이 기지가 건설되기 전인 30년 전으로 돌아간 유로파를 보자 아담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동안 인류가 건설해온 모든 문명이 한순간의 물거품처럼 느껴졌다.
한 번의 처절한 전투가 끝나자 아담은 넋이라도 빠진 사람처럼 지쳐있었다. 실전 경험이 처음인 아담은 새삼 왜 알렌 워커 대령이 그렇게 무참한 외계인과의 전쟁에 직접 나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의 전투로도 충분히 피를 보았고, 다시는 맡고 싶지 않은 유독가스의 냄새도 맡았다. 문득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래도 그때 유독가스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인 듯했다. 그리고 눈앞에는 회색 반점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전투였다.
"괜찮습니까?"
부기장 벅시가 멍하니 어두운 우주를 바라보는 아담을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응? ……응, 괜찮네."
아담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갑자기 구역질이 났다. 서둘러 조종실을 나왔다. 좁은 복도를 지나 돌아서자 지친 듯 주저앉아 훌쩍이고 있는 안나 스콧이 보였다. 그녀는 뭔가 두려운 듯 머리를 두드리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옆으로 화장실이 있었다. 인기척에 그녀가 눈물을 훔치며 일어섰다.
"죄, 죄송합니다."
아담은 대답도 하지 않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변기에 토악질을 해댔다. 현기증이 났지만 갑자기 몸을 일으켜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손잡이를 돌리자 변기뚜껑이 닫히고 서서히 압축되더니 펑하는 소리와 함께 우주공간으로 배출됐다.
'젠장.'
에너지를 아껴야하는데 괜한 토악질로 에너지를 낭비했다.
아담은 고개를 숙이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화장실의 문을 닫았을 때, 아까부터 문 뒤에 있던 안나가 아담에게 물었다.
"저어…… 중령님, 우리가 죽게 될까요?"
아담은 움찔했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놀라게 한 안나에게 화가 났다. 그러나 화를 참고 애써 침착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언젠가는 다 죽지."
"아뇨.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구토가 나고 있어요."
"갑자기 무중력상태의 우주비행을 하게 되면 구토를 할 수도 있네."
아담은 안나의 눈을 똑바로 보지 않았다.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아담은 돌아서며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별거 아니야, 그냥 구토억제제를 주사하면 될 거야."
"아뇨, 중령님도 아시잖아요! 우린 모두 방사능에 노출됐어요. 상태가 좋지도 않고요. 전 머리카락이 빠지고 있어요. 빨리 치료를 하지 않으면 전 죽을 거예요."
핵폭발 후, 방사능 노출은 모두가 불안해했지만 차마 말하지 못한 일이었다. 암묵적으로 금지된 말을 안나가 제일 먼저 입에 담았다.
"제임스는 어떤가?"
아담은 잔뜩 화를 참는 듯 깊게 숨을 내쉬더니 살짝 고개를 돌려 그녀 남편의 상태를 물었다.
"그도 좋은 상태는 아니죠."
안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그렇군. ……우선은 항생제라도 먹어둬."
아담은 침울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나 안나는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발끈하며 말했다.
"그거로는 부족해요. 전 핵무기 담당이라 잘 알아요. 구토가 시작된 건 3 Sv (시벨트 : 인체에 흡수된 방사선의 양을 측정하는 단위) 이상의 오염이라고요. 더구나 머리카락까지, 우린 지금 치료가 필요해요."
"그렇겠지. 하지만, 여기에 뭐가 있지?"
아담은 어금니를 깨물며 말했다.
"……."
"항생제 뿐이야. 그럼 안나, 자네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대책을 내놓을 수 있나?"
"……"
안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제 알겠나? 대책이 없으면 불평도 하지 말게."
아담은 그렇게 밖에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더 미웠다. 자리를 피하고 싶어 서둘러 돌아섰다. 그러나 안나가 아담의 소매를 붙잡고 마녀처럼 부릅뜬 눈으로 낮게 말했다.
"이건 그저 불평이 아니라고요. 이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예요."
"다시 말해줄까? 누구나 다 죽어."
아담은 조금 전 보다 더 힘껏 어금니를 깨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던 아담은 문득 워커 대령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포화 속에서도 단호하게 명령을 내리던 그를 서서히 닮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목멘 안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 임신했다고요!"
걸음을 옮기던 아담은 안나의 말에 순간 멈춰 섰다. 다시 안나의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겨 조종실로 돌아갔다.
자리로 돌아온 아담은 워커 대령도 분명 외면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계속 가슴을 때렸다. 문득 워커 대령도 두려워하고 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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