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Midium] (2)

2009.06.04 21:2806.04

서영은 꿈을 꾸는 중이다. 꿈속임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방금 잠이 든 기억이 선명한 와중에 갑자기 충북대학 병원 정문 앞에 서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오전의 끔찍한 경험을 겪은 후, 서영은 병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녀도 잠깐 동안 기절을 했었고, 언니도 충격에 휩싸여 또 다시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형부 혼자 멀뚱히 두 사람이 깨어나길 기다려야 했고, 마침내 정신이 든 두 사람에게 청심환을 사다 먹인 뒤 병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귀가한 시간이 오후 6시. 그 후로 세 사람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입을 떼면 오전에 겪은 공포가 스멀스멀 기어오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세 사람은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파란만장한 노동절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기억에서 지워버리려고 갖은 애를 쓴 공포가 꿈속까지 쫓아온 것이다.

서영은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쉰다. 그래, 이건 단지 꿈일뿐이다. 꿈이란 본시 현실의 기억을 반영하는 것 아니던가. 그렇게 경악스러운 기억이 꿈에 나타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거다.

하지만 서영은 선뜻 병원 문을 열지 못 한다. 27년이라는 생을 살아오면서 숱한 꿈을 꿔온 그녀다. 그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유추하건데 분명 이 꿈은 악몽일 것이고, 만약 그녀가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되면 시뻘건 피를 뚝뚝 흘리며 그녀를 노려보는 청년과 대면하게 될 것임이 자명했다. 그럴 걸 뻔히 알면서 병원 안으로 들어간다는 건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하지만 꿈이라는 게 언제나 그녀의 뜻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그 이면에 강력한 호기심 혹은 주체 못 할 충동이라는 이름의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기 마련이고, 그녀는 결국 그 힘에 의해 병원 안으로 들어갈 운명인 것 또한 서영은 이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게도 막강한 무기가 있어. 그러니 안심해.’

서영은 이렇게 스스로를 다독인다. 제대로 통제할 수는 없지만 어차피 이 꿈의 주인은 그녀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꿈속에선 무엇이든 될 수도 할 수도 있는, 천하무적 전지전능한 존재인 것이다. 대체로 이런 특권이 발휘될 때는 지금처럼 악몽을 꿀 때였는데, 서영은 자신을 뒤쫓는 귀신이나 악당들과 1 대 100으로 싸워 이긴 경험도 있었다. 또 아주 급박한 상황에서는 마치 ‘드래곤볼’의 주인공처럼 장풍을 쏴대기도 했다. 그러니 그녀가 겁에 질려 이 우월함을 망각하지 않는 이상, 오늘 밤 꿈의 승자도 그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마음을 다잡은 서영이 조심스레 문을 연다. 그리고 억지로 떠밀리듯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병원 안은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그리고 빈 깡통처럼 텅 비어있다. 귀차니즘에 사로잡힌 접수 계원도, 히스테릭한 표정으로 돌아다니던 간호사들도 눈에 띄지 않는다. 서영의 눈길이 응급실로 옮겨 갔을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던 노숙자 노인도, 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던 고등학생의 모습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모두 증발해버린 듯 새하얀 시트의 침대들만이 덩그러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다만, 청년이 누워 있던 침대 위에서 누군가 잠을 자고 있는 모습만이 그녀의 눈을 통해 전달된다. 분명 소름끼치는 모습의 시체가 되었을 청년 일게다.

서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쥔다. 그리고 요동치는 심장을 달래려고 주문처럼 중얼거린다.

‘이건 꿈이다. 이건 꿈이야.’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청년이 아니다. 서영이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 사람이 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상반신을 일으킨 후,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키고는 늘어지게 하품을 해댄다. 그러고도 한참을 스트레칭을 하더니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서영과 2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 서서는, 홀딱 반해버릴 만큼 근사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넨다.

“왔나? 예상보다 늦었군. 곧장 기절해서 꿈을 꿀 줄 알았는데.”

서영이 기절하기 전에 보았던 외국 남자다. 서영은 난데없는 남자의 등장보다 그의 유창한 한국어 실력에 놀란다. 그러나 곧 지금 꿈을 꾸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킨다. 하지만 남자의 외모를 천천히 뜯어보면서, 그녀는 또 다시 혼란에 빠져버린다.

남자는 오전에 봤을 때처럼 희미한 신기루 같이 보인다. 손을 갖다 대면 닿지 않고 그대로 통과할 것만 같다. 그러나 얼굴이나 셔츠까지 검은색인, 정장차림의 몸은 윤곽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특히 얼굴이 아주 잘 생긴 편인데, 뒤로 묶어내린 금발은 봄날의 햇빛처럼 연한 빛을 발했고,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는 희다 못해 창백해 보인다. 또 모든 걸 빨아들일 듯한 강렬하고도 푸른 눈동자에 매력적인 콧날. 거기다가 샤프한 턱 선까지. 어딘지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인상이지만 완벽하다고 할 정도로 멋진 모습이다. 그러나 서영을 혼란에 빠뜨린 건 그의 이 멋진 외모가 누군가와 매우 닮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는데, 그녀는 긴가민가하면서도 마침내 입 밖으로 그 의문을 내뱉는다.

“설마……톰 크루즈?”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뜬금없이 헐리우드 영화배우가 나타난 것도 그렇고, 그녀가 호명한 톰 크루즈는 원래 금발이 아니기 때문에도 그렇다. 그 배우는 짙은 밤색 머리에 좀 더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다. 거기다가 지금은 나이도 제법 먹어 저렇게 젊은 외모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녀가 남자의 얼굴에서 그의 이름을 떠올린 것은 오래전에 봤던 한 편의 헐리우드 영화 때문이다. 그 때의 톰은 확실히 젊었고 저렇게 얼음처럼 차가운 인상으로 분장했는데, 그 영화의 제목이……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서영이 자신도 모르게 말을 되뇌인다. 그러자 남자가 즐거운 듯 쾌활하게 웃는다. 그 웃음소리가 맑은 날 은은하게 흔들리는 풍경소리처럼 쾌청해 결코 싫진 않았지만, 서영은 너무 어이가 없어 눈썹을 꿈틀거린다.

‘왜 갑자기 톰 크루즈가 꿈에 나오는 건데? 그것도 뱀파이어로 분장한.’

“제대로 맞췄네. 생각보다 꽤 유명한 얼굴인데 이거?”

남자가 만면에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말한다. 그러더니 고개를 살짝 가로 저으며 덧붙인다.

“하지만 난 톰인가 뭔가 하는 그 친구가 아니야. 이 얼굴은 아침에 자살한 그 녀석이 선사해준 거지. 현대의 악마는 역시 뱀파이어의 모습이 적격이래나 뭐래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서영은 갈수록 어이상실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죽은 청년이 톰 크루즈의 얼굴을 선사해줬다니. 성형수술이라도 시켜 줬다는 소린가? 서영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도 예의상, 그리고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죠?”

“좋은 질문이군. 안 그래도 지금 막 내 소갤하려던 참이었거든.”

남자가 검지를 치켜세우며 대답한다.

“아마 어디서 들어보긴 했을거야. ‘베엘제붑’이라고. 하지만 그건 야훼 패거리들이 날 폄하하려고 변형시킨 이름이지. 내 본명은 바알. 가나안의 신(神) 바알이 새 영매(靈媒)께 인사드리옵니다.”

남자가 낄낄거리며, 유럽의 중세 귀족처럼 우아한 동작으로 예를 올린다. 하지만 서영은 답례 대신 남자가 소개한 이름을 읊조린다.

“바알. 가나안의 폭풍의 신……?”

들어본 기억이 있다. 카톨릭에서는 우상숭배의 표본처럼 불리는 이교의 신. 혹은 루시퍼를 도와 하느님께 반역한 타락천사로 묘사되는 존재. 그러나 많은 종교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야훼와 동일시되는 엘의 아들로 묘사되거나, 야훼신앙 이전까진 거대한 힘을 자랑했던 가나안 즉,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의 폭풍의 신.

판타지 소설가이자 아동용 신화서적을 출판한 적 있는 서영이기에, 여러 신화를 연구하면서 자주 접해 본 이름이었다.

“호오, 의왼데? 대부분의 다른 녀석들은 베엘제붑이나 바알이나 어차피 악마일 뿐이라고 치부하기 일쑤던데. 언니, 가방 끈이 긴가봐?”

바알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윙크한다.

“직업 특성상 신화에 관한 책을 많이 봐왔거든요. 당신 말대로 카톨릭 교회가 바알을 신에서 악마로 강등시키긴 했지만, 야훼 하느님 이전부터 가나안 지방에 많은 신도를 보유했던 신이……”

서영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다 말고 갑자기 말을 멈춘다. 지금 상황이 너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꿈은 현실을 반영한다. 그녀는 잠시 이 진리를 잊고 있었다. 실제로 오늘 겪었던 참극의 현장이 꿈에 나오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게다가 요즘 그녀는 2년 전부터 신화관련 칼럼을 기고해 오던, 환상문학 잡지에 보낼 새로운 소재를 찾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리스나 북유럽신화 위주의 글을 썼던 것과는 달리, 메소포타미아나 고대 히브리 신화 관련 칼럼을 쓸 계획이었다. 그러다보니 그 방면 자료를 많이 접했고, 그 결과 이렇게 꿈에 반영된 것임이 틀림없었다.

‘나도 참! 이런 얼토당토 않는 꿈이나 꾸다니. 그동안 잡생각을 너무 많이 했나?’

서영은 이렇게 생각하며 싱긋 웃어버린다. 동시에 자살한 청년이 어디서 튀어나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그러자 곧 피곤이 몰려든다. 아무래도 신경과민의 여파가 이제야 찾아든 모양이다. 그녀는 이제라도 숙면을 취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찌됐든 그 잡지사에선 내일까지 글을 보내달라고 했고, 밀어두었던 원고를 작성하려면 반나절은 꼬박 붙잡고 있어야 할 게다. 그러려면 소진된 체력을 보충해야 되므로 저 바알인지 톰인지 하는 사내와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저기, 톰 크루즈 얼굴을 한 바알 씨. 내 꿈에 나와 준 건 영광이지만 난 쉬고 싶어요. 요즘 일이 부쩍 늘어나서 몸이 노곤노곤하거든요. 그러니까 꿈속에서라도 푹 쉬고 싶어요. 꿈을 아예 안 꾸면 더 좋겠고요. 내 말 뜻 이해하죠?”

꿈속의 인물에게까지 예의를 차리는 자신을 보며 서영이 피식 웃음을 흘린다. 그래도 이렇게 좋은 말로 타일러야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을 것이리라. 그러고 난 다음, 어디 남는 침대에 누워 아무 생각 않고 있다 보면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허황된 꿈 따위 꾸지 않고, 아주 편안하게.

“음, 그래.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군. 하지만 내가 원해서 온 건……”

“이해했다면 됐어요. 난 이제 혼자 있고 싶으니까, 당신도 마저 주무세요.”

서영이 반박하려는 바알의 말을 자르고는 휙 뒤돌아선다.

작전 급 변경. 아무래도 좋은 말로 하다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대화가 이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럴 땐 재빨리 피하는 게 상책이리라. 하지만 잠시 후 그녀는 꽤나 집요한 상대와 맞닥드렸다는 걸 깨달았다. 바알이 황급히 뛰어와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애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봐, 내 얘기 아직 안 끝났다고. 휴식을 방해한 건 미안하지만, 나도 아주 급한 사정이 있으니까 이해해줘. 그 전에 너하고 해결 봐야 할 문제도 있고 말이야. 맹세컨대, 금방 끝낼게.”

“왜요? 파우스트에 나오는 메피스토 펠레스나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소원이라도 들어주게요? 그 대신 내 영혼을 걸고 계약을 맹세해야 하나요?”

서영은 이제 냉소까지 곁들여 바알을 비꼰다. 꿈에 악마가 나타난 후에 상호 협동조약같은 걸 맺자고 제안하는 건 너무 뻔 한 스토리다. 서영은 4년차 프로작가인 자신이 고작 그 따위 흔해빠진 공상을 할리 없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바알이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워하며 내뱉은 말이 그녀의 자존심을 무참히도 짓밟아 버린다.

“와우! 이 언니 진짜 똑똑한데? 어떻게 알았지?”

서영은 기가 막혀 헛웃음 밖에 나오질 않는다. 내가 겨우 이정도였나? 스스로에게 실망한 그녀는 화를 낼 기운조차 없어, 그저 “그 언니 소리 좀 집어치워요!” 라는 핀잔만 줄 뿐이다.

“흠, 그러지 뭐. 아무튼 언…아니, 네 말이 맞아. 나와 계약을 맺어줬으면 해. 하지만 영혼을 걸고 하거나 꼴랑 3가지 소원만 들어주는 내용은 아니야. 그 딴 거랑은 차원이 달라. 일명 영매 계약이라고 하는데 말이야……”

“영매 계약? 영매라면 무당이나 신체, 영적 매개체를 뜻하는 건가요?”

서영은 기억을 더듬어 ‘영매’의 사전적 지식을 떠올린다. 그리고 TV나 각종 소설을 통해 알게 된 지식까지 총 동원해 ‘영매’라는 단어의 의미를 정리한다. 그래서 얻어진 결론은 ‘신 내림 받은 사람’ 즉 ‘무당’이었다.

‘나보고 신 내림을 받으라는 거야?’

서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알을 쳐다본다. 그러자 바알이 기분 나쁘게 실실거리며 비아냥거린다.

“한국어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지 않을까? 굳이 확인까지 안 해도 될 텐데?”

꿈 속 엑스트라 주제에 주인공을 비웃다니! 이젠 웃기지도 않는다. 서영은 이 꿈의 주인이 누군지 톡톡히 알려주려는 듯 바알을 쏘아 붙인다.

“부탁하는 사람 치고 너무 성의 없는 답변 아닌가요? 계속 그렇게 삐딱하게 나오면 그냥 잠에서 확 깨버릴 거 에요!”

잠에서 깨버린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우스운 협박이다. 그런데 바알에겐 이 협박이 제대로 먹혀들었는지, 그가 손을 내저으며 그녀를 말리려고 한다.

‘오호라!’

순간, 서영의 눈이 먹잇감을 포착한 매의 눈처럼 번뜩이더니 바알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그리고 잘 모르시나 본데, 전 독실한 크리스천이에요. 그런 내가 교회가 악마라고 지목한 당신과 계약 같은 걸 체결할 거 같아요? 꿈도 꾸지마세요!”

“내 예전 영매 중엔 신부도 있었는걸 뭐. 나중에 파문당하긴 했지만. 그리고 나와 계약을 맺으면 네게도 좋은 일이야. 넌 그저 ‘상상’만 하면 돼. 그러면 모든게 네가 상상한대로 이루어질 거야.”

“상상만 하면 된다고요? 영혼을 파는 게 아니라?”

또 뚱딴지같은 소리에 말려드는 것 같아 찝찝했지만, 고개를 쳐든 호기심을 쉽게 잠재울 수가 없었다. 왕성한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서영도 글쟁이인 이상 최소한의 작가적 호기심을 갖추고 있던 것이다. 바알도 서영이 다시 관심을 보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그리고 예의 그 근사한 미소를 그으며 대답한다.

“그래. 상상, 생각, 공상! 그냥 무언가를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하면 돼. 어차피 너희 인간들은 단 1초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하잖아. 그 중의 일부를 나한테 할애해주면 돼. 말했다시피 난 영혼따위엔 관심 없어. 단지 네 상상력이 필요해. 그게 바로 내 ‘힘’이 되니까. 네가 네 상상력을 빌려주기만 하면, 말 그대로 ‘생각만 하면 생각대로! 비비디바비디부~’가 될 수 있다고. 어때, 구미가 당기지 않아?”

서영은 3-4년 전 유행하던 한 통신회사 로고송까지 곁들여 설명하는 바알을 보며 입을 쩍 벌린다. 동시에 기운이 쪽 빠진 것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어째서 이렇게 황당무계하고도 복합적인 개꿈을 꾸게 된 걸까? 처음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더니, 영화배우가 나오고. 그 배우가 자신을 바알이라고 소개하더니 이젠 ‘생각만 하면 생각대로!’ 할 수 있는 행운을 줄테니 무당이 되라고 한다.

‘완전 대여점 구석에나 처박혀 있을만한 이야기네.’

서영은 만약 자신이 이 이야기를 소설화한다면 ‘문학계의 떠오르는 막장작가’라는 칭호를 거머쥘 수 있을 거라 장담한다. 그리고 한시라도 빨리 저 가상인물을 쫓아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러기 위해선 내키진 않지만 저 작자의 말을 들어줘야 할 것 같다. 생각 같아선 잠에서 확 깨버렸다가 다시 깊은 수면에 빠져들고 싶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도대체 오늘따라 왜 이렇게 꿈이 안 깨지는 거야? 평소엔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인식하기만 해도 저절로 눈이 떠지더니.’

서영이 속으로 불만을 터트린다. 그래도 상대가 호락호락 사라져주지 않는 이상 어쩔 수가 없다. 오, 하느님 아버지 용서해주세요. 내키진 않지만 일단 저도 살고 봐야죠.

“흠, 알았어요, 바알 씨. 물론 당신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거나 제안에 구미가 당긴다는 건 아니에요. 왠지 꺼림칙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난 어서 당신이 사라졌으면 좋겠고, 그러려면 그 계약인가 뭔가를 맺어야 되겠죠. 안 그러면 계속 칭얼댈 거잖아요. 안 그래요?”

바알이 씨익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린다. 아무리 봐도 카리스마 넘치는 톰 크루즈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서영은 ‘에휴’하고 한숨을 폭 내쉬고는 말을 잇는다.

“좋아요. 그럼 계약을 맺기로 하죠.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거죠? 굿판이라도 벌여야 하나요?”

“호오! 진심인가? 영매 계약을 승낙해주는 거야?”

바알이 환희에 찬 얼굴로 묻는다. 서영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렇다고요. 그러니 어서 이 장난 같은 짓 좀 마무리 짓자고요.”

그러자 바알은 풀밭에 풀어놓은 망아지마냥 방방 뛰며 기뻐 어쩔 줄 몰라한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서영의 한심스러운 눈초리를 느꼈는지 헛기침을 해대고는 그녀 앞으로 다가선다.

“좋아, 좋아. 원하신다면 그대로 해드려야지. 자, 일단 날 보고 똑바로 서봐. 가슴 쭉 펴고.”

바알이 서영의 양 어깨에 손을 얹어 자세를 교정시켜준다. 그러고는 능글맞은 웃음을 머금은 채 그녀의 봉긋한 가슴으로 천천히 두 손을  뻗는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가슴을 애무해주면 계약이 성립되는 거야.”

음흉한 눈빛이며 흐물거리는 말투가 마치 성인 비디오에 나오는 변태 중년같이 느껴진다. 결국 참다못한 서영이 그의 손이 몸에 닿기 전에 재빠른 조치를 취한다. 싸늘한 눈빛을 번뜩이며 이렇게 톡 쏘아붙인 것이다.

“전혀 신빙성이 없어 보이는데요? 거짓말이면 계약 파기에요!”

그러자 바알의 손이 황급히 회수된다. 그리고는 낄낄대며 대꾸한다.

“이런, 들켰군. 미안, 미안. 너무 오랜만에 여자 영매를 만난 거라 나도 모르게 그만.”

나 참. 대체 저런 변태 캐릭터는 어디서 끄집어 낸거야? 내 소설 등장인물 중에 저런 녀석이 있었나? 아쉬운 듯 쩝쩝 입맛을 다시는 그를 보며, 서영은 자신의 삐뚤어진 상상력을 탓한다.

그때, 바알이 이렇게 말을 잇는다.

“아무튼 계약은 이미 성립됐어. 고마워.”

“네? 벌써 성립됐다고요?”

“그래. 네가 대답했잖아. 영매 계약을 승낙하겠다고. 그거면 충분해.”

순간, 서영의 미간이 심하게 일그러진다. 분명 바알이 특별한 의식이 있다거나 계약서를 작성해야 된다는 등의 말을 한 적은 없지만, 이건 너무 허탈할 정도로 간단하지 않은가. 뭔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간사한 꾀임에 넘어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그녀는 이 불쾌한 심정을 호소하듯이 바알의 눈을 뚫어져라 쏘아본다. 그러자 그의 푸른 눈동자에 그녀의 모습이 비춰진다. 마치 이국의 시원한 바닷물 속에 잠겨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한 순간, 바알의 눈동자가 정말 바닷물로 변하며 눈 속의 그녀를 잠식시킨다. 그리고 서서히 회전하더니 일순간 거대한 소용돌이가 된다. 흠칫 놀란 서영이 뒷걸음질 친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제 바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짙푸른 빛의 거대한 회오리가 그녀를 덮친다. 서영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지만, 그 소리는 세차게 부는 바람소리에 묻혀버린다. 다만 어디선가 바알의 쾌활한, 그리고 서영이 느끼기엔 사악한 웃음소리가 날아와 그녀의 귓전을 때린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내 새로운 영매……언니.”

그리고 이 말을 듣는 것을 마지막으로 서영은 시커먼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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